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양육하라 (엡6:4)
본문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자녀 교육열이 제일 높은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라고 합니다. 학교 수업 외에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이 초등학교의 경우 93%, 중학교의 경우 96%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금액이 공교육비의 두 배 가까이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선에서 지도하는 교육 전문가들도 과거에 비하면 학력도, 지식도, 경험도 많은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둘이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입니다.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무제에 대해서 시대에 따라 주장을 달리합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당연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가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의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정 사역에 대한 필요성과 더불어 가정 치유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 사역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사회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천국을 소개할 때에는 가정의 질서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성령님을 모성애와도 같은 보혜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정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가정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가정을 통하여 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들은 어떠합니까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에 미움과 갈등, 분노와 다툼, 무관심과 원망, 불안과 실망이 점점 깊이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가정 붕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 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를 보십시오. 청소년들의 폭력 문제가 심각합니다. 상상을 초월할만큼 무섭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원 폭력이 무서워 자살한 학생이 1997년 7월 현재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학생들까지 여기에 뒤질세라 주먹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들의 성적인 타락상이 극심합니다. 십대들의 음란 비디오 사건의 주인공은 15살짜리 여중 2학년생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벌거벗고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들인데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경찰이 5, 6월에 유흥 업소를 급습해서 일하는 여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십대가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마약 사용이며 자살 그리고 가출하는 청소년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녀 교육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지침은 무엇입니까
1. 양육의 주체 ‘아비들아’라는 말씀에서 주체가 드러납니다. 즉 자녀들을 가르칠 사람은 학교의 선생님이 아닌 부모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자녀들의 교육은 모두 학원 아니면 학교에 위임해 버린 상태입니다. 성경은 교사 중에도 부모만한 교사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포로기 전까지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가정 교육이 전부였습니다. 부모가 교사요, 성경과 전승과 부모의 삶 자체가 교과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포로 후기를 지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회당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감당해야 합니다. 선다싱은 ‘어머니의 가슴은 나의 신학교였다’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나는 우리 어머니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하나님을 알게 했고, 선에 대한 씨를 뿌려 주셨다’고 했고, 허버트는 ‘백 명의 교사보다도 한 사람의 어머니가 낫다’고 했고, 스펄전은 ‘가정에서 성경 읽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그치는 자는 화가 있을지로다’라고 했고, 링컨은 대통령 취임시에 낡은 성경을 들고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했고,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을 위한 학교’라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입니다. 자녀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주체는 회당도, 학교도, 사회도 아닌 가정이요, 그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2. 양육의 대상 ‘자녀들’이라는 말씀은 양육 대상을 밝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자녀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어디서 잘못되는가 하면 자녀를 마치 자기 것인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성경적인 자녀관은 이렇습니다. 먼저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시 127:3)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창 33:5)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기르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시 127:3,4, 삿 13:2). 결코 내 물건, 내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자녀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고, 교육 내용이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양육의 방법 본문에서 양육의 방법으로는 부정적인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동시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로 가르쳐 줍니다.
1) 노엽게 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징계와 분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해야 합니다(잠 13:24, 19:18). 그러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노함’에 대하여 공동 번역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감정이 상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헨드릭슨은 여섯 가지를 지적합니다.
(1) 과잉 보호,
(2)편애,
(3)낙심케 하는 일,
(4)의견의 불일치,
(5)자녀들에 대한 소홀함,
(6)가혹한 처벌이 주어질 때라고 했습니다. 바클레이는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1)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할 때이다. 즉 ‘내가 너만할 때는 그런 일을 안 했다’는 식의 꾸지람이다. 그때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2) 지나친 통제 때문이다.
(3) 격려에 인색할 때이다. 그래 루터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끼면 자식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놓아 두어 자식이 잘했을 때에는 그 사과를 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 자녀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유로는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을 들 수 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습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누누어 주면서 어머니를 그려 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특이하게 어머니를 그렸습니다. 그것은 입과 손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도 기형적이리 만큼 크게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더니 ‘우리 엄마는 나만 보면 잔소리나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손으로 때려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도대체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그들의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들의 가슴으로 같이 느껴 보려는 경험을 갖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 교육은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없는 관심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만 될 뿐입니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21에서는 ‘자녀들이 낙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 주의 교양으로 하라. 여기 ‘교양’이라고 하는 말은 ‘행동을 통한 교육’을 의미합니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녀들에게는 산 교육이 됩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으면서 성장합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부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항상 옳은 말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는 스스로 한 말을 부정해 버립니다. 정직을 이야기하면서도 거짓말을 밥 멋듯 합니다.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도 자기 실속 챙기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어느 부모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놀이 동산에 놀러 갔다고 합니다.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6세 이하는 무료’라는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가 물어보면 여섯 살이라고 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습니다. ‘나보고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거짓말을 하라고요’ 하더랍니다. 말따로 행동 따로, 이것을 따로국밥이라고 합니까 그러고도 그 자식이 정직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이런 예들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화가 걸려오면 ‘나 없다고 해라’고 아이에게 일러줍니다. 부모들은 텔리비전을 보면서 자식들은 들어가 공부하라고 합니다. 부모들은 밥상에 앉기만 하면 입맛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때마다 밥 안 먹는다고 타박입니다. 부모들은 자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지겠습니까 여기서부터 교육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부모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대로 흉내내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이제는 말 가지고 교육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행동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원만한 부부 관계, 부모들의 신앙 인격, 안정된 가정, 교회 생활의 헌신과 봉사, 이런 것들이 모두 산 교육의 내용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귀로 배우고 눈으로 배우는 자들입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유산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3) 주의 훈계로 하라. 여기 ‘훈계’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통한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합니다. 특히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캐서린 부스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훌륭한 자식들로 성장했습니다. 교육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악마보다 한걸음 빨랐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악마가 나쁜 습관, 나쁜 생각, 나쁜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대개가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부모들은 어떤습니까 기독교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실망했을 때가 언제냐.’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위는 대학에 떨어졌을 때, 2위는 결혼 생활에 실패했을 때, 3위는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안 됐을 때, 4위는 자식이 입원했을 때, 5위는 부모에게 반항했을 때, 6위는 무단 가출했을 때, 7위는 신앙 생활잘못할 때였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분명히 신앙인이면서 신앙 교육에는 별로 무관심한 상태인 것입니다. 자식들이 학교 한 번 빠지면 큰일나는 줄 알면서도 교회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말씀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가 큽니다. 사람의 뇌는 만 4세까지 95%가 발육되고 나머지 5%는 성인이 되기까지 발육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 성격은 만 4세 이전에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씀 속에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디모데가 디모데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의 말씀 훈련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입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약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31%가 유태인이고, 약 70만 명의 변호사 가운데 20%가 유태인이며, 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 가운데 35%가 유태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각계를 주름잡는 실질적인 세력들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신앙적인 교육 영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좋은 부모가 되기를 힘쓰며 기도할 것입니다. 훌륭한 인물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믿음의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있는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스스로 자문해 볼 일입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둘이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입니다.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무제에 대해서 시대에 따라 주장을 달리합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당연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가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의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정 사역에 대한 필요성과 더불어 가정 치유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 사역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사회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천국을 소개할 때에는 가정의 질서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성령님을 모성애와도 같은 보혜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정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가정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가정을 통하여 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들은 어떠합니까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에 미움과 갈등, 분노와 다툼, 무관심과 원망, 불안과 실망이 점점 깊이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가정 붕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 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를 보십시오. 청소년들의 폭력 문제가 심각합니다. 상상을 초월할만큼 무섭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원 폭력이 무서워 자살한 학생이 1997년 7월 현재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학생들까지 여기에 뒤질세라 주먹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들의 성적인 타락상이 극심합니다. 십대들의 음란 비디오 사건의 주인공은 15살짜리 여중 2학년생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벌거벗고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들인데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경찰이 5, 6월에 유흥 업소를 급습해서 일하는 여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십대가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마약 사용이며 자살 그리고 가출하는 청소년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녀 교육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지침은 무엇입니까
1. 양육의 주체 ‘아비들아’라는 말씀에서 주체가 드러납니다. 즉 자녀들을 가르칠 사람은 학교의 선생님이 아닌 부모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자녀들의 교육은 모두 학원 아니면 학교에 위임해 버린 상태입니다. 성경은 교사 중에도 부모만한 교사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포로기 전까지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가정 교육이 전부였습니다. 부모가 교사요, 성경과 전승과 부모의 삶 자체가 교과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포로 후기를 지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회당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감당해야 합니다. 선다싱은 ‘어머니의 가슴은 나의 신학교였다’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나는 우리 어머니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하나님을 알게 했고, 선에 대한 씨를 뿌려 주셨다’고 했고, 허버트는 ‘백 명의 교사보다도 한 사람의 어머니가 낫다’고 했고, 스펄전은 ‘가정에서 성경 읽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그치는 자는 화가 있을지로다’라고 했고, 링컨은 대통령 취임시에 낡은 성경을 들고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했고,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을 위한 학교’라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입니다. 자녀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주체는 회당도, 학교도, 사회도 아닌 가정이요, 그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2. 양육의 대상 ‘자녀들’이라는 말씀은 양육 대상을 밝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자녀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어디서 잘못되는가 하면 자녀를 마치 자기 것인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성경적인 자녀관은 이렇습니다. 먼저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시 127:3)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창 33:5)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기르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시 127:3,4, 삿 13:2). 결코 내 물건, 내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자녀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고, 교육 내용이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양육의 방법 본문에서 양육의 방법으로는 부정적인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동시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로 가르쳐 줍니다.
1) 노엽게 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징계와 분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해야 합니다(잠 13:24, 19:18). 그러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노함’에 대하여 공동 번역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감정이 상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헨드릭슨은 여섯 가지를 지적합니다.
(1) 과잉 보호,
(2)편애,
(3)낙심케 하는 일,
(4)의견의 불일치,
(5)자녀들에 대한 소홀함,
(6)가혹한 처벌이 주어질 때라고 했습니다. 바클레이는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1)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할 때이다. 즉 ‘내가 너만할 때는 그런 일을 안 했다’는 식의 꾸지람이다. 그때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2) 지나친 통제 때문이다.
(3) 격려에 인색할 때이다. 그래 루터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끼면 자식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놓아 두어 자식이 잘했을 때에는 그 사과를 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 자녀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유로는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을 들 수 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습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누누어 주면서 어머니를 그려 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특이하게 어머니를 그렸습니다. 그것은 입과 손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도 기형적이리 만큼 크게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더니 ‘우리 엄마는 나만 보면 잔소리나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손으로 때려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도대체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그들의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들의 가슴으로 같이 느껴 보려는 경험을 갖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 교육은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없는 관심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만 될 뿐입니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21에서는 ‘자녀들이 낙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 주의 교양으로 하라. 여기 ‘교양’이라고 하는 말은 ‘행동을 통한 교육’을 의미합니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녀들에게는 산 교육이 됩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으면서 성장합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부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항상 옳은 말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는 스스로 한 말을 부정해 버립니다. 정직을 이야기하면서도 거짓말을 밥 멋듯 합니다.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도 자기 실속 챙기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어느 부모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놀이 동산에 놀러 갔다고 합니다.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6세 이하는 무료’라는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가 물어보면 여섯 살이라고 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습니다. ‘나보고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거짓말을 하라고요’ 하더랍니다. 말따로 행동 따로, 이것을 따로국밥이라고 합니까 그러고도 그 자식이 정직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이런 예들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화가 걸려오면 ‘나 없다고 해라’고 아이에게 일러줍니다. 부모들은 텔리비전을 보면서 자식들은 들어가 공부하라고 합니다. 부모들은 밥상에 앉기만 하면 입맛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때마다 밥 안 먹는다고 타박입니다. 부모들은 자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지겠습니까 여기서부터 교육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부모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대로 흉내내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이제는 말 가지고 교육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행동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원만한 부부 관계, 부모들의 신앙 인격, 안정된 가정, 교회 생활의 헌신과 봉사, 이런 것들이 모두 산 교육의 내용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귀로 배우고 눈으로 배우는 자들입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유산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3) 주의 훈계로 하라. 여기 ‘훈계’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통한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합니다. 특히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캐서린 부스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훌륭한 자식들로 성장했습니다. 교육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악마보다 한걸음 빨랐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악마가 나쁜 습관, 나쁜 생각, 나쁜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대개가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부모들은 어떤습니까 기독교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실망했을 때가 언제냐.’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위는 대학에 떨어졌을 때, 2위는 결혼 생활에 실패했을 때, 3위는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안 됐을 때, 4위는 자식이 입원했을 때, 5위는 부모에게 반항했을 때, 6위는 무단 가출했을 때, 7위는 신앙 생활잘못할 때였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분명히 신앙인이면서 신앙 교육에는 별로 무관심한 상태인 것입니다. 자식들이 학교 한 번 빠지면 큰일나는 줄 알면서도 교회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말씀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가 큽니다. 사람의 뇌는 만 4세까지 95%가 발육되고 나머지 5%는 성인이 되기까지 발육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 성격은 만 4세 이전에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씀 속에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디모데가 디모데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의 말씀 훈련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입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약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31%가 유태인이고, 약 70만 명의 변호사 가운데 20%가 유태인이며, 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 가운데 35%가 유태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각계를 주름잡는 실질적인 세력들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신앙적인 교육 영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좋은 부모가 되기를 힘쓰며 기도할 것입니다. 훌륭한 인물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믿음의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있는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스스로 자문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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