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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길 (히1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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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다. 이 사건을 어 려운 말로 성육신이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되 그냥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자연 세계에서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아기로 태어나시는 것이다. 누가 보던가 보통의 남자 아기였다. 하지만 그 아기는 전혀 보통 아 기들과는 달랐다. 무엇이 다른가 태어난 목적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세상에 아기들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나온다. 귀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부귀를 누리기 바란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고 많은 자손들 두고 죽기를 원한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할 것 같으면 부모들은 아예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일생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아예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아이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만큼 아기들은 축복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성탄의 주인공은 달랐다. 이 아기는 가능하면 비참하게 되기 위해 서 태어났다. 난지 8일이 되었을 때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슬픈 예언을 듣는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젊은 나이에 강도처럼 못박혀 억울한 죽음을 보리라는 것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처참하고 슬픈 그리고 억울한 인생을 살다가 갈 목적으로 나신 것이다. 이 아기가 다른 아기와 다른 점은 또 있다.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 을 보라. 아기는 사람의 일생 중 가장 무력한 기간이다. 반면에 일생중 가장 강한 기간이기도 하다. 자기 힘으로는 무능하지만 엄마의 도움으로 가장 완벽 하게 보호받는다. 부모의 모든 능력이 다 아기에게 쏟아진다. 이 아기는 달랐다. 육신의 부모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온 몸에 모든 저주가 쏟아졌지만 그냥 넘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왕으로부터의 박해등,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일찌감치 비뚫어졌을 상황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위대한 스승으로 자신을 키웠다. 모욕과 배신등 끝까지 모든 인간의 저주가 그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거기 눌려서 귀신처럼 망해가지 않았다. 이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하심, 이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이것만 확실하다 면 우리는 그 힘으로 살 수 있다. 본래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품안에 있었다. 처음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주의 면전에서 살고 있었다. 여 기서는 아무런 부족함이나 걱정거리가 없었다. 마치 부모가 아기의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번 사람 아담은 자기의 특권을 원수에게 팔아버린다. 그 결과가 현재 인간의 모습이다. 전혀 육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동산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엉겅퀴요 살벌한 자연 이었다. 생명은 인간에게 더 이상 없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무지개 같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잡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여러가지 종교들이 나타났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목마름을 표현한다. 여러 철학도 나타났다. 여러 방법으로 인간의 욕망이 표현되었다. 권력을 잡으려하고 아름다운 배우자를 얻으려고 하였다. 돈을 모으려고 하였다. 거대한 저택이 세워지고 여러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각종의 재미있는 일 을 찾아헤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길은 어디에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게 다 있어도 행복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사람들 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더 행복을 향해서 길도 모르며 달려가는 게 인간이었다. 부모의 품안에서 쉬는 아기가 바로 행복의 상징이다. 하나님 의 품안에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쉬는 인간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기 예수에게서 보여주는 그것을 사람들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만나지지 않았다. 여러분은 만났는가 여러분 은 그의 품안에 쉬고 있는가 정말로 풍파가 치고 무서운 일이 닥쳐도 엄마 품의 아기처럼 느껴지는가 필요한게 있어서 울기만 하면 당장 도움이 주어지는가 이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오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 나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그는 구름에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거룩한 막에 거하셨다. 적어도 그들 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는 보여졌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 접근할 대상은 없었다. 거기 접근했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론의 잘생긴 젊은 아 들들이 죽었다. 다윗의 친구가 죽었다. 한 왕이 접근하다가 문둥이가 되었다. 인간에게는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다. 단지 상징적으로 일년에 한번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대제사장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것도 죽음을 무릅쓰고 가는 것이다. 성막은 두 부분이었다. 성소와 지성소였다. 둘 사이는 10cm되는 두꺼운 휘장이 가로 막았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계셨다. 그는 지성소를 구름 으로 덮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길은 보였지만 완전히 막혀있었다. 이처럼 인간의 상황은 행복을 얻을 수 없었다. 비록 다른 백성들보다는 나 은 상태였지만 수백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무도 먼 대상이었다. 마찬가지의 현상이 오늘도 우리에게 벌어진다. 대부분 신자들에게 하나님 은 너무도 먼 곳에 있는 대상이다. 실제로 나의 현재 문제와 고통에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인가 그가 내게 줄 수 있는게 무엇인가 두꺼운 휘장은 인간의 죄를 의미하고 있었다. 악함, 하나님께 대항하는 배 신이다. 한이요 증오요 저주였다.
누가 그것을 걷어내겠는가. 오직 하나님 자 신이다. 그래서 성탄이 주어졌다. 그는 자기 몸으로 그것을 짊어진다. 십자가 에 달린다. 그의 몸이 찢어질 때 그 휘장도 함께 찢어지게 한 것이다. 비명과 함께 다 이루었음을 선언하자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내렸다.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가 된 것이다. 즉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길이 열 린 것이다. 이제 인간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만나진다. 자신을 감추지 않는다. 또한 지성소에 들어 온 인간을 죽이지도 않는다. 만나는 정도가 아니다.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살다가 힘이 부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면 않된다. 그의 아기가 되어야 한다. 품속의 아기처럼 전혀 무능할 때 하나님의 절대 보호를 받는 것이다.성탄을 보면서 복된 아기 예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품에 쉬어야 한다. 다시 말하노니 아기는 철저히 무능하다. 그에게는 자기의 수단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의 보호만을 의지할뿐이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 도저히 그의 품을 찾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곰곰히 생각하라. 원수가 자녀로 바뀐다.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다. 벤허는 죄수였다. 로마의 적이었다. 그는 사령관의 배를 젖는 노예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배가 침몰하자 사령관을 구한다. 여러날 함께 바다에 떠 돌다가 로마 함선을 만나 구출된다. 군사들은 사령관에게 마실 물을 바친다. 얼마나 목이 말랐겠는가! 그러나 사령관은 물그릇을 노예에게 내민다. 의 아하게 바라보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시라고 한다. 벤허는 물을 마시고 그 그릇을 사령관에게 돌려준다. 그러자 사령관은 그 그릇에 남은 물을 마신다. 이 장면이 말하는게 무엇인가 사령관과 노예는 완전히 화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예가 마시던 그 물을 먹을 정도로 그는 노예를 사랑하고 있었다. 전도사 시절에 병자들을 위해 기도한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어떤 결핵환 자를 만났다. 방안은 더러웠고 쓰레기통은 가래를 뱉은 휴지로 가득찼다. 병 자를 상담한 뒤에 그의 어머니는 점심을 대접했다. 그 병자와 그 방안에서 함 께 먹으라는 것이다.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걸 억지로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남긴 점심을 그의 어머니는 맛있게 먹어치우는게 아닌가! 여기서 차이를 보자. 남들은 토할 것도 부모는 사랑스러운 것이다. 누가 노예의 먹던 것을 먹겠는가! 그러나 더이상 벤허는 노예가 아니었다. 자기 양 자로 삼기로 결심한 청년이었다. 사령관이 죄수를 끌어안는 것과 이 어머니가 병자의 밥을 먹는 것 다 같은 이야기다. 이제 하나님은 저 높은 곳의 존재가 아니었다. 함께 밥 먹고 한 그릇의 물을 마시는 사랑의 존재를 바뀐 것이다. 성탄에 오신 그는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는 덧붙인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세상을 이기려면 그의 품에서 쉬어야 한다. 전적으로 무능하여 그의 말씀을 의지하라. 그는 이제 새 길이 되셨다. 이 길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만나게 한다. 그와 항상 같이 있게 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 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새길을 찾는 사람은 과거의 길을 버려야 한다. 그 길은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돈있고 사업 잘되고 소원대로 되면 그게 하나님 만나는 길이라 생각말라. 이제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으라. 예수가 만들어준 길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 성탄의 아기 예수의 모습, 그것이 새 길이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평안하라. 자신의 연약함과 전적인 무능을 인정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안기라. 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라. 주는 말씀하신다. "수고하 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께 문제를 드리라. 그리고 마음을 쉬라. 아기가 되라. 바보가 되라. 그에게 의지하라. 비록 내가 더러워도, 비록 내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은 나 를 자녀로 받으신다. 그리스도의 새길로 나아가라. 옛길은 자신을 의존하는 길이요 새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이다. 그가 내게 해 주신 일들을 받아들 이라. 그대로 믿으라. 그는 나를 하늘 성막의 제사장으로 인정해 주신다. 예수를 통해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자신의 몸을 영 적인 제사로 드려야 한다. 그렇게 예배하고 그렇게 그와 교제하라. 아버지와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보내라. 돈보다 명예보다 친구보다 교회의 집회를 사랑 하라. 그를 언제나 의식하라. 저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다. 열매를 나타 내라. 사랑을 가지라. 입술의 열매를 가지라. 아름다운 행위를 가지고 오라. 어떻게 이 아름다운 행위가 가능한가 포도나무와 가지는 같다. 그리스도 와 우리는 같다.
그러므로 우리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와 교제함을 아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도 능력도 지금 함께 교제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처음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부족함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 바로 그러한 상태임을 깨달으라. 너무도 쉬운 새길의 법이다. 성탄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이 새길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 품안의 아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아기가 되어 오셨다. 죄의 벽을 깨 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깨뜨렸다. 새로운 자신의 인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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