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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잃어 버린 기독교 (갈6:11-16)

본문

I. 현대 의술은 발달할 대로 발달을 해서, 단 1분도 멈출 수 없는 심장을 몇시간씩 수술을 해서 죽어야 할 사람들을 살리기도 합니다. 참으로 놀라 운 의술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가끔 심장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람이 뇌사 상태에 빠지면, 그 심장을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이식을 합니다. 그러면 심장은 다른 사람의 몸에서 계속해서 살아서 뜁니다. 그러 면그 몸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심장이 뛰고 있던 원 몸은 죽어 버리고 맙니다. 자기의 심장은 살아서 여전히 이 세상에 살아 있지만, 그 심장을 잃어 버 린 몸은 죽어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이란 증거입니다. 사람에 게서 심장을 빼면, 그것은 시체에 불과 합니다. 심장이 살아 있을 때에는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지만, 무한한 능력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지만, 심 장을 잃어 버리고 나면, 한같 시체에 불과 합니다. 심장은 우리에게 있 어서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장을 이란 말은 아주 중요한 것에다 붙입니다. 발 전소를 가르쳐 산업의 심장이라고 합니다. 발전소가 문을 닫으면, 모든 산업은 시체가 되고 맙니다. 이 나라에 발전소가 문을 다 닫으면, 이 나라의 산업은 하루 아침에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또한 은행은 경제의 심장입니다. 은행이 문을 닫으면, 나라의 경제는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은행없는 경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것, 없어서는 안되는 것, 꼭 있어야 할 것을 가리켜 심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일까요 암스트롱 감독이 (Rev.W.H.Armstrong) 영국에서 있은 감리교 대회(Wesleyan Conference)에서 초대 감리교 설교가들과 오늘날 감리교 설교가들의 영향에 대하여 말씀을 했습니다. 암스트롱 감독은 "초대 감리교 설교가들의 설교는 그렇게 감 화력이 있고 능력이 있었는데, 왜 오늘날 감리교 설교가 들의 설교에는 그 러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목사들이 기독교 복음의 사회적인 면에 지나치게 강조점 을 두가다 보니, 그 사회적인 봉사의 원동력이 되는 십자가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원동력이란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심장 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 심장인 십자가를 잃어 버려서 시체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심장은 십자가 입니다. 기독교의 원동력은 십자가 입니다.
그런데 그 심장, 즉 원동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기독교는 시체가 되었읍니다. 십자가를 잃어 버린 기독교는 시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잃어 버린 기독교에는 아무런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곤지암에서 경기도 광주를 오다가 보면, 충현교회 기도원 들어가는 오른 편에 참으로 가슴아프게 하는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은지 얼마 안되는 잘 지은 교회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거기에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십자가 탑의 십자가와 그 밑이 조금 잘라져 나간체, 철구조물만이 보기 싫게 남아 있습니다. 교회에서 십자가를 떼어내니,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 에는 더 이상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교회를 건축하고 이사오면서, 지난번 교회에 세웠던 십자가 탑을 떼어왔습니다. 십자가가 있을 때에는 그 곳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잃어 버린 그곳은 지금 구원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학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장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기독교을 살아서 역사하게 하는 원동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이 십자가를 잃어 버리고 있습니다. 암스트롱 감독이 지적한대로, 사회적인 구원만을 지나치게 강 조하다가 십자가를 잃어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십자가를 잃어 버리는 자들 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지나치게 정치에 몰두하다가 십자가를 잃어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인간적인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십자가를 잃어 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하더라 도, 십자가를 잃어 버리면, 그것은 심장을 잃어 버린 시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능력을 잃어 버린 기독교,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기독교가 된 것은 바로 십자가를 잃어 버렸 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이 십자가를 잃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 십자가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 십자가를 잃어 버린 교회는 (계3:1)에 나오는 사데 교회와 같이 "살 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겉으로만 살아 있지 실상은 죽 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잃어 버린 십자가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아 있는 기독교, 능력을 행사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기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시간 이 기독교의 심장인 십자가를 살펴 보며 은혜를 받 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요일3:16) 말씀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 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 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하나님이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지옥가는 것 을 참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우리를 그 지옥가는 곳에서 구원하시 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하필이면 우리 같은 더럽고, 추 한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저 아름답고 깨끗한 천사들을 사랑하시지, 왜 하필이면 이 더럽고 추한 인간들을 사랑하셨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죄가 많고 더러워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 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다 망가졌지만, 다 망가졌어도,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이 어렴푸시나만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눈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도 안보여 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죄를 많이 짓고, 부모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의 피가 흐르고, 부모님의 모습을 닮은 그 자식을 부모가 포기할 수 없듯이, 하나님도 하나님 닮은 우리들을 아무리 죄가 많다고 하더라도 포기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인간들이 지금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속으로 잡혀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 기의 자식이 지금 사로 잡혀서 사형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도, 가만 히 있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참 부모 가 아니지요 얼마전 끝이난 야망의 전설에서 정태(최수종)가 사형당하게 되자 그의 어머니 신옥주(김영애)는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돈을 다 썼 습니다. 죽을 아들 살려 낸다는데, 돈인들 아깝겠습니까 생명인들 아깝껫습니까 십자가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지금 지옥불 로 끌려가는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원한다는데, 가리고 주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급기야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가 있는 교회가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없는 교회는 시체교회입니다.
2) 십자가는 우리로 이 사랑을 깨닫게 하는 곳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즉 십자가에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하셨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를 볼때, 우리가 참 사랑 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참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 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사랑이 다 타 락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추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의 사랑을 보면 아름답지가 못합니다. 사랑이 추합니다. 고귀한 사랑이 천박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이 물질에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에 사랑을 팔고 사는 타락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사랑이 이기적인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랑으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대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생각하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사랑하는 사랑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야 그 무엇으로 이 참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이 참사랑은 십자가가 아니고는 알 수가 없읍니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적을 치료하는 참 된 사랑은 오직 "십자가가 걸려 있는 적십자의 깃발"아래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우리 편을 향하여 총을 쏘던 그 적의 부상병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만이 이런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십자가가 가르쳐 주는 기독교의 사랑은 무엇이냐 기독교의 사랑은(Christian love is)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때 침묵하는 것이다.(Silence when your words would hurt) 우리의 이웃이 무뚝뚝해도 참는 것이다.(Patience when your neighbor's curt) 스캔들이 펴질때,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다.(Deafness when the scandal flows) 다른 사람들이 불행을 당할 때 그 사람에게 사려깊은 것이다.(Thoughfulness for another's woes) 준엄한 의무가 부를때 신속하게 응답하는 것이다.(Promptness when a stern duty calls) 불행을 당할때 용기를 갖는 것이다.(Courage when misfortune falls) 이런 사랑은 오직 십자가만이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 고서야 그 어디에서 이 아름다운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에 오늘날 기독교가 이 십자가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까 기독교도 나만 사랑할 줄 압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 라"는 것이 기독교인데 십자가를 잃어 버리고 나니 이 사랑마져도 잃어 버 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기독교의 사랑은 다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 지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 과 다를 바가 조금도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잃어 버린 기독교는 참 사랑을 잃어 버린 이기적인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 기독교는 심장없는 기독교입니다. 시체로서의 기독교입니다. 십자가를 잃어 버리다가보니, 기독교인들이 참 사랑을 다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기독교인 은 심장없는 기독교인입니다. 시체 기도교인입니다. 이런 기독교, 이런 교인들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3) 십자가는 우리로 사랑을 하게 합니다. (요일3:16)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 이 나타난 것을 통하여 참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십자가는 우리로 그 사랑 을 하게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 지 사랑하게 합니다. 우리로 참사랑을 하게 합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야 그 무엇이 우리로 목숨을 버리기까지 형제들을 사랑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로 참사랑을 알게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추상적인고 개념적인 사랑을 구체화하고, 실체화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다만 사랑을 아는 것에 그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참 사랑이 실현되도록 합니다. 한번은 힌두교도이며, 큰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스탠리 죤스 (Stanley Jones) 목사에게 왜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했다. 오래전 그가 어렸을때 그는 시장에서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친구들과 같이 그 선교사에게 야유를 하고, 토마토를 던졌다. 그가 던진 잘익은 그 토마토가 선교사의 얼굴에 맞아서 터졌다. 선교사 의 얼굴은 토마토속으로 번벅이 되었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손수건으로 얼굴에 뭍은 토 마토액을 닥아 낸 후에 전도를 계속했다. 전도를 마친 후에 그 선교사는 그와 그의 친구들을 데리고 과자점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과자를 사주었다. 그는 그 날 그 선교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았으면, 그래서 죽음 을 각오하고 개종을 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자기에게 토마토 세례를 퍼 부운 그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 줄 수 있는 사랑, 이것은 십자가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말로는 사랑 사랑을 외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없는 사랑, 차디찬 시체의 사랑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하느냐 곳곳 마 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 뿐일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심장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힘을 공급하여 그 사랑이 구체화되게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잃어버린 십자가, 잊어버린 참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사랑을 보여주신 십자가 앞에서 참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못박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리고 오직 그의 삶에서는 십자가만이 나타나게 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은 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오직 십자가 만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면
1) 외적으로 모양을 내려고 합니다.(v.12)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자꾸만 외적인 모양 만 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회칠함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3:27) 말씀을 보면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 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자꾸만 외적인 치장을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속은 점점더 썩어 들어갑니다. 속에는 죽은 뼈들이 가득하고,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회칠한 무덤 같은 기독교에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이런 기독교인 무슨 능력을 행하겠습니까
2) 핍박을 피하려고 합니다.(v.12)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아가 살아서 외적인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핍박을 피합니다. 살아있는 생명 체는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위험이 닥쳐오면 그것을 피하게 됩니다. 마찬 가지로 자아가 살아 있는 자들은 핍박이나, 손해가 오는 것 같으면 본능적 으로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핍박을 피하고, 어려움을 피하고 되는 일이 무엇이 있 겠습니까 이렇게 핍박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12:24)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 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아가 살아 있는 자들은 죽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 알 그대로 있지, 새로운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은 자 들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들이 죽었기 때문에, 어떤 핍박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피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그런 곳에서 일어 납니다. 옛날 하와이 군도 중에 한 섬인 모로카이 섬은 문둥병자들만 모여 살 던 죽음의 섬이었다. 어느날 멀리 벧기에로부터 다미엔(Damien) 이란 신 부가 그 섬에 찾아와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온 몸이 썩어져 가는 문둥병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문둥병자들은 그를 비웃으면서, "자 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죽게 되었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고 조롱했다. 전도의 문은 처음부터 굳게 닫혀버린 것이다. 고민에 쌓여 있던 다미엔은 어느날 제단 앞 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셔서 저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후 다미엔에게도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가는 죽음의 병이 찾아오고 말았다. 어느날 다미엔 신부가 문둥이들을 모아놓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살이 타는 노랜내가 진동을 했습니다. 문둥이들이 보니, 다미엔 신부의 손이 촛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문둥병이 이미 들어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손가락이 타들어가는데도 느끼 지를 못했다. 다미엔 신부는 이렇게 외쳤다.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그리스도는 문둥병에 걸린 우리들을 사랑하 십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모여 들었던 많은 문둥병자 들은 마치 전류가 통하는 것같은 감동을 받고, 일대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고 한다. 이런 놀라운 능력은 자기가 죽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자기가 죽은 자 들만이 이런 능력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다미엔 신부는 문둥병이 들어 신경이 죽었기 때문에 뜨거운 촛불이 타들어와도 피하지 않았을 수 있었읍니다. 그랬기 때문에 문둥이들이들까지도 전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어떻게 뜨거운 촛불이 타들어오는 것을 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촛불이 타들어오는 것을 안피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문 둥이들을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은 자들은 핍박이 오면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십자가 에 못박은 자들은 어떤 핍박이 와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3) 육체로 자랑을 하려고 합니다. 자아가 죽은 자들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자랑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할 거라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 죽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기독교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못박은 자들은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십자가 보다 더 높은 것이 무엇이 있읍니 까 이렇게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심장이 있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만이 살아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만이 심장이 살아 있는 교인입니다. 그런 교인들만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은 육체로 자랑거리를 삼읍니다. 늘 자랑하려고 합니다. 오직 나 자신을 십자가에 온전히 못박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십자가는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가 온전한 십자가가 되려면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용서가 없다면 그것은 사형틀에 불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때, 강도 두사람이 같이 달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인간의 법으로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지은 자들이였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어 서 사형당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형수는 사형당하는 날 양팔을 붙잡힌 채 긴 죽음의 길을 걸어오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염없이 어머니를 부 릅니다. 한발 한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시형장 밧줄 밑에 이르는 거 리는 더 가까워집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에 엉덩이를 뒤로 뺀 채 10 센티미터가 될 듯 말 듯한 보폭으로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떼어 놓는 모습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답니다. 이 불쌍한 자들, 그러나 이들이 어디에 가서 이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뜻밖에도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자비를 구하는 한 강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그로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십자가는 바로 이 놀라운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큰 죄, 아무 리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다 용서해 주시는 곳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때에는 저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들과 같이 죽음의 사 자들에 의하여 지옥불 속에 들어가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범한 우리들에게 영원한 지옥불에 던저 넣으라고 심판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들 보다도 더 처참하게 영원한 지옥불로 들어 가기 위하여 끌여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 ! 이 죄인들이 그 어디에 가서 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떻게 이 비극에서 벗어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이 죄를 사해 주는 줄 믿습니다. 십자가에는 이런 죄사함의 놀라운 은혜가 있읍니다. 이 저물어 갈 때, 끔찍하기 이를데 없이 흉칙한 죄를 범해서, 사 형을 당한 유두영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크고 끔찍한 죄를 졌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의 죄가 용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형수로 서울 구치속에 있다가 박효진 장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의 모든 죄를 다 십자가 앞에 회개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무서운 사형장에서도, 머리에 흰두건이 덮이고, 목에 밧줄이 걸렸는데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하면서 죽 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죄용서함이 있었기에 그는 비록 이 세상이 포기한 사형수지만, 변화 되어 구치소의 전도자가 되었으며, 죽을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하며 갈 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었 기 때문입니다. 이 죄사함의 십자가가 있는 교회가 바로 참 교회입니다. 이 죄사함의 십자가 없는 교회는 심장이 없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교회 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죄 사함의 십자가가 있는 교회만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오직 그런 교회만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줄 믿습니다. 우리 흑석동 교회는 이 죄사함의 십자가가 있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무섭고 무거운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이 십자가 믿에만 나오면 다 용서 받고, 구원받을 줄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죽을 죄를 다 용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 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하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 만 따라가리.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와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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