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용량을 키웁시다 (엡3:14-19)
본문
저는 교회 봉사하시는 분 봐 가면서 칭찬을 합니다. 칭찬을 하 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라는 생각이 들면 칭찬을 합니다. 칭찬을 먹어야 자라는 정도의 수준이니까요. 칭찬을 하지 않아도 견딜 만 하면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이 크기 때문에 인간이 미리 김을 뺄 필요가 없지요. 몰래 봉사를 했는데 목사가 알고도 칭찬을 안 해 주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 믿음이 이제 어른이 수준이 됐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양 순탄한 환경만 주신다. 이거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린아이 취급하는 겁니다. 고난과 역경이 오면 믿음을 버릴 정도의 수준이니까 아예 어린아 이 기르듯이 하면서 순풍만 주시는 겁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자요"(히5:13)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 도 못하리라"(고전3:2) 인장강도, 압축강도 라는 것이 있습니다. 견디는 능력이지요. 그 정해진 강도 이상이 되면 부러집니다. 이것을 내성(耐性) 즉 견디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강한 스트레스에도 견딥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미약한 일상적인 스트레스에도 못 견디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심 하면 부서져서 정신병에 걸립니다. 이렇게 내성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성을 높여야 합니다. 사람은 그릇만큼만 담을 수 있습니다. 조그만 그릇에는 조금만 담습니다, 큰그릇에는 많이 담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그리 쉬 분 노하고 절망합니다. 조그마한 모함과 비판에도 크게 상처받고 회 복 불능이 됩니다. 그래서 남을 섬긴다든지 사랑을 실천한다든지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용량이 커지면 달라집니다. 웬만한 고통은 넘어갑니다. 웬만한 불안과 좌절은 넉 넉히 극복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하고서도 대가가 없어도 맘 상 해하지 않습니다. 영적 용량의 차이입니다. 영적 용량을 넓히면 자연히 됩니다. 모세는 혈기에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민족을 해 방하라고 하니 발뺌을 합니다. 혈기에 한 사람을 때려죽일 용량 은 되었지만 민족 해방의 사역에 조직적으로 일평생을 걸어 헌신 하는 용량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의 40년 의 기간이 용량을 키웠습니다. 이렇듯 어느 때나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용량이 커져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것은 인간의 피나는 영적 싸움 끝에 하나님이 키워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을 위한 간절한 중보 기도 를 드립니다. 무슨 돈 잘 벌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모두 건강하고 가정 화목하게 해달라는 축복도 아닙니다. 사랑의 영적 용량이 확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선 속 사람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무엇 보다 우리는 속 사람이 강건하여 져야 합니다. 겉 사람은 건강하고 아무 문제없지만 속 사람이 병들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속 사람의 건강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내주, 그리스도의 내주로만 가능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했지요. 주 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 그의 사랑, 그의 인내, 그의 평화, 그 의 지성, 그의 절제 등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면 우리 인격의 뿌리가 사랑에 깊이 박히 고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무한대로 커 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리는 필생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을 향한 기도 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사랑의 용량을 확대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 영적 용량을 키워 달라 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아 닙니다. 영적 용량이 좌우합니다. 바울은 먼저 낙심치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 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 의 영광이니라"(13절) 자신이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으로 인해 에베소 교인들이 낙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너희 에베 소 교인들이 낙심하는 것은 아직 영적 용량을 넓히지 못한 결과 이니 그리스도 사랑의 용량을 넓히라고 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오체 불만족"이라는 오토다케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 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오토다케는 지금 일본 와세다 데학 정 치학부 졸업반인 대학생입니다. 팔다리 없이 몸뚱아리만 달랑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끔찍한 초기형을 오히려 나만의 초개성 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20년간 만족하게 살아온 주인공 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야구반 수영반 선수였고 고등학교 때는 미식 축구반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체 불만족은 커녕 오체 가운데 사지가 없는 나는 불효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주어진 생명을 최대한 활용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본다. 그래서 나는 소 리 높여 외치고 싶다. 장애인이지만 나는 인생이 즐거워요." 사실 그의 어머니가 더 훌륭합니다. 충격에 산모가 기절할까봐 병실까지 잡아 놓고 출산 한 달만에 병원에서 오토다케를 어머니 에게 첫 대면을 시켰습니다. 거품을 물고 기절할 줄 알았던 이 어머니 기절은 않고 오히려 "어머 귀여운 내 아기."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어머니는 의연했습니다. 용량만큼 우리는 고난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용량을 키워 놓으면 어떤 힘겨운 상황도 다 담을 수 있습니다. 용량이 작으면 아주 작은 고통에도 견딜 수 없습니다. 고통은커녕 행복도 견디기 힘 들어합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고난을 없애 달라고 하기 전에 영적 용량을 넓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 를 넓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축복 받은 기도입니다. 영적 용량을 넓혀 놓지 않으면 기적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적이 쏟아 부어져도 금방 목말라 합니다. 금방 불평하고 금방 원망합니다, 그러니 기적인들 무슨 수로 당하겠어요 광야의 이 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를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그러했습니다. 성령님강림 체험 이전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 다음은 이웃 사랑의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명심할 게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만 하는 것입니다. 이거 잘 못하면 아주 냉정하게 들리는 말 같지만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량 을 키워야 합니다. 복음증거 사랑의 실천도 잘 하려면 용량을 넓 혀 놓아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도 그렇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 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들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들면 딱 그만 둬야 합니다. 거기 까지가 자신의 용량입니다. 무릇 사랑은 힘겹도록 하되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힘겹도록 하되 대가를 바라는 마음 이 없어야 합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대가나 반대급부 없이도 베풀 수 있는 만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은 영적 용량을 키워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효과가 납니다. 자녀에게도 그렇습니다. 자녀에게 온 통 사랑을 쏟아 붓되 서운 한 마음이 들면 거기 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그럴 수 있어 너 죽고 나죽자! 합니다. 자식들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나는 너를 너무 사랑스 러워 내가 좋아서 내가 기뻐서 그렇게 너를 키웠다 그래도 부족 한 점이 많지. 그러니 너도 이 엄마에게 기쁜 마음으로 해라. 기 쁜 만큼만 해라. 나는 너에게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 하나도 없다 나는 내가 기뻐서 했어. 그 뿐이야. 이래야 합니다. 이성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가 희생하라고 했나요 사랑은 전혀 나의 행위입니다. 내 결단이고요. 내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내가 싫으면 못하는 거지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희생한 게 얼마 인데 이렇게 당신이 날 배신할 수 있어 날 이렇게 소홀히 취급 할 수 있어 내 청춘 돌려줘! 끝까지 복수할 꺼야! 이럽니다. 이 거 사랑이 아닙니다. 헌신적인, 사랑 정말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거나 반대급부를 바란다면 이건 싸구려입니다. 헌신적인 사랑 좋습니다. 그러나 서운한 마음이 들거나 본전 생각이 나서 중단한다면 이거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웃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잘 도와주고 위해 주다가, 끝에 가 서는 꼭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이 정도 해 줬으면 인사 치레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 해 줬으면 이제자기 힘으로 일어 서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고, 괜히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깁니다. 실컷 도와 주고 증오하게 됩니다. 실컷 도와주고 헐뜯게 됩니다. 안 하는니 만 못합니다. 무릇 사랑이란 배반당할 각오하고 하는 겁니다. 사랑은 그런 거 예요. 내가 남을 도와준다 배반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베풀고 나서 칭찬과 인사 치례가 돌아오면 조심하세요. 이거 쥐약입니다. 다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은근히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때문 입니다. 그저 사랑은 배반당할 각오를 하고 그래도 기뻐하고 자 족하고 의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는 대상이 문제가 아 닙니다. 전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사랑의 용량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용량을 벗어나면 터지거나 부러집니다. 그러면 사랑의 실천을 하지 말아야 하나요 자신의 용량 이상을 하면 무리가 옵니다. 직분을 맡고서도 멸망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서 도 증오에 휩 쌓입니다. 섬기고서도 이웃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봉사하고서도 파괴하게 됩니다. 그러면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하나요 하지 않는 것이 능수입니 까 아니지요. 바로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용량을 더 넓히면 더 크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량을 더 깊게 만들면 더 깊게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용량을 더 높이면 하늘 끝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베풀면서도 서 운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넓이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깊이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길이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높이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영적 용량을 키워야 합니다. 어디까지키워야 합니까 아주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그 넓이 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 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 충만하 다는 것, 완전하다는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 용량을 키우되 꽉 찰 때까지 용량을 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도록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용량을 넓힙시다. 이웃사랑의 용량을 넓히도록 기도합시다. 인간의 수련과 도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한계 가 있습니다. 무한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뿌 리를 박고 터를 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발원지 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훌쩍 큰 우리 자신의 영적 용량으로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미약한 일상적인 스트레스에도 못 견디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심 하면 부서져서 정신병에 걸립니다. 이렇게 내성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성을 높여야 합니다. 사람은 그릇만큼만 담을 수 있습니다. 조그만 그릇에는 조금만 담습니다, 큰그릇에는 많이 담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그리 쉬 분 노하고 절망합니다. 조그마한 모함과 비판에도 크게 상처받고 회 복 불능이 됩니다. 그래서 남을 섬긴다든지 사랑을 실천한다든지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용량이 커지면 달라집니다. 웬만한 고통은 넘어갑니다. 웬만한 불안과 좌절은 넉 넉히 극복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하고서도 대가가 없어도 맘 상 해하지 않습니다. 영적 용량의 차이입니다. 영적 용량을 넓히면 자연히 됩니다. 모세는 혈기에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민족을 해 방하라고 하니 발뺌을 합니다. 혈기에 한 사람을 때려죽일 용량 은 되었지만 민족 해방의 사역에 조직적으로 일평생을 걸어 헌신 하는 용량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의 40년 의 기간이 용량을 키웠습니다. 이렇듯 어느 때나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용량이 커져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것은 인간의 피나는 영적 싸움 끝에 하나님이 키워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을 위한 간절한 중보 기도 를 드립니다. 무슨 돈 잘 벌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모두 건강하고 가정 화목하게 해달라는 축복도 아닙니다. 사랑의 영적 용량이 확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선 속 사람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무엇 보다 우리는 속 사람이 강건하여 져야 합니다. 겉 사람은 건강하고 아무 문제없지만 속 사람이 병들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속 사람의 건강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내주, 그리스도의 내주로만 가능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했지요. 주 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 그의 사랑, 그의 인내, 그의 평화, 그 의 지성, 그의 절제 등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면 우리 인격의 뿌리가 사랑에 깊이 박히 고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무한대로 커 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리는 필생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을 향한 기도 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사랑의 용량을 확대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 영적 용량을 키워 달라 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아 닙니다. 영적 용량이 좌우합니다. 바울은 먼저 낙심치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 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 의 영광이니라"(13절) 자신이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으로 인해 에베소 교인들이 낙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너희 에베 소 교인들이 낙심하는 것은 아직 영적 용량을 넓히지 못한 결과 이니 그리스도 사랑의 용량을 넓히라고 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오체 불만족"이라는 오토다케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 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오토다케는 지금 일본 와세다 데학 정 치학부 졸업반인 대학생입니다. 팔다리 없이 몸뚱아리만 달랑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끔찍한 초기형을 오히려 나만의 초개성 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20년간 만족하게 살아온 주인공 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야구반 수영반 선수였고 고등학교 때는 미식 축구반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체 불만족은 커녕 오체 가운데 사지가 없는 나는 불효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주어진 생명을 최대한 활용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본다. 그래서 나는 소 리 높여 외치고 싶다. 장애인이지만 나는 인생이 즐거워요." 사실 그의 어머니가 더 훌륭합니다. 충격에 산모가 기절할까봐 병실까지 잡아 놓고 출산 한 달만에 병원에서 오토다케를 어머니 에게 첫 대면을 시켰습니다. 거품을 물고 기절할 줄 알았던 이 어머니 기절은 않고 오히려 "어머 귀여운 내 아기."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어머니는 의연했습니다. 용량만큼 우리는 고난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용량을 키워 놓으면 어떤 힘겨운 상황도 다 담을 수 있습니다. 용량이 작으면 아주 작은 고통에도 견딜 수 없습니다. 고통은커녕 행복도 견디기 힘 들어합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고난을 없애 달라고 하기 전에 영적 용량을 넓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 를 넓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축복 받은 기도입니다. 영적 용량을 넓혀 놓지 않으면 기적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적이 쏟아 부어져도 금방 목말라 합니다. 금방 불평하고 금방 원망합니다, 그러니 기적인들 무슨 수로 당하겠어요 광야의 이 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를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그러했습니다. 성령님강림 체험 이전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 다음은 이웃 사랑의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명심할 게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만 하는 것입니다. 이거 잘 못하면 아주 냉정하게 들리는 말 같지만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량 을 키워야 합니다. 복음증거 사랑의 실천도 잘 하려면 용량을 넓 혀 놓아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도 그렇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 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들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들면 딱 그만 둬야 합니다. 거기 까지가 자신의 용량입니다. 무릇 사랑은 힘겹도록 하되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힘겹도록 하되 대가를 바라는 마음 이 없어야 합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대가나 반대급부 없이도 베풀 수 있는 만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은 영적 용량을 키워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효과가 납니다. 자녀에게도 그렇습니다. 자녀에게 온 통 사랑을 쏟아 붓되 서운 한 마음이 들면 거기 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그럴 수 있어 너 죽고 나죽자! 합니다. 자식들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나는 너를 너무 사랑스 러워 내가 좋아서 내가 기뻐서 그렇게 너를 키웠다 그래도 부족 한 점이 많지. 그러니 너도 이 엄마에게 기쁜 마음으로 해라. 기 쁜 만큼만 해라. 나는 너에게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 하나도 없다 나는 내가 기뻐서 했어. 그 뿐이야. 이래야 합니다. 이성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가 희생하라고 했나요 사랑은 전혀 나의 행위입니다. 내 결단이고요. 내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내가 싫으면 못하는 거지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희생한 게 얼마 인데 이렇게 당신이 날 배신할 수 있어 날 이렇게 소홀히 취급 할 수 있어 내 청춘 돌려줘! 끝까지 복수할 꺼야! 이럽니다. 이 거 사랑이 아닙니다. 헌신적인, 사랑 정말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거나 반대급부를 바란다면 이건 싸구려입니다. 헌신적인 사랑 좋습니다. 그러나 서운한 마음이 들거나 본전 생각이 나서 중단한다면 이거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웃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잘 도와주고 위해 주다가, 끝에 가 서는 꼭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이 정도 해 줬으면 인사 치레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 해 줬으면 이제자기 힘으로 일어 서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고, 괜히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깁니다. 실컷 도와 주고 증오하게 됩니다. 실컷 도와주고 헐뜯게 됩니다. 안 하는니 만 못합니다. 무릇 사랑이란 배반당할 각오하고 하는 겁니다. 사랑은 그런 거 예요. 내가 남을 도와준다 배반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베풀고 나서 칭찬과 인사 치례가 돌아오면 조심하세요. 이거 쥐약입니다. 다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은근히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때문 입니다. 그저 사랑은 배반당할 각오를 하고 그래도 기뻐하고 자 족하고 의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는 대상이 문제가 아 닙니다. 전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사랑의 용량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용량을 벗어나면 터지거나 부러집니다. 그러면 사랑의 실천을 하지 말아야 하나요 자신의 용량 이상을 하면 무리가 옵니다. 직분을 맡고서도 멸망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서 도 증오에 휩 쌓입니다. 섬기고서도 이웃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봉사하고서도 파괴하게 됩니다. 그러면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하나요 하지 않는 것이 능수입니 까 아니지요. 바로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용량을 더 넓히면 더 크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량을 더 깊게 만들면 더 깊게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용량을 더 높이면 하늘 끝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베풀면서도 서 운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넓이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깊이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길이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높이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영적 용량을 키워야 합니다. 어디까지키워야 합니까 아주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그 넓이 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 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 충만하 다는 것, 완전하다는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 용량을 키우되 꽉 찰 때까지 용량을 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도록 용량을 넓혀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용량을 넓힙시다. 이웃사랑의 용량을 넓히도록 기도합시다. 인간의 수련과 도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한계 가 있습니다. 무한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뿌 리를 박고 터를 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발원지 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훌쩍 큰 우리 자신의 영적 용량으로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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