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온전한 믿음의 삶을 위하여(3) (히6:1-2)

본문

우리들은 지난 시간에 기독교의 터와 같은 진리의 한 부분을 들었습니다. 회개와 신앙이 그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회개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없인 결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당에 나올 수는 있지만 참 성도는 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죄성과 악함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사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마음이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회개와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 회개와 신앙은 그리스도인 됨의 가장 중요한 내적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기독교의 터와 같은 진리의 또다른 내용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세례와 안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의 터와 같은 기초적인 진리인 세례들과 안수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교훈에 관한 터를 더 이상 닦지 말고 완전한 신앙으로 나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세례들”이라고 복수를 쓴 것은 당시의 세례 예식들이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 아니라 유대교에도 세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례 행위들을 포괄적으로 말씀하기 위해 세례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수를 썼다고 이상해 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있는 이 세례와 안수는 기독교 진리의 외면적 예식에 관계되는 교리들입니다. 기독교의 외적 의식(外的 義式)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의 사람들은 외적 형식을 무시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외형이 뭐 그리 중요하냐” “그저 형식만 따지지 말고 내용을 충실히 해라”라고 말합니다. 사실 형식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례 허식으로 진리의 내용은 무시한 채 외형만 중히 여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한 반발이 형식 반대론으로 흐르게 됩니다. 모든 형식을 거부하고 내용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교회에 새벽 기도회가 있습니다. 금요기도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꼭 교회 기도회에 나가야 하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라고. 그러나 이런 분들 중 얼마나 말씀을 보고 기도하십니까 매일 한시간 정도 말씀보고 기도하십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예배시간에 꼭 정장을 해야 하냐 마음이 중요하지”합니다. 또는 “헌금하는데 꼭 이름 써야 하나 하나님이 아시면 됐지”합니다. 사실 이런 말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내용은 형식에 의해 더 아름다워 집니다. 아름다운 보석이 아름다운 상자에 담겨질 때 그 귀함은 더욱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석의 귀함과 가치는 그 보석 자체에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겉 포장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로 신문지에 싼 보석이나 보석함에 넣은 보석이나 그 가치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겉 포장의 아름다움에 의해 더 빛나는 것입니다. 여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선물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신문지에 둘둘 말아 줬다면 어떻겠습니까” 뭐, 보석에 주린 사람이야 “신문지면 어떻고 시멘트 푸대면 어떠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분이 크게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보석함에 정성껏 넣은 목걸이를 받을 때하고, 누런 시멘트 부대 한 쪽을 북 찢어서, 둘둘 말은 것을 받을 때하고 기분이 똑 같을까요 “이 양반이 이거 훔쳐 온거 아냐… 이거 진짜 주고 싶어서 주는 건가.” 도리어 화내고 내 팽겨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도리어 부부 싸움 날겁니다. 이렇게 내용이 형식을 무시할 때 도리어 불쾌함을 더 합니다.
그러므로 내용은 적당한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식을 무시함은 무례함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형식에 의해 더욱 빛나고 아름다워집니다.
왜냐하면 “진리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없는 진리는 무례함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의를 갖추고 예배해야 합니다. 자신의 복장과 자세를 하나님께 합당하게 갖추어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예식과 의식에 적극적인 믿음의 참예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며 행할 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외적인 형식도 내용과 같이 중요한 부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고자 하는 “세례와 안수”는 바로 기독교의 이런 외적인 형식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회개와 신앙은 사람의 내적 변화를 의미합니다.회개와 신앙은 여러분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요 실천되는 진리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례들과 안수는 눈에 보이도록 행해지는 교회의 외면적 의식입니다. 이 의식을 통해 하나님은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받는 것과 안수받는 것을 눈으로 볼수 있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목하고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신앙은 마음 속에서 일어 납니다. 그래서 만질 수 없고 보여줄 수 없습니다. 단지 마음에 담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세례와 안수는 회개와 신앙과는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의 진리요 성스러운 예식입니다.
그렇다면 외형적인 이 세례와 안수는 무슨 내면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외적인 형식의 의식들은 내면적이며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 은혜와 은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고, 보다 더 완숙한 성도의 삶을 위해서는 이런 진리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마음으로 참예할 때 더욱 큰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영혼에 그 의미가 전달되어 감격과 기쁨이 더욱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들의 의미를 알때 다른 이에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전도도 하고 다른 이를 가르칠 수 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터를 기초로 해서 더 깊은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기독교의 기초적이며 터가 되는 외적 예식인 세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세례는 죄 씻음을 상징합니다. 세례는 기독교의 성례(성례)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식을 통해 영적인 유익을 주십니다. 오늘 세례는 바로 이 성례 중의 하나입니다. 세례란 물로 씻는 예식입니다. 물로 우리 몸의 때를 씻듯이 물로 우리의 죄를 씻는 것입니다. 세례는 목사가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성도들에게 물을 뿌려 시행합니다. 목사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신자의 머리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 사함을 확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표를 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절하시게도 우리에게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이것을 확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 구원의 확신을 주십니다. 은총을 주셔서 죄사함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표인 세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일생에 한번만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다는 건 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침례가 좋다면 침례를 받고 침례를 받았는데도 세례가 좋다면 또 세례 받고 여러번 받아도 됀다니까 그럼 한번 더 받고. 아 이렇게 해서 대 여섯번 받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세례는 한번으로 족합니다. 어릴때 받았던지, 믿음이 없이 확신도 없이 받았던지 한 번의 세례로 유효합니다. 그러니다중(多重) 세례는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미 세례받은 성도들은 자기의 죄가 완전히 사해지고 씻김받았음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표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또다른 의미입니다. 이것은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서 잘 표현됩니다. 침례란 온 몸을 물에 다 잠궛다가 다시 나오는 예식입니다. 침례를 받는 사람은 온 몸을 물속에 잠급니다. 이것은 옛 사람이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새 사람으로 다시 산 것을 뜻합니다. 침례교회에서는 이 침례만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침례를 받았든 세례를 받았든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침례가 옳으니 세례가 옳으니 싸울 것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침례 방식만이 옳다고 하거나 물로 적시는(뿌리는) 세례방식만이 옳다고 한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세례가 더 성경적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례의 형식 보다 그 의미가 더 중합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았다는 것을 뜻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성도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 야 합니다. 또한 세례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제 교회에 정식 회원이 되는 최초의 절차 입니다. 세례는 이 지상의 만국교회에 가입하는 절차입니다. 우리들이 예배할 때에 매주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의 고백 속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 이 고백에서 “거룩한 공회”란 “하나의 공인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전 세계에 수 많은 예배당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모습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수많은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다양한 예배의식, 다양한 특징들이 있지만 “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아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오직 하나의 교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공인된 교회”의 존재를 믿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례는 바로 이 “거룩한 공회”에 “정식 회원”이 되는 의식입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믿음을 전(全) 성도 앞에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후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공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공회의 정식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비로소 교회에서 직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며 모든 성도의 권리와 의무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일원이 되는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지 못한 사람은 직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가대나 교사등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공적인 행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제외됩니다. 성찬예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고백한 성도는 세례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되고 교회의 공적행사와 성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받는 것을 미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받고 나서 지은 죄는 더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받기를 꺼려합니다. 아마 죄를 실컷 지으려나 봅니다. 또 어떤이는 믿음이 부족해서 못 받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시려고 그럽니까 세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면 됩니다.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후에 더 큰 믿음의 삶을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아는 것이 없어서 “알고 세례받는다”고 합니다. 세례받고나서 배우는 것입니다. 세례받고 나서 진리를 더 배우는 것입니다. 언제 다 알려합니까 어제 다 알고 세례받을 수 있습니까 사실 세례를 받기 전에 성도가 곡 알아야 할 기본적인 교리들을 다 알게 됩니다. 문답공부를 통해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받기 전에 문답을 하여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믿는다고 고백한 성도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계속하여 세례를 기피하는 것은 자기의 고백이 거짓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교회의 참된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믿음이 세례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아야 교회의 정식 가입자며 교회 행사에 참여할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아직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은 세례를 필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음으로 “안수(按手)”는 무엇입니까 제가 초신자 때 교회에 가보니까 “안수집사 안수집사”라는 말들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거 안수만 전문적으로 해주는 집사가 있나 보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안수 받은 집사가 “안수 집사”더라구요. “안수 해주는 집사가 아니라 안수 받아 집사직을 받은 사람”을 “안수 집사”라 하더라 이말 입니다. 안수(按手)는 “손을 얹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을 통해 성령님의 임하심을 구합니다. 먼저 이 안수 의식은 특별한 직무에 구별하여 세울 때 합니다. 보통 안수는 집사와 장로 목사를 세울때 합니다. 그리고 안수 할 때 기도합니다. 기도함으로서 성령님의 임하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해달라는 의식입니다. 이렇게 안수는 어떤 직무를 구별하여 맡길 때 하는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이 안수식을 행한 후에 직무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은총을 간구 할 때 목사가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거나 특별한 일을 앞두고, 안수를 원하는 성도나 목사가 필요로 할 때 안수를 합니다. 이렇게 안수 기도는 특별한 직무를 맡기거나 특별한 은혜를 원할 때 목사가 “손을 얹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안수 기도하다가 사람을 죽인 사건들을 듣기도 합니다. 그들은 안수라는 말보다는 “안찰(按札)”이란 말을 사용하길 잘 합니다. 안수는 “단순히 손을 얹는 것”이고 안찰은 “손으로 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안수나 안찰이나 동일한 일을 뜻합니다. “안수”라는 말로 번역된 말이 “안찰”로도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안수(싸마크)”라는 말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 됩니다. 그러나 “안찰”로 번역된 말은 단 3-4군데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안수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싸마크)를 “안찰”로 번역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안찰로 번역된 말도 “손을 얹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수와 안찰을 구별하는 일은 헛된 일입니다. 단지 손을 얹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일부 기도원에서 이런 무지한 안찰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을 패 죽이기 까지 하다니 참으로 한심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리석은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진리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매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도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초보적 진리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례와 안수가 그것입니다. 세례는 죄사함 받은 표입니다. 이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았다는 표입니다. 그리고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았다는 상징적 행위 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하나님의 교회에 정식 가입하는 최초의 의식입니다. 이러한 세례의 영적 의미를 분명히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안수는 교회의 직무를 위해 손을 얹어 기도하는 의식입니다. 안수는 교회의 직무를 담당토록 손을 얹어 구별하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안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간구하며 직무를 감당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의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기독교의 터가 되는 진리들을 보다 더 확실히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더 큰 성숙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7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