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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인내를 배우자 (히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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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내가 필요한 때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e)이라고 하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죽음의 수용 소'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독일 나치의 그 무시 무시한 감옥에 끌려가서 수년 동안 사선을 넘나드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경험 을 쓴 책이 이 '죽음의 수용소'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너무 소중한 진리를 담고 있는 간단한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1944년 성탄 전후와 1945년 신년 연휴 전후 약 두 주 사이에 그와 같은 수용소 에서 수감되어 있던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무슨 질병이 만 연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악명 높은 가스실에 끌려가서 몰살당한 것도 압니다. 그러면 왜 죽었을까요 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마음 속으로 어린애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쯤 되면 석 방되어서 집으로 돌아가겠지. 이번 성탄은 집으로 돌아가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켜 놓고 그 아래서 예전처럼 행복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겠지.' 이런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이 지나가는데도 전혀 석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너무 절망해서는 마음의 병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의 병은 결국 육신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이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 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불과 4개월 후에 히틀러가 백기를 들 었기 때문입니다. 한 4개월만 참으면 전쟁이 끝나고 그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고 향을 향해서 찬양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날을 맞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것을 못 참아 절망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인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또 사회 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하기 위해서 인내 가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은 상식이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만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인내 없 이는 절대 살아 남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깁니다만 세상을 이기는 믿음도 인내 없이는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초 와 절망과 고통을 믿음으로 극복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고난을 극복하는 그러한 믿음이 있어도 인내가 없이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인내란 그 만 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보다 훌륭한 교육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특별한 용기를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 중에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런가 이유는 단 하나다.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을성 이 없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백 번 들어도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6 25사변의 총성이 멈춘 이래 이 나라가 이처럼 벼랑 끝까지 몰린 적이 또 있었는 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영국의 경제 잡지인 '이코노미스트'(Economist)지는 우리 나라를 가리켜 약간 비꼬는 투로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빨리 부자가 된 나라도 드물고 그처럼 급작스럽게 모욕을 당한 나라도 없다." 바로 우리 나라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굶주리는 북한, 부도 위기에 몰린 남한, 이래저 래 이 나라는 온 세계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인내입니다. 한번 건강을 잃으면 누구든지 그 건강을 회복하기까지는 무지무지한 인내를 해야 합니다. 성 급하게 건강을 회복하려고 덤비다가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버립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병이 들었다는 낌새가 여기저 기서 많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증세를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쉬쉬 하고 허풍만 떨었습니다. '설마' 하는 요행을 하나님처럼 믿고 정신나간 짓들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철이 없어서 이처럼 정신나간 짓을 하면 지도자 를 위시해서 그래도 이 땅의 요직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올바른 정신과 방향을 가지고 이 백성을 이끌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 도 그들은 백성들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일어나야 되겠지요. 정신 차리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것 중에서 과감하게 고칠 것은 고치고, 깨 트릴 것은 깨트리고, 버릴 것은 버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의 과정을 우리가 걸어가려면 필요한 것 하나 있습니다. 인내입니다.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로 승리한 믿음의 선배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히브리서 12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인내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1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여기에 '인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2 절 중간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참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3절에 가서는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향해 공격하는 죄인들을 참으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렇게 '인내'와 '참는다'로 각각 다르게 번 역했습니다만 원문을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이 본문은 11장의 소위 '믿음의 장'과 연관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11장에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믿음의 싸 움을 싸우다가 승리한 위대한 선배들 수십 명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 자는 그들을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는 그들을 허다한 증 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운동장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응원을 하는 군중처럼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서 응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한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이들 믿음의 선배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인내를 가리켰습니다. 인내가 믿음이고 믿음 이 곧 인내였습니다. 이 둘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인내를 가지고 믿음을 지켰고 그 믿음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내하는 믿음으로써 혹독한 환란과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가 직면해 있는 문제와는 연관성을 찾기 힘들지 않은가" 그 말에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처럼 예수 잘 믿고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잘 순종하면서 신 앙 생활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믿음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경제가 불안해져서 우리 생활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는 마음의 걱정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을 지킨 수 십 명의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 역시 이 세상에서 너 무나 어려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선택하고 세상에서 죽느냐, 아니 면 예수를 버리고 세상에서 사느냐 이 양자를 택일해야 될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죽어버리고 망하느냐, 아니면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예수를 거부함으로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가느냐,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선배들은 모두 바보 같은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를 선택함으로 세상 사람들에 게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만가지 고통과 서러움 과 핍박과 멸시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택하고 세상에서 죽기로 각오했을 때 제일 먼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궁핍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11장 37절을 한번 보십시오. 거기 보면 "그들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죽으면 그것은 간단하지요. 그러나 죽지 않고 쫓겨다니면서 고생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요즈음의 밍크 코트같이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정말 할 수 없어 걸치고 다니는 끔찍스러운 옷입니다. 그 뻣뻣한 가 죽이 살을 비비올 때 그 고통이 어떠할 지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염 소 가죽을 몸에 걸치고 유리하면서 다닐 때, 그들이 당한 고통 중 첫째가 무엇이 겠습니까 바로 궁핍입니다. 애들이 배고프다고 울지만 줄 것이 없어 매일매일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고 부르짖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경제적인 궁 핍, 이것이 그들이 겪은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 그들은 인내하면 서 승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비한다면 우리가 지금 마음에 은근히 갖고 있는 불안은 어떤 면에서는 잠꼬대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 를 나에게 들려주는가에 우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달리면서 인내하라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많은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고 인내한 선배들이 있지 만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분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인내의 모범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 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또 3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죄인들의 이같이 자 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우리에게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인내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은 인내로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 하여 오셨고 그 구원자로서의 자기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부터 출발해서 골고다의 십자가에 이르는 그 험난한 길을 인내하면서 달려가셨고 결국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내는 완전한 인내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내에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인내는 달리면서 참는 인내였습니다. 1절 끝에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하는 말이 나옵니다. 표를 잘해 놓으십시오. 이것은 그냥 지나 가며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쉽게 말해서 달리 면서 인내하고 인내하면서 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달리면서 인내하신 분이 요, 인내하면서 달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내라고 하면 약간 정적이거나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 말로 생각 합니다. 우리는 '참는다'고 하면 꼼짝하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는 그런 종류의 것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몸에 병이 나서 고통스러운 경우라면 병상에서 고통이 지 나가기까지 이를 악 물고 참는 것을 인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패한 경우라면 문 딱 닫아걸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 고통을 혼자서 삼키면서 참는 것을 인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인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hupomone)는 그런 정적이고 수동적인 인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내를 가리킵니다. 어쩔 수 없어 서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실비실 피하면서 할 수 없어서 참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무엇을 참으셨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죽음인가를 주님은 잘 알고 계셨지만 그것을 참 으시고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내 입니다. '휘포모네'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죄인들로부터 얼마 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수많은 악한 사람들 때문에 밤낮없이 시달리면서 고통을 당했지만 주님은 그 모든 사람 을 참으셨습니다. 참으시고는 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것이 바로 달리면서 인내하는 휘포모네입니다. 그는 배가 고프다고 해서 허기가 채워질 때까지 방바닥에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달리면서 인 내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그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가서 병자를 고쳐 주시며 그들에게 하늘의 복음을 전하 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휘포모네입니다.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자기 몸을 숨기지 않으시고 담대하게 "내가 여기 있노라." 하면서 십가가를 향하여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달리면서 참는 휘포모네의 인내인 것 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느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진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달리면서도 참을 수 있었고 참으 면서도 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저앉거나 도망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요지부동으로 달릴 수 있었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휘포 모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휘포모네'는 불운을 맞을 때 가만히 있는 인내가 아니라 타격을 받으면서 일하는 인내를 말합니다. 슬픔이 몰려올 때 베개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인내가 아니라 눈물을 훔치면서 일터로 달려가는 인내입니다. 장애물이 가로막아 도 물러서지 않고 시장으로 갑니다. 직장으로 갑니다. 남을 섬기는 봉사의 장으 로 갑니다. 갈 곳이 없으면 어딘 가로 가서 자기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힘 차게 일을 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달리면서 일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심지어 몸이 아파도 누워있기를 거부하는 인내입니다. 인내의 참된 비결은 참는 동안 다 른 할 일을 찾는 데 있습니다. 이 문이 막혔으면 다른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 문도 막혔으면 뒷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면서 달려 가는 자세, 이것이 바로 '휘포모네'입니다. 이것을 놓고 '참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찬바람을 견딘 사람이 봄바람을 맞을 수 있고 먹구름을 물리친 사람만이 태양 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은 오랫동안 귀가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음악가에게 귀가 나쁘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의 청각은 결국 완전히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청각이 가자마자 음악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눌러 앉아 버릴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어서 그 모든 고통을 참느라고 애를 쓰고 앉아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귀가 먹어 버리자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을 목구멍으로 살겠다."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요. 그러나 그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있는 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귀가 먹었으니 까 이젠 목구멍으로 생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래서 유명한 '9번 교향곡' 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휘포모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와 같은 인내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이런 인내의 도사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이와 같은 휘포모네의, 인내의 도사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고린도후서 4장 8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 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먼저 그가 '내가'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를 믿는 우리 모두가 다 이러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사방 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당당 하게 맞서고 일어나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인내의 자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 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 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가 이런 기가 막힌 말씀을 외우지 못하다면 그것만큼 손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실제로는 가난합니다. 실제로는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고 소리칩니까 "나는 기쁘다. 나는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부요하 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이렇게 소리치면서 꺾이지 않습니다. 조금도 굴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이런 자세를 가지고 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내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인내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여 주신 뛰면서 인내하는 인내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환 경에서 주저앉아 마지못해 참는 것이야 잘할 지 모르겠지만 뛰면서, 달리면서 인 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이번의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 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충격이 너무 커서 달리고 싶어도 발이 잘 떨어지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충격적인 순간을 넘기고 나 면 그 다음부터는 일어나서 달려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달리 면서 참아야지 앉은 채로 참으면 안됩니다. 최근에 저는 어떤 글을 보면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많은 교회들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목사님이 두 분 계시는데, 한 분은 빌 하이벨스(Bill Hybels)라고 하는 목사님이고, 또한 분은 릭 워렌(Rick Warren)이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두 분 다 40대 중반의, 아직 도 젊은 사람들인데 아무 것도 없는, 한 사람도 없는 자리에서 교회를 시작해서 18년만에, 혹은 20년만에 지금의 우리 교회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교회로 성 장해서 미국 교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릭 워렌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새들백 교회를 개척해서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님과 인터뷰한 기사가 어느 기독교 잡지 가을호에 실린 적이 있는데 제가 그 내용을 읽으면서 같은 목사로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이상한 병이 있었습니다. 뇌기능부전이라고 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거의 매일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고, 어떤 때는 학교도 못 가고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뇌기능부전이라는 병은 참 특이한 병입니다. 우리 뇌에는 아드레날린이라고 하는 호르몬이 분비가 됩니다. 이 아드레날린이라고 하는 호르몬은 우리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조심성을 갖게 하고, 또 필요할 때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아주 중요한 호르몬입니다. 따라서 특히 지도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릭 워렌 목사님의 경우에는 이 호르몬이 뇌에 분비되면 뇌가 그 호르몬에 대해 이상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비정상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 호르몬이 분비되 면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시력이 갑자기 떨어져 앞에 있는 것도 잘 안 보입니다. 머리가 쑤시면서 아픕니다. 무서운 공포증이 몰려옵니다. 그러다가 심 한 경우에는 실신을 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간질병 비슷한 증세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이런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무서운 병 을 안고도 이 사람이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 면, 공포의 순간이 다가오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치 그 때는 손가락 하나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 같다." 설교를 하다가도 가끔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데 그럴 때면 교인들 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합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고 '이러다가 쓰러지면 어 쩌나' 하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 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 18년 동안 열심히 목회를 했습니다. 그 결과 새들백 교회를 미국에서 주목받는 큰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요즘도 주일이면 저와 같이 네 번 설교를 하는데, 설교하러 들어갈 때 마다 중보기도팀에 찾아가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다고 합니다. 강단에 올라가 설교할 때도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이 약한 그릇을 사용해 주옵소 서. 나의 약함 속에서 당신만이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이 자리에서 쓰러지 면 안됩니다, 주님!'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야, 이거야말로 진짜 휘포모네다. 달리면서 인내하는 것이다. 인내하면서 달리는 자세다.' 라고 무릎을 쳤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목사가 될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저 자기 병만 가지고 날마다 씨름하다가 끝나지 누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처한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놓고 여러분은 인 내하는 자세로 맞서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육신의 약함을 놓고 인내하는 자세로 싸우고 계십니까 여러분 가정이 안고 있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진짜 인내 하는 자세를 가지고 전진하고 계십니까 휘포모네는 뒤로 물러서는 자세가 아닙니다. 주저앉는 자세가 아닙니다. 앉아서 울고만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자기를 비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걱정만 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떨쳐 버리 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뛰어가는 것입니다. 장벽이 있으면 뛰어넘고, 장애물이 가 로막으면 손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되면 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두 들겨 부수더라도 그 벽을 헐고 뛰어가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뻐하며 인내하라
둘째로, 예수님의 인내는 기뻐하면서 참는 인내였습니다. 2절 중간 부분을 보 시면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 으사." 여기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을 아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그가 정복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고 나면 하나님이 자 기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위임해 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통 하여 전 인류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이요, 십자가의 죽음이 잔인한 죽음이지만 그 뒤에 따라올 그러한 영광을 바라보고 그는 기쁨으로 그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기 뻐하면서 십자가를 참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내의 또 다른 면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 말씀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제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순간입니다. 이런 때 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히 많은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 은 제자들에게 "내가 왜 너희에게 이와 같은 말을 많이 하는지 아느냐"고 물으 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다." 십자가를 불 과 몇 시간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나누어주려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그 기쁨을 받아서 그들도 가슴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기뻐하면서 참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잘해 주 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단하고, 무섭고, 끔찍끔찍한 고난의 길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잘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 하 여 유익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광을 안겨주실 것이라는 사실 을 믿었기 때문에 기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인내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인내해 도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뻐하면서 인내할 수 있습니까 그는 승리자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 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이란 참아야 되는 어려운 과정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올 때 우리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 기쁘게 여겨야 합니 까 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러한 시련들을 통해 인내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4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끝까지 잘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인 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4절 중간에 그 답이 나옵니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우리에게 어려운 고난이 옵니까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것처럼 불안 해집니까 내가 계획했던 대로 무엇이 잘 안 됩니까 이 모두가 우리에게 오는 시험일 수 있습니다. 연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들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기가 막힌 축복이 있습니다. 인내하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리고 이 인내를 바로만 배우면, 그 다음에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인내만 바로 할 줄 알면 그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못 당합니다.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인내하기를 배운 사람은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과 역경은 바로 이러한 귀중한 인내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경을 당할 때 힘들고 어려워도 기뻐하면서 인내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내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역경을 만나면 사실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있습니다. 기가 막힌 기도 응답을 언제 받습니까 역경을 거치면서 받는 것입니다. 만사가 다 잘될 때는 응답이 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광활한 곳 에 나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광활한 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언제 경험 합니까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 경험합니다. 인내할 때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우리를 은밀한 장막에 숨기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가 우리 를 숨기는 은밀한 장막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누가 이 은밀한 장막을 경험합 니까 고난의 여정을 걸으면서 인내를 배운 사람이 이 은밀한 장막에 들어가서 그 장막 속에서 평안히 쉬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침에 찾아오는 기쁨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 하시는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언제 우리가 체험합 니까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한 다음에야 아는 것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지도 아니한 사람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을 어떻 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당할 때 인내만 잘하면, 오히려 엄청난 보화들을 거두어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굉장히 연약합니다. 그 동안 너무 잘 살다 보니 너무 약해 졌습니다. 어린애들 같습니다. 몸에 조금만 병이 나도 호들갑을 떨고 못 견딥니다. 좀 강하면 좋겠는데 너무나 약해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형제분이 계십니다. 그 형제 가정의 다 큰아들이 오랫동안 고약한 병으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분을 만날 때면 늘 이 렇게 묻곤 합니다. "요즘, 아들은 좀 어떻습니까 참 힘들지요" 그러면 그분은 저에게 왕왕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을 잘하잖 아요 사실 평안할 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합니까 '간절 간절'하고 기도하기 보 다 '흔들 흔들'하고 기도하지요.
그런데 저는 제 아들 때문에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뭔지 배우고 있습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 대답을 들으며 참 목사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뻐하면서 인내하는 자 세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소중한 축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아주 멋지게 닮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닮느냐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 있습니까 만일 저에게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냐고 물으신다면 잘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말씀하셔야지 제가 말해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 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자기와 닮은꼴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 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자비한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녀라고 하는 명칭을 주셨지 않 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입니까 닮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의 최대의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그를 닮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흥청망청 만 가지가 잘 되고 그저 세상사는 재미가 너무 좋아 날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사람이 언제 하나님을 닮겠습니까 마귀는 가만히 있어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는 것은 연단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흥청망청할 때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것 을 하나님이 조금 거두어 가시고 고난과 가난과 고통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향 하여 내 마음을 드리고 그를 의지하고 그분 앞에 쉼 없이 드나들 때, 나도 모르 게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처럼 의로워집니다. 하나님처럼 자비로워집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물질의 종 이 되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자꾸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통해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흥청망청 좋은 일만 주셔서 마귀를 닮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닮을 수 있도 록 적절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당한 이와 같은 어려운 시련을 두고 어떤 분들은 이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새벽기도도 그렇 게 정성으로 다녔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귀 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 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나 좀 닮지 않겠니 그러면 조금 참아라. 인내해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기쁨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태평한 나날을 보내며 마귀를 닮는 것보다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닮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굴속에 유리 조각이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옵니다. 그 이물질은 굴속에 있는 부드러운 살을 갉아먹어 상처가 생기게 합니다. 그러면 굴은 자기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서 그 이물질을 호르몬으로 감쌉니다. 호르몬을 계속 분 비해서 싸고 또 쌉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처도 아물게 하고, 그 이물질 때문에 자기 몸에서 어떤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굴은 이물질로 인한 고통과 아픔 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이 오랜 과정을 통해 고통스럽기만 하던 그 이물질이 영 롱한 진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이 당신의 삶 속에 굴러 들 어오면 그들을 침입자로 여기지 말고 친구로 맞이하십시오. 그것은 장고의 인내 를 시험하기 위해 온 것임을 아십시오.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속사람은 예수님처럼 성숙한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많이 갖고 즐기다가 마귀처럼 되는 것보다 적 게 갖고 인내하다가 예수님처럼 되는 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럴 때는 기분 좋게 참아야 됩니다. 할렐루야! 기분 좋게 참으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덕분에 예수님하고 닮은꼴이 되 겠네요." 하면서 기분 좋게 참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 세입니다. 계시록 21장 21절에 보면 천국에는 열 두 개의 문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천 국에 들어갈 때 이 열 두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천국 문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아십니까 진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진주는 인내의 상징입니다. 오직 인내한 자, 세상을 살면서 주님을 닮기 위해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 해 인내하고, 의를 행하기 위해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고 이 세상 의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달리면서 인내하고, 기쁨으로 인내한 사람만이 그 진주 문을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서 진 주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 자신이 진주처럼 변할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원합니다. 달리면서 인 내합시다. 기뻐하면서 인내합시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고난의 어두움을 헤쳐 나온 영광의 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 드시 축복하십니다. 인내한 자에게 축복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 나라도 축복 받습니다. 이 과정만 잘 거치면 정말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새로워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새로워집니다. 과거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과 또 물질적인 축복도 주실 줄을 믿 습니다. 달리면서 인내합시다. 기뻐하면서 인내합시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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