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 (요10:11-15)
본문
지금 우리는 저 유명한 예수님의 목자 선언을 듣고자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0:11, 14)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원문은 γ εμι ποιμν καλ입니다. ‘나는 그 선한 목자’(The shepherd the good one)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나 만이 선한 목자라고 하는 엄위하신 자신의 선언입니다.
I. 선한 목자라고 하였습니다(10:11,14) 당시 헬라 사회에서 ‘선하다’는 말은 보통 두 가지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아가도스(αγαθ)라는 선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선하고 좋은 것, 말하자면 도덕적 선, 심미적 선, 지적인 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규범적 선입니다. 또 하나의 경우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선한 목자’라고 할 때 쓰여진 말입니다. 그것은 칼로스(καλ)입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 100번 정도 사용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목회 서신에 24회 이상이나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는 ‘good’으로 번역되고 때로는 ‘honest’로 번역되고 있으나(롬 12:17, 고후 8:21) 이 ‘선한’의 본래 뜻을 나타내기에는 너무 부족한 한계상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선(καλ)은 ‘말쑥한, 우아한, 보기에 멋진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쓸모 있는 것, 명예스러운 것, 매력적인 것 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아가도스(선)’란 말은 도덕적인 의식에 호소하고 있지만, ‘칼로스’는 실질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눈(eye)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입니다. 당시 헬라사회에서 이 말은 잘 생긴 미모의 여자와 멋진 남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의 고백,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신분과 명예 등을 나타낼 때 이 말이 최고의 빛을 나타내었습니다. 사람 뿐아니고 어떤 자연의 매력, 주택의 아름다움, 세련된 옷맵시 그리고 모든 사물들을 말할 때도 최고의 빛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 곧 칼로스(καλ)가 그 앞에 붙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은 언제든지 최고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선한 남자, 선한 여자, 선한 의사, 선한 교육가, 선한 법률가, 선한 집, 선한 의상 등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결과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바로 보고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 단어가 바로 칼로스(καλ)입니다. 신약성경에 좋은 나무(마 3:10), 좋은 땅(마 13:8, 23), 좋은 고기(마 13:48), 좋은 소금(막 9:50), 좋은 포도주(요 2:10), 선한 율법(롬 7:16, 딤전 1:8), 선한 행위(마 5:16), 선한 일(요 10:32-33), 선한 직분(딤전 3:1, 3:13), 선한 군인·선한 싸움(딤전 1:18, 6:12, 딤후 2:3, 4:7), 선한 종(딤전 4:6), 선한 교훈(딤전 4:6), 선한 증거(딤전 6:12-13), 선한 청지기(벧전 4:10) 등등에 모두 칼로스(καλ)가 붙어 있습니다. 특별히 베다니에 살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의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καλ=선한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 26:10, 막 14:6).
그러므로 주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남아 있는 선(善), 살아 있는 선, 말하고 있는 선을 말합니다. 기억될 선, 감동을 주는 선, 새로움을 주는 선으로 남아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에게 칼로스(καλο)를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랑 고백과 사랑 전달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둔하고, 무감각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행위를 무모한 낭비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행한 일이 낭비가 아니고, 선한 일(좋은 일=κα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요, 사랑의 요동(搖動)이요, 사랑의 시위(示威)였습니다. 최고, 최선을 다하는 것, 곧 제일 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붓는 일만이 행복이요, 만족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던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비용을 계산하는 따위는 생각조차 할 줄 몰랐던 실제적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준다는 것은 행동하는 용감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칼로스(καλ)는 사람의 사람된 행위를 빛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많은 칭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귀중한 한 칭호로서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선’ 곧 칼로스(καλ)란 단어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개념은 ‘매력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선물이 아니면, 결코 칼로스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καλ란 행위)란 사랑이 최고로 지배하는 마음의 결과입니다. 행위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사랑의 위대성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만이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 이 말 속에는 이렇게 설명 이상의 ‘사랑의 매력’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도덕적 선, 지식적 선, 윤리적 선, 사회 정의의 선, 국가지상주의적 선, 애국애족적 선 따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Ⅱ. 어디에서 그의 목자적 선이 나타납니까 ‘양’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하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10:11, 14). 그러면 양들에게 ‘목자적 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내 양’이라고 함에서 나타납니다. 10장 4절에 ‘자기 양’, 14절에 ‘내가 내 양’, 27절에 ‘내 양’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양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자식에게 부모의 선이 발작(發作)합니다. 자식을 향할 그때 선한 부모가 됩니다. 내 남편, 내 아내에게 부부의 선이 발작(發作)합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자식의 선이 발동합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내 나라, 내 민족에게 애국애족의 선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애국자, 순국열사 등으로 나타납니다. 내 제자, 내 선생님이 될 때 사제지간의 선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목자적 선은 ‘내 양’을 향하여 발동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 성자 예수님의 구속, 보혜사 성령님의 소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자적 선은 ‘내 양’에게 발동됩니다.
2. 내 양을 사랑함에서 나타납니다. 10장 14절에 내가 내 양을 안다, 양도 나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인 앎(οδα)과 전혀 다른 (γινσκω)입니다. 이 말은 구약의 야다에서 온 말인데 사랑 관계의 앎, 즉 부부 관계의 앎, 독점적 비밀의 앎, 경험적 앎을 가리킵니다. 필연적 앎이요, 목적적 앎이요, 계획적 앎입니다. 지속적 앎입니다. 그 양의 본래도 알고, 이름도 알고, 수(數)도 알고, 음성도 알고, 연약도 알고, 장래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다’(사랑)고 할 때 신망애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전도자가 레바논 산에서 목자를 만나 “당신은 당신의 양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목자는 답하기를 “당신이 수건으로 내 눈을 가리고 아무 양이나 데리고 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내 손을 그 양의 머리에 한 번만 손대 보는 것으로 그것이 내 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자적 칼로스는 자기 양을 앎에서, 곧 사랑함에서 나타납니다. 결코 타인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만이 자기 양을 아는 독자적 앎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사랑합니다.
3.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에서 나타납니다. 10장 11,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사용하신 ‘목숨’이란 단어는 신적이고, 영원적인 생명 조에(ζω)가 아니고, 육적인 생명 푸쉬케(φυχη)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자신의 희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목숨을 버린다’(τθησιν)는 말은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나타낸 선(καλ)입니다. 주는 것이 선입니다. 목숨을 주는 것이 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앞서 먼저 죄인을 향한
1 ‘사랑’이 전제되어 있었고
2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세상에 오셨고(화육강세)
3 33년 간의 선한 삶이 있었습니다(무죄의 삶).
4 마침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랑의 선(善)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최종의 폭발, 최고의 폭발, 큰 폭발입니다. 불가항력적 폭발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목숨이 아닌 ‘자기 목숨’이라고 함으로 나만이 선한 목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만이 세상의 빛이고, 나만이 생명의 떡이다. 나만이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만이 참 포도나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 자기 희생, 자기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가 지닌 ‘선’의 매력입니다. 선의 우아함입니다. 선의 아름다움입니다. 선의 모습입니다. 선의 가치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이 십자가의 희생! 이것이 칼로스의 본성이요, 본질이요, 본색이요, 전부입니다. 이렇게 예수 자신은 칼로스였습니다. 그 칼로스를 자기 백성에게 나타냈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 사람들(마1:21, 요13:1)에게 나타냈습니다. 그 칼로스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 우리 죄를 대신하는 행동으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고 칼로스의 개가를 남겼습니다. 율법 성취의 개가입니다. 모든 예언성취의 개가입니다. 아니 속죄 성취의 개가입니다. 예수 칼로스의 개가입니다. 오늘 목사 임직을 받으시는 여러분! 히브리서 13장 20절에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그를 가리켜 목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선언대로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선한 목자직을 대행하는 직분을 이 시간에 받은 자들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목사’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타인이나 삯꾼이나, 도적이나, 절도나, 강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경건을 자기 유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목자직을 직업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생활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직업의식을 가지고 양들을 돌보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돌봅니다. 사경에 빠진 양을 돕는 데에 일어나는 온갖 류의 위험을 사전에 세밀하게 계산할 줄 모릅니다. 하루에 몇 시간, 일주일에 몇 시간으로 직장 근무지처럼 계산하지 아니합니다. 그가 받은 모든 시간, 모든 날, 모든 정력, 모든 재능, 모든 존재 의미, 가치·목적이 아예 목장과 양들 뿐입니다. 선한 목자는 그의 봉사가 삯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랑의 봉사이기 때문에, 그 삶 자체가 재미있고, 보람있고, 아름답고 영웅적인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선함은 양을 볼 때 발작하는 것입니다. 그 발작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성분은 ‘희생’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입니다. 성자 어거스틴은 젊은 목사가 띄운 편지 한 장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자기가 처한 위험의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젊은 목사는 편지에서 “제가 맡고 있는 목회지에 고트족이 침입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그냥 머물고 있으면, 고트족이 목사인 나를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젊은 목사에게 즉시 답장을 보내기를 “목자는 그 양을 위해 떠날 권리가 없다네. 자네는 목자가 아닌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한 목자는 주님의 양을 위할 권리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양을 사랑할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희생의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과 희생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의 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적 공권입니다. 양들에게 선을 행할 권리! 이것이 목자의 목자된 전부입니다.
I. 선한 목자라고 하였습니다(10:11,14) 당시 헬라 사회에서 ‘선하다’는 말은 보통 두 가지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아가도스(αγαθ)라는 선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선하고 좋은 것, 말하자면 도덕적 선, 심미적 선, 지적인 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규범적 선입니다. 또 하나의 경우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선한 목자’라고 할 때 쓰여진 말입니다. 그것은 칼로스(καλ)입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 100번 정도 사용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목회 서신에 24회 이상이나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는 ‘good’으로 번역되고 때로는 ‘honest’로 번역되고 있으나(롬 12:17, 고후 8:21) 이 ‘선한’의 본래 뜻을 나타내기에는 너무 부족한 한계상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선(καλ)은 ‘말쑥한, 우아한, 보기에 멋진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쓸모 있는 것, 명예스러운 것, 매력적인 것 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아가도스(선)’란 말은 도덕적인 의식에 호소하고 있지만, ‘칼로스’는 실질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눈(eye)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입니다. 당시 헬라사회에서 이 말은 잘 생긴 미모의 여자와 멋진 남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의 고백,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신분과 명예 등을 나타낼 때 이 말이 최고의 빛을 나타내었습니다. 사람 뿐아니고 어떤 자연의 매력, 주택의 아름다움, 세련된 옷맵시 그리고 모든 사물들을 말할 때도 최고의 빛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 곧 칼로스(καλ)가 그 앞에 붙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은 언제든지 최고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선한 남자, 선한 여자, 선한 의사, 선한 교육가, 선한 법률가, 선한 집, 선한 의상 등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결과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바로 보고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 단어가 바로 칼로스(καλ)입니다. 신약성경에 좋은 나무(마 3:10), 좋은 땅(마 13:8, 23), 좋은 고기(마 13:48), 좋은 소금(막 9:50), 좋은 포도주(요 2:10), 선한 율법(롬 7:16, 딤전 1:8), 선한 행위(마 5:16), 선한 일(요 10:32-33), 선한 직분(딤전 3:1, 3:13), 선한 군인·선한 싸움(딤전 1:18, 6:12, 딤후 2:3, 4:7), 선한 종(딤전 4:6), 선한 교훈(딤전 4:6), 선한 증거(딤전 6:12-13), 선한 청지기(벧전 4:10) 등등에 모두 칼로스(καλ)가 붙어 있습니다. 특별히 베다니에 살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의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καλ=선한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 26:10, 막 14:6).
그러므로 주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남아 있는 선(善), 살아 있는 선, 말하고 있는 선을 말합니다. 기억될 선, 감동을 주는 선, 새로움을 주는 선으로 남아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에게 칼로스(καλο)를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랑 고백과 사랑 전달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둔하고, 무감각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행위를 무모한 낭비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행한 일이 낭비가 아니고, 선한 일(좋은 일=κα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요, 사랑의 요동(搖動)이요, 사랑의 시위(示威)였습니다. 최고, 최선을 다하는 것, 곧 제일 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붓는 일만이 행복이요, 만족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던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비용을 계산하는 따위는 생각조차 할 줄 몰랐던 실제적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준다는 것은 행동하는 용감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칼로스(καλ)는 사람의 사람된 행위를 빛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많은 칭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귀중한 한 칭호로서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선’ 곧 칼로스(καλ)란 단어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개념은 ‘매력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선물이 아니면, 결코 칼로스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καλ란 행위)란 사랑이 최고로 지배하는 마음의 결과입니다. 행위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사랑의 위대성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만이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 이 말 속에는 이렇게 설명 이상의 ‘사랑의 매력’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도덕적 선, 지식적 선, 윤리적 선, 사회 정의의 선, 국가지상주의적 선, 애국애족적 선 따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Ⅱ. 어디에서 그의 목자적 선이 나타납니까 ‘양’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하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10:11, 14). 그러면 양들에게 ‘목자적 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내 양’이라고 함에서 나타납니다. 10장 4절에 ‘자기 양’, 14절에 ‘내가 내 양’, 27절에 ‘내 양’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양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자식에게 부모의 선이 발작(發作)합니다. 자식을 향할 그때 선한 부모가 됩니다. 내 남편, 내 아내에게 부부의 선이 발작(發作)합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자식의 선이 발동합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내 나라, 내 민족에게 애국애족의 선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애국자, 순국열사 등으로 나타납니다. 내 제자, 내 선생님이 될 때 사제지간의 선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목자적 선은 ‘내 양’을 향하여 발동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 성자 예수님의 구속, 보혜사 성령님의 소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자적 선은 ‘내 양’에게 발동됩니다.
2. 내 양을 사랑함에서 나타납니다. 10장 14절에 내가 내 양을 안다, 양도 나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인 앎(οδα)과 전혀 다른 (γινσκω)입니다. 이 말은 구약의 야다에서 온 말인데 사랑 관계의 앎, 즉 부부 관계의 앎, 독점적 비밀의 앎, 경험적 앎을 가리킵니다. 필연적 앎이요, 목적적 앎이요, 계획적 앎입니다. 지속적 앎입니다. 그 양의 본래도 알고, 이름도 알고, 수(數)도 알고, 음성도 알고, 연약도 알고, 장래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다’(사랑)고 할 때 신망애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전도자가 레바논 산에서 목자를 만나 “당신은 당신의 양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목자는 답하기를 “당신이 수건으로 내 눈을 가리고 아무 양이나 데리고 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내 손을 그 양의 머리에 한 번만 손대 보는 것으로 그것이 내 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자적 칼로스는 자기 양을 앎에서, 곧 사랑함에서 나타납니다. 결코 타인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만이 자기 양을 아는 독자적 앎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사랑합니다.
3.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에서 나타납니다. 10장 11,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사용하신 ‘목숨’이란 단어는 신적이고, 영원적인 생명 조에(ζω)가 아니고, 육적인 생명 푸쉬케(φυχη)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자신의 희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목숨을 버린다’(τθησιν)는 말은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나타낸 선(καλ)입니다. 주는 것이 선입니다. 목숨을 주는 것이 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앞서 먼저 죄인을 향한
1 ‘사랑’이 전제되어 있었고
2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세상에 오셨고(화육강세)
3 33년 간의 선한 삶이 있었습니다(무죄의 삶).
4 마침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랑의 선(善)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최종의 폭발, 최고의 폭발, 큰 폭발입니다. 불가항력적 폭발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목숨이 아닌 ‘자기 목숨’이라고 함으로 나만이 선한 목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만이 세상의 빛이고, 나만이 생명의 떡이다. 나만이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만이 참 포도나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 자기 희생, 자기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가 지닌 ‘선’의 매력입니다. 선의 우아함입니다. 선의 아름다움입니다. 선의 모습입니다. 선의 가치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이 십자가의 희생! 이것이 칼로스의 본성이요, 본질이요, 본색이요, 전부입니다. 이렇게 예수 자신은 칼로스였습니다. 그 칼로스를 자기 백성에게 나타냈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 사람들(마1:21, 요13:1)에게 나타냈습니다. 그 칼로스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 우리 죄를 대신하는 행동으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고 칼로스의 개가를 남겼습니다. 율법 성취의 개가입니다. 모든 예언성취의 개가입니다. 아니 속죄 성취의 개가입니다. 예수 칼로스의 개가입니다. 오늘 목사 임직을 받으시는 여러분! 히브리서 13장 20절에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그를 가리켜 목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선언대로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선한 목자직을 대행하는 직분을 이 시간에 받은 자들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목사’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타인이나 삯꾼이나, 도적이나, 절도나, 강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경건을 자기 유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목자직을 직업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생활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직업의식을 가지고 양들을 돌보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돌봅니다. 사경에 빠진 양을 돕는 데에 일어나는 온갖 류의 위험을 사전에 세밀하게 계산할 줄 모릅니다. 하루에 몇 시간, 일주일에 몇 시간으로 직장 근무지처럼 계산하지 아니합니다. 그가 받은 모든 시간, 모든 날, 모든 정력, 모든 재능, 모든 존재 의미, 가치·목적이 아예 목장과 양들 뿐입니다. 선한 목자는 그의 봉사가 삯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랑의 봉사이기 때문에, 그 삶 자체가 재미있고, 보람있고, 아름답고 영웅적인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선함은 양을 볼 때 발작하는 것입니다. 그 발작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성분은 ‘희생’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입니다. 성자 어거스틴은 젊은 목사가 띄운 편지 한 장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자기가 처한 위험의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젊은 목사는 편지에서 “제가 맡고 있는 목회지에 고트족이 침입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그냥 머물고 있으면, 고트족이 목사인 나를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젊은 목사에게 즉시 답장을 보내기를 “목자는 그 양을 위해 떠날 권리가 없다네. 자네는 목자가 아닌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한 목자는 주님의 양을 위할 권리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양을 사랑할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희생의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과 희생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의 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적 공권입니다. 양들에게 선을 행할 권리! 이것이 목자의 목자된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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