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빛이 어디로 갔는가? (엡5:8-13)

본문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이 사회에 기독교가 존재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쉽게 말해서 교회가 몇 만개나 되고 교인이 천 몇 백만 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 사회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마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악해졌습니까 어느 교수의 말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죄의식이 완전히 실종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지 않느냐 나만 재수 없어 걸린 것일 뿐인데 뭐가 잘못이냐'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볼 때 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 도대체 뭘 하고 있니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변명해 보려고 애쓸 지도 모릅니다. "주님. 세상은 원래 악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기를 쓴다고 해서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성자로 바뀌겠습니까 그저 우리만 예수 잘 믿고 천국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를 냉정하게 비추어보십시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 사회의 부패나 타락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변명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는 개인적인 종교로서의 역할과 공적인 종교로서의 역할을 균형 있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리면 그것은 참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개인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나 하나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구원받고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것을 가리켜 "실리적인 개인주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실속만 차리려는 자들은 기독교를 개인화 시켜 버립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감정을 만족시키고 자기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겉으로는 신앙 생활을 썩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들여 다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공적인 책임을 가진 종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적인 책임이란 정의를 외치고 약한 자와 억눌린 자 편에 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데 앞장서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면 교회가 그 타락의 환부를 끌어안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공적인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러한 공적인 책임을 도외시한 채 자기만을 위한 종교에 몰두해 있는지 모릅니다. 죠지 아담 스미스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개인적인 영역에다가 제한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심각하게 병들어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열린 대기 속에 살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피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참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가 나 하나 구원받고 자기 소원을 이루는 데다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나중에는 썩은 냄새를 피우는 송장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회를 거룩하게 만들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공적인 책임을 다하게 되면 교회의 피가 깨끗해지고 결과적으로 사회까지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개인적인 면과 공적인 면,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면 결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갈급한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이 사회를 염려하여 병든 부분을 치유하려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그 기독교는 썩은 송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이 사회를 보고도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으로 뭔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만 구원받고, 나만 잘 살면 뭘 합니까 배가 가라앉아 가고 있는데 식당에 앉아 맛있는 것을 혼자 실컷 먹게 되었다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 세상의 빛으로서의 공적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제일 먼저 깨닫고 실천에 옮긴 선각자들은 바로 종교 개혁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시대입니다. 기독교가 그 사회를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는 더 이상 썩을 수 없을 만큼 썩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뇌물을 받고 성직을 팔아먹지를 않나요 돈을 받고 죄 용서를 보증하는 면죄부를 팔지 않나요 거룩한 삶을 자랑하는 성직자들이 수녀들과 음행을 저지르며 사생아를 낳지를 않나요 세상에서 가장 부패해서 악취가 나는 곳이 바로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나 신앙생활을 바로 해 보겠다고 하는 거룩한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받았습니다. '이 더럽고 신물 나는 세상, 안 보는 것이 상책이야. 이 세상 꼴도 보기 싫으니 수도원에나 가서 그 속에서 살다가 죽자!' 그래서 수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과 담을 높이 쌓고 그 속에서 밭이나 갈고 채소나 재배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 당시의 풍조였습니다. 이런 풍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거룩하게 살려는 자들에게 좋은 지침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밑바닥에는 잘못된 사상이 하나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 드리면 거룩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을 버리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신학을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수도원 운동들에 의해 무시되었던, 교회의 공적인 책임을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 남겨 놓으신 것은 타락하고 냄새나는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도피해서도 안되고 세상에 대해 등을 돌려서도 안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며,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개인의 구원을 위한 종교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십시오. 기독교가 개인의 전용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가 '만유의' 주요, '온 세상의' 구주가 아니라 '나의' 구주로 소인화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더욱 더 무기력해졌고, 이 사회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교회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데도 세상은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만큼 많이 들어가서 일하는 회사라고 한다면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은데 피장파장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 동안 공적인 책임을 너무나 등한히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감당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빛의 자녀답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하다'(行)는 말은 걸어다닌다, 혹은 산다, 실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빛의 자녀다운 삶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착하고 의로우며, 진실합니다. 착하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기 때문에 우리의 거듭난 마음은 착해 집니다. 그리고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삶을 살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실하다는 말은 이웃을 향한 나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정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양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인격이자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한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답게 행동하고, 진실한 사람답게 말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가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빛의 자녀다운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크리스천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 세상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빛은 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책임지고 있는 '교회 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 수련회가 모 기도원에서 2박3일 동안 있었습니다. 수련회 기간 내내 참석한 400명의 목사님들이 하나님 앞에 한국 교회의 죄를 놓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놓고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했습니다. 그 때 참석했던 목사님들에게 우리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힘을 잃고 성장이 둔화된 근본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참석한 목사들의 91.7 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부정직하게 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는 기독교를 나만 위한 종교로 사유화 시킴으로써 교회가 공적으로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담당해야 할 책임을 등한히 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과 삶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생긴 것입니다. 정직해야 될 사람이 직장에서 거짓말을 함부로 합니다. 선해야 할 사람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더러운 생각을 품으며, 행동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동해야 할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 이 사회가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빛처럼 환하게 드러나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 새벽에 들고 다니는 등불처럼 가까이서 보면 빨갛게 등불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짙은 어둠 속에 삼켜버리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 꼴이 아닙니까 불이 켜진 등불처럼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둘러 쌓여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좀더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좀더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진리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기름으로 채움을 입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은 등불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태양처럼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서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에 제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 위에 높이 드러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도리어 책망하라! 또 하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좀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과 같이 손잡고 그들의 일에 참여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이 정도쯤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도리어 책망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이 말의 뜻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책망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책망한다'는 말은 곧 들추어내고 폭로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캄캄한 방에 들어갈 때 스위치를 올리면 형광등이 켜지면서 어두운 구석구석에 있는 게 전부 드러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좀더 적극적으로 역할을 다 하려면 내가 거기 있음으로 인해 주변의 어둠의 일들이 다 폭로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호주머니에 돈이 많이 생기게 되는 어떤 공직자의 자리나 부서가 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들은 돈방석에 앉을 것을 기대하고 그 부서에 발령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부서에 크리스천이 발령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만일 그가 '나는 여기서 쫓겨나가는 한이 있어도 뇌물을 받거나 상납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의롭고 정직하게 일한다면 그는 거기에서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주변에 있는 거짓된 사람들의 정체가 환하게 노출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책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밝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살고, 빛으로 행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어두운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빛된 행실을 사람들로 보게 하라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어두움이 드러나는 것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좀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좀더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6장 3절 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적용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한 일을 하고는 무슨 공로라도 세운 것처럼 떠벌리지 말라는 말이지 감추고 숨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장 16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볼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빛된 행실을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빛된 행실들을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합니다. 그러나 카톨릭만 해도 다르지 않습니까 카톨릭 교회는 그 조직 자체가 항상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사 개인이 무슨 일을 해도 카톨릭이 하는 것으로 부각이 됩니다. 테레사 수녀 한 사람 때문에 카톨릭의 이미지가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오웅진 신부가 꽃동네를 시작한 것으로 인해서 웬만한 사람은 참 종교는 카톨릭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카톨릭의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 앞에 그대로 부각이 되니까 카톨릭이 오늘날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그 수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 매일 성경 찬송이나 들고 다니면서 소리를 지르며 울고 불고난리를 떠는 집단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목사가 신도들에게서 헌금을 짜 내서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다 넣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재벌 목사라는 이상한 말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이와 같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대각성 전도 집회 때 결신한 어느 형제는 지금까지 목사를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사랑의교회의 모든 헌금을 가지고 목사가 주식 투자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축재하는 걸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전부 이런 식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랑의교회가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 특히 그늘진 곳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1년에 14억 이상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14억이면 오웅진 신부가 꽃동네를 위해서 사용하는 두 달 생활비에 지나지 않지만 한 교회가 단독으로 하는 사역으로는 굉장한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꽃동네는 세상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있지만 사랑의교회는 잘 한다는 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알려야 할 일은 알려야 합니다. 굳이 등불 위에다 담요를 덮으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지에서 '하하네'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하네'는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경영하는 도매상 이름입니다. 그 집사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게를 하면서 한 가지 철칙을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물건 사 갔다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해서 다시 가져오는 반품이 있으면 몇 달 전에 사 간 것이라도 두말 하지 않고 100 퍼센트 다 받아 주자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 가게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반품하면 받아 주는 가게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저는 그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 마음의 빗장을 풀어 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요즘 학교에서의 체벌을 금지하기 위한 법안을 만든다고 일부에서 난리들이지 않습니까 누가 그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지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벌써 몇 십년 전에 매 안 때리기로 가결했다가 하도 안되니까 이제 다시 매를 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때리지 말자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13:24). 진정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한다면 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를 아끼는 것이 사랑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녀를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징계하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학부형들이 함께 모여 초등학교에 찾아 가십시오. 가서 교장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선생님, 우리 아이 좀 때려주세요. 매를 때려서라도 우리 아이를 사람 되게 해 주세요. 꼭 부탁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선생님들 중에는 감정 때문에 아이들을 때리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하도 많이 당해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를 무섭게 때리던 그 선생님 얼굴이 눈 앞에서 아른거릴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감정을 푸는 선생은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사람 만들기 위해서 부득불 매로 때리는 선생님이 있다면 우리가 오히려 그를 존경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녀가 학교에서 맞고 왔다고 해서 학교로 좇아가서 '어느 선생이 때렸어' 하고 핏대를 올리며 따진다면 어떻게 이 사회에서 빛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매스미디어 오늘날은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매스미디어가 사람들을 제 맘대로 끌고 다닙니다. 신문이 '아'하면 우리도 같이 '아'하고, '어'하면 같이 '어'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요'라고 하면 '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매스미디어가 하는 대로 아무런 분별없이 따라갑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 대중매체를 장악하지 못하면 이 땅 위에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하는 방송이나 언론 매체들을 힘써 도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매스미디어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를 세상에 좀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의 어두움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국민일보 8주년 기념 심포지움에 연사로 참석했다가 조용기 목사님이 자기가 어떻게 신문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하는 것을 듣고 무척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8년 전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믿음 좋은 어느 장로님이 그를 찾아와서는 너무나 다급한 심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이름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이단 종파에서 일간 신문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일간 신문을 만들려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은 기독교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 싶어 신문을 해 보자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기독교계의 힘이 모아지지 않아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조 목사님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말을 도무지 뿌리치지 못한 채 마치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것 같은 마음의 부담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느날 신문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에게 알아 보았더니 당장 일간 신문을 하나 시작하려면 120억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를 소집해서 "오늘 한국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고 살아 남으려면 매스미디어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일을 감당해야 되겠습니다."라고 제안했더니 모든 당회원들이 교회가 공중 분해될지도 모른다며 만류했습니다. 너무나 고민이 되어 기도원에 가서 그 문제를 놓고 계속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마음 속에 "그래도 해야 된다"는 강한 확신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신문을 시작을 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약 2천억원을 투자했고, 지금도 매월 20-30억원을 투자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 신문이 소위 일류 신문으로 발돋움하기까지는 2천억원을 더 투자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조용기 목사님이 왜 이렇게 무리한 투자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그가 말한 것처럼 어느 신문사든지 한 2억만 갖다 주면 싣고 싶은 기사나 글을 얼마든지 실어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기독교가 힘을 모으고 세상에 우리의 모습을 알려야 한다는 소명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한국 교회가 이 신문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세상에 보여주자고 호소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예수 믿는 가정을 200만 가구 정도 된다고 할 때 한 집에서 한 부씩 읽기만 해도 이 신문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신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힘을 뭉치지 않습니다. 전부 개인 플레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을 못 끼치는 졸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회의 빛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좀더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협조할 일은 협조하고, 선전해야 될 일은 좀더 적극적으로 선전해서 온 세상 앞에 우리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에서 악을 폭로하고 어두움을 몰아내는 적극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질 것입니다. GNP가 올라갈수록 이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욕의 종이 되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정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더 강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사야 60장 1절 말씀처럼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절대 그냥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빛을 비추려고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려고 하다 보면 부끄러운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빛이시요, 온 우주를 밝게 비추는 의의 빛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심하게 도망가지 맙시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우리의 존재를 세상 앞에 좀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어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다같이 일어납시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합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이 명령대로 살아서 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데 하나님의 손에 능력 있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8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