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영웅들 (히11:32-40)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저 유명한 히브리 신앙 영웅들의 빛난 생애와, 저들이 믿음으로 창조한 찬란한 신앙의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론적으로 11장 1절로 3절에서 믿음의 본질을 말하고 11장 4절로 7절에서 아브라함 이전에, 세 사람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11장 8절로 19절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20절로 31절에는 아브라함 이후 네 사람, 곧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믿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으로 오늘에 주어진 본문은 사지 시대 이후의 믿음의 선진들을 종합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들은 모두 신앙 생명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생명의 불사조들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힘은 바로 ‘믿음’에 의하여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들의 신앙 생명이 어떻게 나타났던가 그것은 한미다로 죽음도 불사하는 삶에서 나타났습니다.
I. 그것은 믿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에서 나타났습니다(11:33-3
4). 32절에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이들을 모두 신앙 영웅들의 목록에 빛나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이방 나라들과의 접전에서 이긴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1장 33절에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라 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이방 국가들을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 바락은 하솔왕 야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이겼습니다(삿4:15). 기드온은 미디안을 물리쳤습니다(삿7:22). 입다는 암목을 이겼습니다(삿11:33). 다윗은 블러셋은 물론 여부스와 아말렉, 에돔 족속을 정복하였습니다(삼하5장, 8장). 11장 34절 하반절에는 전쟁에 용맹되게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무수한 전쟁을 이겼다는 말은 바로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 됩니다.
2) 의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11:33). 이것은 개인적인 공명의 의가 아닌, 사회정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의 실현을 말합니다. 예컨대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습니다고 한 경우입니다(삼상12:4). 또한 다윗의 경우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할새.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삼하8:15). 저들이 행하는 그 의가 죽음을 이기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3)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11:33). 예컨대, 아브라함에게도 축복과 번성과 기업 후사이 약속을(히6:15), 기드온에게는 주되신 표징의 약속을(삿17:17, 24, 32, 34, 36-40). 마노아에게는 사실인의 약속을(삿13:5), 특별히 다윗에게는 성전과 그의 왕국에 대한 약속(삼하7:)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미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약속 성취를 향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저들의 삶을 용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4)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11:33). 그것은 마치 사자 굴속에 들어간 다니엘을, 하나님의 사자가 사자의 입을 봉해 주심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 순간이었습니다.
5)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였습니다(11:34). 이는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음이 죄가 되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두고 한 말이 됩니다. 저들은 그 죽음의 불꽃 속에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아니하고, 산채로 불꽃 속에서 다시 나오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영웅들입니다.
6)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11:34). 다윗은 사울의 칼날 앞에서 살아 남았습니다(삼상18:11).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 앞에서 살아 남았습니다(왕상19:1, 10). 엘리사는 아람 왕의 칼날 앞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왕하6:12-19).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7)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11:34). 히스기야는 죽을 병 가운데서 살아남았습니다(사38:1-9). 드보라는 연약한 여자 였으나, 가나안 왕 야빈의 침략을 받고 용맹을 떨쳐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삿4:). 기드온(삿8:24-27), 바락(삿4:12-16), 삼손(삿16:4-22), 입다(삿11:34-40), 그리고 다윗 등도 연약한 죄인들이요,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는 믿믕 안에서 용맹을 떨쳐 죽음을 이기는 신앙 영웅의 삶을 치루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죽음의 자리에서 죽지 않고, 승리한 신앙의 영웅성, 생명의 영웅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Ⅱ. 믿음의 능력으로 고난을 감수하는 인내의 삶에서 나타났습니다(11:35-38).
1)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11:35). 예컨대, 사렙다의 과부는 에리야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되살림 받았습니다(왕상17:23). 수넴의 여인은 엘리사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부활로 받았습니다(왕하4:35-37).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를 통하여 죽은 딸을 부활로 받았습니다(막5:40-43). 나인성 과부는 죽은 아들을 예수로 말미암이 부활로 다시 받았습니다(눅7:11-14).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형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죽은 오라비를 부활로 받았습니다(요11:17:44). 모두 모두 죽음과 한 판 승부를 하고 승리한 자들이었습니다.
2)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였습니다(11:35). ‘더 좋은 부활’이 무엇인가
둘째부활, 곧 마지막 부활입니다. 예수 재림시에 받을 영화로운 불사체(不死體)의 부활을 말합니다. 저들은 ‘악형을 받았다’는 말은 ‘북을 치듯이 죽도록 때린다’는 뜻입니다. 이 형벌은 죄수를 형틀 위에 누인 후에 사지가 팽팽해지도록 말뚝에 잡아 맨 뒤에 사지의 연결부분을 창으로 찔러 피를 내고 나서, 배와 가슴을 북치듯이 쳐서 둑이는 비인간적인 극형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형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 안티오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멸운동 때 이 형이 유대인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박해사(迫害史)는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악형이 예수 신앙이 죄목이 되어, 가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이런 죽음의 고난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3) 희롱과 채찍을 받았습니다(11:3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 충성되이 증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제사장 임멜의 아들인 바스훌에게 매를 맞았습니다(렘20:2). 많응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렘29:7, 9). 예수의 사도들은 새 술에 취한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행2:12). 바울은 염병 같은 놈으로, 미친 놈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행26:24). 수없는 굶주림과, 목마름, 매맞음, 헐벗음이 계속되었습니다(고후11:).
4)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6).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렘20:2, 37:15, 39:26). 베드로가 그러하고(행12:3-5),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고후11:23). 미가야 선지자가 그 곳에서 공생의 떡과 물을 마셨습니다(왕상22:27). 결코 이세상 감옥이라고 하는 장소가 악인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의의 사람, 경건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신앙의 죄목때문에 들어갔던, 고난의 가시밭도 되었습니다.
5) 돌로침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하다가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하24:20-22). 나봇은 조상 전래의 유업인 포도원을 지키려 하다가 왕과 백성이 함께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상21:13). 스데반 집사는 예수를 증거하다가 동족인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7:59). 터툴리안(Tertullian)은 말하기를 예레미야는 유대인의 전승을 따라 결국 돌에 맞아 죽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고난을 믿음으로 감수한 자들입니다.
6) 톱으로 켜서 죽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11:36).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에 의해 나무로 만든 톱에 의해 그 몸이 두동강이로 쪼개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므낫세 왕의 우상숭배 강요에 불복하고, 오히려 그 죄를 책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순교자 져스틴 마티(J, Martyr)나 터툴리안(Tertullian)도 알려 오고 있습니다.
7)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11:36). 이세벨은 그의 칼로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왕하19:19). 예레미야 시대 우리야도 그렇게 죽임을 당한바 되었습니다(렘26:23).
8)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7). 엘리야가 그러했고(왕하1:8, 19:19), 엘리사도 그러했고(왕하2:8), 세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막1:6). 그리고 역대 환난시대를 살아가던 모든 앞서간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세상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돌이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광야와 암혈과 산중과 토굴이 저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11:38).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 생활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막해를 피하여 호렙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중세기 유구노당, 왈도파가 그러했고, 저 화란과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생태학적으로, 본질적으로 이 세상이 저들에게 적합하지 못한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전혀 이 세상 애굽과 고모라를 예수의 백성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돼지가 거처하는 장소는 생태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Ⅲ. 그것은 믿음의 소망으로 오직 전진하는 삶이었습니다. 11장 39절로 40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로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믿음을 따라 확실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는 그 약속된 상급을 백퍼센트 형유를 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니미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것’은 앞에서 말한 ‘더 좋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곧 천국, 영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달려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나은 본향(11:16), 곧 하늘에 있는 본향, 더 좋은 부활(11:35), ‘더 좋은 것이 예비된 곳’(11:40)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저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생각하였습니다(11:13). 그래서 저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사는 날 동안의 시간과 살고 있는 활동의 공간(장소)을 우거하는 자로 여겼습니다(11:9). 잠깐동안 외욱에 거류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세상에서 외국인이며, 거류자(居留者)이며 나그네요, 길가는 순례자였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Tertullian)은 기독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이 땅 위에서 순례자이며, 자신을 확보하는 지위는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말하기를 ‘이 땅 위에 우리에게 영원한 조국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들 조국에서 추방된 거류자들이이다’고 하였습니다. 이허한 우리 선배들의 말은, 기독교가 이세상과 관계가 없다거나, 동떨어져 있다던가, 이 세상에서의 시민(국민)의 의무가 소용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선교의 무대요, 복음 전파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지나갈 교량과 같은 곳이다. 현명한 자는 그 교량 곧 다리를 지나 건너갈 따름이지, 그 교량위에 결코 자기 집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얻은 믿음을 가진자들은 예외가 없이 생명의 영웅들입니다. 그것은 신앙 생명의 영웅들을 의미합니다.
I. 그것은 믿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에서 나타났습니다(11:33-3
4). 32절에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이들을 모두 신앙 영웅들의 목록에 빛나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이방 나라들과의 접전에서 이긴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1장 33절에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라 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이방 국가들을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 바락은 하솔왕 야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이겼습니다(삿4:15). 기드온은 미디안을 물리쳤습니다(삿7:22). 입다는 암목을 이겼습니다(삿11:33). 다윗은 블러셋은 물론 여부스와 아말렉, 에돔 족속을 정복하였습니다(삼하5장, 8장). 11장 34절 하반절에는 전쟁에 용맹되게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무수한 전쟁을 이겼다는 말은 바로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 됩니다.
2) 의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11:33). 이것은 개인적인 공명의 의가 아닌, 사회정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의 실현을 말합니다. 예컨대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습니다고 한 경우입니다(삼상12:4). 또한 다윗의 경우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할새.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삼하8:15). 저들이 행하는 그 의가 죽음을 이기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3)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11:33). 예컨대, 아브라함에게도 축복과 번성과 기업 후사이 약속을(히6:15), 기드온에게는 주되신 표징의 약속을(삿17:17, 24, 32, 34, 36-40). 마노아에게는 사실인의 약속을(삿13:5), 특별히 다윗에게는 성전과 그의 왕국에 대한 약속(삼하7:)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미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약속 성취를 향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저들의 삶을 용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4)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11:33). 그것은 마치 사자 굴속에 들어간 다니엘을, 하나님의 사자가 사자의 입을 봉해 주심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 순간이었습니다.
5)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였습니다(11:34). 이는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음이 죄가 되어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두고 한 말이 됩니다. 저들은 그 죽음의 불꽃 속에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아니하고, 산채로 불꽃 속에서 다시 나오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영웅들입니다.
6)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11:34). 다윗은 사울의 칼날 앞에서 살아 남았습니다(삼상18:11).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 앞에서 살아 남았습니다(왕상19:1, 10). 엘리사는 아람 왕의 칼날 앞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습니다(왕하6:12-19).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7)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11:34). 히스기야는 죽을 병 가운데서 살아남았습니다(사38:1-9). 드보라는 연약한 여자 였으나, 가나안 왕 야빈의 침략을 받고 용맹을 떨쳐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삿4:). 기드온(삿8:24-27), 바락(삿4:12-16), 삼손(삿16:4-22), 입다(삿11:34-40), 그리고 다윗 등도 연약한 죄인들이요,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는 믿믕 안에서 용맹을 떨쳐 죽음을 이기는 신앙 영웅의 삶을 치루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죽음의 자리에서 죽지 않고, 승리한 신앙의 영웅성, 생명의 영웅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Ⅱ. 믿음의 능력으로 고난을 감수하는 인내의 삶에서 나타났습니다(11:35-38).
1)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11:35). 예컨대, 사렙다의 과부는 에리야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되살림 받았습니다(왕상17:23). 수넴의 여인은 엘리사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부활로 받았습니다(왕하4:35-37).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를 통하여 죽은 딸을 부활로 받았습니다(막5:40-43). 나인성 과부는 죽은 아들을 예수로 말미암이 부활로 다시 받았습니다(눅7:11-14).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형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죽은 오라비를 부활로 받았습니다(요11:17:44). 모두 모두 죽음과 한 판 승부를 하고 승리한 자들이었습니다.
2)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였습니다(11:35). ‘더 좋은 부활’이 무엇인가
둘째부활, 곧 마지막 부활입니다. 예수 재림시에 받을 영화로운 불사체(不死體)의 부활을 말합니다. 저들은 ‘악형을 받았다’는 말은 ‘북을 치듯이 죽도록 때린다’는 뜻입니다. 이 형벌은 죄수를 형틀 위에 누인 후에 사지가 팽팽해지도록 말뚝에 잡아 맨 뒤에 사지의 연결부분을 창으로 찔러 피를 내고 나서, 배와 가슴을 북치듯이 쳐서 둑이는 비인간적인 극형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형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 안티오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멸운동 때 이 형이 유대인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박해사(迫害史)는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악형이 예수 신앙이 죄목이 되어, 가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이런 죽음의 고난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3) 희롱과 채찍을 받았습니다(11:3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 충성되이 증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제사장 임멜의 아들인 바스훌에게 매를 맞았습니다(렘20:2). 많응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렘29:7, 9). 예수의 사도들은 새 술에 취한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행2:12). 바울은 염병 같은 놈으로, 미친 놈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행26:24). 수없는 굶주림과, 목마름, 매맞음, 헐벗음이 계속되었습니다(고후11:).
4)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6).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렘20:2, 37:15, 39:26). 베드로가 그러하고(행12:3-5),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고후11:23). 미가야 선지자가 그 곳에서 공생의 떡과 물을 마셨습니다(왕상22:27). 결코 이세상 감옥이라고 하는 장소가 악인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의의 사람, 경건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신앙의 죄목때문에 들어갔던, 고난의 가시밭도 되었습니다.
5) 돌로침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하다가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하24:20-22). 나봇은 조상 전래의 유업인 포도원을 지키려 하다가 왕과 백성이 함께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상21:13). 스데반 집사는 예수를 증거하다가 동족인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7:59). 터툴리안(Tertullian)은 말하기를 예레미야는 유대인의 전승을 따라 결국 돌에 맞아 죽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고난을 믿음으로 감수한 자들입니다.
6) 톱으로 켜서 죽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11:36).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에 의해 나무로 만든 톱에 의해 그 몸이 두동강이로 쪼개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므낫세 왕의 우상숭배 강요에 불복하고, 오히려 그 죄를 책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순교자 져스틴 마티(J, Martyr)나 터툴리안(Tertullian)도 알려 오고 있습니다.
7)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11:36). 이세벨은 그의 칼로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왕하19:19). 예레미야 시대 우리야도 그렇게 죽임을 당한바 되었습니다(렘26:23).
8)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7). 엘리야가 그러했고(왕하1:8, 19:19), 엘리사도 그러했고(왕하2:8), 세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막1:6). 그리고 역대 환난시대를 살아가던 모든 앞서간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세상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돌이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광야와 암혈과 산중과 토굴이 저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11:38).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 생활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막해를 피하여 호렙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중세기 유구노당, 왈도파가 그러했고, 저 화란과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생태학적으로, 본질적으로 이 세상이 저들에게 적합하지 못한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전혀 이 세상 애굽과 고모라를 예수의 백성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돼지가 거처하는 장소는 생태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Ⅲ. 그것은 믿음의 소망으로 오직 전진하는 삶이었습니다. 11장 39절로 40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로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믿음을 따라 확실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는 그 약속된 상급을 백퍼센트 형유를 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니미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것’은 앞에서 말한 ‘더 좋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곧 천국, 영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달려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나은 본향(11:16), 곧 하늘에 있는 본향, 더 좋은 부활(11:35), ‘더 좋은 것이 예비된 곳’(11:40)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저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생각하였습니다(11:13). 그래서 저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사는 날 동안의 시간과 살고 있는 활동의 공간(장소)을 우거하는 자로 여겼습니다(11:9). 잠깐동안 외욱에 거류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세상에서 외국인이며, 거류자(居留者)이며 나그네요, 길가는 순례자였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Tertullian)은 기독교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이 땅 위에서 순례자이며, 자신을 확보하는 지위는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말하기를 ‘이 땅 위에 우리에게 영원한 조국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들 조국에서 추방된 거류자들이이다’고 하였습니다. 이허한 우리 선배들의 말은, 기독교가 이세상과 관계가 없다거나, 동떨어져 있다던가, 이 세상에서의 시민(국민)의 의무가 소용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선교의 무대요, 복음 전파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이 지나갈 교량과 같은 곳이다. 현명한 자는 그 교량 곧 다리를 지나 건너갈 따름이지, 그 교량위에 결코 자기 집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 얻은 믿음을 가진자들은 예외가 없이 생명의 영웅들입니다. 그것은 신앙 생명의 영웅들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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