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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라 (엡3:14-21)

본문

지도를 받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에게 스승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 삶입니다." 스승이 다시 말합니다. "당신이 살려면 말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스승의 대답이 하도 황당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나중에 스승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이 하는 말, "당신이 길을 잃고 의지할 곳 없이 된 것은 당신이 말의 세계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내용인데 당신은 말로 만족합니다. 차림표가 배를 부르게 해 주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정해신 도식의 문구가 당신의 갈증을 풀어 주지는 못하는 법입니다."식당 메뉴의 '설렁탕'이라는 문구를 내가 아무리 쳐다본다 해서 내 배가 부른 것이 아니고, 신문 광고의 '광천수'라는 글자를 내가 아무리 쳐다본다 해서 내 갈증이 면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입에 넣고 씹어 취하고 마셔야 비로소 배부름과 해갈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참으로 필요한 것은 체험적인 영성의 삶이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메뉴판'만 읽고서, '차림표'만 보고서 마치 그것을 맛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스승의 지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 대한 지식을 더해가는 삶입니까 물론 그것도 중요한 신앙생활의 한 요소입니다. 그것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행해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경건케 되기 위한 방법이지 그것 자체가 경건은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알아야 성경대로 살 수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을 향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의 형식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말의 실제의 세계에 살아야 참으로 그 말을 아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화 하여 그것으로 이루어가는 생의 과정이다.' 이것을 보통 조직신학적 용어로서는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만은 오늘 바울사도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숙한 신앙은 온전히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갖 충만으로 자신이 의식화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은 바로 이것이 신자의 목표요 힘써야할 일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써 보낸 편지 중의 일부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이 에베소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일반적인 기도 자세는 '서서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서서 기도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빈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간절하고 진지한 기도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함으로 중보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왤까요 왜 사도는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할까요 그 기도의 목적과 제목이 무엇인가요. 사도가 그토록 간절하고 진지하게 구하는 것의 촛점은 바로 19절 하반절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의 교우들 전체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 지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이 그대로 에베소 교우들에게 담겨져서 그분의 충만하심같이 저들도 충만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이 바울의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딤후2:20절 이하에서 사람을 '그릇'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등. 그러면서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릇이란 무언가로 채워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인간을 그릇에 비유한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만 하는 존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릇에 무언인가가 담겨져야 그릇인 것처럼 사람도 무엇을 그속에 담음으로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 속에 담겨진 바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인간에게 담겨져 있는 그 무엇,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질그릇처럼 인간을 빚어서 그 속에 당신의 루아흐, 영을 충만히 불어 넣으셨습니다. 마치 풍선에 질소를 듬뿍 채우면 그것이 하늘 높이 날으는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당신의 충만한 영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내용물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파괴되었습니다.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만 '펑' 터져서 하늘로부터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에 사도는 그 잃어버린 바, 상실해 버린 바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요 촛점이요 핵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취하고, 기도를 올리고, 찬양을 드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공허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충만할 수 있는 겁니까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과정은 어떤 것입니까 18절에 보면 사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온갖 충만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데서 부터 충만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은 병의 병마개를 따는 것과 같습니다. 병마개를 따지 아니하고 아무리 컵에다 부어보십시오. 부어집니까 병마개를 따야 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영성생활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데서 시작한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독특한 사랑입니다. 유일무이한 사랑입니다.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그런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사랑개념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 사랑은 지식을 요구합니다. 그 사랑의 넓이를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의 길이를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의 높이를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신비를 아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는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은 좀 차이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체험입니다.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자기경험에서 맛보는 느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렇게 체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는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잇대어지는 다함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높이'는 하늘 끝에 가 닿는 숭고하고 존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의 무한함과 무궁함과 광대함과 숭고함을 깨달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이 깃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간혹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도 막연히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너무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사랑의 깊이나 넓이나 길이나 높이를 얼마나 헤아려 알고 있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물음입니다. 그 사랑의 실체를 모르면 하나님을 닮아갈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사랑의 깨달음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있을 때 당신께 한 창녀가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이 사함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느니라."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당신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많은 자가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이 깊어지는 겁니다. 아는 만큼 이해가 분명해지는 겁니다. 아는 만큼 관계가 가까와지는 겁니다. 그래서 깊은 교제가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 간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가 막역하면 막역할수록 서로는 내심을 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17절 말씀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원한다"는 사도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랑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심으로 싹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마음에 모심으로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은 진리요 순리입니다. 사도는 지금 농사의 표상으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토양은 사랑이라는 토양입니다. 참사랑의 토양에서 뿌리가 더욱 깊게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화신인 그리스도로 마음밭을 '객토(客土)'해야 합니다. 그 객토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시는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골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배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속사람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고 또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속사람과 겉사람을 구분짓습니다. 비록 겉사람은 세월과 함께 후패해져 갈지라도 속사람은 복음 안에서 날로 젊어지고 싱그러워진다고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것은 '건강한 인격'을 말하는 것인데 몇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칼 융(Carl G. Jung)이라는 심리학자는 '존재에 대해서 개별화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존재의 개별성'을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요즘 소위 신세대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남의 눈치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나름의 자기주의가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 잘 살고 나만 부자되겠노라는 '이기주의적 개별성'과는 다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들의 개별성을 '자기중심적 개별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남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매사에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니가 크니 내가 높으니' 이런 사람은 건강한 인격체가 못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한테 질질 끌려다니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각기 개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다 자신에게 적절한 달란트를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겁니다. 반 달란트면 어떻습니까 작으면 작은대로 좋은 데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굴의 노예가 되고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병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존재를 개별적으로 생각하여 남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항상 개별성을 지니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란 수용성이 큰 사람, 즉 마음이 큰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은 마음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누구의 이야기도 잘 듣습니다. 다 받아들이고 다 수용하며 좀더 깊이 사고 하는 사람, 그가 바로 건강한 속사람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치 못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소리를 들어도 발끈합니다. 화를 잘 냅니다. 아직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질 필요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마다 '죽겠다, 망했다,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항시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이런 사람 인격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입니다. 왜 죽고 망하는 얘기만 하는 겁니까 살고 흥하는 얘기 좀 하면 안됩니까 특히 지도자가 이런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큰 일입니다.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남을 독려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항시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일으키는 말을 해야지 상대방을 주저앉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불씨에 기름을 갖다 끼얹어야지 불씨에 찬물을 갖다 끼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속사람이란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속사람이 겉사람을 주도하는 그러한 인격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질수 있는 겁니까 16절의 사도의 기도에 다시 귀기울여 보십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여기 보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속사람은 성령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속사람은 성령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고 강건케 하는 것은 성령님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를 주장할 때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된 목표로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이라는 새로움을 입는 존재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님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까.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로댕이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미술학도가 찾아와서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까' 그랬더니 로댕의 대답이 이러했답니다. '나는 불필요한 부분만을 깍아 냅니다. 그러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레이져로 수술을 많이 합니다만은 속사람의 강건함은 그렇게 불필요한 부분을 성령님의 빛으로 쪼여 잘라내고 깍아냄으로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늘의 영광을 보아야 내적 건강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의 건강이 땅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의 건강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만이 그 심령에 평강을 누리고 강건함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습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를 맞으려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자기를 죽이는 저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속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도 그러했습니다. 한많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께 창을 꼽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속사람이 강건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스데반이나 주님에게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건강의 절정은 모두 하늘의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봄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영성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풍성함, 이것을 깨닫고 보는 순간, 그 안에서 내 영이 소생함을 입습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영광을 바라볼 때에 병든 영혼이 고침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화케 하는 영이고 사명을 깨우치는 영입니다. 이 영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 속사람은 강해질 수 있고, 하늘의 풍성함을 바라봄으로 현실의 고난과 아픔을 승화하여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하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그 사랑에 뿌리를 내려 더욱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하늘의 온갖 충만한 것으로 자신을 충만히 채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때 그는 참으로 참신자,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내적으로 연관성을 갖는 세 가지 것을 연결지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속사람이 굳세어지고, 믿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고, 그 사랑의 실체를 더욱 알고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으로 자신을 채워,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람으로 저들이 살아가게 되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영락의 가족들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자신을 채워가시기를 바랍니다. 글레멘스톤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게되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게되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게되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게 된다.' 팔자 한탄은 금물입니다. 생을 속단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운명은 내 마음에 달려 있고 내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내 마음이 거듭남을 체험하는 순간 운명도 바뀝니다. 내적 존재가 변할 때에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신 부요함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십시다.
롬9:23절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영광받도록 미리 준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그릇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의 부요를 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그릇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고 바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 바울사도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하십시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속사람의 변화에 있습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이 시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그것들은 모두 악의 도구들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변화될 때에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데 일익을 감당하는 유익한 도구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조종사입니다. 이 시대를 움직이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럼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물의 영장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당신의 피조물들의 이름을 부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고로 본문 14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바로 되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바로 되면 이 세상은 바로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제 이 기도가 우리들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도에 우리 모두가 '아멘'으로 응답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참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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