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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은 예수다 (엡4:11-14)

본문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제가 20년 전에 사랑의교회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목회철학과 비전은 아마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예수의 제자로 만들어 세상으로 내보내고, 또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예수의 제자로 만들자. 그렇게 함으로써 이 교회가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서 종국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자." 이것이 저의 꿈이요,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 제자훈련이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외길을 달려 온 것도, 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주기도문 송을 함께 불렀던 것도 어떻게 해서든 이 꿈을 반드시 이루어보자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요즈음 들어서는 2부 예배 때만 부르고 다른 예배 때는 주기도문 송을 아예 부르지 않습니다만 주기도문은 영원한 우리의 비전이요 꿈이요, 고백입니다. 제자 만드는 사역은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 매진해 온 사역인 동시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 주님이 오시는 세대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어야 할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역이야말로 주님이 우리 교회에 명령하신 사역의 본질, 곧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제자훈련 받았으니까 제자다. 나는 아직 제자훈련을 못 받았고,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죽을 때까지 제자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지난 주일날 제가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삼기 위해서는 가서 전도해야 하고, 세례를 주어 교인으로 만들어야 하고, 지킬 때까지 가르쳐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제자훈련이라는 프로그램만 거치면 자동적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이미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주일이면 설교 말씀을 통해 계속 가르침을 받습니다. 다락방이나 주일 학교를 통해, 기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일주일에 몇 번씩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삽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아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거쳤든, 거치지 않았든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교회에 나온 이상 우리 모두는 예수의 제자입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논산 훈련소의 6주 특별 훈련에 비기고 싶습니다. 6주간 동안 훈련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예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병 훈련소의 목적은 군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정예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더 오랜 기간의 경험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평생 힘써야 되겠지만 특별히 2년간의 제자훈련 과정을 마치게 하는 데도 이와 비슷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집중 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받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만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나는 제자가 아니다."고 말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제자훈련을 해오는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된다."는 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마음 속에 교차되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이나 긴장, 거부감 같은 감정입니다. '할 수 있으면 제자라는 말을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제자가 못되는 주제에 남보고 제자 되라고 말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가급적이면 제자 되라는 을 안하고 싶다.' 그러나 또한편으로는 긍지 내지는 황홀감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일어납니다. '야, 내가 무엇인데 하나님께서 나보고 예수님처럼 살라고 하실 까 남이 뭐라고 하든 간에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예수님과 비슷하게 닮아 가는 사람이다. 이 얼마나 굉장한 영광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스스로 황홀감을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감정을 느끼느냐가 아닙니다. 거부감을 느끼든지 황홀감을 느끼든지 간에 그러한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분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한 생을 헌신하다가 가신 분입니다. 시중에 나온 헨리 나우웬의 저서라고 나온 것들은 여러분이 다 사 보셔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하나같이 유익한 책들입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셨던 것을 우리가 알고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을 우리가 행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가 되게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유의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된다고 시종일관, 직간접적으로 교훈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아도 그렇고,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그 외의 모든 서신서를 보아도 그렇고, 심지어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로 예수 닮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이하에 있는 서신서들을 보니까 '제자 되라'는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오더라. 따라서 너무 그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서신서로 넘어가면서 표현이 달라졌을 따름이지, 그 내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라는 말 대신에 '완전한 자', '온전한 자'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본문 12-13절을 보십시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먼저 '온전케 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인데, 원래는 의학 용어입니다. 뼈가 골절이 되면 병원에 가서 그 뼈를 제자리에 맞추지 않습니까 이처럼 뼈를 제자리에 맞추는 것을 일컬어 '카타르티스모스'라고 했습니다. 뼈가 완전히 제자리에 맞추어지면 모든 것이 온전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말이 의역이 되어 '적절히 준비된', 혹은 '온전한' 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13절에 나오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의 '온전한'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스'(teleios)인데, '완전한', '성숙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나오는 '온전케 하다'는 말과 뒤에 나오는 '온전한 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같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이 이 두 단어를 같은 말로 번역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 보면 '온전케 하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여기서는 '아르티오스'(artios)와 '엑세르티스메노스'(eksertismenos)라는 또 다른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 역시 '완전한' 혹은 '충분히 갖추어진', '성숙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의 두 단어와 의미상의 차이를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이 이 네 단어를 '온전한' 혹은 '완전한'이라는 말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말에서는 '완전하다'와 '온전하다'는 말 역시 의미상의 차이가 거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는 인상으로는 완전한 것이나 온전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온전하다'는 말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쉬운 방법일 것입니다. 13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지식이 신앙과 일치하는 경지로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일치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야 합니다. 아는 것 다르고 믿는 것 다르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나 저나 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성령님의 거룩한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지식은 우리 속에서 점점 믿음으로 바뀝니다. 이 부분에서는 여러분에게 별 달리 문제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13절 그 다음 부분을 보십시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의 자녀가 추구해야 될 두 번째 목적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뜻을 얼른 알기 힘든 말이라 자칫 나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말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비유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성한 분량'이란 다 큰 성인 남자의 신장을 말합니다. 30대 초반쯤이 되면 모든 성장이 최대 한계점에 이릅니다. 그래서 체구를 보나, 그 무엇을 보나 잘 갖추어진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장성한 분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장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 곧 예수처럼 크고, 거룩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말로 말하면 그 인격이 예수처럼 변하고, 그 삶이 예수처럼 거룩해지고, 헌신적인 삶이 되는 것,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사는 인격, 곧 작은 예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달려가야 할 최후의 푯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나우웬이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라고 강하게 표현한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나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 예수처럼 큰 사람이 되는 것,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대여섯 살배기 어린아이에게는 아빠가 우상입니다. 아빠를 보면 키도 크고, 힘도 세고 하니까 그 아이의 눈에는 아빠밖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소리도 하지 않습니까 '아빠, 나 언제 아빠처럼 크지' 아빠처럼 크고 멋진 남자가 되는 것이 어린아이의 꿈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꿈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 예수님처럼 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될까' 이것이 우리의 꿈이 되어야 됩니다. 제자 삼는 사역은 목회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교역자를 주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여기서 '그'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사도를 주셨고, 선지자를 주셨습니다. 이 두 직분은 지금은 없어진 직분들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를 주셨습니다. 이 직분은 오늘날에도 있는데 선교사나 전도사, 복음을 위해 한 생을 사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습니다. 목사와 교사는 표현만 다를 뿐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면서 교사인 사람, 곧 가르치는 목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역자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르치는 목사를 교회에 주셨을까요 12절 앞부분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순종하게 하여 온전한 사람을 만들라고 교역자를 주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왜 성경을 우리 손에 들려 주셨는지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바르게 함을 받고 의로 교육함을 받으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 손에 들려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교회에 교역자를 주신 목적과 성경을 주신 목적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교역자를 주신 것도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요, 성경을 주신 것도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예수의 제자로 만드는 제자훈련은 목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매우 부담스러운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아니면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때 일어날 일로 해석하고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 재림할 때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에 살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 모두는 흠과 티가 전혀 없는 예수님처럼 온전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종말론적으로 일어날 일로 치부해 버리고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반을 부정하는 이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고 하실 때 "이것은 천국에 들어가면 이루어질 일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실 때도 "천당에서나 이루어질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은 천당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소명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교회에 가르치는 목사를 주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르치는 목사는 모든 성도를 온전한 자가 되게 할 책임을 진 사람입니다. 그럴 때 교역자의 존재 가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담스러운 말씀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담스럽기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감히 세상에서 자기를 예수처럼 완전하다고 내세울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예수처럼 완전한 생을 살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옥 목사를 보고 예수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왜 웃습니까 사실적인 반응이지요. 솔직한 반응이지요. 어떤 사람을 놓고 뭔가 좋아 보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처럼 되기가 그만큼 힘이 드니까 우리가 '작은 예수'라도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기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소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처럼 완전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를 수 없는 정상인 줄 알면서도 계속 뒤에서 채찍질을 하면서 올라가라고 합니다. '하나님, 뻔히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자꾸 이러세요 너무 스트레스 받잖아요!' '자꾸 그러면 가출할 거예요. 가출했다가 죽을 때 돌아올게요.' 너무 부담스럽기에 우리가 심리적으로 이와 같은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완전한 자가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하는 말이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9월 달에 미국의 캘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 가서 이틀 동안 특강을 했습니다. 캘빈 신학교는 제가 23년 전에 다녔던 좋은 신학교입니다. 지난 23 년 동안 미국을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특별히 갈 일도 없고 해서 그 학교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그 학교에서 제게 특강을 해달라고 특별히 요청을 해왔습니다. 졸업생으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가겠다고 약속을 했고, 지난 9월 달에 캘빈 신학교에 갔던 것입니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 이틀 동안 특강을 했는데, 많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매우 진지한 자세로 제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특강의 주제는 제자훈련 목회철학이었습니다. 저는 첫 시간부터 제자를 만드는 목회가 왜 중요한가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매 시간 마다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는데, 강의 마지막 시간에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할 테니 그 때까지 참아달라고 특별히 양해를 구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누구든지 지금까지 들은 강의 내용 가운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몇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대단한 질문들이 아니라 쉽게 대답을 해 주며 '이제 됐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주 날카롭게 생긴 어떤 여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순간 저는 무슨 질문이 나올까 하고 약간 긴장을 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완전한 자가 된다는 말로 해석을 하셨는데, 목사님은 완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세요" 아니나다를까 굉장히 날카로운 질문이 튀어나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허를 찔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저보다도 옆에서 통역하던 고성삼 목사님이 더 긴장을 해버렸습니다. 대답을 잘못하면 어쩌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캘빈 신학교 학생들은 파고들고, 비판하는 까다로운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완전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스'인데 어쩌고저쩌고 하면 자꾸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합니다. 그러다 보면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마디로 대답하고 끝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저에게 순간적인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도 '완전하다'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사람에게는 그 말을 붙일만한 대상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를 놓고 완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정신착란증을 일으킨 사람이든지 뭔가 잘못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 말을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습니다. 저는 가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감당도 못하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세요 말씀 좀 절제해 주세요.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만 해 주세요.'
그런데 한 번은 제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불평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냐 아버지라면 자식을 향해서 최상의 소원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자식을 향해서 최상의 소원을 갖고 계시는데 그 최상의 소원을 작은 예수, 혹은 완전한 자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자기 맏아들인 예수처럼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자녀에게 최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이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니까 '완전한 자'라는 말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대답을 했더니 거기에 있던 학생들과 교수들이 제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마도 제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을 낳아 키우는 부모 치고 자식을 향해서 꿈을 안 가진 부모가 있습니까 제자식이 아무리 코가 삐뚤어지고 귀가 하나 작아도 가만히 보면서 '이 놈이 커서 잘 됐으면 좋겠다.'하고 소원을 가집니다. 사법고시에 한이 맺힌 아버지는 자식이 고시에 합격해서 법관이 되는 날을 날마다 꿈을 꿉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이란 말입니다. 설사 아버지가 자녀에게 욕을 할 때도 속내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빌어먹을 놈'이라는 욕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굉장히 서러웠지만 나중에 제가 철이 들고나서는 그 말속에도 아버지의 심정과 소원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 가난해서 거지처럼 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볼 때마다 '네가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서 별 수 없겠지만 내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단다.
너는 뼈가 부러지도록 일을 해서 벌어서 먹고살아라. 절대 남에게 손 내밀고 빌어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소원을 곱씹는 것입니다. 제가 날마다 책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농사꾼의 아들이 책을 쳐다본다고 하늘에서 무슨 별이 떨어지겠냐 너 잘못하다가는 빌어먹는다.' 하는 심정으로 "빌어먹을 놈"하고 야단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아버지라면 누구나 아들을 놓고 제일 좋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부담을 느끼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니까 그런 소원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 된 우리가 2등, 3등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상의 인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심정이 "온전한 자가 되라. 예수의 제자가 되라." 하는 말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오히려 감격해야 합니다. 완전한 자가 되라는 말은 하나도 흠이 잡히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 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를 닮아 가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면 그 사람은 완전한 자라고, 작은 예수라고 해도 잘못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예수들 우리 주변에는 '저 분을 볼 때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 저 분은 참 예수님처럼 살고 있구나.' 하고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을 예로 들고 싶지 않습니다. 1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위대한 사람 이야기를 해 봐야 우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로밖에 안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 닮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부인이 있습니다. 그는 남편이 예수 잘 믿게 해달라고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남편은 여자 하나를 얻어 가지고 딴 살림을 차리고 애까지 낳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이 들통이 나자 남편은 집에서 나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남편 미워하지 않아요. 아직도 그를 사랑해요.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언제든지 용서할 수 있어요. 제 마음은 항상 열려 있어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 '여기 작은 예수가 앉아 있구나. 꼭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집사님은 다락방을 할 때마다 자기를 괴롭히는 순원이 있었습니다. 그 순원은 공적인 석상에서 순장인 자신을 비판하고, 거북하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사님은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록 그 자매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자매에 대해서 목사에게 불평을 한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담아놓고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장을 보면서 '야, 정말 작은 예수님 같다. 예수님도 분명 저렇게 하셨을 것이다.' 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또 어떤 장로님은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 "중앙 아시아에 있는 회교 국가에 가서 몇 년 동안 선교하다가 오겠습니다. 목사님, 양해를 해주십시오."하고는 금년 말로 장로 일도 그만두고 부부가 그 고생스러운 회교 국가에 가서 선교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육십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주님 앞에서 보람되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장로님을 보면서 '야, 작은 예수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는 자기 쓸 것을 조금씩 절약해서 마련한 돈으로 뭔가를 사서 추운 겨울날 그것을 들고 소년 소녀 가장이나 달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떠벌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처럼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따로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입니다.
촌지를 가지고 오면 부드럽게 거절하고, 결손 가정에서 자라면서 문제아가 된 아이를 품고 기도해 주고, 그 아이의 위상을 세워주고 학생들과 서로 교제하도록 끌어주어 그 아이도 변하게 만들고, 그 반의 분위기도 완전히 뒤바꾸어 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반 애들이 집에 가서 선생님 자랑을 합니다. "우리 선생님은 이런 선생님이세요. 요즘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 말에 감동을 받은 부모 중의 어떤 분이 그 교사가 사랑의교회 교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제게 전화를 다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온전한 자가 따로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처럼 사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어제 결혼식을 주례한 일이 있습니다. 신랑 신부는 우리 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교제를 하다가 결혼하게 된 젊은이들입니다.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두 사람이 느닷없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요는 결혼식 때 부를 찬송가를 바꾸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건방진 녀석들 봐라. 목사가 부르는대로 하면 되지, 무슨 찬송가를 바꾸라 말라 그러냐'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저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무슨 찬송으로 바꾸어 줄까" 그러자 그들은 358장 '아침해가 돋을 때'라는 찬송을 내밀었습니다. 그 찬송의 가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드리고/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밤낮 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찬송이 어디 어린 애 자장가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입니까 결혼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부담스러운 찬송을 불러 달라고 합니까 신랑 아버지는 변호사입니다. 그리고 신랑도 이제 고시 합격을 하고 법관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부 아버지는 대사입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자란 덕에 신부는 어학이라든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갖추어진 자매입니다. 둘 다 어디에 가도 빠질 것이 없는 젊은이들인데, 밤낮 주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드리고 이 세상에 햇빛 되게 해달라는 이 찬송을 불러 달라니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젊은이들을 주례하면서 '작은 예수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정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되는대로 살다가도 죽으면 예수님처럼 된다고 하니까 되겠지 뭐.' 이런 자세를 가지고 신앙 생활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명심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날마다 생활하면서 '나는 예수의 제자다. 나는 완전한 자다. 완전한 자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 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나 말을 할 때 항상 혼자서라도 고백을 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돼. 나는 완전한 자가 되어야 돼.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 돼." 우선은 이와 같이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순종하기 쉬운 것부터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일이고 생각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순종하십시오. 실천하십시오. 쉬운 것도 실천하지 못하면 어떻게 어려운 일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말씀을 지킬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안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배웠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지식은 부도 수표입니다. 수백 번을 배웠다 해도 순종하지 못한다면 절대 배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할 수 있을 때까지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으면 그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불일 듯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자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큰 일까지 정성을 다해 노력합니다. 만일 이와 같은 노력도 없이 "나는 안다. 나는 배웠다. 나는 무슨 프로그램을 마쳤다."하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말씀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를 꼭 마음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나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고백합시다. 순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부터 순종합시다. 순종하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삶에 이르기까지 더 열심히 말씀을 배웁시다. 그럴 때만이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라! 나의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환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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