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청소년들은 무엇을갈망하는가? (엡1:1-14)
본문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농구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젼 연속극 프로그램 중에서 농구선수들의 삶을 소재로 한 "마지막 승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연속극 방영이후에 농구가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고 있습니다. 이 농구붐과 함께 등장한 것은 소위 "오빠부대"란 것입니다. 지금 들끓고 있는 농구붐에서 결정적인 불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오빠부대"입니다. "오빠부대"는 농구경기장에 몰려와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선수의 건투를 비는 청소년들-대부분 여학생입니다만-이들을 일컹는데 요즘 농구경기장의 관중석 80%는 이들로 채워집니다. 오빠부대는 경기가 벌어지면 괴성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자기가 챙겨온 응원도구들을 가지고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정도로 광란적인 응원을 합니다. 슛이 터질 때마다 이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떠나갈 듯합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 오빠부대는 과연 누구이며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이 청소년들이 농구경기에 몰려들고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어떤 기자에 의하면 이들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에서 몰려들어서 열광하는 다소 해이해진 청소년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건전한 학생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누가 보아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볼 때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농구장에 들아가는 순간에 그들은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이 현상은 요즈음 청소년들이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상이어서 오늘 성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지극히 관심있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그들을 갈망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빠부대" 현상에 대해 탐구를 한 어떤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그들이 학교에서 대하는 대부분의 선생님이 여성이고 집에서도 주로 대하는 것이 어머니이지 아버지와는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즉 모든 그들의 환경이 여성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파격적인 남성적 힘을 그리워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들이 외쳐되는 "오빠"라는 함성에서 마치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라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적 반응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 비약적인 관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현상에서 세 가지 점을 관찰합니다.
첫째는 농구경기장은 청소년문화의 집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힘"과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농구선수들은 실내공간에서 훤칠한 키와 준수한 인물과 몸매와 귀공자같은 그런 타입의 모양새를 가지고 거기다가 박력있는 힘과 스피드로 좁은 경기장을 10명의 건각들이 뛸 때 거기에는 바로 그들이 흠모하는 모든 것, 즉 큰 키와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모습과 힘과 스피드가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농구경기장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즐기고 싶은데 그런 청소년 문화를 즐길만한 모든 곳은 퇴폐적인 곳입니다. 디스코 텍이 그렇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인듯해서 닥아가면 어김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그러나 농구경기장은 그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보는 눈도 그렇고 거기에는 공인된 장소이며 그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한꺼번에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농구경기장은 그들의 "해방구"이자 "점령지"입니다. 또 다시 젊잖은 어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농구의 경기규칙이나 그 절묘한 스포츠의 묘기를 좋아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발산을 할 수 있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가서 청소년의 그 끓는 피를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곳으로 이동해 갈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수퍼스타"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m를 넘어가는 장신선수들이 코트를 휩쓰는 모습은 수퍼스타의 모습입니다. 골대에 농구공을 넣는 슛도 제일 인기가 있는 슛이 소위 "덩크 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 높은 골대를 잡고 아예 공을 집어넣는 슛입니다. 이것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속에서 저는 이들이 어떤 초인적 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 오페라 형식으로 한 뮤지컬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대한 어떤 존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그들이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스타들을 보고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현대청소년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농구선수나 영화배우는 스타이고 아주 만나기 어렵고 머나먼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선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친밀감을 만끽하려는 의도를 상당히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대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의 삶이 외롭고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가정에서 부모님의 위치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토로하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울어 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약간 특별한 관계정도이지 옛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친밀함(Intimacy)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오빠부대"들이 농구장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것, 그것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그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그 해방구와 점령구가 그들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사실에서는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들은 그들이 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애정을 보이고 싶은 "수퍼스타"가 필요한데 이들에게 농구선수가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구선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격과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스승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그 모든 존재들을 제치고 농구선수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의 학생들이지만 이 이야기를 보편화하면 과연 오늘 내 자식들의 수퍼스타는 누구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오늘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로 슬픈 현실은 우리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전혀 친밀감(Intimacy)을 느끼지 않고 아버지가 안계시는 곳, 어머니가 안계시는 곳, 동생과 언니가 없는 그곳에 가서 가장 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오빠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오빠가 아닌 거기 농구경기장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심리를 시원하게 헤쳐주는 그 선수들을 정말로 친밀한 어조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오빠부대의 현상을 분석한 그 기자의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오빠"라고 부르면서 열광할 때 그 소리에서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란 환청이 울리는 것은 우연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들은 오늘 집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너무나 가치관이 다르고 고민의 범위가 다르며 그들의 고민은 어머니의 고민, 아버지의 고민들 사이에서 고민같이도 취급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털어놓지도 않고 털어놓아도 아무도 심각한 고민으로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오빠부대로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용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친밀감을 표시할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학교는 어마어마한 무한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무한경쟁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들의 삶에만 너무 빠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가정이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가족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이 존재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있는데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 자식이 외로울 때는 어떤 습성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말못할 고민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은 내가 어떤 아버지이기를, 어떤 어머니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검표를 만들어 놓고 조사를 해 보시면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깊은 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학비를 대 주고 밥은 해 주지만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식들도 우리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겠거니, 어머니겠거니 생각하지 우리의 깊은 속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현상을 그대로 우리가 묵과한다면 앞으로 함께 집에 살기는 해도 기숙사처럼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과 사랑을 교환할 수 없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겠습니까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가깝게 해 보려는 우리 교회의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안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재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주 먼 존재였습니다. 그 분과는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곁에 오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 장은 이 하나님과의 친밀해 진 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엡1:5)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엡1:7).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꺼리낌이 없는 사이가 됩니다.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비밀을 다 공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9).넷째는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14). 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아주 거리낌이 없는 관계, 아무때든지 찾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과 무사통과(Free Way)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관계가 다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2장에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옛 생활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은 그냥 이웃이 아닌 나와 마치 건물의 벽돌이 연결되듯이 밀접하고 절친한 관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이 하나님안에서 동일한 성도요 시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웃이 이웃이 아닌 같은 가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을 구성하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5장에 오면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여움을 푸는 대상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고 심지어 종과 상전의 관계도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벽들이 많은 모든 사이들이 전혀 벽이 없는 아주 자기와 가까운 사이로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에베소서의 메시지가 오늘 점점 친밀감을 상실해 가는 우리 가정과 사회에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멀어진 이웃과 이웃, 멀어진 남편과 아내, 멀어진 종과 상전, 멀어진 자녀와 부모를 가깝게, 친구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이 제안은 오늘의 상황에서 들으면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종과 상전은 엄연히 다르고 하나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 만치나 다르고 남편과 아내의 신분이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한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처럼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는 이 모든 사이가 격이 없는 친밀한 사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찾아가고 안기고 할 수 있는 자기가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정말 가까워야 할 주위에서는 없고 농구코트장이나 콘서트나 이런 곳으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픈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곳곳에서 너무 높은 벽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저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농구코트장이 그들의 해방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교회도 청소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청소년이 원하는 것 보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충정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래도 방향을 잡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염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순간에 교회와 어른에 대해 너무 벽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줄 다른 곳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안에서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하여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나 삶의 현실을 볼 때 옛날 봉건시대처럼 억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마저도 별의미없는 것이 되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주안에서 이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친밀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공간,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의 우리곁에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하나님은 수퍼스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수퍼스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내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참여하시고 소원해진 우리의 사이를 주안에서 다시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첫째는 농구경기장은 청소년문화의 집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힘"과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농구선수들은 실내공간에서 훤칠한 키와 준수한 인물과 몸매와 귀공자같은 그런 타입의 모양새를 가지고 거기다가 박력있는 힘과 스피드로 좁은 경기장을 10명의 건각들이 뛸 때 거기에는 바로 그들이 흠모하는 모든 것, 즉 큰 키와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모습과 힘과 스피드가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농구경기장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즐기고 싶은데 그런 청소년 문화를 즐길만한 모든 곳은 퇴폐적인 곳입니다. 디스코 텍이 그렇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인듯해서 닥아가면 어김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그러나 농구경기장은 그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보는 눈도 그렇고 거기에는 공인된 장소이며 그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한꺼번에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농구경기장은 그들의 "해방구"이자 "점령지"입니다. 또 다시 젊잖은 어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농구의 경기규칙이나 그 절묘한 스포츠의 묘기를 좋아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발산을 할 수 있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가서 청소년의 그 끓는 피를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곳으로 이동해 갈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수퍼스타"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m를 넘어가는 장신선수들이 코트를 휩쓰는 모습은 수퍼스타의 모습입니다. 골대에 농구공을 넣는 슛도 제일 인기가 있는 슛이 소위 "덩크 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 높은 골대를 잡고 아예 공을 집어넣는 슛입니다. 이것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속에서 저는 이들이 어떤 초인적 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 오페라 형식으로 한 뮤지컬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대한 어떤 존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그들이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스타들을 보고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현대청소년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농구선수나 영화배우는 스타이고 아주 만나기 어렵고 머나먼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선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친밀감을 만끽하려는 의도를 상당히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대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의 삶이 외롭고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가정에서 부모님의 위치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토로하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울어 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약간 특별한 관계정도이지 옛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친밀함(Intimacy)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오빠부대"들이 농구장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것, 그것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그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그 해방구와 점령구가 그들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사실에서는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들은 그들이 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애정을 보이고 싶은 "수퍼스타"가 필요한데 이들에게 농구선수가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구선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격과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스승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그 모든 존재들을 제치고 농구선수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의 학생들이지만 이 이야기를 보편화하면 과연 오늘 내 자식들의 수퍼스타는 누구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오늘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로 슬픈 현실은 우리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전혀 친밀감(Intimacy)을 느끼지 않고 아버지가 안계시는 곳, 어머니가 안계시는 곳, 동생과 언니가 없는 그곳에 가서 가장 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오빠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오빠가 아닌 거기 농구경기장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심리를 시원하게 헤쳐주는 그 선수들을 정말로 친밀한 어조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오빠부대의 현상을 분석한 그 기자의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오빠"라고 부르면서 열광할 때 그 소리에서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란 환청이 울리는 것은 우연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들은 오늘 집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너무나 가치관이 다르고 고민의 범위가 다르며 그들의 고민은 어머니의 고민, 아버지의 고민들 사이에서 고민같이도 취급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털어놓지도 않고 털어놓아도 아무도 심각한 고민으로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오빠부대로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용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친밀감을 표시할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학교는 어마어마한 무한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무한경쟁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들의 삶에만 너무 빠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가정이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가족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이 존재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있는데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 자식이 외로울 때는 어떤 습성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말못할 고민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은 내가 어떤 아버지이기를, 어떤 어머니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검표를 만들어 놓고 조사를 해 보시면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깊은 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학비를 대 주고 밥은 해 주지만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식들도 우리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겠거니, 어머니겠거니 생각하지 우리의 깊은 속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현상을 그대로 우리가 묵과한다면 앞으로 함께 집에 살기는 해도 기숙사처럼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과 사랑을 교환할 수 없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겠습니까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가깝게 해 보려는 우리 교회의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안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재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주 먼 존재였습니다. 그 분과는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곁에 오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 장은 이 하나님과의 친밀해 진 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엡1:5)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엡1:7).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꺼리낌이 없는 사이가 됩니다.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비밀을 다 공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9).넷째는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14). 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아주 거리낌이 없는 관계, 아무때든지 찾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과 무사통과(Free Way)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관계가 다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2장에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옛 생활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은 그냥 이웃이 아닌 나와 마치 건물의 벽돌이 연결되듯이 밀접하고 절친한 관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이 하나님안에서 동일한 성도요 시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웃이 이웃이 아닌 같은 가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을 구성하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5장에 오면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여움을 푸는 대상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고 심지어 종과 상전의 관계도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벽들이 많은 모든 사이들이 전혀 벽이 없는 아주 자기와 가까운 사이로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에베소서의 메시지가 오늘 점점 친밀감을 상실해 가는 우리 가정과 사회에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멀어진 이웃과 이웃, 멀어진 남편과 아내, 멀어진 종과 상전, 멀어진 자녀와 부모를 가깝게, 친구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이 제안은 오늘의 상황에서 들으면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종과 상전은 엄연히 다르고 하나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 만치나 다르고 남편과 아내의 신분이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한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처럼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는 이 모든 사이가 격이 없는 친밀한 사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찾아가고 안기고 할 수 있는 자기가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정말 가까워야 할 주위에서는 없고 농구코트장이나 콘서트나 이런 곳으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픈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곳곳에서 너무 높은 벽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저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농구코트장이 그들의 해방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교회도 청소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청소년이 원하는 것 보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충정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래도 방향을 잡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염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순간에 교회와 어른에 대해 너무 벽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줄 다른 곳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안에서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하여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나 삶의 현실을 볼 때 옛날 봉건시대처럼 억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마저도 별의미없는 것이 되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주안에서 이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친밀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공간,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의 우리곁에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하나님은 수퍼스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수퍼스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내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참여하시고 소원해진 우리의 사이를 주안에서 다시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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