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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이신 예수님 (요10:1-10)

본문

현대 기독교의 혼란이나 무력함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만 나오면 교인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한번도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복음의 전달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 오래동안 다니면 스스로 자신을 교인이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는 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접할 때 깜짝 놀라게 됩니다.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모르고 교인이 되고, 따라서확신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양산(量産)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두번째는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그리스도인으로써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가르치지 않았기에,신앙생활의 진정한 내용을 상실해 버렸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감격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10장에는 이 두가지 교회의 딜렘마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는 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수님의 두가지나는.이다.(Egwv eijmi)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나는 양의 문이다.(Egwv eijmi hJ quvra tw'n probavtwn)(요10:7),나는 선한목자다!(Egwv eijmi oJ poimh;n oJ kalov")(요10:11)이 두가지멧세지야 말로, 오늘 교회가 직면한 두가지 딜레마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지그 방법을 생각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배경-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
1. 양의 우리(1절)-“구원받은 공동체” 여기서 “양의 우리”(th;n aujlh;n tw'n probavtwn)이라고 했을 때, “양(probavtwn)”은 복수형으로 “양들”이라는 번역이 더 합당합니다. 또한 양들이 있는우리(aujlh;n)라는 것은 당시 1세기 팔레스틴에서 양들의 삶의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을에 공동으로 우리가 있어서, 목자들이 그 한 우리에 자기 양을 매일밤을 지내게 하기 위해서 그 양들을 위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우리에는 지키는 자가 있는데 '3절'에서는문지기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문지기가 바로 그 공동 우리를 지키는 자입니다. 아침이 되면 그 우리안에 있는 자기 양을 찾으러 옵니다. 그 우리에는 자기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양의 이름을 부르면, 그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와 푸른 초장으로 따라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리(aujlh;n)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양들에게 있어서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공동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우리(aujlh;n)는 구약시대에는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였으며, 신약에 오면 그 공동체는 보다 넓어져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이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신약에서는교회입니다.
2. 우리(aujlh;n)에 들어가는 문 교회라고 하는 구원받은 공동체인 우리안에 들어 오려면 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양의 우리가 벽의 담은 높았지만, 문을 별도로 없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그 문앞에 있는 문지기가 통과시켜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문지기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을 때, 문지기의 대답을 상상해 보십시요!문이 어디 입니까내가 곧 문이요!이러한 배경을 상상해 보시면, 오늘 본문을 보다 쉽게 접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양들의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도 이 양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둘째, 이 문은 유일한 문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문(hJ quvra)”은 명사 단수형으로 여러개의 문중에 하나의 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문’입니다. 따라서 양이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하나였던 것처럼, 구원받은 공동체에 들어가는 문도 하나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문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그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중생의 문, 거듭남의 문, 구원의 문입니다.
1. 이 문은 예수님이십니다(7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나는 양의 문이다.(Egwv eijmi hJ quvra tw'n probavtwn)(요10:7) 그분이 문이십니다.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 들어가는 자는절도요 강도입니다. 9절에서는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문이십니다. 나는 하나의 문이라(I am a door)라 하지 않고,나는 그 문이라(I am (hJ )the door:KJV)라고 하였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몇 개 있었습니까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방주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문이야 말로 노아시대에 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문이었습니다. 이 방주의 문 밖에서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방주의 문 밖에서 착한 일 많이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못받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획중에 유일한 문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감격속에서 그 문을 통과 하셨습니까 노아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당신은 방주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이것을 오늘 우리시대의 질문으로 바꾸어 볼까요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참으로 그문안에 들어와 계십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다는 사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까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kai; oujk e'stin ejn a'llw/ oujdeni; hJ swthriva, (ou'te) ((oujde;)) ga;r o'nomav ejstin eteron uJpo; to;n oujrano;n to; dedomevnon ejn ajnqrwvpoi" ejn w/ dei' swqh'nai hJma'".(행4: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levgei aujtw'/ !Ihsou'", !Egwv eijmi hJ oJdo;" kai; hJ ajlhvqeia kai; hJ zwhv:oujdei;" e'rcetai pro;" to;n patevra eij mh; di! ejmou'. Jesus saith unto him,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no man cometh unto the Father, but by me.(KJV)(요14:6)
2.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자는 강도요.절도입니다.-바리새인들(7절)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는 강도요 절도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강도와 절도는 당시 예수님을 거부하고서 하나님을 믿으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아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안믿었습니까 믿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봉사생활을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한주에 이틀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드리며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구원의 문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던 유대인들이 마침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절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일입니까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사람들이 없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서 날카로운 강조와 예수님에 대한 책임있는 신앙고백을 강조하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결국 우리들도 바리새인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
1':바울 이전의 사울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바울되기 전에 사울의 결정적인 결함이요, 실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압니다. 여러분! 바울이 바울 되기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안믿었습니까 얼렁뚱땅 믿었습니까 열심히 믿었습니까 굉장히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어느 정도 잘 믿었습니까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 말고 누구를 또 믿으라는 말인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야소”를 믿는 사람들을 이땅에서 척결을 하기 위해서다메섹으로 가게된 가장 중요한 원인도하나님께 대한 열심때문이었습니다(빌3:8). '예
2' 이스라엘 백성들(롬10:1-4)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향해 신앙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한국교회 전통적인 교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열렬히 하면서도 항상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 나를 통하지 않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없이는 아무것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근거가 없습니다. 직분이 무엇인가 우리의 부모나 조부모의 신앙적인 배경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3. 이 문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항상 열려있는 문은 아닙니다. 주님께서잔치집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문은 언젠가 닫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문을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후6:2':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은 구원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이땅에는진노의 날이 올 것입니다(계6:17). 이 문은 항상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9절上)고 했습니다.
셋째, 예수 안에서 누리는 구원은(9절下)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을 너무 소극적으로 생각합니다.죽을 지경에서 건짐 받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오늘 본문 9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은 적극적인 의미까지 언급하셨습니다.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했고, 10절 하반절에서는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은 우리에 들어가 쉼을 얻고 보호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목자를 따라 양의 우리에서 나와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아 풍성한 꼴을 먹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풍성한 삶의 시작입니다.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그가 나에게 공급하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과 할 때 이 풍성한 삶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맺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의 최대의 비극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들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날카롭게 강조되지 않을 때 기독교는 왜곡될 수 있고, 유대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그리스도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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