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3)

본문

철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싸피엔스'라고 부릅니다. '호모'란 사람이라는 말이고, 싸피엔스란 묻고 탐구한다는 말입니다. 즉 철학에서는 인간을 묻고 탐구하는 존재,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존재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명제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여부,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여부를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가 여부로 판가름하려 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피조물과 달리 생각할 줄 알고,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그 어떤 피조물이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철학의 인간 이해를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인간의 인간됨은 바로 사유 즉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생각하며 사는 사람 그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사는 사람, 무작정 사는 사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은 철학자들의 눈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무리와 비리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생각을 통해서 이치와 도리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찾아낸 그 이치와 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끝에 삶의 이치를 찾아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끝에 사람 사는 도리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이치와 도리를 따르면서 사람답게 잘 살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치와 도리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리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생각은 하되 잘못된 생각,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치와 도리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공동체 전체에 커다란 피해를 입힙니다. 우리는 이것을 비리를 저지른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또는 나쁜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판을 치고, 비리가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정원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행하던 서해안 페리 호가 뒤집혔습니다. 생각 없이 무리하게 설계하고 시공하다가 삼풍 아파트가 주저앉았고, 성수대교 무너졌습니다. 못된 생각, 나쁜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 때문에 비리가 저질러지고, 그 결과 정경유착, 뇌물 수수 등 부정 부패가 곳곳에 만연되어있습니다. 제대로 생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특징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 생각의 깊이가 깊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뭐니뭐니 해도 학교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학교교육이 생각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지혜의 산실이기보다는 생각한 결과물인 지식의 전달장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생각하는 훈련을 받지 못하고, 그저 지식만 머리 속에 넣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대중 문화가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도전하는 것에서 생각 없이 즐기는 쪽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 읽는 문화에서 바보 상자라 일컬어지는 TV나 전자 오락과 그리고 컴퓨터 같은 사이버 문화로 급속히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은 가져다 줄 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생각을 빼내갑니다.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생각하며 살 줄을 모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무리와 더 심한 비리가 이 세상에 더욱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실종한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울리트라는 사람의 충고는 이 시대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생각한 것을 가르치지 말고, 생각하는 기술을 가르치라."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도 생각 없이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있는 히브리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일종의 편지입니다. 여기서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란 유대 중에서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로마 정부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을 싫어했고 미워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를 의심했고, 반대했습니다. 이제 예수믿는다고 이상한 눈으로 보고, 때로는 체포하여 심문하고, 때로는 가택수색, 재산압수 등 예기치 않은 봉변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생각 없이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마음에 회의가 생기게 되고, 신앙의 동요가 일기 시작해서 예수를 버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는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비난과 무시를 당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전통을 저버린 사람, 율법을 포기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했고, 유대 공동체 내에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를 깨뜨리는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이비 이단 집단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생각 없이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씩 둘씩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라 이런 위태로운 상황가운데 처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나름대로 문제 해결책을 내어놓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카타노에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주목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마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날라 다니는 새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들에 여기 저기 피어난 꽃구경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멋진 경치를 감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면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새들이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놓지도 않지만 먹이시고 기르시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면서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 하나님께서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않하지만 입히시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깊이 생각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왜를 묻는 것입니다. 어느 날 뉴우톤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질까 왜 꼭 아래로 떨어질까를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게 됐고, 그 결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뉴톤 말고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왜를 묻지 않았습니다. 생각 없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왜를 물었으면 반드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왜를 물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시대를 바라보니까 의인은 계속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비해서 악인은 출세하고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공의의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내버려두시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조만 간에 이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을 통해서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하필이면 더 악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신 데 왜 더러운 바벨론을 사용하시는가 오랜 기도와 궁리 끝에 답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잠시 유다를 벌하는 도구로 쓰셨다가 때가 되면 멸망하도록 버리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이런 답을 찾고난 뒤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서 하박국서를 매듭짓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왜를 물었으면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답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답을 찾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 물음을 끝내야 합니다. 만일 왜를 묻고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끝난다면, 그 물음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뒤흔들어 놓게 되고, 잘못하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를 묻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냥 믿으려 합니다. 안됩니다. 그래도 왜를 물어야 합니다. 왜를 묻지 않으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신앙생활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왜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를 물었으면 끝까지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본문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이 생각하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사도라고 칭했다는 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서만 예수님을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도를 택하고 보내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만 예수님을 사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모세를 최고의 권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위대한 사도를 자기들에게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율법을 통해 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또 다른 사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도 훌륭한 사도이지만 예수와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대신 보내서 그 뜻을 전하다가 잘 안되면 최후로 자기 아들을 보내 그 뜻을 전하는 것이 당시 중동 지방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비유한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대제사장은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인간들의 모든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인간들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중개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도록 해 주셨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주셨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박해나 고난이 닥쳐도 예수를 버릴 수 없고, 믿음으로 그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박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생각 없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 없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 찍기 바쁩니다. 경치를 깊이 감상하지 못합니다. 바쁜 일정에 쫓겨서 사진 찍고는 또 다른 곳으로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왔었다는 기억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행도 건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건성입니다. 생각 없이 떠밀려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무리가 따르고 비리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해서는 않되는 생각들, 행동들이 여기 저기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896년 미국 교회와 미국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진 한 권의 소설이 출간됐습니다. 찰스 셀돈 목사가 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는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이 책은 초판만도 미국 내에서만 300만 권이 팔린 보기 드문 베스트 셀러가 됐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헨리 맥스월 목사님은 존경받는 목회자였습니다. 설교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실직한 인쇄공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의 배려로 교인들 앞에서 간증을 하게 됩니다. 실직한 이후 10개월 동안 힘겨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가 어느 날 밤 교회 앞에서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들었답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이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오늘날 교회가 예수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자기 생각에는 교회가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던 끝에 그는 영양부족과 빈혈과 현기증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는데 숨을 거두기 전까지 반복해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예수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외쳤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온 교인들이 사사건건 묻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교인들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교회가 변하기 시작했고, 사회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런 나에게 예수는 무어라 말씀하실 것인가 묻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무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비리를 저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7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