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사 (갈3:6-4:7)
본문
먼저 갈3:6-4:7까지 보십시다.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의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4: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또 히브리서를 한번 보십시요 히브리서 8:1-13 "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 것이니라 " 이제 성경을 이해하는 근본 뼈대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 청년과 산수교회 청년과 잘아는 것인데 강의를 하 라고 하니 또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토대를 붙들고 있으면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바른 빛을 줄 것입니다.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책 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책인데 곧 그 효력에 영생을 주는 책인가. 그것은 "너희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 해서 증거한다."요8장에 말씀 했잖아요. 그러면 왜 성경이 그리스도의 책인데 곧 영생을 우리에게 주는 책인가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너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곧 그것이 생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또 지으셨을 뿐만 아니 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셔서 그와의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와의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의 생명의 본질이다. 그 관계가 파괴 됐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로 창세기 3:15절에서 처음 구원의 약속을 거기에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역사 안에서 발전시키시며 그리고 그 약속 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는가 하나님은 친히 구원의 약속 안에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그 약속 이 예수 안에서 성취하는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이루신 그 구원의 일들을 모두 기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은 곧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책이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이 친히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그 역사 안에서 자기의 구원을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으로 나타내셔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다시 교제하시고 부르심은 중보자의 구속행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번에 완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라 그 약속이 하나님이 친히 자기 구원 역사를 진행시키면서 여러 방식으로 나타내셨 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여러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그 약속에 대한 내용이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을 아는 것은 곧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냥 느닷없 이 오신 것이 아니라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친히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계속 역사를 진행해 오셨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전부 언약적인 발전으로 나타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언약적인 그 발전을 아는 것이 성경 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언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뼈대 가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성경은 신론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신론적으로 해석 하는 것은 곧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언약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라 하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해석에 서 무슨 구속사적인 해석이니 하는 말이 같은 말이어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친히 자기 구원 역사를 진행 하셨거든요.그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고, 구원 역사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교제 역사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 구속의 역사를 점점 발전적으로 진행 시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느닷 없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 언약의 역사를 앎으로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안다. 그러니까 언약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중 요하다 그런 말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에 나타난 언약을 보십시다.
여기 히 8장 제 일 끝에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거기 "새언약"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옛언 약"이란 말이 있는가 거기 옛언약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마는 새 언약 을 말씀하셨고 이 새언약은 무엇과 대비되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 여 내던 날에 자기와 새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8:9절에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저희와 새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하니까 우리가 여기서 '옛언약' '새언약' 그런 말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옛언약은 무엇인가 하면 모세 언약을 두고 옛언약이라고 그럽니다. 새언약이란 그리스도로 주신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히브리서 9장은 그렇게 말하지요.주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 언약이 이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좀더 살펴 보면 이 옛언약과 새언약은 다 둘다 합쳐서 하나님의 은혜언약입니다. 은혜 언약이고 구속 언약입니다. 엣언약과 새언약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요 구속의 언약입니다. 이 둘다 똑같이 그런데도 하나는 옛언약, 하나는 새언약 그렇개 말씀하심으로 그것의 나타남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타남을 펼쳐 보인 것 뿐이어요. 그러나 같은 언약이다. 옛언약과 새언약은 은혜언약과 구속 언약으로서 동질성이 같은 것인데도 어떻게 이 것이 대비되는가 문제를 우리가 설명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언약 말고 또 다른 언약이 있는가 그것은 처음에 나타나는 창2:16,17에 거기 보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 라 "하는 거기에 제일 처음 언약 관계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소위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위 언약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창2:16,17에 행위 언 약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언약사에서 구별되는 것은 바로 행위 언 약과 은혜언약 이 둘로 대별됩니다. 아담이 범죄하게된 행위언약,아담의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리라 약속하신 3:15을 시발점으로 하는 은혜언약 이 둘로 나뉘어져요. 그래서 하나는 행위언약 또 하나는 소위 구속의 언약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둘로 나뉘어 집니다. 이 구속의 언약이 하나님이 그 언 약을 진행시키는 역사 안에서 하나를 옛언약,하나는 새 언약 하는 방식으로 두 경륜 이 있다. 두 시기가 있다. 구속의 언약의 두 시기가 있는데 예수 이전 시기를 말하자 면 옛언약시기라고 말을 하고 예수 오심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새 언약 시기라고 말을 한다. 그렇게 둘로 대별되지요 그러면 이제 좀더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 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약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본래가 언약적인 관계여요. 그것이 제일 처음 나타난 것은 창
1,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를 지으셨다는 그런 내용과 특별히 2장 처음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해서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는 것이 제일 처음 본래 주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 언약적인 형태로 말하자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방식으로 2:16,17절에 나타나 있어요. 근거는 앞에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질서에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없는 것 중에서 '있을찌어다' 그렇게 지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본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이런 존재로 사람을 세우신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을 뿐 만 아니라 또 그렇게 지은 방식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이렇게 말을 해요. 그 지으심에 문제를 두고도 말씀으로 있으라 하심에 있었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런 방식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안에 깊은 도모가 있고 계획이 있고 그리고 그 계획 은 따라서 특별한 방식으로 지으신 것을 말해요.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 지으실 때도 그 를 특이하게 지었고 또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 7일에 하나님이 기쁨의 그를 세움으 로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복주셨다. 제 7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 게 했다는 말은 다른 날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나타나심이 온 세상에 부요 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하루를 구별하고, 하루를 구별했다는 것은 (복된날로 구별했다) 하나님을 복되심을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복되심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복된날로 선별하셔서 그날을 복되심 날임과 교제의 날로 구별하셨다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러니까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제 칠일 안식일에 나타나고 있는데 인간 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으시고 그의 기쁨에 인간을 참여시켜서 그를 경배하는 존재로 거기 세우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은 하나님이 지으셨을 때 땅에 사망이 없었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심이 참 풍성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특별히 한 나무를 세우시고 거기서 하나님이 생명의 교제 ,생명의 풍성함을 특이 한 방법으로 나타낸 것처럼 온 날에 온땅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날을 복된날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심으로 (혹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이지요) 하나님의 기쁨에 인간을 참여케 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복주셨다. 거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교제로 세우심이 잘 나타나 있어요. 그리고 2:16,17에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도 그런 언약 관계로 세우시지요. 네가 내 말을 순종하면 살고 안순종하면은 죽는다 그런 방식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단순한 본 성적인 존재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서 영적이고 종교적이 고 윤리적인 존재로 세우셨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교제가 파괴되면은 인간 되기를 멈 추는 방식이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반영하는 존재로 그의 대리자로 그와의 교제 가운데로 세우셨기 때문에 그 교제가 파 괴되면 그것은 사망입니다. 그런 관계로 처음 사람을 세우시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여요. 소위 여기 행위 언약이나 구속 언약이나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입니다. 말한자면은, 그러나 신학적으로 쓰기를 정말 가치 없는 피조물 하나님의 원수된 아무 쓸모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무조건적인 선하심을 은 혜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의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 고 행위 언약 자체도 인간의 행위로 무엇을 얻는다는 그러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의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곧 그것이 무한하신 은 혜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허리를 굽히셔서 그가 교제 가운데로 자기를 주셨으니 그것이 은혜 중의 은혜여요. 그러나 거기에는 죄가 발동되기 전이거든요. 아직 죄가 아담 안에 역사하기 전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든 피조물을 자기 교제로 세 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말하고 있지마는 아담이 범죄한 뒤로 원수에 게 베푸신 은혜와 범죄 하기 전에 그가 지으신 피조하신 선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혜 와 그런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구속의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말한 것 뿐이고 실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제입니다. 그가 친히 자기를 낮추셔서 자기를 주신 것 뿐이여요.
그러면 왜 2:16,17 나타난 언 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그러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은 곧 인간의 순종이고 울타리여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성적인 피조 물인 천사와 인간에게 거룩을 요구합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을 순종함이 거룩의 본질 이기 때문이여요. 그래야만 하나님을 반영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교제 가운 데 사는 것은 참다운 순종으로 나타난 것이고 만일에 인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자 기의 권능이 신적인 권능으로 나타났을 때 스스로를 자립하는 존재로 해석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은 그것은 창조자와 언약 안에 교제 안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신적 인 존재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 안에서 요구된 행동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는 행 동까지라도 행동이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안에 그 교제 안에 사는 사람의 울타리는 곧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이고 믿음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요 하나님을 순종함이 그의 생명이고 그 외에는 생명의 근원이 없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만물의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나타내심인 것이고 지은 모든 세계를 뜻대로 개발해서 하나님께 돌림이 곧 그의 삶의 목표요 내용이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처음부터 이처럼 믿음의 존재로 세웠 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요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그와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이것은 인격적인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관계,신뢰의 관계, 순종의 관계지요. 신뢰요,곧 순종입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생명의 존재 방식은 믿음의 존재 방식이다. 만일에 그것을 떠나서 스스로 그것을 해석하고 스스로 선악을 알 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악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출발하 면 그는 만물의 선악을 규정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 그것은 의존적인 존재 방식이 아니라 자존적인 존재 방식이고 그것은 믿음의 존재 방 식이 아니여요.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언약의 대상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떠나서 스스로를 자존자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명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가 언약 관계이고 그 본질 자체가 언약 관계이고 곧 그 것이 믿음의 관계요 곧 그것이 생명 이여요. 그러나 아담이 그 위치를 떠났지요. 보통 우리들은 어째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만들어 놓고 괜히 만들어 아담이 먹게 했느냐. 뻔히 알면서 그래서 딱 잡아 놓고 묶어 놓고 너 내말 잘들어. 말하자면 애기 한데 독약 놔두고 먹은 뒤로 살려 놓고 하는 말이 어째서 네 아버지가 주었느냐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참 하나님이 불량하다. 말하자면 참 망령스런 말이지요. 그 단어를 안써도 하나님이 참 잔인하고 묘하다 이제 이런 식이지요 말하자면.하나님을 모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말 표현을 안해도 그런 뜻입니다. 실은 , 왜 하나님이 다 알면서 그랬느냐. 그것을 소위 명쾌하게 해석하는 분이 우리 나라에 있어요. 그것은 뭐 복잡할 것 없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지으셨고 모든 것은 하나님 이 하시니까 인간은 아무 말 할 것 없다. 하나님이 빛도 지으시고 어두움도 지으셨으 니 하나님이 자기 영광에 필요하니까 죄를 지으신 것이고 그래서 묶어 놓으니 아담 때 부터 더 큰 완전함으로 우리를 올리 잖느냐. 그러니까 손해될 것이 무엇이냐. 다 이익 뿐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거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었고 먹게 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먹는 아담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고 죽게된 아담을 살리므로 더 큰 영광을 받지 않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하여 징검다리로 필요한 것이지 악 자체는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나쁜일이 없 거든요. 악 자체가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팀이 있어요. 이제 그분이 책도 내놓고 Tape도 나오니까 이름을 말을 해야 그 위험성에서 벗어나겠지요. 소위 박용규 목사라고 계셔요. 그분이 이론을 전개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풀 면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그러면 하나님은 골인 지점에서 복을 주시리라. 말로는 칼 뱅주의라 하면서 매 인간의 행위만 가르쳤어요. 너희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면 복을 줄 것 아니냐 너도 야곱처럼 해 봐라 꿈의 환상을 보고 줄 것 아니냐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면 저기서 삐끗이 웃으며 돌아오며 너 왔냐 하고 복이나 주는 이런 하나님으로 해석해 왔어요. 그러면 그런 것이 인간을 괴롭게 했는가 정말 거듭난 인간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 해서, 아 너는 이만큼 잘 했냐 하나님이 상줄만한 수준에 올라온다는 것은 방금 아담이 범죄한 그 원리를 따라서는 인간이 가장 소망하는 바고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바예요. 내가 수고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서고 그렇게 하면 특별히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복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어요. 죽어라고 수고하면 내가 그런 자리에 올라야 맞을 것이라. 그것은 어떻게 보면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최상의 힘을 제공하는 것처럼 되었 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가 가짜지요. 그래도 몰라요. 오늘의 한가지 부 족점이 있다면 그가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는 것 이니까.
그것은 그런데도 오늘은 99하고 내일 한나절 더하자 하고 편히 자요. 그 하나 가 부족한 것이 전체가 부족한 것인줄 몰라요. 그 성취 개념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도 모를 뿐 만 아니라 이렇게 되버리기에 스스로 사람 양심을 화인 맞게 하는 것이고 스스로 모르고 그러고도 죽어라고 힘을 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 자 기가 성취한 줄 모르고 피곤함이 없어요. 참으로 성취가 모르면 자살해서 죽게 되어야 하는데 그 성취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의 완전함에 참여 안하면 성취가 안되는 것이거든요. 인간에게는 그런 성취가 없어요. 오늘의 선행이 어제의 죄악을 닦이질 못 해요. 완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을 말하지 내가 죽을 때 완전해도 죽기 전에 잘못 이 용서받지는 못해요.
그런데 그 완전의 개념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수고하고 하지요. 그러니까 헌금 제도를 고쳐서 부드럽게 하면은 소위 교인들이 많이 불고,헌금을 많이 요구하면 아주 어느 교회라면 돈 없으면 교회도 못 가겠더라. 교회 를 안 올 것 같아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많은 헌금을 요구하고 그 헌금에 상응하는 복을 그만큼만 확실한 방식으로 보장하면은 그것은 소위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좋은 일이예요. 또 확실히 보장하기 때문에 우상 심리는 그것을 더 원하는 겁니다. 왜 많이 내는 만큼 많이 버는 보장만 있으면 조금 내면 불안한 것이어요. 왜 자기 성취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부흥사들이 하는 부흥회에 많은 사람이 가고 모아 두는 이유가 그렇게 되 있습니다. 이처럼 아담이 범죄한 뒤로 인간은 말하자면은 자기 행위를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았지요. 자 그렇게 하고 보니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 과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 범죄 해야 구원하 지요. 그런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 만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 나라 교회가 사람의 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에 잘 못된 것이고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니 여러분들 마음을 편안히 해라 그것이 곧 믿음이다. 왜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래야 마음이 편하든지 뭐하든지 하지. 자기 수고를 멈춰라. 그 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불안해하지 말아라. 왜 못 이루었다고 불안해하는가 그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 했어도 그 범죄가 아담을 더 큰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오늘의 내부족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 섭리중에 있으니 불안할 것 없다. 그렇지요.그렇게 하면 인간의 죄책감은 없어집니다.
왜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고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인간이 신 입니다.왜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고 내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범신론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총 결론이 여기 있는 가. 이제는 하나님이 사랑의 법으로 우리 안에 오셨으니 외적으로 이것하라 저것 하라 우리를 옛날 일처럼 애기 취급하지 말란 말이요. 가만이 놔두어도 다 잘 할 것이기 때문에. 왜 성령님이 오셨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외적인 요구 없어도 자원해서 선을 행하 고 선을 행할 규칙이 내안에 스스로 있다. 그러니 율법이 다시 우리에게 다시 규범으 로 요구되면은 그것은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거듭난 사람 들이,신자들은 믿는 신자들은 곧 이제 선을 행한다는 의미로도 신이다 그말이예요. 그것이 복음처럼 굉장한 속도로 번지고 있지요. 거기에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전 부 가짜면 장사가 안되지요.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왜 모든 이단들이 나왔는가. 그 이단들은 교리의 어두움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꼭 일어나요. 교회에서 꼭 이단이 일어 납니다. 꼭 교회에서 이단이 발동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완전한 세트로 설명이 안되 면 그런 방식으로 나와요. 우리는 나타난 대로 설명할 수 밖에 없지요. 그 양반이 얼 마큼 선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그건 우리가 판단할 조항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 이 사람 속을 아시니까. 우리는 나타난 대로 판정할 때 그것은 이단이어요. 우리는 이단하면 제가 드는 비유대로 우리가 간첩하면 선그라스를 끼고, 손톱은 길 고, 배경은 거미줄이고, 국민학교 때는 간첩잡을려면 꼭 엿장수만 바라보았어요. 저것 이 간첩인가. 그래서 제가 하위도 섬사람 아닙니까. 아 어떤 사람이 안경을 파란 것 썼어요. 시골에서는 그것이 봉사 아니면 형사입니다. 지금은 문화인들이 쓰는 것이지 만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다 보니까 권총도 찼습디다. 안경집인데. 그래서 지서에 가서 일러 바쳐야 하느냐 상당히 고민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간첩 교육을 그렇게 배웠 으니까. 이번에 김일성이 비디오에 나오는데 보니까 승계를 이어갈 만큼 권위가 있잖 아요. 내용은 어떤지 몰라도. 그래서 우리들이 꼭 그것을 이전에 배웠던 반공 교육 방 식이 그런 방식이다 그래요. 지금 우리 군부가 광주 사태 해결 안합니다. 왜 통치권을 시행했다고 믿기 있거든 요, 그러니까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라요. 그러면 북과 남은 민족을 통일한다는 대전제 아래 전쟁이 시작됐으면 죄책감을 못 느낍니다. 그렇지 않겠 어요. 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죽여 버려도 합법화 되 버려 요. 그렇게 되면은. 그렇게 해서 전쟁을 했다고 보면 공산당에게 누구도 죽었는데, 그 러고 우리들도 전두환 정권 아래 누구도 죽었는데 똑같은 말이 되버려요. 그런 의미로 우리는 다시 사고를 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더 다른 차원으로 구조 분석을 해야 되겠지마는 지금 정치적인 방향으 로는 우리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말이어요. 그러니까 정권들도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해 북방 정책을 썼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북방 정책은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한 그 방법일 뿐이지 참으로 그런 의지가 안보여요. 그러면은 민족의 대 추구하는 것이 통일이면은 말하자면 재야에서도 김일성을 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일이 끝나거든요. 어떻든 지금 우리가 전두환을 품에 안으라고 안합니 까. 용서하라고. 그래야 일의 화목이 시작 된다고. 그런 배경에 비추어 보면 야권에서 하는 행동들이 뭣인가 조금 짐작이 가요. 왜 너희 30 몇 % 신임 받고 있는 정권만 너희 정권 강화만 위해 북방 정책 강화하고 있느냐 더 보다 많은 대다수 국민이 본질적 인 통일을 원하고 있는데 뭐 너희들이 그런 의지가 있냐. 그러니까 누구든지 가서 안 아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러나 실정적인 법으로는 그렇게 공 기관 아니 고는 그런 일하면 안됩니다.특히 북방에 있어서는 위임받는 공 기관이 아니고는 그런 일을 못해요.
그런데도 그런 기관들이 광주 사태처럼 묘한 일을 한다고 평가 해 버리 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 작은 광주 사태도 국가 안정 을 위해서 광주를 쓸어버릴려고 그랬지요. 그건 우리 나라끼리 입니다. 그런대도 이만 큼 뻔뻔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하고 있는 방향이 조금 이해가 가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 개념들이 무엇인가 잘못 되면은 나머지 모든 것을 해석하는데 그만큼 어둡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사고를 다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재 조정할 필 요가 있어요. 그렇게 안하면 바르게 모릅니다. 그럼 가장 나쁘게 나타난 것이 조금 전 에 그런 것입니다.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니 아담의 범죄는 아담을 더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징검다리다. 필요악이어요. 타락이 없으면 구속을 못하니까.그렇게 했으니 얼마나 명쾌하냐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 뿐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도 감사한 것 뿐 우리의 죄책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니 까. 이 현재의 상태도 더 큰 영광을 위해서 한 통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이해 를 하는 사람 참 안됐습니다. 그 다음에 한가지 일은 해석을 못하니까 그런 질문한 사람을 지옥 보낼려고 하나님 이 준비하고 계신다. 이런 말로 대답하는 사람 여러 말들이 있지요. 그럼 무엇하실려고 하나님이 그처럼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파괴하는 시험돌로 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강화하는 은혜로 준 것입니다. 에덴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지도 않고 사람의 미혹됨이 자기 욕심의 미혹됨이지 하나님 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으로 시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거기에 주신 것이어요. 에덴에 주신 모든 것은 성 에덴적으로 주신 것이어요.
하나님과 교제 방식으로 주신 것이지 하나님과 파괴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주신 것은 아니어요. 우리가 죄의 근본 비밀은 성경 에서 말 안하니까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가를 갖고 인간을 말하고 있지 인간 스스로 자기 스스로 자기 기원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더듬도 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 지식의 한도가 거기까지 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고 그 이상의 것을 성경은 인간의 물음에 답하 지 않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자기를 만물을 지으신 신의 원리를 아는 것처럼 스스로 더듬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대답을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선악과를 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존적인 존재요 하나님만 선하게 규정자요 인간은 그를 순종함이 곧 생명이다. 그럼 어떤 경우에 스 스로 인간을 높여서 신적인 존재로 올리도록 유혹이 있을 때 까지도 인간은 하나님 앞 에 피조물인 것을 알고 의존적인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 그의 생명이다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도 뚜렷하게 알 수 있도록 거기 선악을 알게하는 실 과와 생명 나무를 함께 세우시고 이것을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또 지으셨을 뿐만 아니 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셔서 그와의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와의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의 생명의 본질이다. 그 관계가 파괴 됐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로 창세기 3:15절에서 처음 구원의 약속을 거기에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역사 안에서 발전시키시며 그리고 그 약속 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는가 하나님은 친히 구원의 약속 안에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그 약속 이 예수 안에서 성취하는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이루신 그 구원의 일들을 모두 기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은 곧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책이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이 친히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그 역사 안에서 자기의 구원을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으로 나타내셔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다시 교제하시고 부르심은 중보자의 구속행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번에 완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라 그 약속이 하나님이 친히 자기 구원 역사를 진행시키면서 여러 방식으로 나타내셨 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여러 방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그 약속에 대한 내용이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을 아는 것은 곧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냥 느닷없 이 오신 것이 아니라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친히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계속 역사를 진행해 오셨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전부 언약적인 발전으로 나타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언약적인 그 발전을 아는 것이 성경 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언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뼈대 가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성경은 신론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신론적으로 해석 하는 것은 곧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언약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라 하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해석에 서 무슨 구속사적인 해석이니 하는 말이 같은 말이어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친히 자기 구원 역사를 진행 하셨거든요.그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고, 구원 역사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교제 역사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 구속의 역사를 점점 발전적으로 진행 시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느닷 없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 언약의 역사를 앎으로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안다. 그러니까 언약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중 요하다 그런 말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에 나타난 언약을 보십시다.
여기 히 8장 제 일 끝에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거기 "새언약"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옛언 약"이란 말이 있는가 거기 옛언약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마는 새 언약 을 말씀하셨고 이 새언약은 무엇과 대비되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 여 내던 날에 자기와 새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8:9절에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저희와 새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하니까 우리가 여기서 '옛언약' '새언약' 그런 말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옛언약은 무엇인가 하면 모세 언약을 두고 옛언약이라고 그럽니다. 새언약이란 그리스도로 주신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히브리서 9장은 그렇게 말하지요.주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 언약이 이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좀더 살펴 보면 이 옛언약과 새언약은 다 둘다 합쳐서 하나님의 은혜언약입니다. 은혜 언약이고 구속 언약입니다. 엣언약과 새언약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요 구속의 언약입니다. 이 둘다 똑같이 그런데도 하나는 옛언약, 하나는 새언약 그렇개 말씀하심으로 그것의 나타남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타남을 펼쳐 보인 것 뿐이어요. 그러나 같은 언약이다. 옛언약과 새언약은 은혜언약과 구속 언약으로서 동질성이 같은 것인데도 어떻게 이 것이 대비되는가 문제를 우리가 설명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언약 말고 또 다른 언약이 있는가 그것은 처음에 나타나는 창2:16,17에 거기 보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 라 "하는 거기에 제일 처음 언약 관계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소위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위 언약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창2:16,17에 행위 언 약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언약사에서 구별되는 것은 바로 행위 언 약과 은혜언약 이 둘로 대별됩니다. 아담이 범죄하게된 행위언약,아담의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리라 약속하신 3:15을 시발점으로 하는 은혜언약 이 둘로 나뉘어져요. 그래서 하나는 행위언약 또 하나는 소위 구속의 언약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둘로 나뉘어 집니다. 이 구속의 언약이 하나님이 그 언 약을 진행시키는 역사 안에서 하나를 옛언약,하나는 새 언약 하는 방식으로 두 경륜 이 있다. 두 시기가 있다. 구속의 언약의 두 시기가 있는데 예수 이전 시기를 말하자 면 옛언약시기라고 말을 하고 예수 오심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새 언약 시기라고 말을 한다. 그렇게 둘로 대별되지요 그러면 이제 좀더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 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약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본래가 언약적인 관계여요. 그것이 제일 처음 나타난 것은 창
1,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를 지으셨다는 그런 내용과 특별히 2장 처음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해서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는 것이 제일 처음 본래 주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 언약적인 형태로 말하자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방식으로 2:16,17절에 나타나 있어요. 근거는 앞에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질서에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없는 것 중에서 '있을찌어다' 그렇게 지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본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이런 존재로 사람을 세우신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을 뿐 만 아니라 또 그렇게 지은 방식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이렇게 말을 해요. 그 지으심에 문제를 두고도 말씀으로 있으라 하심에 있었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런 방식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안에 깊은 도모가 있고 계획이 있고 그리고 그 계획 은 따라서 특별한 방식으로 지으신 것을 말해요.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 지으실 때도 그 를 특이하게 지었고 또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 7일에 하나님이 기쁨의 그를 세움으 로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복주셨다. 제 7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 게 했다는 말은 다른 날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나타나심이 온 세상에 부요 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하루를 구별하고, 하루를 구별했다는 것은 (복된날로 구별했다) 하나님을 복되심을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복되심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복된날로 선별하셔서 그날을 복되심 날임과 교제의 날로 구별하셨다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러니까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제 칠일 안식일에 나타나고 있는데 인간 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으시고 그의 기쁨에 인간을 참여시켜서 그를 경배하는 존재로 거기 세우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은 하나님이 지으셨을 때 땅에 사망이 없었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심이 참 풍성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은 특별히 한 나무를 세우시고 거기서 하나님이 생명의 교제 ,생명의 풍성함을 특이 한 방법으로 나타낸 것처럼 온 날에 온땅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했을 때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날을 복된날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심으로 (혹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이지요) 하나님의 기쁨에 인간을 참여케 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복주셨다. 거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교제로 세우심이 잘 나타나 있어요. 그리고 2:16,17에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도 그런 언약 관계로 세우시지요. 네가 내 말을 순종하면 살고 안순종하면은 죽는다 그런 방식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단순한 본 성적인 존재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서 영적이고 종교적이 고 윤리적인 존재로 세우셨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교제가 파괴되면은 인간 되기를 멈 추는 방식이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반영하는 존재로 그의 대리자로 그와의 교제 가운데로 세우셨기 때문에 그 교제가 파 괴되면 그것은 사망입니다. 그런 관계로 처음 사람을 세우시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여요. 소위 여기 행위 언약이나 구속 언약이나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입니다. 말한자면은, 그러나 신학적으로 쓰기를 정말 가치 없는 피조물 하나님의 원수된 아무 쓸모 없는 죄인에게 베푸신 무조건적인 선하심을 은 혜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의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 고 행위 언약 자체도 인간의 행위로 무엇을 얻는다는 그러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의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곧 그것이 무한하신 은 혜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허리를 굽히셔서 그가 교제 가운데로 자기를 주셨으니 그것이 은혜 중의 은혜여요. 그러나 거기에는 죄가 발동되기 전이거든요. 아직 죄가 아담 안에 역사하기 전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든 피조물을 자기 교제로 세 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말하고 있지마는 아담이 범죄한 뒤로 원수에 게 베푸신 은혜와 범죄 하기 전에 그가 지으신 피조하신 선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혜 와 그런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구속의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말한 것 뿐이고 실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제입니다. 그가 친히 자기를 낮추셔서 자기를 주신 것 뿐이여요.
그러면 왜 2:16,17 나타난 언 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그러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은 곧 인간의 순종이고 울타리여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성적인 피조 물인 천사와 인간에게 거룩을 요구합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을 순종함이 거룩의 본질 이기 때문이여요. 그래야만 하나님을 반영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교제 가운 데 사는 것은 참다운 순종으로 나타난 것이고 만일에 인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자 기의 권능이 신적인 권능으로 나타났을 때 스스로를 자립하는 존재로 해석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은 그것은 창조자와 언약 안에 교제 안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신적 인 존재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 안에서 요구된 행동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는 행 동까지라도 행동이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안에 그 교제 안에 사는 사람의 울타리는 곧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이고 믿음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요 하나님을 순종함이 그의 생명이고 그 외에는 생명의 근원이 없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만물의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나타내심인 것이고 지은 모든 세계를 뜻대로 개발해서 하나님께 돌림이 곧 그의 삶의 목표요 내용이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처음부터 이처럼 믿음의 존재로 세웠 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요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그와 교제 가운데 세우셨기 때문에 이것은 인격적인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관계,신뢰의 관계, 순종의 관계지요. 신뢰요,곧 순종입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생명의 존재 방식은 믿음의 존재 방식이다. 만일에 그것을 떠나서 스스로 그것을 해석하고 스스로 선악을 알 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악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출발하 면 그는 만물의 선악을 규정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 그것은 의존적인 존재 방식이 아니라 자존적인 존재 방식이고 그것은 믿음의 존재 방 식이 아니여요.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언약의 대상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떠나서 스스로를 자존자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명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가 언약 관계이고 그 본질 자체가 언약 관계이고 곧 그 것이 믿음의 관계요 곧 그것이 생명 이여요. 그러나 아담이 그 위치를 떠났지요. 보통 우리들은 어째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만들어 놓고 괜히 만들어 아담이 먹게 했느냐. 뻔히 알면서 그래서 딱 잡아 놓고 묶어 놓고 너 내말 잘들어. 말하자면 애기 한데 독약 놔두고 먹은 뒤로 살려 놓고 하는 말이 어째서 네 아버지가 주었느냐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참 하나님이 불량하다. 말하자면 참 망령스런 말이지요. 그 단어를 안써도 하나님이 참 잔인하고 묘하다 이제 이런 식이지요 말하자면.하나님을 모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말 표현을 안해도 그런 뜻입니다. 실은 , 왜 하나님이 다 알면서 그랬느냐. 그것을 소위 명쾌하게 해석하는 분이 우리 나라에 있어요. 그것은 뭐 복잡할 것 없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지으셨고 모든 것은 하나님 이 하시니까 인간은 아무 말 할 것 없다. 하나님이 빛도 지으시고 어두움도 지으셨으 니 하나님이 자기 영광에 필요하니까 죄를 지으신 것이고 그래서 묶어 놓으니 아담 때 부터 더 큰 완전함으로 우리를 올리 잖느냐. 그러니까 손해될 것이 무엇이냐. 다 이익 뿐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거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었고 먹게 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먹는 아담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고 죽게된 아담을 살리므로 더 큰 영광을 받지 않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하여 징검다리로 필요한 것이지 악 자체는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나쁜일이 없 거든요. 악 자체가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팀이 있어요. 이제 그분이 책도 내놓고 Tape도 나오니까 이름을 말을 해야 그 위험성에서 벗어나겠지요. 소위 박용규 목사라고 계셔요. 그분이 이론을 전개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풀 면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그러면 하나님은 골인 지점에서 복을 주시리라. 말로는 칼 뱅주의라 하면서 매 인간의 행위만 가르쳤어요. 너희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면 복을 줄 것 아니냐 너도 야곱처럼 해 봐라 꿈의 환상을 보고 줄 것 아니냐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면 저기서 삐끗이 웃으며 돌아오며 너 왔냐 하고 복이나 주는 이런 하나님으로 해석해 왔어요. 그러면 그런 것이 인간을 괴롭게 했는가 정말 거듭난 인간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 해서, 아 너는 이만큼 잘 했냐 하나님이 상줄만한 수준에 올라온다는 것은 방금 아담이 범죄한 그 원리를 따라서는 인간이 가장 소망하는 바고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바예요. 내가 수고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서고 그렇게 하면 특별히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복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어요. 죽어라고 수고하면 내가 그런 자리에 올라야 맞을 것이라. 그것은 어떻게 보면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최상의 힘을 제공하는 것처럼 되었 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가 가짜지요. 그래도 몰라요. 오늘의 한가지 부 족점이 있다면 그가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는 것 이니까.
그것은 그런데도 오늘은 99하고 내일 한나절 더하자 하고 편히 자요. 그 하나 가 부족한 것이 전체가 부족한 것인줄 몰라요. 그 성취 개념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도 모를 뿐 만 아니라 이렇게 되버리기에 스스로 사람 양심을 화인 맞게 하는 것이고 스스로 모르고 그러고도 죽어라고 힘을 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 자 기가 성취한 줄 모르고 피곤함이 없어요. 참으로 성취가 모르면 자살해서 죽게 되어야 하는데 그 성취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의 완전함에 참여 안하면 성취가 안되는 것이거든요. 인간에게는 그런 성취가 없어요. 오늘의 선행이 어제의 죄악을 닦이질 못 해요. 완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을 말하지 내가 죽을 때 완전해도 죽기 전에 잘못 이 용서받지는 못해요.
그런데 그 완전의 개념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수고하고 하지요. 그러니까 헌금 제도를 고쳐서 부드럽게 하면은 소위 교인들이 많이 불고,헌금을 많이 요구하면 아주 어느 교회라면 돈 없으면 교회도 못 가겠더라. 교회 를 안 올 것 같아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많은 헌금을 요구하고 그 헌금에 상응하는 복을 그만큼만 확실한 방식으로 보장하면은 그것은 소위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좋은 일이예요. 또 확실히 보장하기 때문에 우상 심리는 그것을 더 원하는 겁니다. 왜 많이 내는 만큼 많이 버는 보장만 있으면 조금 내면 불안한 것이어요. 왜 자기 성취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부흥사들이 하는 부흥회에 많은 사람이 가고 모아 두는 이유가 그렇게 되 있습니다. 이처럼 아담이 범죄한 뒤로 인간은 말하자면은 자기 행위를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았지요. 자 그렇게 하고 보니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 과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 범죄 해야 구원하 지요. 그런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 만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 나라 교회가 사람의 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에 잘 못된 것이고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니 여러분들 마음을 편안히 해라 그것이 곧 믿음이다. 왜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래야 마음이 편하든지 뭐하든지 하지. 자기 수고를 멈춰라. 그 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불안해하지 말아라. 왜 못 이루었다고 불안해하는가 그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 했어도 그 범죄가 아담을 더 큰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오늘의 내부족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 섭리중에 있으니 불안할 것 없다. 그렇지요.그렇게 하면 인간의 죄책감은 없어집니다.
왜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고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인간이 신 입니다.왜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고 내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범신론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총 결론이 여기 있는 가. 이제는 하나님이 사랑의 법으로 우리 안에 오셨으니 외적으로 이것하라 저것 하라 우리를 옛날 일처럼 애기 취급하지 말란 말이요. 가만이 놔두어도 다 잘 할 것이기 때문에. 왜 성령님이 오셨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외적인 요구 없어도 자원해서 선을 행하 고 선을 행할 규칙이 내안에 스스로 있다. 그러니 율법이 다시 우리에게 다시 규범으 로 요구되면은 그것은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거듭난 사람 들이,신자들은 믿는 신자들은 곧 이제 선을 행한다는 의미로도 신이다 그말이예요. 그것이 복음처럼 굉장한 속도로 번지고 있지요. 거기에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전 부 가짜면 장사가 안되지요.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왜 모든 이단들이 나왔는가. 그 이단들은 교리의 어두움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꼭 일어나요. 교회에서 꼭 이단이 일어 납니다. 꼭 교회에서 이단이 발동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완전한 세트로 설명이 안되 면 그런 방식으로 나와요. 우리는 나타난 대로 설명할 수 밖에 없지요. 그 양반이 얼 마큼 선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그건 우리가 판단할 조항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 이 사람 속을 아시니까. 우리는 나타난 대로 판정할 때 그것은 이단이어요. 우리는 이단하면 제가 드는 비유대로 우리가 간첩하면 선그라스를 끼고, 손톱은 길 고, 배경은 거미줄이고, 국민학교 때는 간첩잡을려면 꼭 엿장수만 바라보았어요. 저것 이 간첩인가. 그래서 제가 하위도 섬사람 아닙니까. 아 어떤 사람이 안경을 파란 것 썼어요. 시골에서는 그것이 봉사 아니면 형사입니다. 지금은 문화인들이 쓰는 것이지 만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다 보니까 권총도 찼습디다. 안경집인데. 그래서 지서에 가서 일러 바쳐야 하느냐 상당히 고민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간첩 교육을 그렇게 배웠 으니까. 이번에 김일성이 비디오에 나오는데 보니까 승계를 이어갈 만큼 권위가 있잖 아요. 내용은 어떤지 몰라도. 그래서 우리들이 꼭 그것을 이전에 배웠던 반공 교육 방 식이 그런 방식이다 그래요. 지금 우리 군부가 광주 사태 해결 안합니다. 왜 통치권을 시행했다고 믿기 있거든 요, 그러니까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라요. 그러면 북과 남은 민족을 통일한다는 대전제 아래 전쟁이 시작됐으면 죄책감을 못 느낍니다. 그렇지 않겠 어요. 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죽여 버려도 합법화 되 버려 요. 그렇게 되면은. 그렇게 해서 전쟁을 했다고 보면 공산당에게 누구도 죽었는데, 그 러고 우리들도 전두환 정권 아래 누구도 죽었는데 똑같은 말이 되버려요. 그런 의미로 우리는 다시 사고를 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더 다른 차원으로 구조 분석을 해야 되겠지마는 지금 정치적인 방향으 로는 우리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말이어요. 그러니까 정권들도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해 북방 정책을 썼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북방 정책은 자기 정권 강화를 위한 그 방법일 뿐이지 참으로 그런 의지가 안보여요. 그러면은 민족의 대 추구하는 것이 통일이면은 말하자면 재야에서도 김일성을 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일이 끝나거든요. 어떻든 지금 우리가 전두환을 품에 안으라고 안합니 까. 용서하라고. 그래야 일의 화목이 시작 된다고. 그런 배경에 비추어 보면 야권에서 하는 행동들이 뭣인가 조금 짐작이 가요. 왜 너희 30 몇 % 신임 받고 있는 정권만 너희 정권 강화만 위해 북방 정책 강화하고 있느냐 더 보다 많은 대다수 국민이 본질적 인 통일을 원하고 있는데 뭐 너희들이 그런 의지가 있냐. 그러니까 누구든지 가서 안 아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러나 실정적인 법으로는 그렇게 공 기관 아니 고는 그런 일하면 안됩니다.특히 북방에 있어서는 위임받는 공 기관이 아니고는 그런 일을 못해요.
그런데도 그런 기관들이 광주 사태처럼 묘한 일을 한다고 평가 해 버리 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 작은 광주 사태도 국가 안정 을 위해서 광주를 쓸어버릴려고 그랬지요. 그건 우리 나라끼리 입니다. 그런대도 이만 큼 뻔뻔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하고 있는 방향이 조금 이해가 가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 개념들이 무엇인가 잘못 되면은 나머지 모든 것을 해석하는데 그만큼 어둡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사고를 다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재 조정할 필 요가 있어요. 그렇게 안하면 바르게 모릅니다. 그럼 가장 나쁘게 나타난 것이 조금 전 에 그런 것입니다. 만사는 하나님이 하시니 아담의 범죄는 아담을 더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징검다리다. 필요악이어요. 타락이 없으면 구속을 못하니까.그렇게 했으니 얼마나 명쾌하냐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 뿐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도 감사한 것 뿐 우리의 죄책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니 까. 이 현재의 상태도 더 큰 영광을 위해서 한 통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이해 를 하는 사람 참 안됐습니다. 그 다음에 한가지 일은 해석을 못하니까 그런 질문한 사람을 지옥 보낼려고 하나님 이 준비하고 계신다. 이런 말로 대답하는 사람 여러 말들이 있지요. 그럼 무엇하실려고 하나님이 그처럼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파괴하는 시험돌로 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강화하는 은혜로 준 것입니다. 에덴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지도 않고 사람의 미혹됨이 자기 욕심의 미혹됨이지 하나님 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으로 시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거기에 주신 것이어요. 에덴에 주신 모든 것은 성 에덴적으로 주신 것이어요.
하나님과 교제 방식으로 주신 것이지 하나님과 파괴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주신 것은 아니어요. 우리가 죄의 근본 비밀은 성경 에서 말 안하니까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가를 갖고 인간을 말하고 있지 인간 스스로 자기 스스로 자기 기원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더듬도 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 지식의 한도가 거기까지 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고 그 이상의 것을 성경은 인간의 물음에 답하 지 않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자기를 만물을 지으신 신의 원리를 아는 것처럼 스스로 더듬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대답을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선악과를 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존적인 존재요 하나님만 선하게 규정자요 인간은 그를 순종함이 곧 생명이다. 그럼 어떤 경우에 스 스로 인간을 높여서 신적인 존재로 올리도록 유혹이 있을 때 까지도 인간은 하나님 앞 에 피조물인 것을 알고 의존적인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 그의 생명이다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도 뚜렷하게 알 수 있도록 거기 선악을 알게하는 실 과와 생명 나무를 함께 세우시고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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