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하나 (엡4:13)
본문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일치를 의미하는 말씀인 줄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신앙과 지식의 일치는 신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한국교계 지도자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일인 줄 압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을 드리는 바 입니다. 본절은 앞에 12절에서 지적된바 성도가 완전케 되어 봉사하며 교회를 설립 할 때의 내용 또는 목적을 말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일치를 필요로 합니다. 이 신앙의 일치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여호와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지식 사 이에 만족스러운 일치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신앙과 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은 갖었지만 우리의 지 식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여 우리의 믿음은 갖었지만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 하고 불충분하여 우리의 믿음이 수준에까지 끌어 올리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믿는 일은 잘 하는 성도들이라 도 성경말씀의 지식이 너무 적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확실히 모르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분별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우고 확실한 지식에 거하여 믿음의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우나 상크타(Una Sancta:거룩한 하나), 거룩한 일치는 우리 모두를 하나 로 통일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지식에 속해있는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일에 있어 "믿음"을 먼저 말하고 "지식"을 그 다음에 말했 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지식'이라는 말 에피그노시스이라는 말은 그노시스 (지식) 라는 말보다 더 강한 지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지식 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은 ".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 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고 했습니다. 참된 지식은 믿음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지식 은 신앙의 결과입니다. 이 지식은 믿음없이 불가능합니다.믿음의 성경을 읽 을 때 참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명사는 같은 목적 곧 "하나님의 아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고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잘못된 믿음이 지식에 영향을 미치고 잘못된 신앙과 신학(지식)은 서로 잘못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주장해야 할 신앙과 신학(지식)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 입니까 나누어 생각해 보고저 합니다.
1. 신앙, 우리가 가지는 신앙은 물론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의 구속의 진리를 믿고 성령님의 역사를 믿고 구원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우리 장로교회, 개혁교회가 믿는 신앙은 웨스트민 스터 신도계요서(Westminster Confession)와 대소요의 문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필자가 화란,독일,미국 등 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었을 때 교포 교인들에게 "당신은 어느 교회 교인입니까"라고 자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 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장로교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장로교회는 무엇을 믿는 교회입니까"고 물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많은 교인들이 대 답을 잘못했습니다. 같은 현상은 필자가 교실에서나 교회 대학부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6장 4,5절에 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장 49절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 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한 나다나엘의 고백이 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고백적인 신앙이 되었 으며 현대 교회의 신앙고백의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많던 도마의 외침,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도 이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전 12:3,롬10:9,행2:36,참조). 교회가 가지는 이러한 고백은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호모 로기아라고 하는데, "고백한다"는 것은 신적 능력의 존재나 권위를, 혹은 사람이 범한 죄와 불법을 말로나 행동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동 사가 성경에서는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1)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서, 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시인하거나 공언하는 것,(2) 죄를 시인하거 나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에서부터 신조가 작성된 것은 신학과 더불어 초대교회에서부터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확하고 고정된 공적인 신조는 3,4세기까지 나타나 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절정에 이른 과정은 역사적 신조(신 26:5-9와 6:21-25)와 구약의 선언적인 확언(신6:4-5와 왕상 18:39)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해석하시고 제자들이 그것들과 세상 을 위해 예수님의 의의를 나타냄으로써 분명히 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에는 정확하고 정의되며 공적으로 권위가 부여된 신조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설교이며 노래하며 귀신을 내어 쫓으며 말씀을 증거했습니다.이러한 활동 중에서 신앙의 내용은 신조와 같은 형식으로 다소 고정되 었습니다. 이러한 형식들은 때때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7절 까지에서 말한대로 그가 받은 것을 형식적인 스타일로서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때로는 판에 박힌 형식으로 고정되기 시작한 인정된 교수체 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형식에 있어서는 예수에 관한 확언에 있어서까지도 어떤 신조적인 모형은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기독론적인 형식은 예수는 주님이 시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카리스마적 외침에서 칼케톤의 잘 발전 된 기독론의 기초가 되는 로마서 1장1절에서 4절까지에 있는 말씀과 같은 주의깊은 신학적 생각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기독론적 고백과 더불어 신 약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두분을 고백하는 두분 형식과 성부, 성자, 성신 을 긍정하는 세분 형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동시에 나란히 존재합니다. 3세기에는 삼위일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침례의식의 영향 때문에, 부 분적으로는 신약 문서의 절대적인 삼위일체론 때문에 한분 형식이나 두분 형식으로 대치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는 고정된 신조가 생겼다는 중요한 신학적인 생각에 대한 설명은 사 도행전에 있는 설교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설교들은 일반적으로 주장된 신앙의 요약이며 특별히 선교적 상황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는 설교(행2-3장),세례(행 8:36-38),마귀 축출(행3:6,막1:24),신앙고백 (딤전 6:12-16),순교(행7:54),신앙고백(딤전 6:12-16),순교(행 7:54-56),논 쟁(요일 4:2)등이 있습니다.
신앙의 척도(Regula fidei)등 다시 말하면 신앙의 표준임을 주장하는 신조 를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무시 혹은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려는 경향이 농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던 최초의 상황에 대 하여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멧세 지는 기억하고 대항하던 세계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외 교회 교 육이나 실천적 생활, 성경이해나 해석 등은 신앙고백의 표준과 실제적인 신앙의 규범을 필요로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의 체험을 반영하는 이와 같은 표준과 규범은 마침내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수 많은 민족의 종교샤왈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으로는 "사도신경"(Apostles Creed),니케아 신조(Nicene Creed),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Augusburg Confession), 영국 국교의 "39 개 신앙개조"(39 Articles),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빈주의 의 최대 표현으로서 우리 장로교회의 기본 신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주흐 1643년에서 1647년까지 잉글랜드와 스코 트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 대표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교회당에 모여 성 직자회의(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를 열고 모두 33장으로 된 신조 와 교역자를 위한 196문의 대요리문답(Larger Catechism)과 초신자를 위한 101문의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그리고 예배모범을 제정했습니다. 약간의 감독주의 대표들과 독립당과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철 저한 칼빈주의 사상에 입각한 장로교회 목사 121명, 귀족 10명, 국회의원 20명, 합계 151명의 경건한 장로들, 평교인들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 시까지 다섯 시간씩 1,064회의 회의를 통해 14,000여 단어 33장으로 된 이 신조를 만들었는데 각 장은 다시 수많은 절로 세분되어 있으며 여기에 성구 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리챠-드 박크스터(Richard Baxter)는 말하기를 "사도 후 온 세계에 이 같이 신령한 집회는 별로 없었다. 그 회원들은 지식 이 탁월하였으며 경건한 신앙이 독실했으며 교역에 재능이 겸비한 사람들이 었다"고 했습니다. 이 신조 작성의 소제는 물론 성경이었겠지만 이미 영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신조를 수정하기도 하고 축조하다가 중지하고 1615년 아일랜드 교회에 서 제정하여 당시 사용하고 있던 아일랜드 신조를 기초로 하여 작성했습니다. 그리고는 1648년 국회에서 다소 수정하여 법률로 인정하고 그 신조를 국교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장로회 총회가 채 용했고 그후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미국과 카나다와 호주 및 온 세계의 각 장로회 총회가 채용했고 또 장로회 이외에도 이 신조를 채용하는 교회가 많 게 되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9월 7일 평양에서 장로교회를 조직하고 이 신조와 대소요리문답,예배모범 등을 채용하게 되었고 공의회가 선교사 다섯 사람 을 선출하여 우리말로 번역하게 했는데 배위량 선교사가 이 신조를 번역했 으며 리놀서 선교사가 교정을 보았습니다. 1932년 총회에서는 위원 15인을 택하여 번역이 잘못된 것을 개정하여 한글 맞춤법에 맞게 문구를 수정하여 1933년 총회의 승인을 받아 사용하게 되었 습니다.
2.둘째는 신학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사상이며 개혁주의 정통주의 신학사상 입니다.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a) 신지식으로서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그 신지식입니다. 이 신 지식을 논리적으로 조직화하며 또 다른 여러 학문과 병행하여 그 학문적 진리성을 주장하는 학적 신학에는 지식으로서의 진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에 잇어서 같은 신지식이어서 신자 일반의 신지식 없이는 학자의 학적 신학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신학을 가지며 신학자는 하나님을 아는 학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 없이는 멸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2절에서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의 결여가 유대인의 멸망이었 습니다. 하나님에의 열심은 있어도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그 열심은 오히려 비참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지와 반지식주의를 배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위펄드(Warfield)는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이 나오기 이전 1545년 이래 13판이나 출판 된 칼빈의 교리문답은 전세계 개혁파교회에서 사랑을 받았는데 이 교리문답 은 "인간생활의 주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답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제2장 에서 신지 식은 본질적으로 경건한 것이여야 한다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신 학은 본질적으로 경건한 신지식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b) 그 다음은 신조신학으로서의 신학입니다. 개혁파신학은 신조신학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개혁파신학의 직접적 재료는 개혁파교회의 여 러 신조입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신학의 연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 문답으로서 되는 신앙규준의 신학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조신학은 어떤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의 신학이 아니고 교회적 공공적신학입니다. 여기에는 신학적 일치가 있는 것이며 신조신학에는 교회적 규범이라는 제이 의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신학은 비신 앙적, 비교회적 성격을 띠고 있어 교회의 신조를 비평하면서 교회를 파괴하 고 있습니다.
(c).셋째는 성경적 규범 하에 서는 신학입니다. 신조신학,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은 그 위에 있는 규범성을 나 타내고 있는데 이 규범은 성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론 에 의하면 "성경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史上 최 종적 단계에 서는 것이며 특별계시의 완성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것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 말하는 바에 잘못이 없고 주로 신앙과 도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교회의 논쟁문제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권위 를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한 성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프 로테스탄트의 주장이었습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객관적 원리 이며 내용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에 근거를 두는 합 리주의, 감정에 근거를 두는 신비주의, 의지에 근거를 두는 적극적 사고와 인위적 확신주의 등을 배격하고 성경을 단지는 종교적 본질만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아 그리스도와의 실존적 만남으로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하며 성경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신정통주의, 성경을 과학에 비추어 해석하거나 또는 영 감과 무우성을 구분하여 영감은 믿으나 무오성은 부인하는 오늘날의 신복음 주의 성경관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d) 마지막으로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을 믿는 신학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입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 하나님을 믿느니 것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은 "하나님은 영으로서 그 실재, 지혜, 힘, 거룩, 의, 선 참되심이 무한,영원,불변한 분이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제1인격에 있어서는 아버지, 제2인격에 있어서는 아 들, 제3인격에 있어서는 성령님이시며 삼위로서 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 에 있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미리 성정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정에 의해 천지와 인류를 창조하셨고 지배하시며 뜻 가운데서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를 뜻대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고 36절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의 입장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며 성경 중심의 신학이며 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신조신학이며 모든 교인이 가지는 신지식의 신학 입니다. 이상 신학적 주장 외에 그 이상의 신학은 우리의 지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를 믿는 신앙에 있습니다. 성경 기록 이상의 아무 것도 믿 지 않지만 그 기록 이하의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 이상 의 것, 신학 이상의 것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이 믿음의 수준에까지 올라옴으로 "거룩한 하나"(Una Sancta) 의 경 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신학이 일치되는 거룩한 하나, 우나 상크타입니다.
우나 상크타(Una Sancta:거룩한 하나), 거룩한 일치는 우리 모두를 하나 로 통일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지식에 속해있는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일에 있어 "믿음"을 먼저 말하고 "지식"을 그 다음에 말했 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지식'이라는 말 에피그노시스이라는 말은 그노시스 (지식) 라는 말보다 더 강한 지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지식 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은 ".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 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고 했습니다. 참된 지식은 믿음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지식 은 신앙의 결과입니다. 이 지식은 믿음없이 불가능합니다.믿음의 성경을 읽 을 때 참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명사는 같은 목적 곧 "하나님의 아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고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잘못된 믿음이 지식에 영향을 미치고 잘못된 신앙과 신학(지식)은 서로 잘못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주장해야 할 신앙과 신학(지식)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 입니까 나누어 생각해 보고저 합니다.
1. 신앙, 우리가 가지는 신앙은 물론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의 구속의 진리를 믿고 성령님의 역사를 믿고 구원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우리 장로교회, 개혁교회가 믿는 신앙은 웨스트민 스터 신도계요서(Westminster Confession)와 대소요의 문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필자가 화란,독일,미국 등 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었을 때 교포 교인들에게 "당신은 어느 교회 교인입니까"라고 자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 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장로교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장로교회는 무엇을 믿는 교회입니까"고 물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많은 교인들이 대 답을 잘못했습니다. 같은 현상은 필자가 교실에서나 교회 대학부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6장 4,5절에 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장 49절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 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한 나다나엘의 고백이 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고백적인 신앙이 되었 으며 현대 교회의 신앙고백의 근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많던 도마의 외침,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도 이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전 12:3,롬10:9,행2:36,참조). 교회가 가지는 이러한 고백은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호모 로기아라고 하는데, "고백한다"는 것은 신적 능력의 존재나 권위를, 혹은 사람이 범한 죄와 불법을 말로나 행동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동 사가 성경에서는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1)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서, 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시인하거나 공언하는 것,(2) 죄를 시인하거 나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에서부터 신조가 작성된 것은 신학과 더불어 초대교회에서부터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확하고 고정된 공적인 신조는 3,4세기까지 나타나 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절정에 이른 과정은 역사적 신조(신 26:5-9와 6:21-25)와 구약의 선언적인 확언(신6:4-5와 왕상 18:39)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해석하시고 제자들이 그것들과 세상 을 위해 예수님의 의의를 나타냄으로써 분명히 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에는 정확하고 정의되며 공적으로 권위가 부여된 신조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설교이며 노래하며 귀신을 내어 쫓으며 말씀을 증거했습니다.이러한 활동 중에서 신앙의 내용은 신조와 같은 형식으로 다소 고정되 었습니다. 이러한 형식들은 때때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7절 까지에서 말한대로 그가 받은 것을 형식적인 스타일로서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때로는 판에 박힌 형식으로 고정되기 시작한 인정된 교수체 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형식에 있어서는 예수에 관한 확언에 있어서까지도 어떤 신조적인 모형은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기독론적인 형식은 예수는 주님이 시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카리스마적 외침에서 칼케톤의 잘 발전 된 기독론의 기초가 되는 로마서 1장1절에서 4절까지에 있는 말씀과 같은 주의깊은 신학적 생각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기독론적 고백과 더불어 신 약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두분을 고백하는 두분 형식과 성부, 성자, 성신 을 긍정하는 세분 형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동시에 나란히 존재합니다. 3세기에는 삼위일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침례의식의 영향 때문에, 부 분적으로는 신약 문서의 절대적인 삼위일체론 때문에 한분 형식이나 두분 형식으로 대치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는 고정된 신조가 생겼다는 중요한 신학적인 생각에 대한 설명은 사 도행전에 있는 설교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설교들은 일반적으로 주장된 신앙의 요약이며 특별히 선교적 상황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는 설교(행2-3장),세례(행 8:36-38),마귀 축출(행3:6,막1:24),신앙고백 (딤전 6:12-16),순교(행7:54),신앙고백(딤전 6:12-16),순교(행 7:54-56),논 쟁(요일 4:2)등이 있습니다.
신앙의 척도(Regula fidei)등 다시 말하면 신앙의 표준임을 주장하는 신조 를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무시 혹은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려는 경향이 농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던 최초의 상황에 대 하여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멧세 지는 기억하고 대항하던 세계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외 교회 교 육이나 실천적 생활, 성경이해나 해석 등은 신앙고백의 표준과 실제적인 신앙의 규범을 필요로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의 체험을 반영하는 이와 같은 표준과 규범은 마침내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수 많은 민족의 종교샤왈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으로는 "사도신경"(Apostles Creed),니케아 신조(Nicene Creed),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Augusburg Confession), 영국 국교의 "39 개 신앙개조"(39 Articles),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빈주의 의 최대 표현으로서 우리 장로교회의 기본 신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주흐 1643년에서 1647년까지 잉글랜드와 스코 트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 대표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교회당에 모여 성 직자회의(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를 열고 모두 33장으로 된 신조 와 교역자를 위한 196문의 대요리문답(Larger Catechism)과 초신자를 위한 101문의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그리고 예배모범을 제정했습니다. 약간의 감독주의 대표들과 독립당과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철 저한 칼빈주의 사상에 입각한 장로교회 목사 121명, 귀족 10명, 국회의원 20명, 합계 151명의 경건한 장로들, 평교인들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 시까지 다섯 시간씩 1,064회의 회의를 통해 14,000여 단어 33장으로 된 이 신조를 만들었는데 각 장은 다시 수많은 절로 세분되어 있으며 여기에 성구 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리챠-드 박크스터(Richard Baxter)는 말하기를 "사도 후 온 세계에 이 같이 신령한 집회는 별로 없었다. 그 회원들은 지식 이 탁월하였으며 경건한 신앙이 독실했으며 교역에 재능이 겸비한 사람들이 었다"고 했습니다. 이 신조 작성의 소제는 물론 성경이었겠지만 이미 영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신조를 수정하기도 하고 축조하다가 중지하고 1615년 아일랜드 교회에 서 제정하여 당시 사용하고 있던 아일랜드 신조를 기초로 하여 작성했습니다. 그리고는 1648년 국회에서 다소 수정하여 법률로 인정하고 그 신조를 국교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장로회 총회가 채 용했고 그후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미국과 카나다와 호주 및 온 세계의 각 장로회 총회가 채용했고 또 장로회 이외에도 이 신조를 채용하는 교회가 많 게 되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9월 7일 평양에서 장로교회를 조직하고 이 신조와 대소요리문답,예배모범 등을 채용하게 되었고 공의회가 선교사 다섯 사람 을 선출하여 우리말로 번역하게 했는데 배위량 선교사가 이 신조를 번역했 으며 리놀서 선교사가 교정을 보았습니다. 1932년 총회에서는 위원 15인을 택하여 번역이 잘못된 것을 개정하여 한글 맞춤법에 맞게 문구를 수정하여 1933년 총회의 승인을 받아 사용하게 되었 습니다.
2.둘째는 신학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사상이며 개혁주의 정통주의 신학사상 입니다.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a) 신지식으로서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그 신지식입니다. 이 신 지식을 논리적으로 조직화하며 또 다른 여러 학문과 병행하여 그 학문적 진리성을 주장하는 학적 신학에는 지식으로서의 진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에 잇어서 같은 신지식이어서 신자 일반의 신지식 없이는 학자의 학적 신학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신학을 가지며 신학자는 하나님을 아는 학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 없이는 멸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2절에서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의 결여가 유대인의 멸망이었 습니다. 하나님에의 열심은 있어도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그 열심은 오히려 비참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지와 반지식주의를 배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위펄드(Warfield)는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이 나오기 이전 1545년 이래 13판이나 출판 된 칼빈의 교리문답은 전세계 개혁파교회에서 사랑을 받았는데 이 교리문답 은 "인간생활의 주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답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제2장 에서 신지 식은 본질적으로 경건한 것이여야 한다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신 학은 본질적으로 경건한 신지식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b) 그 다음은 신조신학으로서의 신학입니다. 개혁파신학은 신조신학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개혁파신학의 직접적 재료는 개혁파교회의 여 러 신조입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신학의 연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 문답으로서 되는 신앙규준의 신학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조신학은 어떤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의 신학이 아니고 교회적 공공적신학입니다. 여기에는 신학적 일치가 있는 것이며 신조신학에는 교회적 규범이라는 제이 의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신학은 비신 앙적, 비교회적 성격을 띠고 있어 교회의 신조를 비평하면서 교회를 파괴하 고 있습니다.
(c).셋째는 성경적 규범 하에 서는 신학입니다. 신조신학,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은 그 위에 있는 규범성을 나 타내고 있는데 이 규범은 성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론 에 의하면 "성경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史上 최 종적 단계에 서는 것이며 특별계시의 완성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것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 말하는 바에 잘못이 없고 주로 신앙과 도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교회의 논쟁문제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권위 를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한 성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프 로테스탄트의 주장이었습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객관적 원리 이며 내용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에 근거를 두는 합 리주의, 감정에 근거를 두는 신비주의, 의지에 근거를 두는 적극적 사고와 인위적 확신주의 등을 배격하고 성경을 단지는 종교적 본질만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아 그리스도와의 실존적 만남으로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하며 성경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신정통주의, 성경을 과학에 비추어 해석하거나 또는 영 감과 무우성을 구분하여 영감은 믿으나 무오성은 부인하는 오늘날의 신복음 주의 성경관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d) 마지막으로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을 믿는 신학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입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 하나님을 믿느니 것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은 "하나님은 영으로서 그 실재, 지혜, 힘, 거룩, 의, 선 참되심이 무한,영원,불변한 분이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제1인격에 있어서는 아버지, 제2인격에 있어서는 아 들, 제3인격에 있어서는 성령님이시며 삼위로서 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 에 있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미리 성정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정에 의해 천지와 인류를 창조하셨고 지배하시며 뜻 가운데서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를 뜻대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고 36절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의 입장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며 성경 중심의 신학이며 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신조신학이며 모든 교인이 가지는 신지식의 신학 입니다. 이상 신학적 주장 외에 그 이상의 신학은 우리의 지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를 믿는 신앙에 있습니다. 성경 기록 이상의 아무 것도 믿 지 않지만 그 기록 이하의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 이상 의 것, 신학 이상의 것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이 믿음의 수준에까지 올라옴으로 "거룩한 하나"(Una Sancta) 의 경 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신학이 일치되는 거룩한 하나, 우나 상크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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