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 (엡4:1-16)
본문
에베소서는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지금까지 보았던 3장까지는 주로 신앙 에 대한 원리 또는, 교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즉 우리가 믿어야 할 것(credenda)에 대한 말씀들이었습니다.이제 4장부터는 믿는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agenda)에 대하 여 말씀하고 있습니다.이론적인 신학으로부터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로 그 초점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지금부터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1절에 보면 3장 1절과 마찬가지로 <주안에서 갖힌 내>가 너희를 권한다고 그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바울은 자신을 주안에서 갖힌 나,즉 그리스도의 죄수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는 그리스도의 죄수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한 죄수였습니다.순전히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죄수아닌 죄수가 된 것입니다.어제는 홍성교도 소를 심방했었는데,죄스들이 사는 곳을 높은 벽으로 막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높은 벽을 보니 도저히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죄수라고 말하는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죄수로 그리스도안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던 바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 의 죄수였던 것입니다.여러분은 어데습니까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노라고 자 신있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었습니다.그러한 바울이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에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이 짧은 말씀속에는 무한대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부르심에 입은 부름>이 뜻 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르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우리는 그 부르심을 입고 아멘으로 응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즉,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하나님 과 전혀 상관 없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 성도들의 합당한 행함이 오늘 2절 이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행함을 다섯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입니다.고대세계에 있어서는 겸손은 매우 경시되었습니다.겸손은 약한 자들의 것으로 간주되었고,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겸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전 까지는 사람들은 참 겸손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마디로 겸손의 삶이었습니다.그는 자 신을 낮추었습니다.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의 극치를 발견하게 됩니다.본래 성경에 겸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피조물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곧 교만인 것 입니다.즉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1 유혹에 넘어가서 마치 자기가 절대자인 것처럼 행하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 었 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의 영역입니다.우리는 모두 절대 자가 아니라 피조물인 것입니다.피조물의 행할 바는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온유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매우 찬미하였습니다.그는 온유를 중용의 덕으로 보았습니다.즉 <지나치게 분노하는 것과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의 중 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이 온유라는 단어는 길들여진 짐승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즉 사나운 야생동물을 잘 길들여서 사납지 않게 하고 짐을 나를수 있게 되면 그것을 가르켜 <온유>해졌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이 온유라는 말은 결코 연 학함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강한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 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움인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겸손과 온유한 사람이 참으로 강한 사람인 것이고 겸손과 온유가 부르심에 합당 한 행위인 것입니다. 오래참음, 즉 인내입니다.인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참 으신 것처럼 우리를 거역하는 자들에 대하여 오래참는 것입니다.우리의 하나님은 인 내의 하나님이며 오래참는 하나님이십니다.이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 도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따라서 부름받은 우리가 오래참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용납한 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을 뜻하고 있습니다.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먼저 받아 주셨습니다. 찬송349장의 후렴귀는 바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우리는 기도 할 때에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자주 합니다.그러나 본문은 주의 깊게 보면은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신 것"은 이미 과거에 완료된 사건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 미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그 하나됨을 깨지않게 하소서,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이것이 바울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그 하나됨의 근거는 무엇인가 어째서 우리는 하나라고 감히 주장할수 있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7가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 한 몸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고 몸은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한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됨을 이루게 하는 역사입니다.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이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각기 다른 말을 사용하는 지방의 사람들이 자기네의 언어로 들었던 사건이 있습니다.이 사건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인데 바벧탑이후에 분열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하나가 됨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우리는 한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성령님의 사역이 하나되게 함 이라는 것입니다. 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성령님께서는 어느날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 은 같은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이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한 소망을 갖게 되 었는데,그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얼마나 기가막힌 공동체입니까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에 우리는 하나라고 바울은 과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입니다.'또 성령님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 느니라'고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성령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는 같은 한 주님을 소유한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수 있습니다.어쩌면 조금씩 다른 것이 당연 한 일인지도 모릅니다.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믿음입니다. 같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씻 음을 받았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백의 표현입니다.이 세례가 우리에게 있어서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즉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의미에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세례요한의 때나,지금이나,한국이나 미국이나 우리가 선교하는 중공에서도 같은의미로 한 세례 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우리의 하나됨에 대단히 큰 근거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하여야 합니다.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은 만유의 아 버지시며,만유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만유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만유가운 데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된 공동체,부르심을 입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서로 용납함과 하나되 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공동체를 든든히 세우시기 위해,12절에는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기 위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37절 말씀에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는데 그는 부활하여 승천하신 분으로써 우리에게 맞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자신의 분량 대로 우리에게 각종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우리에게 주신 여러 직책들은 오늘 본문 의 말씀 그대로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즉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 니라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한 나에게 귀한 직책을 맡기신 것입니다.우리에게 직책을 맡기신 목적이 12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우리에게 맡기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목적 세가지중에 어느 것을 보아도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봉 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는 것,-모두가 어려운 일입니다.때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보다는 오히려 해할 때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우리는 성장하고,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도 더욱 성숙하여져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14절에는 우리가 경계할 것 두가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아이 처럼 되지 않는일입니다.어린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려고 합니다.이기적 이고 늘 받기만 하려고 하고 아직 철이 없습니다.두번째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 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입니다.악에 빠지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제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여 졌습니다.우리의 목표는 우리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나는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우리는 반드시 성숙한 신앙의 인격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할 때 16절 말씀대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되는 교회,성장하는 교회,든든히 서는 교회를 이룰수가 있는 것입니다.주 안에서 갖힌 바울이 우리를 향하여 간곡히 말하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할 때,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4
그러므로 부르심에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 성도들의 합당한 행함이 오늘 2절 이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행함을 다섯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입니다.고대세계에 있어서는 겸손은 매우 경시되었습니다.겸손은 약한 자들의 것으로 간주되었고,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겸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전 까지는 사람들은 참 겸손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마디로 겸손의 삶이었습니다.그는 자 신을 낮추었습니다.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의 극치를 발견하게 됩니다.본래 성경에 겸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피조물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곧 교만인 것 입니다.즉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1 유혹에 넘어가서 마치 자기가 절대자인 것처럼 행하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 었 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의 영역입니다.우리는 모두 절대 자가 아니라 피조물인 것입니다.피조물의 행할 바는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온유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매우 찬미하였습니다.그는 온유를 중용의 덕으로 보았습니다.즉 <지나치게 분노하는 것과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의 중 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이 온유라는 단어는 길들여진 짐승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즉 사나운 야생동물을 잘 길들여서 사납지 않게 하고 짐을 나를수 있게 되면 그것을 가르켜 <온유>해졌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이 온유라는 말은 결코 연 학함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강한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 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움인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겸손과 온유한 사람이 참으로 강한 사람인 것이고 겸손과 온유가 부르심에 합당 한 행위인 것입니다. 오래참음, 즉 인내입니다.인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참 으신 것처럼 우리를 거역하는 자들에 대하여 오래참는 것입니다.우리의 하나님은 인 내의 하나님이며 오래참는 하나님이십니다.이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 도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따라서 부름받은 우리가 오래참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용납한 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을 뜻하고 있습니다.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먼저 받아 주셨습니다. 찬송349장의 후렴귀는 바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우리는 기도 할 때에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자주 합니다.그러나 본문은 주의 깊게 보면은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신 것"은 이미 과거에 완료된 사건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 미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그 하나됨을 깨지않게 하소서,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이것이 바울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그 하나됨의 근거는 무엇인가 어째서 우리는 하나라고 감히 주장할수 있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7가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 한 몸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고 몸은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한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됨을 이루게 하는 역사입니다.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이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각기 다른 말을 사용하는 지방의 사람들이 자기네의 언어로 들었던 사건이 있습니다.이 사건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인데 바벧탑이후에 분열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하나가 됨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우리는 한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성령님의 사역이 하나되게 함 이라는 것입니다. 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성령님께서는 어느날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 은 같은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이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한 소망을 갖게 되 었는데,그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얼마나 기가막힌 공동체입니까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에 우리는 하나라고 바울은 과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입니다.'또 성령님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 느니라'고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성령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는 같은 한 주님을 소유한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의 형태가 조금씩 다를수 있습니다.어쩌면 조금씩 다른 것이 당연 한 일인지도 모릅니다.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믿음입니다. 같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씻 음을 받았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백의 표현입니다.이 세례가 우리에게 있어서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즉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의미에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세례요한의 때나,지금이나,한국이나 미국이나 우리가 선교하는 중공에서도 같은의미로 한 세례 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우리의 하나됨에 대단히 큰 근거를 제시하는 말씀입니다.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하여야 합니다.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은 만유의 아 버지시며,만유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만유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만유가운 데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된 공동체,부르심을 입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서로 용납함과 하나되 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공동체를 든든히 세우시기 위해,12절에는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기 위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37절 말씀에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는데 그는 부활하여 승천하신 분으로써 우리에게 맞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자신의 분량 대로 우리에게 각종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우리에게 주신 여러 직책들은 오늘 본문 의 말씀 그대로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즉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 니라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한 나에게 귀한 직책을 맡기신 것입니다.우리에게 직책을 맡기신 목적이 12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우리에게 맡기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목적 세가지중에 어느 것을 보아도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봉 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는 것,-모두가 어려운 일입니다.때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보다는 오히려 해할 때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우리는 성장하고,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도 더욱 성숙하여져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14절에는 우리가 경계할 것 두가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아이 처럼 되지 않는일입니다.어린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려고 합니다.이기적 이고 늘 받기만 하려고 하고 아직 철이 없습니다.두번째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 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입니다.악에 빠지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제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여 졌습니다.우리의 목표는 우리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입니다.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나는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우리는 반드시 성숙한 신앙의 인격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할 때 16절 말씀대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되는 교회,성장하는 교회,든든히 서는 교회를 이룰수가 있는 것입니다.주 안에서 갖힌 바울이 우리를 향하여 간곡히 말하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할 때,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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