하나님이 이루신 구원 (요10:1-3)
본문
오늘 본문은 신앙 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게서 요한복음 10장에 들어서면서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려 하 면서 그 시작을 '나는 선한 목자이며, 내가 양들을 구하러 왔노라!'는 아주 적극적 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왜 문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이는 강도요 절 도라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이야기부터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아직 9장의 연속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옛날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축업은 독특했습니다. 낮 동안에는 목동들이 양들을 데 리고서 풀을 뜯게 하고서는 저녁이 되면 각각 양들을 몰고와서 마을의 공동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 우리는 양을 해할 만한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튼튼하고도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고 출입구에는 숙직자가 있어서 그 문을 닫아 걸고 밤새도록 지킵니다. 3절의 문지기는 바로 그 숙직자를 가리킵니다. 목동들은 그 공동 우리 안에 자기들의 양들을 몰아 넣고는 돌아가서 밤새 휴식을 취하고 아침이 되면 되돌아와서 자기 양들을 골라가는 것입니다. 와서 양들을 부르 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모여 목자가 이끄는 대로 그 울안을 나오 게 되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이 목자가 어제 이 우리에 그의 양을 맡긴 사람인가 아닌가를 확인만 하 면 됩니다. 몇마리를 데리고 왔는지는 세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제 목 자들만을 쫓아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목자들 쪽에서도 자기 양인데 오지 않으면 가서 부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양도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도 자기 양을 알아봅니다. 왜 이 말씀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9장에서 소경되었던 자를 예수님께서 고쳐놓았 더니 당시의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그 눈뜬 자를 그들의 사회에서 쫓아 내었던 사건과 결부시켜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9:39절부터 보시면 연결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 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10:1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지금 누구에게 절도며 강도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와 함께 있는 바 리새인들을 가리켜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10 장의 서두에 꺼내 놓으셨을까는 그만두고서라도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그 전개되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너희는 다 절도요 강도며 나야말로 진짜다!
그러므로 너희 무리들아, 거짓 선지 자들을 삼가고 참 목자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말을 하셔야 제대로 되어지는 줄거 리일 것 같은데, 그렇게 전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보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리고 4절 이후에는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본문의 말씀이 누구를 선택 할 것이냐 하는 싸움이 아니라, 주인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관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구원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을 말해주는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을 베푸시고는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한다면, 옳은 말인것 같은데 문제 되는 것이 하나가 있게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도 그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지만 결국,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누가 결정하느냐 라는 질문에 바로 우리 자신이 결정한다는 식으로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구원론을 표현상으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지 말 아야 합니다. 성경이 구원론을 이야기 할 때는 그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구원을 펼 쳐 놓고 믿겠느냐 안믿겠느냐 하며 우리 앞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그 양들은 누가 자기의 목자인 줄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요,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데려가는 싸움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찾아 오지도 않고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는 하나님을 알아 보지도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시고, 자기 백성을 그 죄 에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겠다는 것이요, 결국은 뜻대로 이루고야 말 일로써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6:3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여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시하셨는데 누구는 믿었고 누구는 안 믿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의 자녀를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회개시키고 고백케 하여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게 하는 싸움이 구원이러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쉽게 속는 것은 우리의 운명의 최종 결제자가 결국 자기 자신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지은 이도 하나님이시요, 그 가 지을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 계획을 추진하시며 그 계획에 실수하지 않으시 고 호리라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연히 생긴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 기 형상대로 만든 자들이요 만들 때 완성을 내다보고 만들어졌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대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할지라도 마침내는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완성품을 만들어 내 시고야 마는 작업이 구원이고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43:1-7절을 보 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 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게 함께 할 것이 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 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 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네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 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 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말씀에서 가장 굵은 핵심이 무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시작과 끝이 그 의 손에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시한 복스러운 말씀들 로 인해 우리가 선택하므로 마침내 좋은 길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우리를 만들 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게서 우리를 그 운명의 자리에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라고 말씀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리로 갈 수도 있고, 저리로 갈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 편을 내가 선 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길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의도 하셨던 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홍수에 의하여 범람하여 흘러가는 진흙탕물에 휩쓸려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밧줄을 던지시며 '누구든지 붙잡기만 해라! 내가 건져주마 '라는 식의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만들었던 자들이 배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던 자들이었으나 죄지은 자리에까지 오셔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꺼내기도 하셨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에 게 설득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최고의 작품인 우리가 우리의 깊은 속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네, 하나님 내 목숨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더 기쁨입니다.'라는 고백을 우리로부터 받아 내겠다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 구원의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대화요 권면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 중에서 십자가의 방법이 최고의 방법입니 까 이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자를 없애면 될 것 아니 겠습니까 죄로 타락한 자들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새로 만드시면 얼마나 쉽겠습니 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강권하시고 겁을 주어서라도 끌고가실 수도 있으 십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사탄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미개한 시절에는 사탄이 산신령으로도 나타나고 도깨비로도 나타나 흉악한 재난을 줌으로써 얼마 나 많은 영혼들을 걸머잡고 있었습니까 하지만 한 영혼인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 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영혼들이 하나만 큼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족하고 감격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앞에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실 때, 코를 꿰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 끌려 나오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그 분의 자존심상 절대로 그렇게는 안하십니다. 그 인생들 자신들이 '하나님, 당신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나 옳습니다. 이 미련한 것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므로 순복하게 하 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 께서 즉시 나타나셔서 죄를 범하지 못하게 했던 구약시대 처럼 지금도 그렇게 막아 주시고 강제라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대로 끌어가기를 바랍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그렇게 겁을 주시는 적이 있었습니까 거짓말하면 즉 시로 불기둥이 나타나서 경계를 시키던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은 죄를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죄를 지었어도 지금까지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뒤에 걸리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이래서는 안되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자신들을 살펴볼 때에도 참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참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구원이 무었입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의 최저 밑바닥에 있는 구원 의 근거가 무었입니까 그것이 나는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같은 기초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가난한 신앙을 가지 고 있는지 모릅니다. 구원은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작업을 처음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작업을 통하여 우리를 항복시켜 나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출3: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 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 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 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설명하십니다. 그의 존재 자 체가 완전하며 충만하며 부족함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무었이나, 다른 곳에 원인 이 있어서 결과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그 분만이 창조주시고 모든 생물과 모든 존재의 기원이십니다. 그리고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가 곤란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분만이 원인자이시고 그분만이 결과입니다. 그분만이 시작이시고 그분만 이 끝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종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은 이렇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것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도 없습니다. 이 이름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에 이런 것들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얼마나 철저하게 복종하였으면 100살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 고 하였을때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데려갔고, 죽으려 하였겠 습니까 또한,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아브라함은 100살에 낳은 단 하 나밖에 없는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끌고가서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설명하실 때에 그렇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평생을 동행했던 아브라함은 나의 단 한 마디인, 네가 백살에 낳은 아들을 내게 바 치라!고 하자 기쁜 마음으로 이행하였다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면 이미 포기했을 것이고, 절대로 같이 동행하지 않았을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한 평생 을 인도하고 간섭하사 그 야곱을 제대로 만들어 내시고 그 입술로 하나님 앞에서 항복케 하셨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구원을 설명할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어느만큼 하나님께 항복해야 될 만한 분이신가 하는 사실들을 나타내시므로 구원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말해, 우리는 지금 무었을 하다가 죽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 한은 윤리적으 로나 도덕적으로 어떤 결함과 실수를 저지르고 죽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됨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70년 8 0여년의 인생 중에서 여러가지 우여곡절로 간섭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저 가슴 밑바 닥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오! 하나님, 이제 항복하나이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시기 위하여 모든 시간과 공간을 다 동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무었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가 싫다 고 반발한 것이 아닙니까 구원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같은 반발 로부터 전인격적인 굴복이요, 순복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우리로 하여금 내 인생과 내 존재에 관하여 내가 주인도 아니요, 내 지혜와 내 계획이 전부가 아 니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고,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간섭에 대 하여 기쁨으로 순복하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작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싸움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의 자랑이 되며, 영광이 되며 우리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싸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기쁨으로 나아오고, '세상에서의 천 날을 사는 것보다 하늘나라의 문지기로 하루를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는 고 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의 비천한 고집과 계속해서 싸 우시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가게되는 삶 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도입하여 안락한 생활을 추구해 보겠다는 얇팍한 계산으로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계획되어 있으며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손길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내게 하나님의 손길이 무었이며 그 손길이 내게 무었을 요구하시는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무었을 어떻게 항복하기를 요구하시는가에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거기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한 사건과 문제와 풀어야 할 숙제를 두고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계획과 우리의 욕심은 너무나 대조 적이고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만일 나의 자녀가 아프면, 우리는 얼른 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도입하려고 서두 럽니다. 이것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당장의 희망사항 보다도 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항복하게 만드시고자 하는 어떤 뜻이 더 중요한 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명기4:32-40절을 보십시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 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 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 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얘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일게 하려 하 심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보이시고 너를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 라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내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 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 라" 얼마나 자상한 말씀입니까 오히려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설득하고 계신 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아닙니까 능력의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죄지으려고 할때에 불을 내려서 막아버리시고, 범죄하려고 손을 내밀면 즉시로 마 비시켜 버려서 못하게 만들면 될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의 여러 곳에서 '이러 이러한 것은 내가 싫어하니 하지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어기면 즉시로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 보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행위를 우리가 하면 벌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 왜 그 저지르는 죄를 강력하게 막지는 않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같은 질문은 선악과 문제가 나오면 언제나 제기 되었던 질문입니다. '선악과 열 매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안 만들었더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혹 그 열매를 먹으려고 갈 때에 다리를 굳어지게 하였으면 그 계율을 범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셨다면 우리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지, 로보트같은 기계적인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 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그렇게 유치하게 끌어내리지 말 아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유치하게 신앙이 출발되어 집니다. 그러나 그 목 표마저 유치해 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에 살다가 죽고 멸망당하고 다시 일어나는 민족의 역사로 보지말고,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되어지는가를 적 나라하게 보여 주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한번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러면 큰 일을 당한다. 그렇게 하면 내게 혼 날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내시고 혼을 내실 수 있으 신 분이라면 못 하게 막으시면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계속 경고하시고 설득하시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인생으로 보시고 이스라엘을 한 인간으로 보시면 어 쩌면 그렇게도 내 인생과 똑 같은가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 생 속에서 무었이 참되고 무었이 그릇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짓고 혼돈하고 있습니다. '다음 부터는 제가 죄를 짓거든 방관하지 말고 징계해 주십시오.
그런데 지금의 이 시험에서만은 꺼내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보통 언제 그 런 기도를 합니까 일반적으로 범죄하러 가면서 그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일 성수를 하도록 붙잡아 주십시오. 그래도 제가 주일을 안 지키 고 등산 가거든 타고 가던 버스의 바퀴를 펑크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에 등산하러 가시면 버스에서 고장이 났던가요 대부분 무사태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통하여 여러분을 불러 내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불러 내십니다. 내가 욕심을 내고 즐겼던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 셨던 것과의 차이를 보이시므로 불러 내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욕심내고 즐 겼던 것이 손해이고 더러운 것임을 알게 하시므로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비교하게 하시고 스스로 돌이키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돌이켜야 되는 줄을 알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에는 가끔 한번씩 손을 대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얼마나 화급히 돌이켰었던지를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갈 것을 확보해 놓았는데도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걷 게 하시는 이유가 무었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항복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 갈 표를 하나 구입해 놓은 것으로 만 족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목숨보다 중하며 하나님이 내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시며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만족한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내가 전심으로 고백할 때까지 계속해서 간섭하시고,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걷는 길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 자리에 나아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수준 만큼은 항복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항복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나의 사고방식과 권위와 그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기 보다, 언제나 내가 주인인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고치시려고 하는 가장 큰 목표요, 가장 큰 숙제거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모두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하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지금 욕심내고 있는 그 무었보다도 하나님 이름 그 자체가 만족스럽고, 자랑스 럽고, 기쁘고 희열에 넘치는 것이 되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소망이 되 고 있습니까 성경은 신자의 구원과 소망이 이러한 자리에로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이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 구하시는 풍성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평가절하시키지 마십 시오. 돈이 없을 때 돈이나 채워주시고, 병들었을 때 병이나 고쳐 주며, 죽으면 천 국에나 데려다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모독 해서는 안될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수많은 축복들 중에 가장 유치한 수준의 것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수려한 설악산에서 주어온 깨어 진 돌 조각에 불과합니다. 설악산의 풍성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거기에서 주워 온 깨진 돌만 보고 너무 좋아한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깨어진 돌이 아름답다면 그 돌이 있었던 곳은 얼마나 놀라운 곳이 될수 있을런지 짐작하고도 남아야 할 것입니다. 적은 축복에 가리워 엄청난 축복의 보고에 나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론'
옛날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축업은 독특했습니다. 낮 동안에는 목동들이 양들을 데 리고서 풀을 뜯게 하고서는 저녁이 되면 각각 양들을 몰고와서 마을의 공동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 우리는 양을 해할 만한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튼튼하고도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고 출입구에는 숙직자가 있어서 그 문을 닫아 걸고 밤새도록 지킵니다. 3절의 문지기는 바로 그 숙직자를 가리킵니다. 목동들은 그 공동 우리 안에 자기들의 양들을 몰아 넣고는 돌아가서 밤새 휴식을 취하고 아침이 되면 되돌아와서 자기 양들을 골라가는 것입니다. 와서 양들을 부르 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모여 목자가 이끄는 대로 그 울안을 나오 게 되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이 목자가 어제 이 우리에 그의 양을 맡긴 사람인가 아닌가를 확인만 하 면 됩니다. 몇마리를 데리고 왔는지는 세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제 목 자들만을 쫓아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목자들 쪽에서도 자기 양인데 오지 않으면 가서 부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양도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도 자기 양을 알아봅니다. 왜 이 말씀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9장에서 소경되었던 자를 예수님께서 고쳐놓았 더니 당시의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그 눈뜬 자를 그들의 사회에서 쫓아 내었던 사건과 결부시켜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9:39절부터 보시면 연결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 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10:1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지금 누구에게 절도며 강도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와 함께 있는 바 리새인들을 가리켜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10 장의 서두에 꺼내 놓으셨을까는 그만두고서라도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그 전개되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너희는 다 절도요 강도며 나야말로 진짜다!
그러므로 너희 무리들아, 거짓 선지 자들을 삼가고 참 목자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말을 하셔야 제대로 되어지는 줄거 리일 것 같은데, 그렇게 전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보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리고 4절 이후에는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본문의 말씀이 누구를 선택 할 것이냐 하는 싸움이 아니라, 주인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관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구원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을 말해주는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을 베푸시고는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한다면, 옳은 말인것 같은데 문제 되는 것이 하나가 있게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도 그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지만 결국,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누가 결정하느냐 라는 질문에 바로 우리 자신이 결정한다는 식으로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구원론을 표현상으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지 말 아야 합니다. 성경이 구원론을 이야기 할 때는 그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구원을 펼 쳐 놓고 믿겠느냐 안믿겠느냐 하며 우리 앞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그 양들은 누가 자기의 목자인 줄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요,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데려가는 싸움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찾아 오지도 않고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는 하나님을 알아 보지도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시고, 자기 백성을 그 죄 에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겠다는 것이요, 결국은 뜻대로 이루고야 말 일로써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6:3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여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시하셨는데 누구는 믿었고 누구는 안 믿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의 자녀를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회개시키고 고백케 하여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게 하는 싸움이 구원이러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쉽게 속는 것은 우리의 운명의 최종 결제자가 결국 자기 자신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지은 이도 하나님이시요, 그 가 지을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 계획을 추진하시며 그 계획에 실수하지 않으시 고 호리라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연히 생긴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 기 형상대로 만든 자들이요 만들 때 완성을 내다보고 만들어졌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대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할지라도 마침내는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완성품을 만들어 내 시고야 마는 작업이 구원이고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43:1-7절을 보 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 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게 함께 할 것이 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 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 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네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 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 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말씀에서 가장 굵은 핵심이 무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시작과 끝이 그 의 손에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시한 복스러운 말씀들 로 인해 우리가 선택하므로 마침내 좋은 길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우리를 만들 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게서 우리를 그 운명의 자리에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라고 말씀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리로 갈 수도 있고, 저리로 갈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 편을 내가 선 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길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의도 하셨던 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홍수에 의하여 범람하여 흘러가는 진흙탕물에 휩쓸려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밧줄을 던지시며 '누구든지 붙잡기만 해라! 내가 건져주마 '라는 식의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만들었던 자들이 배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던 자들이었으나 죄지은 자리에까지 오셔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꺼내기도 하셨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에 게 설득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최고의 작품인 우리가 우리의 깊은 속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네, 하나님 내 목숨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더 기쁨입니다.'라는 고백을 우리로부터 받아 내겠다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 구원의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대화요 권면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 중에서 십자가의 방법이 최고의 방법입니 까 이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자를 없애면 될 것 아니 겠습니까 죄로 타락한 자들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새로 만드시면 얼마나 쉽겠습니 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강권하시고 겁을 주어서라도 끌고가실 수도 있으 십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사탄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미개한 시절에는 사탄이 산신령으로도 나타나고 도깨비로도 나타나 흉악한 재난을 줌으로써 얼마 나 많은 영혼들을 걸머잡고 있었습니까 하지만 한 영혼인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 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영혼들이 하나만 큼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족하고 감격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앞에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실 때, 코를 꿰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 끌려 나오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그 분의 자존심상 절대로 그렇게는 안하십니다. 그 인생들 자신들이 '하나님, 당신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나 옳습니다. 이 미련한 것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므로 순복하게 하 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 께서 즉시 나타나셔서 죄를 범하지 못하게 했던 구약시대 처럼 지금도 그렇게 막아 주시고 강제라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대로 끌어가기를 바랍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그렇게 겁을 주시는 적이 있었습니까 거짓말하면 즉 시로 불기둥이 나타나서 경계를 시키던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은 죄를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죄를 지었어도 지금까지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뒤에 걸리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이래서는 안되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자신들을 살펴볼 때에도 참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참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구원이 무었입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의 최저 밑바닥에 있는 구원 의 근거가 무었입니까 그것이 나는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같은 기초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가난한 신앙을 가지 고 있는지 모릅니다. 구원은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작업을 처음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작업을 통하여 우리를 항복시켜 나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출3: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 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 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 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설명하십니다. 그의 존재 자 체가 완전하며 충만하며 부족함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무었이나, 다른 곳에 원인 이 있어서 결과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그 분만이 창조주시고 모든 생물과 모든 존재의 기원이십니다. 그리고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가 곤란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분만이 원인자이시고 그분만이 결과입니다. 그분만이 시작이시고 그분만 이 끝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종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은 이렇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것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도 없습니다. 이 이름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에 이런 것들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얼마나 철저하게 복종하였으면 100살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 고 하였을때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데려갔고, 죽으려 하였겠 습니까 또한,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아브라함은 100살에 낳은 단 하 나밖에 없는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끌고가서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설명하실 때에 그렇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평생을 동행했던 아브라함은 나의 단 한 마디인, 네가 백살에 낳은 아들을 내게 바 치라!고 하자 기쁜 마음으로 이행하였다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면 이미 포기했을 것이고, 절대로 같이 동행하지 않았을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한 평생 을 인도하고 간섭하사 그 야곱을 제대로 만들어 내시고 그 입술로 하나님 앞에서 항복케 하셨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구원을 설명할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어느만큼 하나님께 항복해야 될 만한 분이신가 하는 사실들을 나타내시므로 구원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말해, 우리는 지금 무었을 하다가 죽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 한은 윤리적으 로나 도덕적으로 어떤 결함과 실수를 저지르고 죽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됨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70년 8 0여년의 인생 중에서 여러가지 우여곡절로 간섭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저 가슴 밑바 닥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오! 하나님, 이제 항복하나이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시기 위하여 모든 시간과 공간을 다 동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무었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가 싫다 고 반발한 것이 아닙니까 구원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같은 반발 로부터 전인격적인 굴복이요, 순복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우리로 하여금 내 인생과 내 존재에 관하여 내가 주인도 아니요, 내 지혜와 내 계획이 전부가 아 니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고,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간섭에 대 하여 기쁨으로 순복하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작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싸움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의 자랑이 되며, 영광이 되며 우리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싸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기쁨으로 나아오고, '세상에서의 천 날을 사는 것보다 하늘나라의 문지기로 하루를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는 고 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의 비천한 고집과 계속해서 싸 우시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가게되는 삶 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도입하여 안락한 생활을 추구해 보겠다는 얇팍한 계산으로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계획되어 있으며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손길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내게 하나님의 손길이 무었이며 그 손길이 내게 무었을 요구하시는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무었을 어떻게 항복하기를 요구하시는가에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거기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한 사건과 문제와 풀어야 할 숙제를 두고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계획과 우리의 욕심은 너무나 대조 적이고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만일 나의 자녀가 아프면, 우리는 얼른 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도입하려고 서두 럽니다. 이것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당장의 희망사항 보다도 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항복하게 만드시고자 하는 어떤 뜻이 더 중요한 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명기4:32-40절을 보십시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 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 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 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얘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일게 하려 하 심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보이시고 너를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 라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내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 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 라" 얼마나 자상한 말씀입니까 오히려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설득하고 계신 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아닙니까 능력의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죄지으려고 할때에 불을 내려서 막아버리시고, 범죄하려고 손을 내밀면 즉시로 마 비시켜 버려서 못하게 만들면 될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의 여러 곳에서 '이러 이러한 것은 내가 싫어하니 하지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어기면 즉시로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 보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행위를 우리가 하면 벌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 왜 그 저지르는 죄를 강력하게 막지는 않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같은 질문은 선악과 문제가 나오면 언제나 제기 되었던 질문입니다. '선악과 열 매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안 만들었더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혹 그 열매를 먹으려고 갈 때에 다리를 굳어지게 하였으면 그 계율을 범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셨다면 우리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지, 로보트같은 기계적인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 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그렇게 유치하게 끌어내리지 말 아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유치하게 신앙이 출발되어 집니다. 그러나 그 목 표마저 유치해 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에 살다가 죽고 멸망당하고 다시 일어나는 민족의 역사로 보지말고,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되어지는가를 적 나라하게 보여 주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한번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러면 큰 일을 당한다. 그렇게 하면 내게 혼 날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내시고 혼을 내실 수 있으 신 분이라면 못 하게 막으시면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계속 경고하시고 설득하시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인생으로 보시고 이스라엘을 한 인간으로 보시면 어 쩌면 그렇게도 내 인생과 똑 같은가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 생 속에서 무었이 참되고 무었이 그릇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짓고 혼돈하고 있습니다. '다음 부터는 제가 죄를 짓거든 방관하지 말고 징계해 주십시오.
그런데 지금의 이 시험에서만은 꺼내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보통 언제 그 런 기도를 합니까 일반적으로 범죄하러 가면서 그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일 성수를 하도록 붙잡아 주십시오. 그래도 제가 주일을 안 지키 고 등산 가거든 타고 가던 버스의 바퀴를 펑크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에 등산하러 가시면 버스에서 고장이 났던가요 대부분 무사태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통하여 여러분을 불러 내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불러 내십니다. 내가 욕심을 내고 즐겼던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 셨던 것과의 차이를 보이시므로 불러 내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욕심내고 즐 겼던 것이 손해이고 더러운 것임을 알게 하시므로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비교하게 하시고 스스로 돌이키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돌이켜야 되는 줄을 알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에는 가끔 한번씩 손을 대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얼마나 화급히 돌이켰었던지를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갈 것을 확보해 놓았는데도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걷 게 하시는 이유가 무었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항복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 갈 표를 하나 구입해 놓은 것으로 만 족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목숨보다 중하며 하나님이 내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시며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만족한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내가 전심으로 고백할 때까지 계속해서 간섭하시고,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걷는 길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 자리에 나아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수준 만큼은 항복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항복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나의 사고방식과 권위와 그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기 보다, 언제나 내가 주인인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고치시려고 하는 가장 큰 목표요, 가장 큰 숙제거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모두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하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지금 욕심내고 있는 그 무었보다도 하나님 이름 그 자체가 만족스럽고, 자랑스 럽고, 기쁘고 희열에 넘치는 것이 되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소망이 되 고 있습니까 성경은 신자의 구원과 소망이 이러한 자리에로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이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 구하시는 풍성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평가절하시키지 마십 시오. 돈이 없을 때 돈이나 채워주시고, 병들었을 때 병이나 고쳐 주며, 죽으면 천 국에나 데려다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모독 해서는 안될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수많은 축복들 중에 가장 유치한 수준의 것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수려한 설악산에서 주어온 깨어 진 돌 조각에 불과합니다. 설악산의 풍성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거기에서 주워 온 깨진 돌만 보고 너무 좋아한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깨어진 돌이 아름답다면 그 돌이 있었던 곳은 얼마나 놀라운 곳이 될수 있을런지 짐작하고도 남아야 할 것입니다. 적은 축복에 가리워 엄청난 축복의 보고에 나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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