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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충만과 감사 (엡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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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당시의 신대륙이었던 미국에 도착한 이후 1620년11월26일에 드린 감사의 예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미국은 '추수'라고 하는 말이 없이 단지 감사절(Thankgiving Day)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추수라고 하는 개념이 삽입된 것은 당시의 우리 사회구조가 농경사회였고, 대개 한 해의 추수가 끝나는 기간이 11월 중순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먼저 전파해 준 미국 선교사님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명한 절기는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 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청교도들이 가졌던 감사정신을 기억하고 오늘날의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감사의 의미를 새기고 그 감사를 생활화하자는데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특히 성령님충만과 감사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소위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안하무인격이고, 아무리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하여도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성령님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열매를 그 나무를 알 듯이 그 행위로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행동에 감사가 없으면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저는 성령님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면서 거짓말하고 사기치며 온갖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혐오감이 생길 정도입니다. 특히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아 성령님이 내주하고, 그 성령님의 온전한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감사하게 되었다는 점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성령님충만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로는 성령님충만과 감사의 관계, 세 번째로는 성도의 생활에서의 감사의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님충만의 개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성령님 안에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자가 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것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롬8:15-16; 갈4:6).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순간부터 성령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의 생활이 가능한 것도 성령님사역의 결과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까지 자라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바울이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을 때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령님이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인격과 의지도 무시하고 자동적으로 어떤 일을 행한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이 본문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 18-21절까지를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두 개의 명령어와 다섯 개의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명령은 하나는 술취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다섯 개의 분사는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서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법적 규칙은 이 다섯 개의 분사가 주절인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에 종속되어 결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이 충만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분사로 된 다섯 개의 용어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주의해 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술취하는 일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 바울의 이러한 비교는 성령님의 충만과 술취함과 성령님의 충만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술이 취하였다고 하는 것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한 두 모금 마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술에 흠뻑 젖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술에 흠뻑 젖은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술로 인하여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이 완전히 마비되어 술기운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지요 술의 지배를 받아 술의 힘에 의해 움직여 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술취함과 비교하면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술취함과 성령님의 충만이 유사성은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술취함은 술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고, 성령님의 충만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유사성은 이 부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술취함과 성령님의 충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바울은 술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헬라 세계에서 방탕(헬. )이라는 삶의 태도에 있어서 부도덕하고, 품행이 나쁘고, 낭비적인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로 많이 알려진 "어떤 아버지의 비유" 속에 둘째 아들이 나옵니다. 이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챙겨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허랑방탕"과 원어상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술취함이 방종과 부도덕하고 낭비적인 삶의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술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 목사님은 술취한 사람들이 행하는 방탕한 삶의 방식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술취한 사람들은 더 중요한 것들을 던져 버린다. 순결과 정조마저 던져 버린다. 그것들을 보존하기는 고사하고 그것들을 던져 버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주신 가장 보배로운 선물들, 즉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산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던져 버린다. 술취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순결과 정조와 도덕성을 버리게 만든다." 사실 술취하면 가장 중요한 것까지도 다 버립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술취한 사람에 대하여 더 심한 말을 하였습니다. "술취한 사람은 난폭하고, 방탕하고, 무절제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는 짓은 짐승같거나, 심지어 짐승보다 못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술취한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충만이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님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술취함과 반대로 성령님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5:18-21의 말씀과 내용적으로 평행을 이루는 부분이 골로새서 3:16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다음의 말씀도 읽어보면 에베소서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표현과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 것을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서 어떤 특별한 일을 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적으로 신자의 삶에 나타나야 할 삶과 인격의 변화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어떤 능력을 행할 것인가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입니다. 어떤 사람인가, 즉 인격의 변화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삶의 도덕적인 부분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충만의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볼 때 이 점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2. 성령님충만과 감사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으로 나타날까요 성령님의 충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다섯 개의 분사로 그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오순절주의자가 말하는 것처럼 특별한 일을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러한 일들이 결과로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인격의 변화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섯 개의 분사로 나타납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서로 화답한다"(헬. )라는 말은 "서로에게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본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에게 말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다른 말로 하면 아름다운 말로 서로 권면하고 교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말이나 험담이나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께 마음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에게 말하는 것과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은 교회생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충만이 교회생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교회생활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친숙한 교제를 나누며, 큰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새로운 생활과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축복된 소망과 가정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문제에 직면하여 서로를 도우며, 서로를 강하게 하고, 서로를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생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것은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대단히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충만,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풍성하게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충만할 때,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거할 때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돕고 싶어하며, 항상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특별한 체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도들이 위하여 기도하거나 관심을 기울이며 간섭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의 세 번째로 나타나는 삶의 결과들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여기에 "감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로서 받은 은혜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유명한 책 기독교 강요 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지식이 전제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인간의 교만해 져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사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도우시고 함께 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감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성령님충만의 결과입니다. 성령님 충만의 네 번째 결과는 헬라어 성경에 보면 맨 마지막 분사인 "서로 복종하라"는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성경에 보면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주절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문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NIV, RSV, NEB 같은 영어번역성경에서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충만의 결과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일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뒤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성령님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하고도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신자 개개인의 삶에서 기쁨과 감사생활과 서로 복종하는 삶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어서 전체적인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있습니다. 특히 순종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서로간의 관계에서 복종하고 섬기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고 주인은 종을 사랑으로 대하는 일들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충만의 삶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성령님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에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감사는 성령님충만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그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거나,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삶에서의 감사의 위치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님충만이 무엇을 의미하며, 성령님충만과 감사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날 감사하지 못할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자기 스스로 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전에 해외 입양아가 성장하여 한국의 부모를 찾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녀를 낳아 무책임하게 길가에 버렸는데 그 아이는 아이들 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미국의 어느 가정에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부모를 찾았습니다. 기자가 왜 거리에 버린 부모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그 분이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한 것이 아니냐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때로는 좋지 못한 부모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부모를 원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들처럼 많은 사랑은 받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낳아주신 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세상의 부모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시고, 매일의 삶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없이 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감사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네비게이토의 행정책임 담당자인 제리 브릿지스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 이라는 책에서 감사를 정의한 것은 참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감사는 우리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감사라고 하는 용어가 헬라어로 유카리스티아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기뻐한다'는 유와 '은혜'라는 뜻의 카리스의 합성어입니다. 헬라어의 의미는 은혜를 받아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감사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할 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 이 말씀을 볼 때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은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창조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주시고 모든 필요들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 인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이나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노력, 지혜, 재수, 또는 운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지 않으면 하나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받아 누리고 있는 은혜들을 한 번 종이에 시간을 내어 적어 보십시오. 제리 브릿지스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 이라는 책에서 감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하여 제시하였습니다. 그 분은 기도제목과 함께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중요한 축복들을 적어두고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 영적 성장의 기회, 성경말씀을 주심,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와 교훈, 유익한 기독교 서적들이 많음, 봉사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 경건한 부모님, 경건한 아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있는 자녀들, 가족들의 건강, 자유가 있는 나라에게 살아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심 등" 우리의 감사조건들이 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아담가 하와를 위해 주신 모든 것을 보고 감사하게 하기보다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가지 사실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불만을 가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사탄은 우리가 받은 여러 가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할 수 없는 한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불평과 불만을 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물을 보기보다는 부정적인 몇 가지 사실을 들추어내어 감사보다는 분쟁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이러한 것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기본적인 전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성령님충만과 감사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감사는 성령님충만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서 인격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천성은 이상하게도 감사를 모릅니다. 그리고 100가지 은혜를 입었다가도 한 두지 섭섭하게 대하면 원수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하여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기도함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덧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는지도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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