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의 믿음 (히11:5-6,창5:21-24)
본문
지난 시간에는 믿음의 시작인 아벨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면서 아벨의 믿음은 예배로 시작된다고 전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에녹의 믿음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참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처리한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체험적 순서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는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인물들이 생략되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녹의 믿음은 아벨의 믿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역사적 순서를 따라 기록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의미를 체험을 따라 기록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런 순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연결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로 이어집니다. 아벨에게서는 믿음의 예배를 통한 믿음의 시작을 볼 수 있고, 에녹에게서는 믿음의 행실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의 동행을 볼 수 있고, 노아에게서는 믿음의 증거인 구원의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어 줍니다. 참된 믿음이란
첫째는 예배요,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실이요,셋째는 구원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예배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에 있어서도 이런 질서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믿음의 행위가 살아 있었던 에녹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1.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긴 믿음 에녹의 믿음의 결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늘로 직행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당하게 된 슬픈 일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로 갖는 최대의 슬픔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죽음입니다. 하관예배를 드릴 때 우는 성도를 보는 목사의 심정은 그리 유쾌하지가 못합니다. 저는 40대 초반의 성도가 아내와 어린 자녀 둘을 남겨놓고 암으로 죽은 가정의 장례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하관 예배를 드릴 때 저는 같이 우느라고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죽음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함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으므로 심판 때에 의롭다함을 받았게 되면 그는 영생을 받고 죄와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에녹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에게는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습니다. 하지만 에녹이 어떤 방법으로 옮기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다고 했지만 에녹의 경우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그대로 올라 갔는지 아니면 변화되어져서 올라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것을 가지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신앙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옮기신 이유는 이들이 더 이상 죄악된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란 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사 57:1, 벧후 2:5-9참고).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
그렇다면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에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기울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 때문에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유별난 데가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300년 동안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동안 먹여 살리느라고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믿음을 지킨다고 홀로 수도원 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남들이 당하는 고난과 유혹을 같이 당하면서 매일 매일의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에녹성을 쌓았고(창4:16), 야발은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을 치고 퉁소를 부는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렇다할만한 재주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을 남기지도 못했고 이삭처럼 우물을 파지도 못했습니다. 지극히 미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저 밥먹고 하는 일이란 그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애기나 낳는 일을 했습니다. 300년 동안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니 얼마나 많이 않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흥부처럼 많이 낳았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하며 미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에녹은 드러난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큰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 생활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가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에녹의 어떤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기쁘게 했다는 말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동행한다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창 6:9, 17:1, 시 26:3, 시 56:13, 시 116:9참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몇 십년 동안의 부부생활도 동행하기 힘든데 300년 동안 동행했다고 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모스 3장 3절에 보면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뜻이 합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은 철저히 하나님과 뜻을 같이 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은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자발적인 행동과 꾸준한 진보와 전진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께 굴복하여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생활입니다. 에녹은 철저히 이런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를 보면 에녹이 바른 믿음을 갖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대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악한 길을 향해서 달음박질하고 있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당시의 상황은 심판을 자처하는 시대였습니다. 유다서 14절과 15절의 말씀을 보면 그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 4:23에서는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배이리로다” 이것은 유명한 칼의 노래입니다. 사람을 죽이고서 오히려 좋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지존파의 살인극과 택시운전사로 가장한 은란 사람의 살인극이 선량한 시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보면 사람을 죽이고서도 양심의 뉘우침의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살인 행극을 보면서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 일을 대신해 주니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세상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인간의 완악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살인 행극이 에녹의 시대에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힘센 자가 여자를 차지하고 약자를 억압합니다. 악한 자가 득세를 하며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모두가 편한 것이 좋다고 하여 편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따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바로 에녹이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롬 12:2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고후 5:9에서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치 물고기사 사람과 동행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불가능합니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어져야만 가능해집니다(고후 5:17).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롬 8:5-8). 영을 좇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육신의 일로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요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 6:63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는 자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즐거이 복종합니다.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시대상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성경을 보면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약함 속에서 정의로 빛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가능한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빛과 소금은 자신이 녹아질 때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조롱당하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럴듯한 말과 숭상하는 체하는 태도 속에 있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께 완전하게 복종하는가를 보십니다. 불가능한 속에서 더욱 더 순전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기뻐하십니다. 에녹은 바로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과의 동행의 근거 이제 우리는 말씀 속에서 에녹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인정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녹에게서도 몇 가지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과학적인 것들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인과의 법칙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며 원인의 원이 있기 마련인데 그 시작과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을 직감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구상의 법칙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달과 지구 간의 거리가 조금만 멀어도 물이 육지로 올라오는 위험한 일이 있게 됩니다. 지구가 조금만 더 크거나 작았더라면 산소와 중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믿음의 눈이 없이는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도처에 죄악이 만연되고 있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위를 보지 못하고 주변만 본다고 한다면 주변에 사람이 확인되지 않을 때 얼마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모세도 위를 보지 못하고 주변을 보았을 때 사람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에녹은 철저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신 존재를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인정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두 번째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에녹은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이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지막에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찾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불의를 도말해 주십니다(사 55:7).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다서 14절과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는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에녹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에 경건치 않는 자들로 가득찼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오직 한 번 뿐인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벌써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에녹으로 하여금 심판을 향한 종말론적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시한부적 종말론이 아닙니다. 시한부적 종말론에 빠지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도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시대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전한 종말론적 삶이 필요합니다. 에녹은 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녹이 심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종말론적 사고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도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New Berry라는 성경 학자의 말에 따르면 므두셀라의 뜻은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창을 제일 잘 던지는 사람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과 마을이 전쟁을 할 때에 한 마을을 정복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로 마을 입구를 지키는 창을 던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만 죽이면 마을은 쉽게 정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을 사람들로 보아서는 마을을 지키는 창을 잘 던지는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므두셀라라고 하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에녹에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 5장 22절에 무엇이라고 기록했습니까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기억하기 쉽게 말하자면 오늘 읽은 말씀도 신약 성경 365페이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년 365일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일부러 365년, 365페이지를 강조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에녹이 365년을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300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행의 기점을 므두셀라를 낳은 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선포하여 이름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는데 어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세라고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마비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현대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학자 나인홀더 니버 박사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이 심각하게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짖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말씀이요 깨어 경성하며 하나님을 따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5장 25절에서 무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28절에 보면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무두셀라의 손자입니다. 계산해 보면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몇 살이 됩니까 바로 969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므두셀라가 죽을 때 홍수는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경성하여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았던 에녹이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기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기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쉽게 살다가 종말을 준비하지 못해서 쫓겨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7절로 11절에서 종말에 처하는 성도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깨어서 경성하며 항상 그 때를 생각하고 심판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 시대와 같은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다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로 17절을 보면 심판 직전에 휴거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분명히 이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 말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을 소유하는 택함받은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인정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세 번째의 이유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풍성으로부터 나오는 긍휼,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인정은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듭니다. 약속에 대한 확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네번째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상주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반드시 주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면류관이 있음을 확신할 때 순교도 전도도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상급을 받으려고 일하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심히 교만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상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대로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순하게 주님의 상급을 기다리며 주님과 동행할 뿐입니다. 약속한 것을 이루시는 신실한 한나님을 생각하며 상급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루이 페러스트가 해안에서 휴가를 지내는 중에 생긴 일입니다. 유명 인사가 내려왔다는 말에 마침 그곳에서 있었던 콩쿨 대회 주최측에서 심사를 의뢰했습니다. 루이 페러스트는 미인들의 콩쿨이려니 생각하고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미인 콩쿨이 아니라 자동차 콩쿨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심사를 하는데 도저히 분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묘책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찾아낸 방법은 자동차 본네트를 열고 모타를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판결은 간단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한 여성이 그 판결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의인 즉은 자동차 콩쿨의 규정에 모타 검색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이 페러스트가 말했습니다. “미인대회에 목욕하고 나오라는 규정이 있습니까” 이 한 마디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가끔 속은 닦지 않고 겉만 번지르하게 해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없이 겉만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속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말세지말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입에서 조차도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고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입니다. 근래에 이단들은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저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선언하고난리를 칩니다. 깨어 경성하며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이 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종말관은 어떠합니까 구름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마냥 달라고만 하면 나오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는 좋으신 하나님만 찾는 신앙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선인의 생활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할 때에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전진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에녹과 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 동행하시다가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서 천국까지 이를 수 있는 주님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는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인물들이 생략되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녹의 믿음은 아벨의 믿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역사적 순서를 따라 기록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의미를 체험을 따라 기록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런 순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연결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로 이어집니다. 아벨에게서는 믿음의 예배를 통한 믿음의 시작을 볼 수 있고, 에녹에게서는 믿음의 행실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의 동행을 볼 수 있고, 노아에게서는 믿음의 증거인 구원의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어 줍니다. 참된 믿음이란
첫째는 예배요,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실이요,셋째는 구원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예배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에 있어서도 이런 질서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믿음의 행위가 살아 있었던 에녹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1.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긴 믿음 에녹의 믿음의 결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늘로 직행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당하게 된 슬픈 일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로 갖는 최대의 슬픔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죽음입니다. 하관예배를 드릴 때 우는 성도를 보는 목사의 심정은 그리 유쾌하지가 못합니다. 저는 40대 초반의 성도가 아내와 어린 자녀 둘을 남겨놓고 암으로 죽은 가정의 장례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하관 예배를 드릴 때 저는 같이 우느라고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죽음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함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으므로 심판 때에 의롭다함을 받았게 되면 그는 영생을 받고 죄와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에녹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에게는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습니다. 하지만 에녹이 어떤 방법으로 옮기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다고 했지만 에녹의 경우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그대로 올라 갔는지 아니면 변화되어져서 올라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것을 가지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신앙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옮기신 이유는 이들이 더 이상 죄악된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란 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사 57:1, 벧후 2:5-9참고).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
그렇다면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에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기울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 때문에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유별난 데가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300년 동안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동안 먹여 살리느라고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믿음을 지킨다고 홀로 수도원 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남들이 당하는 고난과 유혹을 같이 당하면서 매일 매일의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에녹성을 쌓았고(창4:16), 야발은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을 치고 퉁소를 부는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렇다할만한 재주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을 남기지도 못했고 이삭처럼 우물을 파지도 못했습니다. 지극히 미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저 밥먹고 하는 일이란 그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애기나 낳는 일을 했습니다. 300년 동안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니 얼마나 많이 않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흥부처럼 많이 낳았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하며 미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에녹은 드러난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큰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 생활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가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에녹의 어떤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기쁘게 했다는 말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동행한다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창 6:9, 17:1, 시 26:3, 시 56:13, 시 116:9참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몇 십년 동안의 부부생활도 동행하기 힘든데 300년 동안 동행했다고 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모스 3장 3절에 보면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뜻이 합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은 철저히 하나님과 뜻을 같이 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은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자발적인 행동과 꾸준한 진보와 전진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께 굴복하여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생활입니다. 에녹은 철저히 이런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를 보면 에녹이 바른 믿음을 갖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대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악한 길을 향해서 달음박질하고 있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당시의 상황은 심판을 자처하는 시대였습니다. 유다서 14절과 15절의 말씀을 보면 그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 4:23에서는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배이리로다” 이것은 유명한 칼의 노래입니다. 사람을 죽이고서 오히려 좋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지존파의 살인극과 택시운전사로 가장한 은란 사람의 살인극이 선량한 시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보면 사람을 죽이고서도 양심의 뉘우침의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살인 행극을 보면서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 일을 대신해 주니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세상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인간의 완악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살인 행극이 에녹의 시대에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힘센 자가 여자를 차지하고 약자를 억압합니다. 악한 자가 득세를 하며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모두가 편한 것이 좋다고 하여 편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따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바로 에녹이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롬 12:2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고후 5:9에서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치 물고기사 사람과 동행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불가능합니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어져야만 가능해집니다(고후 5:17).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롬 8:5-8). 영을 좇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육신의 일로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요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 6:63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는 자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즐거이 복종합니다.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시대상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성경을 보면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약함 속에서 정의로 빛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가능한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빛과 소금은 자신이 녹아질 때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조롱당하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럴듯한 말과 숭상하는 체하는 태도 속에 있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께 완전하게 복종하는가를 보십니다. 불가능한 속에서 더욱 더 순전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기뻐하십니다. 에녹은 바로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과의 동행의 근거 이제 우리는 말씀 속에서 에녹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인정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녹에게서도 몇 가지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과학적인 것들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인과의 법칙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며 원인의 원이 있기 마련인데 그 시작과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을 직감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구상의 법칙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달과 지구 간의 거리가 조금만 멀어도 물이 육지로 올라오는 위험한 일이 있게 됩니다. 지구가 조금만 더 크거나 작았더라면 산소와 중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믿음의 눈이 없이는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도처에 죄악이 만연되고 있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위를 보지 못하고 주변만 본다고 한다면 주변에 사람이 확인되지 않을 때 얼마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모세도 위를 보지 못하고 주변을 보았을 때 사람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에녹은 철저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신 존재를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인정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두 번째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에녹은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이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지막에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찾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불의를 도말해 주십니다(사 55:7).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다서 14절과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는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에녹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에 경건치 않는 자들로 가득찼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오직 한 번 뿐인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벌써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에녹으로 하여금 심판을 향한 종말론적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시한부적 종말론이 아닙니다. 시한부적 종말론에 빠지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도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시대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전한 종말론적 삶이 필요합니다. 에녹은 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녹이 심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종말론적 사고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도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New Berry라는 성경 학자의 말에 따르면 므두셀라의 뜻은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창을 제일 잘 던지는 사람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과 마을이 전쟁을 할 때에 한 마을을 정복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로 마을 입구를 지키는 창을 던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만 죽이면 마을은 쉽게 정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을 사람들로 보아서는 마을을 지키는 창을 잘 던지는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므두셀라라고 하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에녹에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 5장 22절에 무엇이라고 기록했습니까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기억하기 쉽게 말하자면 오늘 읽은 말씀도 신약 성경 365페이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년 365일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일부러 365년, 365페이지를 강조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에녹이 365년을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300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행의 기점을 므두셀라를 낳은 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선포하여 이름을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는데 어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세라고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마비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현대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학자 나인홀더 니버 박사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이 심각하게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짖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말씀이요 깨어 경성하며 하나님을 따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5장 25절에서 무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28절에 보면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무두셀라의 손자입니다. 계산해 보면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몇 살이 됩니까 바로 969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므두셀라가 죽을 때 홍수는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경성하여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았던 에녹이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기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기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쉽게 살다가 종말을 준비하지 못해서 쫓겨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7절로 11절에서 종말에 처하는 성도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깨어서 경성하며 항상 그 때를 생각하고 심판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 시대와 같은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다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로 17절을 보면 심판 직전에 휴거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분명히 이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 말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을 소유하는 택함받은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인정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세 번째의 이유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풍성으로부터 나오는 긍휼,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인정은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듭니다. 약속에 대한 확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네번째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상주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반드시 주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면류관이 있음을 확신할 때 순교도 전도도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상급을 받으려고 일하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심히 교만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상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대로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순하게 주님의 상급을 기다리며 주님과 동행할 뿐입니다. 약속한 것을 이루시는 신실한 한나님을 생각하며 상급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루이 페러스트가 해안에서 휴가를 지내는 중에 생긴 일입니다. 유명 인사가 내려왔다는 말에 마침 그곳에서 있었던 콩쿨 대회 주최측에서 심사를 의뢰했습니다. 루이 페러스트는 미인들의 콩쿨이려니 생각하고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미인 콩쿨이 아니라 자동차 콩쿨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심사를 하는데 도저히 분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묘책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찾아낸 방법은 자동차 본네트를 열고 모타를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판결은 간단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한 여성이 그 판결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의인 즉은 자동차 콩쿨의 규정에 모타 검색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이 페러스트가 말했습니다. “미인대회에 목욕하고 나오라는 규정이 있습니까” 이 한 마디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가끔 속은 닦지 않고 겉만 번지르하게 해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없이 겉만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속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말세지말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입에서 조차도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고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입니다. 근래에 이단들은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저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선언하고난리를 칩니다. 깨어 경성하며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이 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종말관은 어떠합니까 구름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마냥 달라고만 하면 나오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는 좋으신 하나님만 찾는 신앙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선인의 생활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할 때에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전진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에녹과 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 동행하시다가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서 천국까지 이를 수 있는 주님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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