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운동 (엡2:13-18)
본문
영감의 사람 사도 바울은 전세기적인 세계화 운동의 기수였습니다. 아니 그는 예수 세계화 운동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2장 전반부에서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멸망받을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2:1-10), 그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2:11-22)에서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곧 교회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은 우리 구원의 빙거가 되고, 교회 성립의 요체가 되는 십자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장 16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신 말씀에 유의하면서 ‘십자가 운동’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I. 십자가 운동은 화평(화목)운동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우리의 평화이시다’는 말입니다. 여기 화평(ερνη)은 ‘합하다’ ‘연결하다’는 동사 에이로(ερω)에서 유래된 ‘평화’ ‘일치’ ‘조화’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살롬을 뜻했습니다. 이것은 분쟁과, 불일치와, 불화와 갈등 원수된 상태의 관계를 깨뜨리고 일치와, 조화, 평화의 새 관계를 창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 성경이 말하는 불화나, 원수된 분쟁의 관계는 인류가 범한 죄의 결과였다고 하였습니다. 인류가 범한 죄는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만들어 버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들어 버렸고, 사람과 자연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해 버렸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근본적이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인류가 만난 모든 불화와 불일치는 근원적이요, 일차적인 문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화평, 평화를 만들어 내는 일은 어떤 열띤 토론이나, 수많은 조약들이나, 어떤 조직적인 연맹이나, 수다한 외교적 노력으로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류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창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Ⅱ. 화평 운동의 내용(십자가 운동)
1. 가까워지게 하는 운동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멀리 있었다는 말은 넓게 말하면 범죄한 인류가 하나님과 떨어져 버린 소원(疎遠)관계를 말합니다. 더 좁히면 유대인과 이방인 관계를 말합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가리켜서(엡2:11-12) ‘멀리 있던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는 이 멀어져 버린 소원 상태를 없애 버리고 ‘가까워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류가 가까워지게 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가까워지게 하고, 이방인과 이방인끼리 가까워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적 지식입니다.
2.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린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담’은 서로 볼 수 없고, 오고 갈 수 없도록 가운데 장애물을 만들어 세운 장벽, 혹은 울타리(φραγμ)를 뜻합니다. 바로 그 ‘담’은 ‘죄’라고하는 장애물을 뜻합니다. 인류의 범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또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무서운 장벽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상적인 장벽이나 정치적인 장벽이나, 어떤 경제적인 장벽이나, 문화와 언어와 풍습의 장벽을 훨씬 넘어서는 본질적이요, 근원적인 장벽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버린 사건은 바로 십자가 속죄 사역이 담을 무너뜨리는 사실을 보여주는 웅변적인 사건이었습니다(마27:51). 이것도 지상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산 지식입니다.
3.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는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5절에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결코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알려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서 주어진 것이요, 죄를 알려 주고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을 준수해야 선해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멸시하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유대인들은 그 율법에 수 천개의 규칙과 관습과, 계율과 법령을 붙였습니다. 손 씻는 것, 그릇 씻는 것, 안식일 규례, 제사와 제물 규례 등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묶어 놓았습니다. 의식의 규례로 사람을 묶어 놓고 차별대우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의 율법들로부터 결코 ‘세계적인 종교’는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종교적 의식의 규정이나, 관습이나, 풍습에 기초한 종교는 결코 세계로 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자기 몸(육체)으로 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습니다(롬10:4). 그래서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였습니다. 예수는 유대의 율법주의가 더 이상 세계 종교의 힘이 되지못하도록 해버렸습니다. 오직 ‘십자가’ 하나만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십자가 하나만 믿게 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 하나만 짊어지고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계 인류를 십자가로 통일시켰습니다. 바로 그것은 ‘희생의 사랑’ ‘대속의 사랑’입니다. 속죄의 피를 흘린 사랑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엡2:8)로 구원 받도록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 맛보고 있는 진리입니다.
4. 새 사람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5절 하반절에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 가운데 ‘새롭다’는 말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네오스(νεο)란 말인데 ‘시간적으로 최근’을 뜻합니다. ‘새 것’을 말합니다. 예컨데 새 연필, 새 구두, 새 옷, 새 양말, 새 모자 등등꼭 같은 물건이 같은 시간 안에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있어질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또 하나는 카이노스(καινο)란 말인데 이것은 시간 관계에서 쓰인 말이 아니라 질(質)적인 면에서 쓰인 말입니다. 여기 ‘새 사람’이란 카이노스를 말합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을 뜻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새롭게 만들어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린 새 창조를 가리킵니다(2:16). 그러나 이 말은 예수 십자가가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든다거나,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든다는 말은 아닙니다. 두 종류의 인간 세계의 내용을 새롭게 하나로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납으로 된 조각과 은으로 된 조각을 함께 녹여서 새로운 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취하신 통일은 모든 민족적, 국가적 문화적인 것을 말살하고 성취하는 통일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국가를 그리스도인으로, 믿는 자로, 구원인으로, 영생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국의 그리스도인, 한국의 그리스도인, 인도의 그리스도인, 호주의 그리스도인, 브라질의 그리스도인, 미국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 목적적 변화, 가치적 변화를 뜻합니다.
5. 평안을 전하는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7절에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전파’운동이 평안입니다. 사죄의 평안입니다. 용서받은 평안입니다. 구원의 평안입니다. 영생의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의 평안입니다. 영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요14:27). 그것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일시적인 육체적 평안과 대조되는 평안입니다. 근본적인 평안, 본질적인 평안입니다. 말하자면 구속적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셨을 때 제일 먼저 평강이있기를 기원하였습니다(요20:21). 이 평안은 세계적이요, 우주적 평안, 모든 인류가 받아야 할 평안입니다. 먼데 있는 자나,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 모두 필요한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시(時)마다 경험하는 새 은총들입니다. 6. 아버지께서 나아가는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8절에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간다는 말은
1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우
2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경우
3 특별히 왕의 존전에 사람을 안내할 경우에 쓰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을 데리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십자가 공로를 덧입혀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고 마침내 영원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행복한 걸음을 걷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십자가 운동’은 화평(화목) 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키고,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방언과 방언을 화목시키는 운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화목 운동의 내용은
1 멀어졌던 사이를 가까워지게 하는 것
2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것
3 의문에 속한 율법(의식)을 폐해버리는 것
4 새 사람을 만드는 것
5 평안을 전하는 것
6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운동입니다.
바울이 이 영감의 글을 썼던 당시의 고대세계는 온갖 장벽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정치적 장벽, 문화와 언어와 풍습의 장벽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인종의 장벽과 사상적인 장벽으로 세계는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전쟁의 불길이 역사의 한가운데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벽은 바로 인류가 범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막힌 무수한 담은 역사의 장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 십자가 운동’의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세계화 운동을 십자가로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크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류가 범한 죄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독생자의 죽음에서 나타났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죄인 속죄의 길이요,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영원한 승리의 길임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종적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횡적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한문에 十자(字)는 이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사람을 향한 사랑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또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十)을 보여줍니다. 또한 십자가는 수학적으로 더하기의 표시입니다(十). 바로 사랑 더하기, 용서 더하기, 은혜 더하기, 축복 더하기, 성공과 번영의 더하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주적 복음 운동을 보여 줍니다. 하늘과 땅(종적관계), 동서남북(횡적관계)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을 믿고(고전1:18) 십자가만을 전하고(고전1:22-23),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갈6:14)고 하였습니다. ‘예수세계화운동’은 십자가 운동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세계의 언어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세계의 심장이요, 양심이요, 사상이요, 힘이요, 예수 십자가만이 세계의 피난처요, 도피성입니다. 십자가 만이 세계의 지붕입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최후 승리의 표적입니다(계17:14). 이런 의미에서 세기적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이 ‘나는 실패자요, 나사렛 예수는 승리자다’라고 말한 그의 독백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I. 십자가 운동은 화평(화목)운동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우리의 평화이시다’는 말입니다. 여기 화평(ερνη)은 ‘합하다’ ‘연결하다’는 동사 에이로(ερω)에서 유래된 ‘평화’ ‘일치’ ‘조화’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살롬을 뜻했습니다. 이것은 분쟁과, 불일치와, 불화와 갈등 원수된 상태의 관계를 깨뜨리고 일치와, 조화, 평화의 새 관계를 창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 성경이 말하는 불화나, 원수된 분쟁의 관계는 인류가 범한 죄의 결과였다고 하였습니다. 인류가 범한 죄는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만들어 버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들어 버렸고, 사람과 자연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해 버렸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근본적이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인류가 만난 모든 불화와 불일치는 근원적이요, 일차적인 문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화평, 평화를 만들어 내는 일은 어떤 열띤 토론이나, 수많은 조약들이나, 어떤 조직적인 연맹이나, 수다한 외교적 노력으로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류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창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Ⅱ. 화평 운동의 내용(십자가 운동)
1. 가까워지게 하는 운동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멀리 있었다는 말은 넓게 말하면 범죄한 인류가 하나님과 떨어져 버린 소원(疎遠)관계를 말합니다. 더 좁히면 유대인과 이방인 관계를 말합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가리켜서(엡2:11-12) ‘멀리 있던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는 이 멀어져 버린 소원 상태를 없애 버리고 ‘가까워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류가 가까워지게 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가까워지게 하고, 이방인과 이방인끼리 가까워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적 지식입니다.
2.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린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담’은 서로 볼 수 없고, 오고 갈 수 없도록 가운데 장애물을 만들어 세운 장벽, 혹은 울타리(φραγμ)를 뜻합니다. 바로 그 ‘담’은 ‘죄’라고하는 장애물을 뜻합니다. 인류의 범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또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무서운 장벽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상적인 장벽이나 정치적인 장벽이나, 어떤 경제적인 장벽이나, 문화와 언어와 풍습의 장벽을 훨씬 넘어서는 본질적이요, 근원적인 장벽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버린 사건은 바로 십자가 속죄 사역이 담을 무너뜨리는 사실을 보여주는 웅변적인 사건이었습니다(마27:51). 이것도 지상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산 지식입니다.
3.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는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5절에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결코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알려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서 주어진 것이요, 죄를 알려 주고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을 준수해야 선해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멸시하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유대인들은 그 율법에 수 천개의 규칙과 관습과, 계율과 법령을 붙였습니다. 손 씻는 것, 그릇 씻는 것, 안식일 규례, 제사와 제물 규례 등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묶어 놓았습니다. 의식의 규례로 사람을 묶어 놓고 차별대우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의 율법들로부터 결코 ‘세계적인 종교’는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종교적 의식의 규정이나, 관습이나, 풍습에 기초한 종교는 결코 세계로 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자기 몸(육체)으로 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습니다(롬10:4). 그래서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였습니다. 예수는 유대의 율법주의가 더 이상 세계 종교의 힘이 되지못하도록 해버렸습니다. 오직 ‘십자가’ 하나만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십자가 하나만 믿게 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 하나만 짊어지고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계 인류를 십자가로 통일시켰습니다. 바로 그것은 ‘희생의 사랑’ ‘대속의 사랑’입니다. 속죄의 피를 흘린 사랑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엡2:8)로 구원 받도록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 맛보고 있는 진리입니다.
4. 새 사람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5절 하반절에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 가운데 ‘새롭다’는 말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네오스(νεο)란 말인데 ‘시간적으로 최근’을 뜻합니다. ‘새 것’을 말합니다. 예컨데 새 연필, 새 구두, 새 옷, 새 양말, 새 모자 등등꼭 같은 물건이 같은 시간 안에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있어질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또 하나는 카이노스(καινο)란 말인데 이것은 시간 관계에서 쓰인 말이 아니라 질(質)적인 면에서 쓰인 말입니다. 여기 ‘새 사람’이란 카이노스를 말합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을 뜻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새롭게 만들어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린 새 창조를 가리킵니다(2:16). 그러나 이 말은 예수 십자가가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든다거나,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든다는 말은 아닙니다. 두 종류의 인간 세계의 내용을 새롭게 하나로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납으로 된 조각과 은으로 된 조각을 함께 녹여서 새로운 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취하신 통일은 모든 민족적, 국가적 문화적인 것을 말살하고 성취하는 통일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국가를 그리스도인으로, 믿는 자로, 구원인으로, 영생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국의 그리스도인, 한국의 그리스도인, 인도의 그리스도인, 호주의 그리스도인, 브라질의 그리스도인, 미국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 목적적 변화, 가치적 변화를 뜻합니다.
5. 평안을 전하는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7절에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전파’운동이 평안입니다. 사죄의 평안입니다. 용서받은 평안입니다. 구원의 평안입니다. 영생의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의 평안입니다. 영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요14:27). 그것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일시적인 육체적 평안과 대조되는 평안입니다. 근본적인 평안, 본질적인 평안입니다. 말하자면 구속적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셨을 때 제일 먼저 평강이있기를 기원하였습니다(요20:21). 이 평안은 세계적이요, 우주적 평안, 모든 인류가 받아야 할 평안입니다. 먼데 있는 자나,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 모두 필요한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시(時)마다 경험하는 새 은총들입니다. 6. 아버지께서 나아가는 운동입니다. 본문 2장 18절에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간다는 말은
1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우
2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경우
3 특별히 왕의 존전에 사람을 안내할 경우에 쓰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을 데리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십자가 공로를 덧입혀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고 마침내 영원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행복한 걸음을 걷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십자가 운동’은 화평(화목) 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키고,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방언과 방언을 화목시키는 운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화목 운동의 내용은
1 멀어졌던 사이를 가까워지게 하는 것
2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것
3 의문에 속한 율법(의식)을 폐해버리는 것
4 새 사람을 만드는 것
5 평안을 전하는 것
6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운동입니다.
바울이 이 영감의 글을 썼던 당시의 고대세계는 온갖 장벽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정치적 장벽, 문화와 언어와 풍습의 장벽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인종의 장벽과 사상적인 장벽으로 세계는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전쟁의 불길이 역사의 한가운데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벽은 바로 인류가 범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막힌 무수한 담은 역사의 장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 십자가 운동’의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세계화 운동을 십자가로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크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류가 범한 죄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독생자의 죽음에서 나타났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죄인 속죄의 길이요,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영원한 승리의 길임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종적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횡적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한문에 十자(字)는 이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사람을 향한 사랑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또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十)을 보여줍니다. 또한 십자가는 수학적으로 더하기의 표시입니다(十). 바로 사랑 더하기, 용서 더하기, 은혜 더하기, 축복 더하기, 성공과 번영의 더하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주적 복음 운동을 보여 줍니다. 하늘과 땅(종적관계), 동서남북(횡적관계)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을 믿고(고전1:18) 십자가만을 전하고(고전1:22-23),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갈6:14)고 하였습니다. ‘예수세계화운동’은 십자가 운동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세계의 언어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세계의 심장이요, 양심이요, 사상이요, 힘이요, 예수 십자가만이 세계의 피난처요, 도피성입니다. 십자가 만이 세계의 지붕입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최후 승리의 표적입니다(계17:14). 이런 의미에서 세기적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이 ‘나는 실패자요, 나사렛 예수는 승리자다’라고 말한 그의 독백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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