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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보라 (골3:1-4)

본문

오늘은 새해 첫날 아침입니다. 세상이 신선하리 만큼 아름답고 새롭고 밝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간밤에 좋은 꿈 꾸셨습니까 새해는 뭔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새해 첫 출발이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매사는 시작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높은 뜻을 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는 더욱 분명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소중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엑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해를 살아가시면서 위를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 귀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참되고, 신령하고, 값이 있는 것은 모두 패역한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저 높은 곳으로부터 오고,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만나가 거기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모두 거기로부터 왔습니다. 헐몬산의 이슬이 모두 거기로부터 내려옵니다. 이다음 주님도 그 곳으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존슨 오트만(Johnson Oatman),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하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21편에서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위로부터 온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일을 다 집어 치우고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고 기도만 하고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삶의 초점을 저 높은 곳에 두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귀하고, 신령한 것들은 모두 저 높은 곳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사람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짐승은 대개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다릅니다. 짐승은 네 발로 걸어 다니기 때문에 언제나 그 눈이 땅을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두 발로 걸어 다니기 때문에 머리를 위로 향하여 언제나 위를 보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노라.” 이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무릇 인간의 삶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이 두 형태의 삶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상주의자는 미래를 현재보다 더 중시합니다. 장래의 소망을 위해서 오늘 받는 고통도 잘 견뎌 냅니다. 그리고 물질의 소득보다 정신적인 가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둡니다. 또 이 땅에 집중하여 살기보다는 저 높은 곳에 뜻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는 먼 장래 일보다는 당장의 일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생일 날 먹자고 이레를 굶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기반보다는 물질적 기반이 더 우선해야 한다고 합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욕망을 절제시키기보다는 되도록 쾌락을 충족시키는 데 더 열중합니다. 이 두 삶의 형태를 놓고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절대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을 진보시키고 향상시키는 것은 현실에 집착해서 땅의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서라도 먼 장래를 바라보면서, 저 높은 곳을 올려다 보고 사는 이상주의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존슨 오트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날마다 나아간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도움이 저 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2.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위를 올려다 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거기에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주님은 생명이시고, 진리 되시고, 길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편안할 때는 굳이 위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 위를 보게 되는냐하면 혼자서는 힘에 부칠 때입니다. 그 때는 무신론자도 위를 올려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말에 의하면 사탄도 병들면 위를 쳐다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평상시에는 그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인생의 근본적인 길은 모두 저 높은 곳에 있다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어떤 청년이 어머니가 너무 고지식하리 만큼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가 무지해서 그렇다고 늘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전쟁이 일어나서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전장으로 떠나려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십니다. “아들아, 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거든 위를 보거라.” 아들은 그 말을 무심코 듣고는 흘려 버렸습니다. 이 청년이 전쟁에 나갔다가 그만 적진에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아남을 가능성도,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도 전무합니다. 길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 이 청년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오거든 위를 보라”는 어머니의 말씀입니다. 이 청년의 가슴에서 순간적으로 그 말씀이 얼마나 강렬하게 떠오르는지 그만 위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그 짤막한 기도 한 마디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청년은 어머니의 그 고지식한 신앙의 모습을 보고는 무지하다고 비웃었지만 막상 그 환경에 처하고 보니까 진정 근본적인 길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높 은 곳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그 때 위를 올려다 보는 힘 때문에 여러 날 동안을 인내하고 기다렸다가 구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 해를 살아가시다가 어렵거든 자꾸만 방법을 찾고, 꾀를 내기보다는 위를 올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위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생활이 없으면 사람은 저속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길들이기에 따라서 사람도 될 수 있고, 짐승도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관심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육의 사람이냐 영의 사람이냐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 높은 곳은 언제나 우리와 동떨어진 저 멀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곳의 일부분은 현재 지금 나의 마음속에 있고, 관심 속에 있고, 생활 속에 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험악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 현실의 삶에서 그 나라를 경험하고 인식하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 땅엣 것에 너무 지배를 받고 살게 되면 거기서 나타나는 생활의 열매는 저속하고 천박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골로새서 3:5-8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음란과 부정과 정욕과 탐심과 분노와 악의와 부끄러운 일들뿐입니다. 여러분,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외형상의 모습은 감옥이나 수도원이나 똑같습니다. 세상과의 격리, 높은 담장, 엄격한 규율, 자유의 제약, 똑같은 복장, 공동 생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는 자나깨나 한숨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지만 스스로 수도원의 담장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자나 깨나 밝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죄수가 변하여 성자가 되면 그 곳이 비록 감옥일지라도 수도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자가 타락하여 믿음을 저버리면 그 수도원은 갑자기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먹고 마시는 땅의 것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바 저 위엣 것이 지금 우리의 삼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했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은 저속해지지 않고, 오늘 현재의 삶에서도 영의 세계에 속해서 살아갈 수가 있고, 뿐만 아니라 내가 일생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그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아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유태인 청년 변호사가 운명하면서 유언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하버드 대학 병원 연구실에 기증하여 연구 자료로 사용되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버드 대학이냐고 물으니까 그 분이 대답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하버드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나로서는 이 방법이 내가 거기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하버드에 가고 싶었으면 죽어서 시체로라도 가겠다고 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저 높은 곳,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버드에 가는 것이 평생 소원으로 주어서라도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체를 대학에 기증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그 나라에 대한 열망이 그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는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4. 그렇게 살려고 하면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그것은 수고가 따른다는 점입니다.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는 거거에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트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서 자꾸만 탈락하는 이유도 거기에 이 같은 수고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내려가는 일은 모두 쉬운데 올라가는 것은 모두가 어렵습니다. 산도 내려갈 때는 쉬운데 올라갈 때는 힘이 듭니다. 돈도 벌기는 어려운데 쓰기는 아주 쉽습니다. 사람도 깨끗이기는 참 어려운데 더러워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수도하기가 어렵지 타락하고, 더럽혀지고, 추해지기는 순식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을 올려다 보는 생활에는 언제나 수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엣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사람들이 저 높은 곳을 그저 동경만 하고 바라만 보았지 팔 다리를 걷어 붙이고 그 높은 곳을 향하여 내디디려고는 하지 않ㅅ브니다. 행동이 없는 관념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중국 산동성에 신념이 강한 환 노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 앞에 큰 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매우 답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노인은 그 산을 없애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여러 아들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곡괭이와 삽을 들고 함께 산을 파 내기 시작했습니다. 참 무모한 짓입니다. “왜 땅을 파느냐”고 이웃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산을 옮기기 위해서 판다”고 노인이 대답합니다. 그 이웃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래서 “헛수고 하지 말라”고 조용히 타이릅니다. 이 노인이 그 말에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파다가 다 못 파면 내 아들들이 팔 것이고, 내 아들들이 파다가 다 못 파면 그 아들들이 팔 것이고, 그들이 죽는 날까지 파다가 다 못 파면 그 아들들이 또 팔걸세, 그렇게 파다 보면 언젠가는 이 동산이 옮겨질걸세.”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꾀도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저 높은 곳을 동경하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 다 안 되면 내일 하고, 내일도 안 되면 모레도 할 수 있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너무 성급한 것이 탈입니다. 이어령씨의 말에 의하면 사탕을 입에 넣고 깨물어 먹는 경우는 세계에서 한국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너무 서두는 것이 흠입니다. 죽는 날까지 꾸준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게 위를 올려다 보고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한 해를 살아가시는 동안 때로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힘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위를 올려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육신은 이 땅에 있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정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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