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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언약에 대한 예법 (히9:1-10)

본문

히브리 사람들은 장막, 제사, 제사직분등 모든 것이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건물이 완성되면 건물을 짓기 위해 옆에 대었던 부목들을 떼어 옮기듯이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을 뿐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치 추운 겨울에는 두꺼운 옷이 필요하지만 더운 여름이 되면 벗어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히브리 사람들은 첫언약의 예법에 그들의 마음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첫 예법이 무조건 쓸모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비교된다는 점에 있어서 가볍게 취급되면 안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첫 예법을 주셨기에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성소와 지성소를 모형으로 주시고 거기에서 행해야 할 것들을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를 원하셨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대로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어떤 것이며 그것을 섬기는 법은 어떠했는가 오늘은 옛 언약의 예법을 상고해 보기로 한다.
1. 첫 장막(성소)에 대한 예법(1,2절)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6일이 걸렸으나 장막짓는 일을 위하여 모세를 가르치는데 40년이나 걸렸다. 이것은 은혜의 사역이 창조의 사역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명백히 시사해 준다. 이제 레위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예수님의 직무 수행을 비교하고자 한다. 첫 언약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있었다. 예법이라 함은 섬기고(행24:14) 봉사하는 일(빌3:3)로써 두려운 맘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법의 장막은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는 대조가 된다. 장막은 다만 세상적인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사활적이고 영원한 것은 확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에서 첫언약을 깔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장점을 드러내고 예수님이 그것보다 더 우월한 것을 드러내고자 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첫 장막에 있는 것들은 무엇이며 그것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1. 등대(출 25:31-39, 37:17-24) 등대는 촛대라고도 한다. 촛대는 향제단의 왼쪽이나 남쪽에 비치되었다. 촛대는 가운데 하나의 줄기를 중심으로 해서 6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다. 살구꽃 형상의 무늬가 있으며 금으로 입혀졌다. 모두 7개의 가지에 7개의 등잔이 달려 있다. 제사장은 저녁 예배 때 불을 켰으며 낮 동안에는 가운데만 불을 켰다. 등대는 교제를 위한 능력이며 빛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등대로 흘러 들어가는 기름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상징한다. 밝은 빛은 음식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가재 도구였다. 빛은 말씀을 통해서 그의 종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생명의 빛을 상징한다. 또한 성도는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함을 설명해 준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 거하고 믿음과 사랑과 복종의 빛을 발해야 한다. 주목할 것은 첫 장막에는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빛으로 영적인 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빛이시다. 그러나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했고 꺼버렸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밤이다. 등대가 없는 삶은 죄악의 어두운 밤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등대와 빛되신 그리스도가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2. 진설병상(출 25:23-30, 레 24:5-9) 진설병상은 장방형으로 4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 위에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그릇과 스푼들이 놓여졌다. 매 안식일마다 고운 밀가루로 만들어진 열 두개의 떡덩이를 여섯개 씩 두 줄로 진열하였으며 그 각 줄에는 유향이 놓여졌다. 진설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일상적인 음식들을 거룩하게 하는 상징이었다.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요 6:32-58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떡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도 의미가 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인데 떡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떡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떡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떡을 진열해 놓는 것은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3. 향단(출 30:6-10, 40:26) 향단은 싯딤나무로 만들어진 장방형의 제단이다. 4귀에 뿔이 있고 그 뿔과 제단 테두리는 금으로 씌워졌다. 1년에 1차 속죄제물의 피가 뿌려졌다. 향단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상적인 감사와 기도의 상징으로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향료가 살라졌다. 다른 향이 사용되면 안된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드리다가 즉석에서 죽임을 당했다(레 10:1). 향단의 향은 예수님이 승천해서 드리는 제사와 기도를 말한다(롬 8:34, 히 7:25, 요일 2:1).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 성전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면 예수님은 그 기도를 금향로에 담아서 하나님께 아뢴다. 계 5:8에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들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되는 줄로 믿는다.
4. 놋단(출 38:1-9, 27:1-8) 놋제단은 짐승을 잡아 죽여서 불태우는 곳이다. 다른 기물들은 다 금으로 만들었는데 짐승을 죽이는 제단만큼은 놋으로 만들었다. 놋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한다. 그곳에서 동물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인간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족적 죽음을 이룬 십자가 사건을 상징한다. 놋제단은 십자가의 상징이다. 왕하 18:4에서 히스기야 왕이 느후스단을 부수어 없애는 일이 나오는데 느후스단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지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놋뱀이었다. 그 때 들리워진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놋제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그 결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5. 물두멍(출 30:17-21, 31:9, 38:8, 40:30-32) 물두멍은 두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닦는 기능이다. 물두멍에는 물이 있어 수족을 씻도록 되어 있었다. 안씻고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다. 더러운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더러운 돼지 우리에서 놀다 들어온 아이에게 그냥 새 옷을 입힐 수는 없다. 먼저 닦아야 한다. 사람은 허물과 죄를 씻고 자신을 살피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거룩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사52:11, 히 10:22, 행 22:16). 또 하나는 거울의 기능이다. 제사를 집례하러 들어갈 때에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볼 수 있도록 한 기능이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는 양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고(고전 13:12), 진리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고(약1;23), 성령님의 감화와 그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요 16:7-11).
2.둘째 장막(지성소)에 대한 예법(3-5절) 지성소는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해 1년에 1차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대제사장은 4번 정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먼저는 자기 죄를 속하러 들어가고 그 다음은 백성의 죄를 속하러 들어갔다(레 16:12,15). 세번째
는 피를 뿌리기 위해서 들어갔다(레 16:14). 네번 째는 번제 후에 놔둔 기구와 불담는 그릇을 제자리에 두려고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일년에 일차 들어간다고 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서는 기도를 길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도가 길면 혹시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이제 둘째 장막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1. 휘장(출 26:1-6) 휘장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기둥에 두 겹으로 두텁게 만들어졌다. 10폭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28규빗, 넓이는 4규빗으로 되어 있다.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으로 되어 있다. 청색은 하늘 나라의 신성을 의미하고 자색은 위엄과 존귀를 말하고 홍색은 피와 능력과 권세를 말한다. 이 모든 색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말한다. 휘장을 친 목적은 첫째로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에 있다. 이것은 구별을 상징한다. 안은 밖의 죄악된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구별은 선택과 구속의 상징이다. 둘째로 휘장은 보호의 의미가 있다. 그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하고 간수하는 의미가 있다. 셋째로 휘장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2. 안휘장(출 26:31-37) 안휘장은 삼베로 만들어졌으며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네 기둥에 금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둥은 금박으로 입혀졌으며 휘장은 네 기둥 뒤에 있었고 그 휘장의 바로 앞쪽에는 양쪽으로 갈라진 짧은 휘장이 장식용으로 걸려 있었다. 안 휘장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려서 구원하는 구속 사업을 뜻한다. 이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찢어졌다고 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휘장을 찢으시므로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만드셨다.
3. 금향로(레 16:12,13) 금향로는 지성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취급을 하고 있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70인역의 번역의 오류 때문이라고 한다. 출 30:6과 40:5은 문장이 애매하며 향로가 지성소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성소에 있는 향로가 가져다 주는 지성소의 향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번째의 해석이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데 왕상 6:22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는 향로가 성소에 있기는 하지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 행사와 관련되므로 지성소의 물건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성소에서 향로를 가지고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해마다 속죄일이면 대제상은 향단에서 피운 거룩한 불씨를 향로에 옮겨 담고 그 불씨 위에 향료를 넣었으며 그 향로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서 그 향로 안에 담긴 것을 향제단에 쏟아 붓고 기도드린 후에 자신의 다른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면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하나님께 열납되고 그리스도의 간구하심이 효력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효과적 기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4. 언약궤(출 25:10-16) 출 25:32에 보면 “법궤 위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고”라고 했다. 법궤는 지성소에 두었다. 법궤는 어떤 것인가 법궤는 가시나무(싯림 가시나무)로 만들었다. 아카시아 나무라고도 한다. 법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가로 112cm, 세로 68cm, 높이 68cm로 만들어졌다. 아카시아 나무는 볼품 없는 나무다. 이렇게 볼품 없는 나무를 쓰는 이유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가르쳐주기 이해서다. 베드로, 세리 마태, 수가성의 여인, 어거스틴, 무디를 쓰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아카시아 나무는 예수님의 성품을 말해 주기도 한다. 내유외강의 성품을 말한다. 조각목이라고도 하는 이 나무는 절대로 좀이 먹지 않는다고 한다. 부패되지 않는 예수님의 성품을 상징한다. 언약궤는 금으로 싸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말한다. 신적 영광을 상징한다. 또한 우리는 가시나무처럼 볼품 없으나 순금보다 귀한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혀지면 귀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궤는 구약의 핵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의 모형이요 예수님의 교회의 표상이다. 뿐만 아니라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법궤를 소중히 여길 때 복을 받고 함부로 다룰 때는 고난을 당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소중히 다루므로 복을 받았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1)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히 9:4, 출 16:32-36, 요 6:51참고) 언약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있었다. 왕상 8:9에 보면 궤 안에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것이 분실된 이후에 법궤를 성전에 보관해 두었기 때문이다. 만나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다. 만나는 광야 40년 동안의 음식이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이틀을 두면 안되었다. 만나는 요단강을 건넌 후에 그쳤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나요 산떡이요 영생이다(요 6:51). 생명의 떡이다(요 6:32,35). 또한 만나는 주님의 말씀을 말한다. 항상 만나가 필요했다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는 양념은 많이 쳤으나 건데기는 없는 국과 같다. 말씀은 없고 행사만 있는 교회는 건데기 없는 국과 같다. 출애굽 이후 유월절 희생 이후 홍해를 건너서 애굽의 추적이 없어진 때부터 만나를 먹기 시작했듯이 이 세상의 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이전의 모든 삶의 방식을 버린 후에 주어지는 우리 영혼의 양식인 성령님의 인도와 힘을 먹고 살아야 한다. 만나는 외형적으로는 성찬, 내용적으로는 성경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감화와 역사로 구체화 된다. 만나는 매일 먹어야 하듯이 성령님은 한 번 체험으로 그치지 말고 매일 매일 충만해야 한다. 사르밧 과부에게 양식을 줄 때도 한 번에 다 주지 않고 매일의 것으로 주었던 것도 매일 매일 주님을 의지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왕상 17:8-16).
2)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 17장 참고) 법궤 안에 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민수기 16장의 사건으로부터 연관시켜야 한다. 고라 자손의 반역이 있은 후에 모세가 각 지도자들의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나무 꽃이 피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법궤 안에 넣게 하셨다. 모세의 지팡이가 아닌 아론의 지팡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수 많은 능력을 행했던 모세의 지팡이가 아닌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집어 넣게 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자만이 중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보의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론의 지팡이가 싹이 났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한다. 생명의 능력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을 말한다. 에스겔이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에 모든 자들이 참여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3) 언약의 비석들(신 10:1-5) 언약궤 속에 있던 것들이 없어졌으나 언약의 돌비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두 돌판은 십계명을 기록해 놓은 것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쳐 준 것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둘째는 이웃 사랑이다(마 22:34-40). 그리스도께서는 이 율법을 높이시고 영예롭게 하셨다(사 42:2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로 들어가셨다(갈 4:4). 이로 말미암아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셨다(마 5:17).
4) 영광의 그룹(출 25:17-22) 법궤는 두 개의 그룹으로 감싸져 있었다. 그룹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듯 하며 한 쌍의 날개로 만들어졌다.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룹과 대조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 은혜와 자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수호하는 일을 담당하는 천사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현인 쉐키나의 그룹들이다. 출 25:17-22에서는 7번 그룹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룹은 하나님의 법정적 권위의 행사와 연관되어 있다. 계 4:6-8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룹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쉐키나가 항상 있었다. 그룹은 날개로는 언약궤를 지키고 구름으로 임재하는 하나님의 보좌가 된다. 5) 속죄소 법궤가 있는 곳을 속죄소라고 했다. 속죄소는 죄를 가리워주고 화목하게 하는 곳이다. 속죄소는 사람의 죄를 가리워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곳은 죄를 속하여 주는 곳이기에 속죄소라고 하기도 하지만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 하여 시은소라고 하기도 한다. 총체적으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임재는 승리의 상징이다. 홍해를 건널 때와 요단강을 건널 때에 법궤는 항상 앞장섰다. 그러나 법궤가 곧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궤는 우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법궤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다. 법궤를 모신 자는 복을 받았다. 오벧에돔은 그 중의 한 사람이다(삼하 6:11).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정은 복받은 가정임을 보여준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3. 불완전한 첫 언약 예법(6-10절) 첫언약은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완전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첫언약도 세 가지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제사 직분으로,
둘째로 제사 직분이 수행되는 장막과 모든 후속 장치들로,
셋째로 제사와 예배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 집착한 나머지 복음을 거절하였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온전히 못한 것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므로 온전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첫언약의 한계성이었다. 모세가 받은 계시는 신적이고 영광스러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진리로 희미한 모양을 취하고 있어서 실체를 정확히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수건을 썼던 것이다. 장차 없어질 것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후 3:13). 하늘에 속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썼던 것이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고후 3:14).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 체험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체험이 고정화 되면 표적만 구하는 유대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첫언약 예법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모두가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다(6,7절). 성소는 제사장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단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대제사장은 그 곳에서 섬기는 예를 행했다. 섬기는 일을 온전히 이루었다(고후 7:1참고). 대제사장은 매일 행하는 일로써 등대를 검사하고, 금향단을 검사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 진설병을 교환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예표를 보여준 것이다. 대제사장이 이 일을 하는 동안 백성들은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눅 1:10참고). 하지만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었다(계 1:6). 이제 만인제사장 된 우리는 직접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살전 5:16, 17). 뿐만 아니라 가정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더 핑크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가정 제단을 통해서 가정에서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윌 가정을 축복하리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2. 제사장도 자신을 위해 속죄의 피를 드려야 했다(7절). 대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속죄의 피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대제사장이 드리는 제사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대제사장은 7월 10일이면 시종을 거느리지 않은 채 혼자 지성소를 들어갔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다.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공공연하고 의도적으로 배역한 것을 위한 것이 아닌 부지중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를 먼저 드려야만 했다. 대제사장은 이 제사를 위해서 영광과 아름다움의 예복을 입었다(출 28:22).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었다(레 16:4). 향로에 향을 들고(레 16:12,13) 짐승의 피를 들고(레 16:11) 들어갔다. 그 다음에 나와서 염소에게 안수해서 광야로 내보냈다(레 16:20-22). 이 염소를 아사셀 염소라고 한다. 아사셀 염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아주 험한 곳으로 보내졌다. 죄를 멀리보내는 의식이다. 하지만 그 염소가 다시 돌아와서 쫓아버리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이 예법이 온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3.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확실히 나타나지 않았다(8절, 레 16:17).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하나님께 직접 나가는 길이 아직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길이 없는 것 또한 아니다. 그 길이 열려 있기는 하였지만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아벨의 제사 때부터 그 길이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육체를 입고 나타날 때까지 유보되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그 길을 장막을 통해서 보여주시기는 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직접 나갈 수 있도록 열어 놓지를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 길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기에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제 그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길이 환하게 열려졌다(요 14:6). 이제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제사를 믿고 나가면 된다. 휘장이 갈라져서 그 길이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속죄를 믿고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열납을 받는다(롬 5:1-3, 행 2:14-18).
4. 비유로만 나타났다(9절). 비유라는 말은 “파라볼레”라고 하는데 이 말은 물건의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비교하기 위해 놓은 물건이라는 말이다. 비유는 실체를 볼 수 있도록 하게 해준다. 하나님은 비유로 1500년 동안 계속하셨다. 그것을 부지런히 읽고 주목하면 충분히 하나님을 따를 수가 있었다. 첫언약도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비유로 주어진 것은 완전한 모습은 아니다. 다만 완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일 뿐이다. 상징적인 것은 항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일시적이고 물리적이고 예비적인 것일 뿐이다.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5.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9절). 첫 언약의 예법은 양심을 온전하게 씻을 수 없었다.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제사는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 6. 육체의 예법으로만 되었다(10절). 첫 언약의 예법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씻는 것등 모두가 다 육체적인 것들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레 11:1-23에서는 먹는 것에 대한 예식이, 레 10:8-9에는 마시는 것에 대한 예식이 레 11:24-40과 레 16:28에는 씻는 것에 대한 예식이 기록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육체적인 것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지 영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되지는 못했다. 7. 개혁할 때까지만 있는 준비 단계다(10절).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이 개혁할 때까지만 있는 준비단계라고 했다. 준비단계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그 때까지 맡겨둘 뿐이다. 그것들은 무거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옛 언약은 그 밑에서 신음하면서 종노릇하게 할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 하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더욱 승화된 각종 교훈으로 대체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하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 왜 필요했단 말인가
첫째는 잠정적인 통치의 차원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고,
둘째는 유대교적 체계가 적당치 못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므로 유대인이 기독교화 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게 함이고,
셋째는 기독교인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지 못하게 함이고
넷째로 중생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를 내다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첫언약의 예법은 나름대로 필요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결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에 우리의 신앙을 걸어서는 안된다. 불완전은 완전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불완전한 예법을 보면서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온전하게 좇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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