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침을 받게 하라 (히12:5-13)
본문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가난한 장사꾼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은 방직공장을 다니며 고생하는 가운데서도 틈틈히 공부하여 미개한 나라의 선교사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후에 의사가 되었고 그가 바로 아프리카의 개척선교사 리빙스턴입니다. 그는 이런 말 을 했습니다. "내가 만일 죽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역시 가난한 집에 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고 싶다."라고. 리빙스턴은 자신의 가난한 삶이 있었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고생이 있었기에 아프리카 의 밀림에 들어가 고생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경제 난국을 맞아 최근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포기할만큼 나 름대로의 절박한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절박하고 힘든 환경을 극복하 지 못해서 삶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일제 시대 고통받는 민족의 한과 눈물이 짙게 배어 있는 유행가중에 <타향살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으 로 고복수가 불렀습니다. 이 노래에 얽힌 일화입니다. 고복수가 만주 공 연 때였습니다. 만주의 용정은 일제 치하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나라 잃고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이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 보니"하는 노래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 을 토해냈던 것입니다. 청중도 울고 가수도 울었습니다. 극장은 온통 울 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삼십대 여인이 무대 뒤로 고복수를 찾아왔습니다. 고향이 부산이라는 그 여인은 고향 떠난 지 10년이 되는데 남편은 용정에서 세상을 떠나고 생활은 어렵고 그렇다고 고향에 돌아가 자니 여비도 없고 해서 울산 출신인 고복수에게 자기 고향에 소식 좀 전 해달라고 부탁하려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여인은 고향을 그리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슴 저린 이야기는 당시 만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중국, 일본 등 우리 민족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나라잃은 설움과 생활고를 트 로트의 조금은 청승맞고 애잔한, 체념적인 멜로디와 박자에 실어서 당하는 슬픔과 고난을 그대로 노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하는 고난을 고난 그대로, 슬픔을 슬픔 그대로 받아들여 체념하거나 좌 절하며 한 많은 노래나 자살로 풀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 다시말해 당하는 슬픔과 고난의 의미를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 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로 해석하여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아니하 고",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까지참아야" 할 것입니다. 길이 참아 기다린 가운데 결국 8.15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고난이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가 나중에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 도록"하기 위해 훈련으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훈련받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그 자식들을 끊임없이 훈련시킬 것입니다. 자식들이 좋아하는대로 버려두거나 그들이 편한대로 살도록 버려둔다면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아 버지로부터 고된 훈련을 받지 않는 자식이라면 사생아라고 해도 틀림없 을 것입니다. 아글라티다스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을 웃기는 사람보다는 울리는 사람 쪽이 나에게는 벗이다. 당신에게 올바른 판단이 있다고 하면 내가 하는 말이 옳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는 그 자식을 울림으로써 자제심을 기르고, 교사도 그 같은 방법을 써서 학생들의 마음에 큰 교훈 을 심는다. 법률도 역시 시민을 울림으로써 올바른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을 웃기는 자가 과연 우리의 몸을 단련시킬 것인지,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가다듬고 개인의 일이나 국가 사업에 참여 함에 합당한 자로 만들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당시에는 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권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자 식이 결혼해서 손자까지 생겨도 그 부친의 자식에 대한 주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아버지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자식이라도 살리든지 죽이든지 할 수 있었으며 자식을 묶고 채찍으로 때리고 노예로 팔고 또는 죽이는 일까지도 허용되었었습니다. 훗날에는 부친이 아들을 처형한다는 것은 여론으로 금지하기 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시대까지 그러한 일이 행해졌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아버지의 훈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대한 훈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서 행하는 이러한 훈련으로써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으며 그것을 거스리는 것은 달걀로 바 위치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것을 그냥 훈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같은 자세는 하나님 아버지의 훈련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없어서 그 아버지의 힘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패배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고난당하게 되면 자기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 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때에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 것을 생각해보니 자기 자신이 측은하고 불쌍해 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한 훈련을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 당시에 사람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재난이 일어나면 그것을 신들 의 징벌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루카누스는 "만일 신들이 로마 사람 들에게 징벌을 주실 만큼 뜻을 가지고 사랑하신다면 로마는 행복하며 그 시민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그 고난당함의 부당성을 토로하거나 그것을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분을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만들어 사용하려 하는 것인가"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훈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롬은 "하나님 의 최대의 노여움은 죄를 범하는 사람에 대해서 노여워 하시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역설적인 진리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대의 형벌은 그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가르친다든가 올바로 인도한다든가 눈을 뜨게 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자 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아버지는 불필요하게 자식들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으며 모든 일이 자기를 보다 현명하고 보다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을 훈련으로써 받아들이며 그것이 한 결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울어나온 것으로 자신에 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떠한 고난 중에 있다할지라도 자기 연민이나 서글픔, 그리고 분노나 원망 불평이 사라질 것입니다. 아이엠에프(경제위기)는 이 나라 민족을 정직하고 공평하며 공의롭게 하기 위한, 앞으 로 다시 부강해진다해도 끝까지 겸손하여 재물과 영광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조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단순한 하나님의 징벌이나 심판이 아니라 그릇되고 어그러진 역사, 부정 부패의 역사, 불의와 타락의 역사 를 바로 잡아 고침받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사랑의 징계입니다. 기독교 선교 100여년의 역사는 고난 받아온 한국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 간 섭을 뜻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그 사실을 몹시 수치 스럽고 고통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 시 면류관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을 깨닫고 한국사람이 할 일은 아직도 남았기에 원기를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원기를 내야할 이유를 그 고난에는 하늘의 뜻이 있고 사람들이 배울 교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고난은 죄를 씻는다.고난은 인생을 깊게 한다.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한국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인 것은 역사를 낳는 것이 아가페(사랑)이 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보면, 한국 역사가 골고다 언 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께로 우리가 이끌려가는 한편의 시로 표 시했습니다. 한국역사가 비록 고난의 역사일지라도 그 고난을 위에서 주 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선물로 받아들일 때, 한국의 민족의식은 세계사상 에 한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의 젊은 시절, 그는 엄청난 재벌이 되기 까지 무척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일즈맨으로 이집 저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러 돌아다닐 때의 일입니다. 어떤 노인 댁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집을 들어서자마자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커다란 그 림이 벽 한 가운데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쓸쓸한 해변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초라한 나룻배 한 척과 낡아빠진 노가 썰물에 밀려 흰 백사장에 제멋대로 널려 있었고 군청색 바다는 비교적 잔잔한 파도만을 일으킬 뿐인,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은 오 히려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 하단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카네기는 그 그림과 함께 짧은 글귀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그 집을 나 온 이후로도 계속 그 그림과 글귀가 그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오 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카네기는 용기를 내어 다시 그 노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 노인에게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그 그림을 자신에게 꼭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고 그의 간절한 부탁 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결국 그는 그 할아버지 사후에 그 그림을 받아 가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무실 한 가운데는 그 그림이 카네 기의 일생 동안 항상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 그림은 카네기의 일생을 좌우하는 굳건한 신조였습니다. 이 나라가 겪고 있는 썰물같은 고난의 역사를 반드시 밀물같은 축복 의 역사로 바뀌어지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 이 나라 민족을 사생자처럼 내버려 두시거나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깊이 간섭하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공평의 역사, 공의의 역사, 정의의 역사, 정직의 역사, 성실의 역사를 만들고자,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역사가 하나님의 징벌의 심판을 받아 버림 받지 않을 만큼 공정하고, 공의롭고, 정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나라가 "저는 다리가 되지 않도록", 탈선하지 않도록 이 나라 역사를 만드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역사의 심판주를 가르치며, 또한 시편 2편 시인과 같 이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쳐 즐거워할지어다"는 외침(선교)을 부단 히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정치일선 에 서 있지 않다해도, 일선 정치에 나선 사람이든 아니든, 이 나라 역사 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역사, 그의 심판 대신 사랑의 징계를 통한 평강의 역사가 만들어지도록, 정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 고, 동시에 이 나라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경고해야 할 책임 이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라고 해도 외칠 것은 외쳐야 합니다. 정 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긴다 함은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정치가 하나님의 역사원리에서 이탈하여 부정과 불의의 역사를 만들고 허위와 불공정의 역사를 만들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학대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역사 를 만들고 양심있는 사람과 성실히 살려는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픔을 줄 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원리대로, 다시말해 공평과 공의, 정직과 성 실함으로 정치를 하도록 깨우치고 외쳐야 할 의무가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것입니다. 옛날 구약 예언자들이 그 나라 정치문제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외친 것은 그들이 정치가이거나 또는 어떤 정치적 이권을 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나라의 운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그의 계시를 들고 그 나라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정의를 외쳤고, 호세아는 사랑을 외쳤고, 이사야는 믿음을 외쳤고, 예레미야는 그 백성과 지도자들의 죄를 외쳤고, 미가는 도회지에 서 나라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부정, 부패와 타락, 그리고 공의를 말하 지만 그들 자신들은 사치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죄를 고발했 던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나라 민족의 고난이 한국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간섭인 것을 안다면, 우리의 선교와 설교는 이 나라 역 사가 잘못되지 않는 역사가 되도록 외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구약 예언 자들 중에서 그 나라의 운명이 가장 위태롭다고 생각된 때, 요즘말로 하 자면 유대 국가의 안보가 가장 위험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이 위험한 고 비를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졌다"는 표현을 했는 데(렘1:13), 오늘 우리의 역사적 현실도 소위 "북풍"으로 나라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때에 예레미야 가 한 말이 무엇이며,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 다"(렘4:19).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것이 나라 사랑하는 애국임을 그는 외 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비통함을 느꼈는가 예레미야 4장 22절에서 그는 또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내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둔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함 에는 무지하구나." 예레미야가 말하는 그 백성의 악을 살펴보면, 그 나라 지도자들과 백성이 다같이 하나님의 역사원리를 무시하고 범죄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면서 고 넓은 거리에서 공의 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냐"고 (렘 5:1)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 야 입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레미야 5장 9 절과 29절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대하여 보수하지 않겠느 냐" 이런 일들이 무엇인가, 그의 말 전후에서 설명하는대로, 그 지도자와 백성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옳은 일을 봄 에 눈이 멀었고 바른 소리를 들음에 귀가 멀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 니하고, 덫을 놓아 새를 잡는 사냥꾼처럼 인권을 유린하고, 경제적으로 거부가 되기는 하나 자신들만 살이 찌고, 자기 이익만을 탐하고, 가난한 사람의 송사는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고, 분명히 위험한 국난이 닥쳐왔는 데도, 큰 자나 작은 자가 다 같이 "괜찮다", "무사하다"고 하며 건성으로 만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의 역사원리를 누구보다도 바로 아는 사람으로 이 나라의 병을 솔직히 말해 주고, 이 나라 지도자들의 잘못된 지도이념을 깨우쳐 주고 백성들의 무지함을 일깨어 이 역사가 비극을 경험하지 않도록 외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명이요,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내 교회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개교회주의나, 내 교단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교파주의를 지양하고, 한국사가 하나님의 역사 지배 아 래 올바른 역사의 원리를 실행할 수 있도록 나라와 민족에 대한 관심을 내 개인 영혼구원에 못지 않게 외쳐야 하며, 내 교회 내 교파의 성장과 발전관심에 못지 않게 이 나라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백성도 하나님께서 더욱 더 깊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선교해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호세아의 말씀 그대로, 우리 한국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가 되도록 우리 기독교인들이 책임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고난받는 한국 사를 고침받게 하여 평강의 열매를 맺게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이 땅의 절름발이 역사, 어그러진 역사를 반드시 고침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 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스라엘은 전쟁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전쟁이 있으므로 나라가 강해지고 산업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 라엘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있어야 민족 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서 살다온 사람은 공산당이 고,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민주주의이며 얼굴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기만 하면 그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 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긴장 관계에 있을 때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나라 지도 자 백성이 마귀같은 짓을 많이 했어도 '천사표'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은 하나님의 사생자가 아니요 참 아들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고"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더욱 더 이 나라가 공평과 정의, 공의와 정직, 그리고 성실의 역사가 되도록 기도하고 외치시므로(선교) 경제 전쟁이 축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당시 나라잃은 설움과 생활고를 트 로트의 조금은 청승맞고 애잔한, 체념적인 멜로디와 박자에 실어서 당하는 슬픔과 고난을 그대로 노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하는 고난을 고난 그대로, 슬픔을 슬픔 그대로 받아들여 체념하거나 좌 절하며 한 많은 노래나 자살로 풀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 다시말해 당하는 슬픔과 고난의 의미를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 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로 해석하여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아니하 고",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까지참아야" 할 것입니다. 길이 참아 기다린 가운데 결국 8.15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고난이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가 나중에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 도록"하기 위해 훈련으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훈련받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그 자식들을 끊임없이 훈련시킬 것입니다. 자식들이 좋아하는대로 버려두거나 그들이 편한대로 살도록 버려둔다면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아 버지로부터 고된 훈련을 받지 않는 자식이라면 사생아라고 해도 틀림없 을 것입니다. 아글라티다스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을 웃기는 사람보다는 울리는 사람 쪽이 나에게는 벗이다. 당신에게 올바른 판단이 있다고 하면 내가 하는 말이 옳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는 그 자식을 울림으로써 자제심을 기르고, 교사도 그 같은 방법을 써서 학생들의 마음에 큰 교훈 을 심는다. 법률도 역시 시민을 울림으로써 올바른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을 웃기는 자가 과연 우리의 몸을 단련시킬 것인지,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가다듬고 개인의 일이나 국가 사업에 참여 함에 합당한 자로 만들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당시에는 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권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자 식이 결혼해서 손자까지 생겨도 그 부친의 자식에 대한 주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아버지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자식이라도 살리든지 죽이든지 할 수 있었으며 자식을 묶고 채찍으로 때리고 노예로 팔고 또는 죽이는 일까지도 허용되었었습니다. 훗날에는 부친이 아들을 처형한다는 것은 여론으로 금지하기 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시대까지 그러한 일이 행해졌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아버지의 훈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대한 훈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서 행하는 이러한 훈련으로써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으며 그것을 거스리는 것은 달걀로 바 위치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것을 그냥 훈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같은 자세는 하나님 아버지의 훈련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없어서 그 아버지의 힘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패배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고난당하게 되면 자기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 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때에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 것을 생각해보니 자기 자신이 측은하고 불쌍해 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한 훈련을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 당시에 사람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재난이 일어나면 그것을 신들 의 징벌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루카누스는 "만일 신들이 로마 사람 들에게 징벌을 주실 만큼 뜻을 가지고 사랑하신다면 로마는 행복하며 그 시민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그 고난당함의 부당성을 토로하거나 그것을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분을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만들어 사용하려 하는 것인가"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훈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롬은 "하나님 의 최대의 노여움은 죄를 범하는 사람에 대해서 노여워 하시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역설적인 진리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대의 형벌은 그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가르친다든가 올바로 인도한다든가 눈을 뜨게 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자 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아버지는 불필요하게 자식들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으며 모든 일이 자기를 보다 현명하고 보다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을 훈련으로써 받아들이며 그것이 한 결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울어나온 것으로 자신에 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떠한 고난 중에 있다할지라도 자기 연민이나 서글픔, 그리고 분노나 원망 불평이 사라질 것입니다. 아이엠에프(경제위기)는 이 나라 민족을 정직하고 공평하며 공의롭게 하기 위한, 앞으 로 다시 부강해진다해도 끝까지 겸손하여 재물과 영광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조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단순한 하나님의 징벌이나 심판이 아니라 그릇되고 어그러진 역사, 부정 부패의 역사, 불의와 타락의 역사 를 바로 잡아 고침받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사랑의 징계입니다. 기독교 선교 100여년의 역사는 고난 받아온 한국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 간 섭을 뜻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그 사실을 몹시 수치 스럽고 고통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 시 면류관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을 깨닫고 한국사람이 할 일은 아직도 남았기에 원기를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원기를 내야할 이유를 그 고난에는 하늘의 뜻이 있고 사람들이 배울 교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고난은 죄를 씻는다.고난은 인생을 깊게 한다.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한국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인 것은 역사를 낳는 것이 아가페(사랑)이 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보면, 한국 역사가 골고다 언 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께로 우리가 이끌려가는 한편의 시로 표 시했습니다. 한국역사가 비록 고난의 역사일지라도 그 고난을 위에서 주 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선물로 받아들일 때, 한국의 민족의식은 세계사상 에 한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의 젊은 시절, 그는 엄청난 재벌이 되기 까지 무척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일즈맨으로 이집 저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러 돌아다닐 때의 일입니다. 어떤 노인 댁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집을 들어서자마자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커다란 그 림이 벽 한 가운데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쓸쓸한 해변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초라한 나룻배 한 척과 낡아빠진 노가 썰물에 밀려 흰 백사장에 제멋대로 널려 있었고 군청색 바다는 비교적 잔잔한 파도만을 일으킬 뿐인,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은 오 히려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 하단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카네기는 그 그림과 함께 짧은 글귀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그 집을 나 온 이후로도 계속 그 그림과 글귀가 그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오 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카네기는 용기를 내어 다시 그 노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 노인에게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그 그림을 자신에게 꼭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고 그의 간절한 부탁 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결국 그는 그 할아버지 사후에 그 그림을 받아 가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무실 한 가운데는 그 그림이 카네 기의 일생 동안 항상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 그림은 카네기의 일생을 좌우하는 굳건한 신조였습니다. 이 나라가 겪고 있는 썰물같은 고난의 역사를 반드시 밀물같은 축복 의 역사로 바뀌어지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 이 나라 민족을 사생자처럼 내버려 두시거나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깊이 간섭하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공평의 역사, 공의의 역사, 정의의 역사, 정직의 역사, 성실의 역사를 만들고자,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역사가 하나님의 징벌의 심판을 받아 버림 받지 않을 만큼 공정하고, 공의롭고, 정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나라가 "저는 다리가 되지 않도록", 탈선하지 않도록 이 나라 역사를 만드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역사의 심판주를 가르치며, 또한 시편 2편 시인과 같 이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쳐 즐거워할지어다"는 외침(선교)을 부단 히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정치일선 에 서 있지 않다해도, 일선 정치에 나선 사람이든 아니든, 이 나라 역사 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역사, 그의 심판 대신 사랑의 징계를 통한 평강의 역사가 만들어지도록, 정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 고, 동시에 이 나라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경고해야 할 책임 이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라고 해도 외칠 것은 외쳐야 합니다. 정 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긴다 함은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정치가 하나님의 역사원리에서 이탈하여 부정과 불의의 역사를 만들고 허위와 불공정의 역사를 만들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학대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역사 를 만들고 양심있는 사람과 성실히 살려는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픔을 줄 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원리대로, 다시말해 공평과 공의, 정직과 성 실함으로 정치를 하도록 깨우치고 외쳐야 할 의무가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것입니다. 옛날 구약 예언자들이 그 나라 정치문제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외친 것은 그들이 정치가이거나 또는 어떤 정치적 이권을 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나라의 운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그의 계시를 들고 그 나라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정의를 외쳤고, 호세아는 사랑을 외쳤고, 이사야는 믿음을 외쳤고, 예레미야는 그 백성과 지도자들의 죄를 외쳤고, 미가는 도회지에 서 나라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부정, 부패와 타락, 그리고 공의를 말하 지만 그들 자신들은 사치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죄를 고발했 던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나라 민족의 고난이 한국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간섭인 것을 안다면, 우리의 선교와 설교는 이 나라 역 사가 잘못되지 않는 역사가 되도록 외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구약 예언 자들 중에서 그 나라의 운명이 가장 위태롭다고 생각된 때, 요즘말로 하 자면 유대 국가의 안보가 가장 위험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이 위험한 고 비를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졌다"는 표현을 했는 데(렘1:13), 오늘 우리의 역사적 현실도 소위 "북풍"으로 나라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때에 예레미야 가 한 말이 무엇이며,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 다"(렘4:19).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것이 나라 사랑하는 애국임을 그는 외 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비통함을 느꼈는가 예레미야 4장 22절에서 그는 또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내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둔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함 에는 무지하구나." 예레미야가 말하는 그 백성의 악을 살펴보면, 그 나라 지도자들과 백성이 다같이 하나님의 역사원리를 무시하고 범죄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면서 고 넓은 거리에서 공의 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냐"고 (렘 5:1)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 야 입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레미야 5장 9 절과 29절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대하여 보수하지 않겠느 냐" 이런 일들이 무엇인가, 그의 말 전후에서 설명하는대로, 그 지도자와 백성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옳은 일을 봄 에 눈이 멀었고 바른 소리를 들음에 귀가 멀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 니하고, 덫을 놓아 새를 잡는 사냥꾼처럼 인권을 유린하고, 경제적으로 거부가 되기는 하나 자신들만 살이 찌고, 자기 이익만을 탐하고, 가난한 사람의 송사는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고, 분명히 위험한 국난이 닥쳐왔는 데도, 큰 자나 작은 자가 다 같이 "괜찮다", "무사하다"고 하며 건성으로 만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의 역사원리를 누구보다도 바로 아는 사람으로 이 나라의 병을 솔직히 말해 주고, 이 나라 지도자들의 잘못된 지도이념을 깨우쳐 주고 백성들의 무지함을 일깨어 이 역사가 비극을 경험하지 않도록 외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명이요,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내 교회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개교회주의나, 내 교단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교파주의를 지양하고, 한국사가 하나님의 역사 지배 아 래 올바른 역사의 원리를 실행할 수 있도록 나라와 민족에 대한 관심을 내 개인 영혼구원에 못지 않게 외쳐야 하며, 내 교회 내 교파의 성장과 발전관심에 못지 않게 이 나라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백성도 하나님께서 더욱 더 깊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선교해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호세아의 말씀 그대로, 우리 한국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가 되도록 우리 기독교인들이 책임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고난받는 한국 사를 고침받게 하여 평강의 열매를 맺게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이 땅의 절름발이 역사, 어그러진 역사를 반드시 고침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 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스라엘은 전쟁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전쟁이 있으므로 나라가 강해지고 산업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 라엘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있어야 민족 이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소련에서 살다온 사람은 공산당이 고, 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민주주의이며 얼굴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기만 하면 그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 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긴장 관계에 있을 때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은 축복이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나라 지도 자 백성이 마귀같은 짓을 많이 했어도 '천사표'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은 하나님의 사생자가 아니요 참 아들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고"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더욱 더 이 나라가 공평과 정의, 공의와 정직, 그리고 성실의 역사가 되도록 기도하고 외치시므로(선교) 경제 전쟁이 축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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