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 (갈2:20)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시작한 갈라디아 교회가, 유대에서 내려온 자들의 말을 쫓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할례 를 받는 등(갈5:3)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음으로, 복음만이 구원의 길임을 다시금 강력히 증거하는 내용이다. 유대에서 내려온 자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예루살 렘 교회와도 무관한 자임을 강조하였고, 사사로운 교훈에 지나지 않으 며 잘못된 말씀으로 몰아붙이며, 예수도 믿고(복음) 할례도(율법) 받아 야 한다는 복음의 변질을(갈라디안 주의) 가져왔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떠난 갈라디아 교회가 이 유대주의자들의 교훈을 따르게 되고 할례를 받는 자들이 있었다는데(갈5:3) 있다. 이 소식을 들 은 사도 바울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통탄을 하며(갈3:1)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복음의 소식을 다시 한 번 밝히 증거하시는 말씀이다.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핵 심이요, 진수이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극치이요, 또한 신비이다. 이 짤 막한 한 절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가슴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 생활의 신비는 '거듭난 삶'의 생활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곧 "육의 사람"은 주와 함께 죽고, "영의 사람"이 주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요한복음 3: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다. "거듭난 삶"이란 지금까지의 삶에서,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삶의 목 적이 변한다. 추구하는 가치관이 달라진다. 남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위 하는 마음이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동네 개망나니"로 불리우며 뭇 사람의 손가락 질 받던 친구가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어 오히려 칭찬을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된다. 이들은 세상적으로, 윤리, 도덕면에서 "거 듭난 자"이다. 성경이 말하고, 우리 성도가 말하는 "거듭난 자"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난 옛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온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없는 "옛 사람"이 예수를 그 가슴 속에 영접하여 가진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에 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1.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옛 사람인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고 있다.
1.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는 문법적으로 완료형 수동태이다. 수동 태임으로 못 박혀진 상태이고, 완료형임으로 그 못박혀진 상태가 지금 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갈보리 산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 못 박힌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 그 못박힘이 함께 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 성도가 육체적인 삶을 계속하고 있기에 그 못박힘도 계속 되 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 라"고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의 순간 순간 인간 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솟구칠 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잡고 있는 줄이 바로 "십자가에 박힌 못"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도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 내 감정, 내 방법, 내 힘, 내 꾀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2.율법의 저주 아래 죽음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 되어 진 내가 그 죄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값은 지불된 것이다. 이는 모든 인류가 대표인 조상 아담의 범죄에 동참함으로 죽음이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임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 함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곧 죄에 서 사유하심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2.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기에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바꾸어진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부활의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사는 것이다.
1.나는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살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며 육체 가운 데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2.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으로 나는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
3.그리스도가 사신다. 나는 살아 있지만 옛 사람인 나는 죽고, 새 사람인 그리스도가 내 안 에 사시는 것이다. 이제 그분이 나의 주인이며, 나의 주체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죽었으니 "내 뜻"은 없고, 그분의 "뜻"만이 있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4.두 영혼의 신비한 연합 본문 20절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신비한 연합을 말한다. 세상의 종교들도 이러한 신 비한 연합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성경에서는 두 영혼이 따로 존재하며 친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으나, 세상 종교가 말하는 것은 흡수되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다. 혹은 그리스도는 나다. 이렇게 되면 나와 그리스도 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두 개체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에 흡수되어 한 개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된다는 말이나 열반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신비한 연합은 두 개체 가 따로 따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3.믿음 안에서 산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새 사람의 생활"을 말한다. 이 "믿음"에는 신비한 진리가 있고, 놀라운 능력의 힘이 있다. 그 능력의 힘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1.육체 가운데서 산다. 본문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했다. 신비한 연합의 삶이라 해서 육체 밖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육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이다. 곧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삶 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생활이지만 현세에서 이루 어지는 생활을 말한다. 거듭난 영혼의 생명이지만 범죄의 그릇인 육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육체이기에 "육체의 소욕"이 있다. 그래서 그 "육체의 소욕"을 따르게 되면 "성령님의 소욕"을 거스리게 되고 결국 범죄하게 된다. 우리 성도가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한 연합을 이룬 것도 "영혼"이다. 우리 성도들의 육체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룰 수는 없다. 육체는 시공의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체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2.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빌립보 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예수의 생명줄에 연결되 어졌음을 말한다. 곧 접붙임의 원리로서 뿌리 되시는 예수님에게 내가 접붙여짐으로 예수의 진액을 받아 이제는 산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빌1:8) 그의 마음을 가지고 살 아가는 자이다. 그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나의 마음 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3.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본문 20절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새 생명을 가지고, 새 사람의 생활을 이루어 가는 삶의 영역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이다. "믿음 밖에서"는 안된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도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도 하는 신비한 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내가", "내 안에" 등 단수로 표현된 것은 이 신비한 연합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개인적인 체험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 되고 만다. 이 "믿음"의 신비한 연합과 신비한 능력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석'의 경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두 자석이 있을 때, 두 자석 모두 각자의 자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큰 자석에 작은 자석이 달라붙으면, 작은 자석의 존재는 사 실상 없어진다. 실제적으로 존재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의 의미가 상실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큰 자석의 운동에 따라 작은 자석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운 동의 방향, 운동의 범위, 운동의 힘, 운동의 결과 등 모두가 다 큰 자석 에 의해 결정이 된다. 어느 하나 작은 자석 자신의 것은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힘을 모아 하나가 된다. 큰 자석의 뜻을 따르게 되고, 큰 자석의 목적을 이루는 일 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가 이렇게 믿음의 신비한 연합으로 하나가 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아 역사하게 된다. 내 뜻, 내 목적은 사라지고 주님의 뜻이 있을 뿐이다. 주님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살펴 보면 잘 알 수 있다. ㉠.내맡긴다(딤후1:11-12) 믿음의 대상에게 "나"를 내맡겼으니 "나"는 없는 것 ㉡.영접한다(요1:12) 믿음의 대상을 "주"로 영접함, 곧 나의 "주인"으로, "구주"로 영접 결과적으로 "나"는 없는 것 ㉢.안에 거한다(고후5:17) 믿음의 대상 "안에내"가 거함으로 "나"는 없는 것,-(주머니 속의 동전) ㉣.접 붙임(롬11:17) 믿음의 대상에 "내"가 접 붙여짐으로 뿌리에서 공급되는 "원액"을 먹 고 살게 되어 "돌감람나무"인 내가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 것 결국 돌감람나무인 "나"는 없는 것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국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없애고, 부활의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살아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곧 나라는 작은 자석이 예수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자석에 붙음으로 나는 사라지고 예수만이 살아 역사하는 것이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믿음의 신비한 연합을 말한다. 곧 두 자석의 만남을 말하고 있다. 이 신비한 연합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자, 그래서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 "예수 내 안에 사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1.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옛 사람인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고 있다.
1.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는 문법적으로 완료형 수동태이다. 수동 태임으로 못 박혀진 상태이고, 완료형임으로 그 못박혀진 상태가 지금 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갈보리 산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 못 박힌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 그 못박힘이 함께 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 성도가 육체적인 삶을 계속하고 있기에 그 못박힘도 계속 되 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 라"고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의 순간 순간 인간 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솟구칠 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잡고 있는 줄이 바로 "십자가에 박힌 못"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도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 내 감정, 내 방법, 내 힘, 내 꾀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2.율법의 저주 아래 죽음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 되어 진 내가 그 죄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값은 지불된 것이다. 이는 모든 인류가 대표인 조상 아담의 범죄에 동참함으로 죽음이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임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 함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곧 죄에 서 사유하심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2.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기에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바꾸어진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부활의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사는 것이다.
1.나는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살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며 육체 가운 데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2.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으로 나는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
3.그리스도가 사신다. 나는 살아 있지만 옛 사람인 나는 죽고, 새 사람인 그리스도가 내 안 에 사시는 것이다. 이제 그분이 나의 주인이며, 나의 주체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죽었으니 "내 뜻"은 없고, 그분의 "뜻"만이 있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4.두 영혼의 신비한 연합 본문 20절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신비한 연합을 말한다. 세상의 종교들도 이러한 신 비한 연합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성경에서는 두 영혼이 따로 존재하며 친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으나, 세상 종교가 말하는 것은 흡수되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다. 혹은 그리스도는 나다. 이렇게 되면 나와 그리스도 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두 개체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에 흡수되어 한 개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된다는 말이나 열반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신비한 연합은 두 개체 가 따로 따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3.믿음 안에서 산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새 사람의 생활"을 말한다. 이 "믿음"에는 신비한 진리가 있고, 놀라운 능력의 힘이 있다. 그 능력의 힘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1.육체 가운데서 산다. 본문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했다. 신비한 연합의 삶이라 해서 육체 밖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육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이다. 곧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삶 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생활이지만 현세에서 이루 어지는 생활을 말한다. 거듭난 영혼의 생명이지만 범죄의 그릇인 육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육체이기에 "육체의 소욕"이 있다. 그래서 그 "육체의 소욕"을 따르게 되면 "성령님의 소욕"을 거스리게 되고 결국 범죄하게 된다. 우리 성도가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한 연합을 이룬 것도 "영혼"이다. 우리 성도들의 육체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룰 수는 없다. 육체는 시공의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체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2.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빌립보 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예수의 생명줄에 연결되 어졌음을 말한다. 곧 접붙임의 원리로서 뿌리 되시는 예수님에게 내가 접붙여짐으로 예수의 진액을 받아 이제는 산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빌1:8) 그의 마음을 가지고 살 아가는 자이다. 그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나의 마음 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3.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본문 20절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새 생명을 가지고, 새 사람의 생활을 이루어 가는 삶의 영역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이다. "믿음 밖에서"는 안된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도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도 하는 신비한 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내가", "내 안에" 등 단수로 표현된 것은 이 신비한 연합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개인적인 체험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 되고 만다. 이 "믿음"의 신비한 연합과 신비한 능력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석'의 경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두 자석이 있을 때, 두 자석 모두 각자의 자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큰 자석에 작은 자석이 달라붙으면, 작은 자석의 존재는 사 실상 없어진다. 실제적으로 존재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의 의미가 상실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큰 자석의 운동에 따라 작은 자석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운 동의 방향, 운동의 범위, 운동의 힘, 운동의 결과 등 모두가 다 큰 자석 에 의해 결정이 된다. 어느 하나 작은 자석 자신의 것은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힘을 모아 하나가 된다. 큰 자석의 뜻을 따르게 되고, 큰 자석의 목적을 이루는 일 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가 이렇게 믿음의 신비한 연합으로 하나가 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아 역사하게 된다. 내 뜻, 내 목적은 사라지고 주님의 뜻이 있을 뿐이다. 주님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살펴 보면 잘 알 수 있다. ㉠.내맡긴다(딤후1:11-12) 믿음의 대상에게 "나"를 내맡겼으니 "나"는 없는 것 ㉡.영접한다(요1:12) 믿음의 대상을 "주"로 영접함, 곧 나의 "주인"으로, "구주"로 영접 결과적으로 "나"는 없는 것 ㉢.안에 거한다(고후5:17) 믿음의 대상 "안에내"가 거함으로 "나"는 없는 것,-(주머니 속의 동전) ㉣.접 붙임(롬11:17) 믿음의 대상에 "내"가 접 붙여짐으로 뿌리에서 공급되는 "원액"을 먹 고 살게 되어 "돌감람나무"인 내가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 것 결국 돌감람나무인 "나"는 없는 것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국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없애고, 부활의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살아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곧 나라는 작은 자석이 예수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자석에 붙음으로 나는 사라지고 예수만이 살아 역사하는 것이다.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믿음의 신비한 연합을 말한다. 곧 두 자석의 만남을 말하고 있다. 이 신비한 연합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자, 그래서 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오 "예수 내 안에 사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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