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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믿음 (히11:4)

본문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를 견디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아쉬워하면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설명하기를 원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이후에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아벨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믿음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 하지 않고 왜 하필이면 아벨부터 시작하고 있을까요 믿음의 시작이 아담이 아니고 아벨인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듣고 보고서 따랐던 생활이었지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선조로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에덴 밖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조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아벨의 이름도 의미가 있습니다. 아벨의 이름의 뜻은 “허무하다”입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이름과 대조가 됩니다. 가인은 “아! 아들을 얻었다”라는 뜻으로 아들을 얻고난 후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가인에 대한 또 다른 말은 “나는 바로 그를 얻었다”입니다. 이 말은 이미 기대하고 있는 사람을 얻었다는 말로써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둘째 아들을 낳고 기쁨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아벨에게 일어날 운명을 직감한듯한 이름이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짓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아벨은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 허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그 나이 아직 청년이었을 때, 날개도 펴기 전에 생명을 마무리 지어야 했던 허무한 삶을 살았던 사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아벨을 허무하게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된 첫 사람이요, 순교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장에서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는 아벨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1. 믿음의 시작 아벨은 믿음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습니까 롬 10:17의 말씀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믿음은 어디에서 출발했습니까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그런 직접적인 말씀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그의 생활 태도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기록하기를 “믿음으로 아벨은”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이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아벨, 믿음의 첫번째 인물인 아벨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벨의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신실한 예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신실한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가 신실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바른 믿음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아벨의 예배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정해진 장소에서 드려졌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단으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성막이 있기 전에는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의 돌단이 그랬습니다. 일정한 장소는 중요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무교회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하면 된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일정한 장소로 모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히 10:25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아벨의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드려졌습니다. 아벨도 정해진 시간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 4:3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번역하면 “날들의 마지막에”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시간의 마지막을 말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예배를 드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셋째로 정해진 방법으로 드려졌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정해주신 방법대로 드려졌습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제사를 드리는 법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이시고 설명하기 전에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창 3:21에서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입힌 것이 아닙니다.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야만 했고 짐승을 잡으면서 생명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옷으로 죄를 가리우는 것을 보여주시고 죽음을 통해야만 죄용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히 9:22, 레 17:11). 쉬운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히시면서 제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사의 정해진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벨은 그 방법을 따랐습니다. 지금도 예배의 방법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예배 드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마음과 인격과 생활이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드려져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말로만 드려지거나 한 시간 앉아 있는 것으로만 드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변화를 받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받고 분별하는 생활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예배당 안에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롬 12:3 이하엠서는 구체적은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살아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창 4:4,5에서는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했고, 5절에 보면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고 가인의 제물을 받기 전에 이미 받으신 것과 안받으신 것이 있습니다. “아벨과”라는 말과 “가인과”라는 말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제물을 드리기 이전에 이미 그들 자신을 먼저 받고 받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모양이 아니라 예배의 자세입니다. 경건의 모양도 중요하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모양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진정으로 드리지 못하는 자들이 어찌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자신을 먼저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아 주셨고 그 예배를 통해서 바른 믿음을 확신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시작인 아벨은 바른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2. 아벨의 제사와 제물 이제 두 번째로 아벨의 믿음의 표현인 제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 제사에 드려진 제물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일정한 방범이 있었고 거기에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아벨이 드린 양이 숫놈이 아니라 암놈이라는데 있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이 여성명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벨이 드린 제사가 속죄제가 아니라 화목제라는 말입니다. 화목제는 대속을 통한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감사와 서원을 목적으로 드려집니다. 화목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에는 소, 양, 염소가 드려집니다. 암컷 수컷 구분 없이 드려집니다. 하나님께 피를 드리고 이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속죄제가 아니라 화목제라는 말은 가인의 제사와 연결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화목제의 성격이라면 가인이 농산물을 드린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레 19:24에 보면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가인이 피를 안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방법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와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것의 표준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순종이 있는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이신 제사를 보고서 명령대로 순종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제사 그 자체보다는 순종을 원하십니다(삼상 15:22). 순종이야말고 최고의 제사입니다. 자의적 순종이 있는 제사(골 2:23), 믿음으로 따르는 제사, 자진하는 마음으로의 제사(고후 8:12), 예수님의 희생을 기다리며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제사였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곡물을 드렸기 때문에 안받은 것도 아닙니다. 곡물은 비록 죄를 위한 것일지라도 피를 드릴 때 같이 드리면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인의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를 안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마음과 방법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 아닌 자신의 방법을 따라 드렸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자기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의무로만 드려진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자신의 방법이 아닌 부모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부모님께 효도한답시고 여행을 다니게 한다면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극약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순종입니다. 순종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 의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니까 마음은 없이 의무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 받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 순종하므로 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입니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은 숭배자처럼 가장하지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았던 위선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드려지지 않은데 대해서 분노를 금하지 못했습니다(창 4:3).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했습니다(창 4:6-7). 살인했습니다(창 4:8). 거짓으로 빈정댔습니다(창 4:9).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창 4:10-15). 슬퍼하기는 했으나 회개가 없었습니다. 마치 가룟유다와 같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있었으나 회개가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한나님을 떠나갔습니다(창 4:16). 하지만 아벨은 달랐습니다. 가인과 비교가 안되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기뻐하셨습니다.
3. 믿음의 결과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의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일 3:11-12에 보면 아벨은 의롭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고 롬 3:10에 분명히 말씀을 하였는데 어떻게 아벨이 의롭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그도 역시 죄의 모습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제사를 통해서 의를 전가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고후 5:21참고). 의롭다는 증거는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의란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에서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위로 증명될 수밖에 없습니다(약 2:14-24참고).
뿐만 아니라 그는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지만(사 57:21)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에게는 평강이 따릅니다. 그러나 아벨의 결과는 그리 좋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믿음의 결과로 오히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더 나은 제세를 드렸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믿음의 결과가 반드시 만사형통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편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할 때 보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술대접하는데 대한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마귀와 거슬러 가려면 그만큼 저항이 거세기 마련입니다. 빨리 뛰는 사람이 바람을 더 거세게 맞고 오래 뛰는 사람이 바람도 더 많이 맞는 법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욕을 많이 듣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때에 따라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악인 앞에서 무기력해 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무기력하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마치 아벨이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했듯이 무기력하게 넘어집니다. 이것을 안타까와하면서 기록한 것이 욥기 21장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를 떠난 자가 성령님을 따라 난 자를 지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지배했던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한탄하면서 갈 4:29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님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세상이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벨의 죽음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하다가 일이 막히고 잘 안풀려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가 다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냥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육체적 죽음만을 생각하면 허무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를 보면 결코 허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살아서 계속 말을 했습니다. James Moffatt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의로운 사람의 생에 있어서 죽음은 결코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남거나 교훈이 남기도 하고 이름이 남기도 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아벨은 지금도 말하고 있고 살아서 오고오는 모든 세대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게 죽은 것 같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약해서 죽는 것 같다고 울고 낙심하지 말고 허무한 것을 통해서 말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새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믿음으로 사는 참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천추만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가인은 아벨보다 더 오래 살기는 했지만 그의 결과는 오직 공포심밖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창 4:14). 공포 때문에 그는 에녹과 함께 성을 쌓았습니다(창 4:17). 그는 저주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창 4:11,12). 창 4:16에 기록된 “놋”은 유리하며 방황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달랐습니다. 그는 죽임을 당하여 허무한 것 같았으나 오히려 살아서 말했습니다. 누가에게 말했습니까 창 4:10에 보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계6:9-10참고). 가인에게도 말했습니다. 가인이 피흘린 땅을 볼 때마다 아벨의 피를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벨은 모든 인류에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징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죽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서 참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후대에 전했습니다.
아벨은 죽음 후에도 후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도록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고난을 받기는 하지만 중간에 타락하여 떨어져 나가지 말고 아벨과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들마다 귀가 열려서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아벨은 믿음의 시작이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고 하는 시대를 초월한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약하여 배교하려는 사람들에게 힘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허무한 것 같이 죽었으나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말하는 믿음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예수님의 모형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너무 쉽게 아벨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있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가인보다 더 나은 것을 드리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마 5:20에 이르기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새기면서 아벨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환경에 얼마나 좌우되고 있습니까 환경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습니까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기쁘게 하는 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도 아벨을 본받아 허무한 것 같은 세상에서 절대로 허무가 아닌 능력 있는 믿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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