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랑 십자가 (갈6:14)
본문
구유에서 골고다에 이르는 우리 구주 예수의 수난의 사실과 고난의 생 애를 묵상하기 전에, 우리는 첫번째 서론의 시간으로서 치욕과 저주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자랑의 십자가가 된 이유를 말씀을 통해서 나누기 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 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흉악범을 처벌하는 저주의 형틀이었습니다. 수많은 강도들과 살인범들과 로마의 반역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사람의 십자가도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역사를 소요시 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애정과 신앙 고백의 촛점이 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이 단순히 법과 질서를 범하고 죽어간 인간이라면, 그렇게도 수많 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단순히 우대를 사랑한 애국자로서 로마에 항거하다가 죽 어간 사람이라면, 국경을 초월하여 수많은 민족들에게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이 단순히 인간의 사랑을 가르친 휴머니스트로서 자신의 신념 때문에 조용히 죽어간 사상가라면 사상과 지식을 모르는 가난하고 무지한 서민 들에게까지도 눈물을 흘리도록 기억되고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단순히 인간을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해방시키기 위 해 죽어간 사회 운동가라면 가난과 무지를 모르는 인류의 제왕들과 통치자 들과 수 많은 귀족들에게까지도 열렬한 경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를 향해서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변할 수 없는 참 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이 자랑 외 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어떤 자랑도 하나님이 금지 하셨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자랑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히 사람들의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보 십시요. 자기의 지식과 예지를 총동원하여 신이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자기 자랑에 급급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랑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특별한 달란트와 은사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종교적 충성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난 번 선거 때에도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가며 그가 몇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고백하는 사람 들의 자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랑하지 않을 것도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남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 보십시요. 내가 여자들을 이렇게 했다느니 하는, 바울이 저희의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말한 그 대로, 수치스러운 고백을 자랑으로 여기는 수 많은 사람들의 고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피조물도 저마다 자기를 자랑하기에 분주합니다. 자연도 자기의 자랑을 쉬지 않습니다. 오,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인류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 부패한 자랑들을 들어 보십시요.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것은 일찌기 역사에 없었던 자랑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역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명예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잘난 놀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4절의 말씀을 봅니다. 만일 지금까지 역사를 살았던 인류 가운데 참으로 자랑할 만한 어떤 조 건과 인간적인 요소를 구비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바울 사도일 것 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 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바울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를 받은 종교적 특권을 자 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족속이다. 나는 사랑과 충성을 용기와 진실의 상징이었던 가장 자랑스러운 이스라 엘의 지파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다. 모든 세계의 언어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다. 나는 히브리인의 탁월한 교육과 유명한 가말리엘 문화에서 유대인의 철 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바리새인이다. 나는 율법과 영광과 전통을 소중히 여겨온 사람이다. 나는 종교적인 정통성에 모든 것을 돌파한 사람이다. 열심으로 말하자면, 나는 교회를 핍박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 말하자면, 나는 흠이 없었던 사람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준, 모든 윤리적인 표준 앞에 내 생활을 비추어 보아도 아무런 흠 잡힐 여지가 없는 도덕적으로 경건한 생활을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런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납니다. 정오의 빛나는 불빛 아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 앞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엎드리며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의 아들 메 시야 앞에 소리칩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바울 사도의 고백은 달라 집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 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 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절 상반절). 바울은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을 그렇게 평가합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지나온 종교적인 발자취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울 앞에 자기의 이력 서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 기의 종교적 체험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방언을 말하며 입 신을 했으며, 나는 수많은 체험을 했으며, 나는 이와 같은 종교적인 과거 의 이력서를 가져 왔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린도후서 11장 18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22-23절의 말씀을 보십시요.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 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넘치도록 수고를 하였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없이 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였소. 나는 매도 수없이 맞았소. 나는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소. 나는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 로 맞았고 한 번은 돌로 맞았고 세 번 배에서 파선하여 나는 복음을 전하 다가 일 주야를 생사를 알지 못하는 깊음 속에서 지내기도 했소. 나는 여러 번 강의 위험을 체험하고 강도의 위험도 만났소. 선교하다가 나는 내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민족의 반역자라는 오해도 받 았소. 나는 이방인의 위험도 만났소. 시내의 위험도 광야의 위험도 바다의 위험도 만났소. 거짓 형제들에게 위험을 당하기도 했소. 나는 수고했으며, 애썼으며, 잠도 못자고 주렸으며, 목말랐으며, 춥고 헐벗은 삶을 살아 왔소. 그 뿐만 아니라 날마다 내 속에 눌린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과 심장은 타고 있었소.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겠소. 단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 이하에서, 나는 이런 체험을 했다 고 떠벌리며 돌아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의 태도와는 달리 바울은 조심성있게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 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 늘에 이끌려 간 자라 (고후 12:1,2). 바울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히 자기라는 말을 못하고 그것은 주 님이 주신 체험에 불과하므로 그 사람이라는 겸손한 고백을 통해서 자기의 고백을 말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후 12 3-5). 바울이야말로 모든 조건들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바울 사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돈을 사랑했다 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이 세상에서 황금의 권력을 알 았다면, 그 황금의 위대한 힘을 자랑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이 세상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쟁쟁한 권력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나폴리의 엄 청난 부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친히 아테네를 방문하고, 지성을 자랑 하는 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토론하며 지식의 참된 속성과 본질을 알았 던 사람입니다. 그는 친히 폼페이를 방문했으며, 폼페이의 수 많은 쾌락과 허영과 환락의 정체를 잘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어두움과 허영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육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불과하다는 그 정체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시릉띵 알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허구와 속임수를, 이 세상의 찬란한 그 모든 영광의 배후에는 허무함과 쓰디쓴 독초 같은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돈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명예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겠다고 여기 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밖에는 바울 사도에게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탄생하던 날, 하늘의 천사들은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동방박사들이 멀리서부터 와서 아기 예수 앞에 경배하며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드린 그분의 탄생을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예수님의 탄생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 수 많은 예루살렘 군중 들이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찬송하며 환영과 인기와 갈채를 보냈던 그 장면을 바울 사도는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필이면 왜 예수님 의 십자가입니까 아니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부활의 영광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을 까요 어쩌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던 이 기가 막힌 영광스런 장면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필이면 십자가 ! 저주의 십자가 ! 치욕의 십자가 ! 고난의 십자가 !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까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 미암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증되었기 때문 입니다. 십자가에서 바울은 비로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얼마나 엄격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그 아들 독생자까지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는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독생자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철저히 추적하여 심판해버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놀랍게 조화된 하나님의 완벽 한 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분을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 죄를 그대로 간과하실 수 없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랑과 의는 태초 이전에 십자가의 설 계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에서 비로소 구원의 능력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는 비로소 구원을 얻 었지 않았습니까 우리 편에서 볼 때, 십자가는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말합니다. 내 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함은
왜냐하면 이 복음이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 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또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있지만, 나는 못 박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성과 이성에 맞는 합리적인 지혜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제가 살아 있는 한, 이 강단에서 십자가를 빼놓고 자기의 표적과 권능 을 자랑하는 사람이 이 강단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 강단을 지키는 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인간의 지혜와 이성을 자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철학이 나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 어떤 철학이 나를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하여 죄 용서 받은 참된 기쁨을 나에게 제공할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어떤 정치가 나에게 영생의 소망을 가 르쳐 줄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어떤 지식이 나에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도 리를 가르쳐 주었습니까 어떤 지식이 나에게 천국의 비밀을 제공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도덕이 강도를 변화시켜 성자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윤리가 한 기생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람 라합으로 만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교훈이 깡패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십자가 ! 이것은 구원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생애의 목표는 십자가였습니다. 보시옵소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를 의식하며 평생을 살았던 주님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로 태어났을 때, 헤롯의 살육의 칼은 벌써 아기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30년 고요한 생애를 보내고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공적인 생애 를 시작하셨을 때, 즐겁고 흥겹기만 한 잔치 석상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는 그날 잔치 석상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약 내 죽음의 모습과 내 죽음의 날과 내죽음의 시간을 알고, 내 죽음의 그림자를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생애를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가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세속적인 영광을 구하 여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면 누가 우편에 누가 좌편에 설 것인지에 대해 영광을 탐하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세속적인 영광이 아닌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 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다가 문득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 시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인자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느니라. 이 사실을 붙들고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사도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소리칠 때, 그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엄한 질책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나아가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천 년 전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수 많은 군중들을 보시며, 그러나 잡시 며칠 후면 지금 이렇게 환영하던 군중들이 돌을 들고 당신을 향해서 던질 것이며, 바라바를 놓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소리지르는 난폭한 무리들로 변할 것을 미리 아신 예수께서는 골고다의 언덕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십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소 서. 마태는 말하기를, 그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 다고 말합니다. 여기 심히 고민하여 라는 말은 고민이 너무 심해서 터질 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가는 말하기를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 습을 보고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공포가 극치에 달하는 주님의 경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 기까지 기도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 두려워서일까요 고난이 두려워서입니까 결코 아 닙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을 단순히 고난의 잔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죄악의 잔입니다. 그 잔 속에는 내일 아침이면 주님을 통해서 주님이 담당하셔야 할 인류의 죄악이 담겨져 있는 잔이었습니다. 그분이 죄를 짊어지신다는 말을 바꿔 말하면 그분이 죄를 범한 사람처 럼 되어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을 죄 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묘사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지는 그분이 죄를 범하신 사람처럼 되어. 주님의 경악과 고민은 죄를 접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 하나님,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접촉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만일 그분이 십자가를 거부하시면, 그 잔을 거부하시면,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떨어져야 할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의 땀 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던 주님의 눈 앞에 스치고 지 나가는 얼굴을 주님은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만약 십자가를 짊어지 지 않으면, 멸망해야 할 고통당할 이 사람 ! 그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을 견딜 수 없는 심정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오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날이 밝자 사랑하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배신의 웃음을 띠고 찾아와서 주님의 손 등에 키스를 할 때, 그 제자는 이미 반역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일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품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가슴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분은 단 한번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섯 번이나 개처럼 법정을 끌려 다니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신 주님, 그 분은 다시 산헤드린 공회 앞에 끌려나가 유대인의 최고 종교 재판소에서 가장 무지한 살인자처럼 심 판을 받으십니다.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지고 빌라도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서 헤롯왕에게로 다시 주님을 보냅니다. 수 많은 야유와 조롱의 언어를 퍼 붓던 그 모습 앞에 잠잠히 침묵으로 대하시던 주님의 얼굴을 보십니까 또 다시 빌라도의 법정으로 옮기우신 예수님은 나는 이 사람의 범죄에서 무관 하다는 빌라도의 어리석은 판결로 마침내 십자가의 사형수로 넘기웁니다. 옷은 벗겨집니다. 홍포가 입혀지고 가시 면류관이 씌워집니다. 채찍질 이 가해지기 시작합니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그 때 예수님을 때린 그 채 찍은 한 번의 채찍질에 모든 등뼈의 살이 묻어나는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수욕과 침 뱉음을 당하며 쓰러지고 거꾸러지면서 감당하기 힘든 무서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나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길을 슬픔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호산나를 소리치며 그분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없습니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실 때, 그분께 감사하던 군중들의 무리는 이 순간 고독한 주님의 목전에는 더이상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소리치던 베드로의 모습도 없 습니다. 쓰러지며, 넘어지며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시는 그 주님의 모습 속에서 당신과 나의 구세주의 모습을 보십시요. 나는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슬피 통곡 하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위로하시며 마지막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던 그 주님, 십자가에 누우심을 당하시며 양 손과 양 발에 못박힘을 당하시고 마 침내 하늘과 땅 사이의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우리 주님 ! 이분을 보십시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셨다면, 우리가 맞는 수난의 주간의 참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한 시간이 아니고, 두 시간도 아닌 6시간을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엘리 엘리를 부르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내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뿌리시던 그 주님 ! 하늘은 빛을 잃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 속에 매달려 자기를 못박고 자기를 조롱하며 침 뱉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저들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저들 을 용서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던 그 주님 ! 한 시인이 이 놀라운 장면을 묵상하다 견딜 수 없는 감격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그 하늘을 날으던 새들은, 캄캄한 창공을 향하여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고 하고 그 구름은 더 높이 있는 구름에게 외치기를 다 이루었다 고 하고 다시 구름은 더 높은 곳에 계신 영광의 구름을 향해서 다 이루 었다 고 외칩니다. 다시 구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영광의 그룹들과 천사들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 고 합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범죄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 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는 방금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뿌리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십자가가 던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정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말할 수 없는 곤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 미움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오늘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를 향해서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변할 수 없는 참 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이 자랑 외 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어떤 자랑도 하나님이 금지 하셨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자랑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만히 사람들의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보 십시요. 자기의 지식과 예지를 총동원하여 신이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자기 자랑에 급급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랑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특별한 달란트와 은사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종교적 충성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난 번 선거 때에도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가며 그가 몇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고백하는 사람 들의 자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랑하지 않을 것도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남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 보십시요. 내가 여자들을 이렇게 했다느니 하는, 바울이 저희의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말한 그 대로, 수치스러운 고백을 자랑으로 여기는 수 많은 사람들의 고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피조물도 저마다 자기를 자랑하기에 분주합니다. 자연도 자기의 자랑을 쉬지 않습니다. 오,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인류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 부패한 자랑들을 들어 보십시요.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것은 일찌기 역사에 없었던 자랑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역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명예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잘난 놀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4절의 말씀을 봅니다. 만일 지금까지 역사를 살았던 인류 가운데 참으로 자랑할 만한 어떤 조 건과 인간적인 요소를 구비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바울 사도일 것 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 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바울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를 받은 종교적 특권을 자 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족속이다. 나는 사랑과 충성을 용기와 진실의 상징이었던 가장 자랑스러운 이스라 엘의 지파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다. 모든 세계의 언어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다. 나는 히브리인의 탁월한 교육과 유명한 가말리엘 문화에서 유대인의 철 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바리새인이다. 나는 율법과 영광과 전통을 소중히 여겨온 사람이다. 나는 종교적인 정통성에 모든 것을 돌파한 사람이다. 열심으로 말하자면, 나는 교회를 핍박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 말하자면, 나는 흠이 없었던 사람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준, 모든 윤리적인 표준 앞에 내 생활을 비추어 보아도 아무런 흠 잡힐 여지가 없는 도덕적으로 경건한 생활을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런 바울이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납니다. 정오의 빛나는 불빛 아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 앞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엎드리며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의 아들 메 시야 앞에 소리칩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바울 사도의 고백은 달라 집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 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 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절 상반절). 바울은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을 그렇게 평가합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지나온 종교적인 발자취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울 앞에 자기의 이력 서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 기의 종교적 체험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방언을 말하며 입 신을 했으며, 나는 수많은 체험을 했으며, 나는 이와 같은 종교적인 과거 의 이력서를 가져 왔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린도후서 11장 18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22-23절의 말씀을 보십시요.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 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넘치도록 수고를 하였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없이 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였소. 나는 매도 수없이 맞았소. 나는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소. 나는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 로 맞았고 한 번은 돌로 맞았고 세 번 배에서 파선하여 나는 복음을 전하 다가 일 주야를 생사를 알지 못하는 깊음 속에서 지내기도 했소. 나는 여러 번 강의 위험을 체험하고 강도의 위험도 만났소. 선교하다가 나는 내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민족의 반역자라는 오해도 받 았소. 나는 이방인의 위험도 만났소. 시내의 위험도 광야의 위험도 바다의 위험도 만났소. 거짓 형제들에게 위험을 당하기도 했소. 나는 수고했으며, 애썼으며, 잠도 못자고 주렸으며, 목말랐으며, 춥고 헐벗은 삶을 살아 왔소. 그 뿐만 아니라 날마다 내 속에 눌린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과 심장은 타고 있었소.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겠소. 단지 이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 이하에서, 나는 이런 체험을 했다 고 떠벌리며 돌아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의 태도와는 달리 바울은 조심성있게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 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 늘에 이끌려 간 자라 (고후 12:1,2). 바울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히 자기라는 말을 못하고 그것은 주 님이 주신 체험에 불과하므로 그 사람이라는 겸손한 고백을 통해서 자기의 고백을 말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후 12 3-5). 바울이야말로 모든 조건들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바울 사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돈을 사랑했다 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이 세상에서 황금의 권력을 알 았다면, 그 황금의 위대한 힘을 자랑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이 세상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쟁쟁한 권력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나폴리의 엄 청난 부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친히 아테네를 방문하고, 지성을 자랑 하는 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토론하며 지식의 참된 속성과 본질을 알았 던 사람입니다. 그는 친히 폼페이를 방문했으며, 폼페이의 수 많은 쾌락과 허영과 환락의 정체를 잘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어두움과 허영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육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불과하다는 그 정체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시릉띵 알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허구와 속임수를, 이 세상의 찬란한 그 모든 영광의 배후에는 허무함과 쓰디쓴 독초 같은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돈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명예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겠다고 여기 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밖에는 바울 사도에게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탄생하던 날, 하늘의 천사들은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동방박사들이 멀리서부터 와서 아기 예수 앞에 경배하며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드린 그분의 탄생을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예수님의 탄생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 수 많은 예루살렘 군중 들이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찬송하며 환영과 인기와 갈채를 보냈던 그 장면을 바울 사도는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필이면 왜 예수님 의 십자가입니까 아니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부활의 영광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을 까요 어쩌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던 이 기가 막힌 영광스런 장면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필이면 십자가 ! 저주의 십자가 ! 치욕의 십자가 ! 고난의 십자가 !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까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 미암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증되었기 때문 입니다. 십자가에서 바울은 비로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얼마나 엄격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그 아들 독생자까지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는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독생자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철저히 추적하여 심판해버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놀랍게 조화된 하나님의 완벽 한 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분을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 죄를 그대로 간과하실 수 없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랑과 의는 태초 이전에 십자가의 설 계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에서 비로소 구원의 능력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는 비로소 구원을 얻 었지 않았습니까 우리 편에서 볼 때, 십자가는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말합니다. 내 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함은
왜냐하면 이 복음이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 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또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있지만, 나는 못 박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성과 이성에 맞는 합리적인 지혜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제가 살아 있는 한, 이 강단에서 십자가를 빼놓고 자기의 표적과 권능 을 자랑하는 사람이 이 강단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 강단을 지키는 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인간의 지혜와 이성을 자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철학이 나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 어떤 철학이 나를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하여 죄 용서 받은 참된 기쁨을 나에게 제공할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어떤 정치가 나에게 영생의 소망을 가 르쳐 줄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어떤 지식이 나에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도 리를 가르쳐 주었습니까 어떤 지식이 나에게 천국의 비밀을 제공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도덕이 강도를 변화시켜 성자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윤리가 한 기생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람 라합으로 만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교훈이 깡패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십자가 ! 이것은 구원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생애의 목표는 십자가였습니다. 보시옵소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를 의식하며 평생을 살았던 주님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로 태어났을 때, 헤롯의 살육의 칼은 벌써 아기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30년 고요한 생애를 보내고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공적인 생애 를 시작하셨을 때, 즐겁고 흥겹기만 한 잔치 석상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는 그날 잔치 석상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약 내 죽음의 모습과 내 죽음의 날과 내죽음의 시간을 알고, 내 죽음의 그림자를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생애를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가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세속적인 영광을 구하 여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면 누가 우편에 누가 좌편에 설 것인지에 대해 영광을 탐하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세속적인 영광이 아닌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 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다가 문득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 시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인자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느니라. 이 사실을 붙들고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사도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소리칠 때, 그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엄한 질책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나아가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천 년 전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수 많은 군중들을 보시며, 그러나 잡시 며칠 후면 지금 이렇게 환영하던 군중들이 돌을 들고 당신을 향해서 던질 것이며, 바라바를 놓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소리지르는 난폭한 무리들로 변할 것을 미리 아신 예수께서는 골고다의 언덕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십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소 서. 마태는 말하기를, 그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 다고 말합니다. 여기 심히 고민하여 라는 말은 고민이 너무 심해서 터질 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가는 말하기를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 습을 보고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공포가 극치에 달하는 주님의 경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 기까지 기도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 두려워서일까요 고난이 두려워서입니까 결코 아 닙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을 단순히 고난의 잔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죄악의 잔입니다. 그 잔 속에는 내일 아침이면 주님을 통해서 주님이 담당하셔야 할 인류의 죄악이 담겨져 있는 잔이었습니다. 그분이 죄를 짊어지신다는 말을 바꿔 말하면 그분이 죄를 범한 사람처 럼 되어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을 죄 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묘사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지는 그분이 죄를 범하신 사람처럼 되어. 주님의 경악과 고민은 죄를 접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 하나님,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접촉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만일 그분이 십자가를 거부하시면, 그 잔을 거부하시면,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떨어져야 할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의 땀 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던 주님의 눈 앞에 스치고 지 나가는 얼굴을 주님은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만약 십자가를 짊어지 지 않으면, 멸망해야 할 고통당할 이 사람 ! 그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을 견딜 수 없는 심정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오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날이 밝자 사랑하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배신의 웃음을 띠고 찾아와서 주님의 손 등에 키스를 할 때, 그 제자는 이미 반역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일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품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가슴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분은 단 한번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섯 번이나 개처럼 법정을 끌려 다니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신 주님, 그 분은 다시 산헤드린 공회 앞에 끌려나가 유대인의 최고 종교 재판소에서 가장 무지한 살인자처럼 심 판을 받으십니다.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지고 빌라도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서 헤롯왕에게로 다시 주님을 보냅니다. 수 많은 야유와 조롱의 언어를 퍼 붓던 그 모습 앞에 잠잠히 침묵으로 대하시던 주님의 얼굴을 보십니까 또 다시 빌라도의 법정으로 옮기우신 예수님은 나는 이 사람의 범죄에서 무관 하다는 빌라도의 어리석은 판결로 마침내 십자가의 사형수로 넘기웁니다. 옷은 벗겨집니다. 홍포가 입혀지고 가시 면류관이 씌워집니다. 채찍질 이 가해지기 시작합니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그 때 예수님을 때린 그 채 찍은 한 번의 채찍질에 모든 등뼈의 살이 묻어나는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수욕과 침 뱉음을 당하며 쓰러지고 거꾸러지면서 감당하기 힘든 무서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나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길을 슬픔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호산나를 소리치며 그분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없습니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실 때, 그분께 감사하던 군중들의 무리는 이 순간 고독한 주님의 목전에는 더이상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소리치던 베드로의 모습도 없 습니다. 쓰러지며, 넘어지며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시는 그 주님의 모습 속에서 당신과 나의 구세주의 모습을 보십시요. 나는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슬피 통곡 하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위로하시며 마지막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던 그 주님, 십자가에 누우심을 당하시며 양 손과 양 발에 못박힘을 당하시고 마 침내 하늘과 땅 사이의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우리 주님 ! 이분을 보십시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셨다면, 우리가 맞는 수난의 주간의 참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한 시간이 아니고, 두 시간도 아닌 6시간을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엘리 엘리를 부르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내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뿌리시던 그 주님 ! 하늘은 빛을 잃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 속에 매달려 자기를 못박고 자기를 조롱하며 침 뱉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저들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저들 을 용서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던 그 주님 ! 한 시인이 이 놀라운 장면을 묵상하다 견딜 수 없는 감격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그 하늘을 날으던 새들은, 캄캄한 창공을 향하여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고 하고 그 구름은 더 높이 있는 구름에게 외치기를 다 이루었다 고 하고 다시 구름은 더 높은 곳에 계신 영광의 구름을 향해서 다 이루 었다 고 외칩니다. 다시 구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영광의 그룹들과 천사들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 고 합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범죄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 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는 방금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뿌리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십자가가 던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정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말할 수 없는 곤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 미움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오늘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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