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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것과 둘째 것 (히10:1-18)

본문

인간들이 드리는 제사는 한계가 있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사하기시에 유효한 것이었다고 했다. 본문은 히4:14 이하에서 전개된 이러한 논지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어떻게 보면 다시 한 번 요약하여 정리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첫째 것과 둘째 것을 비교하고 있다. 본문은 모형적인 것과 실체적인 것을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제사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설 수 있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건대 옛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드린 자들의 필요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온전히 이루어주지 못하므로 사람들의 양심의 평안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축복을 누리도록 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하늘의 바깥 뜰에 참예하는 예배자로서 그리스도인이 가진 복된 특권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을 기록하면서 둘째 것이 첫째 것보다 훨씬 월등함을 강조하므로써 유대교의 결함과 기독교의 탁월함을 심어주고 있다.
1.첫째 것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다는 것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맞이하는 사람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죄로 인해 차단되었다. 그 갭을 이어주는 것이 제사제도요, 제사 제도를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한 것이 율법이었다. 본문은 이것을 첫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첫째 것인 율법은첫째 것인 율법은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만한 온전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폐하여질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첫째 것은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1. 참 형상이 아니었다(1절).
첫째 것은 참 형상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림자는 아무리 완벽하게 보인다고 해도 실체를 온전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 약속된 영원한 복락의 그림자와 개요에 불과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단순한 의식적인 제사를 의미하는 불필요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참 형상을 향해 가도록 해준다. 그림자는 참 형상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 형체의 크기와 모양을 비춰준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림자라기 보다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밑그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밑그림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림이 완성되면 밑그림은 보이지도 않으며 필요도 없게 된다. 율법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모형이요, 그림자였을 뿐이다. 율법은 단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으로 제 몫을 다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참 형상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2. 의미의 인식을 위한 반복성을 요했다(1, 4-8, 11절).
첫째 것은 참 형상이 아니었으므로 진정한 치료제가 되지 못했다. 다만 잠시 위기를 넘기게 하는 응급처치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반복을 요할 수 밖에 없었다.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전하다는 것은 실재적 측면보다는 법정적 측면으로서 계획된 조건대로 완성짓는 것을 말한다. 교리적으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만족하고 최종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확보해 놓으신 이른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앞에 서있는 변하지 않는 위치다.
그런데 율법은 이것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무능성을 말해준다.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시 짓는 죄를
첫째 것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해마다 유대력으로 7월 10일이면 드려지는 속죄의 제사도 반복되었다. 율법은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일 뿐이므로 반복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첫째 것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이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절). 동물 제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요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므로 해마다 반복해서 같은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5절). 제사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짐승 제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린양 예수님 뿐이다(벧전 1:20). 세번째 이유는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6,8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이 있는 것인데 그들은 회개와 신앙이 결여된 형식적인 제사였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나 순종이나 헌신의 표시는 없고 죄용서 받기에만 급급한 제사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호 6:6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고, 시 51:16-17에 “주는 제사를 즐거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어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다. 사 1:10-20에서는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물을 가증히 여기시고 기도도 듣지 않겠다고 하셨다. 올바른 정신과 참회하는 마음이 부족한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가 하나님 사랑의 표현보다 내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예배는 아닌가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3. 참 형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다(3절).
그렇다면 사람다마 제사가 무능력한줄 알면서도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제물을 드릴 때 마다 느껴지는 허탈감과 거기에 따른 더 나은 제사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참 구원이 나오는 방향을 향하게 하고 죄 없는 희생 제물을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첫 것은 죄를 생각나게 하므로 영원한 제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계속하여 드려졌다.
2.둘째 것첫째 것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둘째 것이 오게 되었다.둘째 것은첫째 것의 실제적 적용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으로 그 효력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레위 제사의 것이 하나님께 만족을 주지 못했던 것을 온전하게 채워 주도록 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두루마리책에 기록된 것처럼 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곧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 없이 다 이루어진다.둘째 것은 예언에 기록된대로첫째 것의 성취였다.
둘째 것은 참 형상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드린 만족한 제사는 그에게 피하여 온 모든 사람에게 보배로운 복락들이 미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단번에 몸으로 드리심이다(10절).
둘째 것의 특징은 단번에 그 몸을 드리신 것이다. 참 형상은 단회적인 것이다.
둘째 것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무죄한 인간의 몸으로 드리셨다. 약속을 따라 오셔서 언약의 피를 드리신 확실한 인간이셨다.
둘째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당하게 드려졌다. 구속의 언약을 이루는데 단 번에 만족할 수 있기에 충분하게 드려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로 끌려가서 드려지신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드려졌다는데 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온 것도 순종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흘리는 기도도 억지의 기도가 아니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찾아가는 최고의 순종이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도 순종이었다. 순종으로 드려지는 헌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로 우리가 받을 심판을 지연시키고 심판을 실제로 제거시키셨다.
2. 영원한 제사다(12절). 제사가 계속 반복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다고 하는 반증이된다. 반면에
둘째 것이 단번에 드려졌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제사라고 하는 것을 입증해 준다. 영원한 제사를 위해서 예수님은 단번에 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는 사람을 대신할 수 없는 동물과도 다르며, 죄가 있어서 대신할 수 없는 사람과도 다르다. 예수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온전한 속죄물이 되어(벧전 1:19참고)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
3.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다(14절).
둘째 것의 세번째
의 특징은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전히 바치는 것이요, 성령님의 지배를 따라 하나님을 영적으로 에배하도록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요, 충분하고 온전한 속죄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요, 내적인 부정과 타락이 본질적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직접 나가는 특권을 소유하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마음에 둔 자들이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온전케 하는 효력을 가지게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산 자들이 영원토록 온전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4. 계심과 기다리심(12, 13절).
둘째 것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기다리신다고 하셨다.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당시의 제사장은 서서 일했다. 의자가 없기에 앉을 수도 없었지만 서 있다는 것은 그의 사역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같이 드려지는 제사이기에 끝이 없고, 끝이 없기에 앉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앉으셨다. 이것은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끝났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시 110:1의 말씀을 보면 원수가 발등상 되기까지 기다리신다고 했다. 이제 남은 예수님의 사역은 원수가 무너지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원수는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말하여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분명 사단이나 적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세력들이 멸해지기까지 기다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피동적 기다림이 아니다. 악의 세력이 붕괴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단번에 멸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극악한 죄인이라고 할찌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 아니 예정된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기다리시는 동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어떤 것인가 요한복음 14:2,3의 말씀을 보건대 우리가 머무를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가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처소가 다 예비되면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주님은 그 처소가 다 예비되기까지 한 영혼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원하여 기다리신다. 주님이 처소를 예비하며 다시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이제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늘 기다려야 한다. 그 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가 주께서 오라하시면 내 영혼이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며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인내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5. 보존을 위한 사역(15, 16절).
둘째 것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까지 제물로 영원히 거룩하게 한 자들이 멸망의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온전히 보전되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한 사역을 하고 계심을 증거하셨다. 칼빈의 5대 교리의 마지막 부분인 성도의 견인은 이 말씀이 굳게 뒷받침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번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다시는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히 보전해 주신다. 택한 자를 보전하신다는 것은 성령님이 증거하신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의 백성을 보전할 수도 없고 그의 보전을 증거할 이가 없다.
둘째 것의 온전함을 성령님이 증거하신다. 기록된 말씀으로 증거하신다. 성령님으로 기록된 말씀에 의해서 증거하신다. 성령님은 보혜사로, 돕는 자로, 상담자로, 창조주로(창 1:2), 창조 세상을 유지하시는 이로(시 104:30), 생명을 공급하시는 이로(창 2:7), 모든 성도에게 내주하시는 이로(행 2:1-14) 존재하시며 증거하신다. 그 분이 증거하기를
둘째 것은 영원한 제사로 온전히 구원을 이루었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이 멸망의 길을 다시는 가지 않게 한다고 증거한다. 성령님께서 법을 우리의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도록 하셨다. 아담의 경우에는 기록된 법이 없었다. 그러나 창조주로부터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있었다. 즉 모든 유의 거룩한 선행, 명령을 따르는 선행, 이것이 마음의 본성의 법이었다. 시 40:8의 말씀대로 주의 법이 그 심중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부패했다. 육신적인 생각은 거룩한 본성이나 영적 성향이나 소질 대신 죄를 그 안에 살게 하고 있다. 그것을 롬 8:2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영혼 속에서 새롭게 되었으니 그 법이 마음의 법, 생각의 법이다. 이 사역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누가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영원 전에 구별된 자들이요(엡 1:4), 하나님께서 중보자에게 준 자들이요(요 17:6),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이요, 미리 정하사 부르신 자들이다(롬 8:30). 이런 자들을 보호해 주시겠다고 성령님께서는 마음의 법에 새겨 주셨다.
6. 망각하심과 사유하심(18, 19절).
둘째 것의 하일라이트는 역시 하나님의 망각과 사유하심에 있다. 우리의 죄에 관한 한 기억도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죄를 도말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이지만(엡 2:1-3) 이제는 그 죄를 기억도 아니하시겠다고 하셨다(렘 31:34).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모르시는 것도 없다. 또 사람이 아니시므로 식언하거나 망각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잊어버리신다고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한 자의 모든 죄는 당신의 기억에서 모두 지워버리신다는 것이요, 한 번 지워버린 것은 다시는 재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믿는 자마다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하나님은 유괴범이나 흉악범과 같이 우리의 죄를 재탕 삼탕 울겨 먹으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의 권세에 눌려 살면 안된다. 회개한 부분에 있어서는 이제자유함을 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시고 망각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사유하지 못하고 자꾸 반복해서 생각하지는 않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도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잡아서 갚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결론을 맺는다.
둘째 것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첫째 것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이제 첮째 것은 폐하여졌고
둘째 것이 온전히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 것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 역류현상일 뿐이다. 새 역사를 위해서 과거는 폐기되어야 한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이제 더 이상은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합당치 않다. 첫것은 폐하여져야만 새것이 유효하게 된다. 제사제도의 폐지는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 없다. 이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제 옛사람이 제거되어야 새사람으로서 행실을 바로 할 수 있다. 새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을 수 없듯이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새 것을 입을 수 없다. 우리는 죄를 제거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야 한다.
둘째 것으로 온전하게 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용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용서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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