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감사 (골3:15)
본문
오늘 도시에서 그리고 풍부한 문화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맥추절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맥추절이 오늘 우리 상황과 맞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에서는 아예 맥추 감사 주일을 없애 버렸다는 교회도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벼 농사는 지어서 지키는 것입니까 신앙 생활의 뜻과 의미는 너무 쉽게 생각하면 모두 다 퇴색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감사 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이재(理財)에 치우치고 타산적인 생활을 하다 보면 신앙 생활도 모두 타산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됩니다. 보리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맥추 감사 주일도 필요없는 것 아니냐는 발상도 사실은 타산적인 신앙에서 나온 의식입니다. 이 같은 의식 구조로 흐르게 되다 보면 우리에게서 신앙의 모습은 종국에 가서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까지 스며들도록 마음을 열고 진정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합시다. 첫 번째로 감사에는 “환난 중에 드리는 감사가 제일”입니다. 오늘 대다수 사람들은 뭔가 받았을 때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감사는 그렇게 중요한 뜻을 지닌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드릴 수 있는 감사라고 하면 그것은 뜻이 있고 의미가 깊은 감사입니다. 뭔가 사람이 깨닫고, 또 느꼈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3장을 보면 선지자가 하나의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바벨론이 곧 쳐들어 온다는 정보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최강국입니다. 오늘의 미국과 같은 힘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들이 쳐들어 온다고 하면 나라는 풍지 박산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선지자 하박국은 “(합3:16) 내 창자가 흔들렸고 내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미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을 잃게 됩니다. 앞뒤를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감사와 찬송은 바로 환난 중에 드린 감사요 찬송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인만이 흉내 낼 수 있는 그런 감사입니다. 시편을 보면 수많은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나와 있습니다. 개중에는 기뻐서 드린 감사도 있고, 찬양시도 있지만 대부분은 환난 중에 부르짖었던 기도고 찬양이고 감사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찬양의 가사를 보아도 그 가사들 대부분은 환난을 거치는 동안 그 환난 속에서 영감을 받아 눈물로 옮어진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성숙한 감사인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다리 하나만 부러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그만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남편이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소리치는 부인을 향해서 남편은 미친 여자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무엇이 감사하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온전하던 다리가 부러진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내의 감사함은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지 않고 그만큼의 사고로 그쳤음을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두 다리도 아니고 거기다 허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한쪽 다리만 부러졌으니 그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관심은 이렇게 다릅니다. 생각도, 보는 관점도 다릅니다. 불신앙인들의 눈은 부러진 다리를 보지만 신앙인들의 눈은 부러지지 않은 다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주어져서 감사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감사라고 한다면, 어려움이 주어졌을 때 그 곳에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내서 감사하는 것은 철이 든 어른이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같은 감사함을 성숙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난하고 비천한 중에 드리는 감사”도 소중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말할 때 사렙다 과부의 밀가루 떡 이야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뭄과 기근이 극심해서 먹을 것이 모두 떨어져 가고 있을 때 그 마지막 밀가루 한 줌을 반죽해서 엘리야를 공궤하는 그 여인의 손길은 정녕 아름다웠습니다. 그 여인에게도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보채고 우는 것이 몹시도 걸렸지만 그것을 마다하고 선지자를 공궤하는 그 손은 정말 기가 막힌 감사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이 전해 내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사복음서를 보게 되면 어느 과부의 두 동전 헌금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남들은 많은 액수의 헌금을 자신 있게 떳떳한 마음으로 헌금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과부는 동전 두 개를 가지고 부끄럽게 움츠린 모습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극구 칭찬합니다. 없는 중에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중에 드린 그 헌금은 그의 전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중에 헌금할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한 마음입니다.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숙한 감사하고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 감사하는 것도 좋은 감사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도 더 소중한 감사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 고난의 삶이 주어졌을 때, 그 환경 그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욱 소중한 감사입니다. 성숙한 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숙한 감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깨달은의 감사도 성숙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에게만 이성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깨달아 알고,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과 처지에서 살고 있지만 한 사람은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사람은 감사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보지 못해서 그렇고, 느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깨달음 여하에 따라서는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 여하에 따라서 그의 삶이 행복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에 나와 앉게 하신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침에 우리는 이 같은 깨달음의 감사를 드리는 아침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네 번째로 감사 중의 감사는 “믿음의 감사”입니다. 감사 중에는 믿음의 감사가 있습니다. 믿음의 감사는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그런 감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난한 중에 드리는 감사와도 그 격이 다릅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 드리는 감사와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의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섭리를 믿고 은혜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를 믿음의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 사건 때 공산당에게 두 아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죽은 두 아들의 영결식 때 아버지인 목사님은 아홉 가지 조건을 일일이 내세우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 자식이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 같은 영광을 하필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3. 3남 3녀 중에 가장 잘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5. 예수를 믿다가 병중 자리에서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전도하다가 순교했으니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갔으니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8.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9.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은 옛날 내 부모가 새벽마다 3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정이요. 내 형제자매들이 2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해 줘서 열매 맺게 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하나이다. 이 땅 위에서, 정말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일은 위대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과연 누가 와서 시비를 걸겠습니까 누가 이 같은 사람을 건드리며 넘어뜨리며 유혹할 수 있을 것입니까 신앙의 높은 경지, 얼마나 신비한 세계입니까 그래서 감사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야만인인 것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너희는 범사에 감사하라.” 오늘 맥추 감사절 아침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같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다만 추수했기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보다 깊고 성숙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벼 농사는 지어서 지키는 것입니까 신앙 생활의 뜻과 의미는 너무 쉽게 생각하면 모두 다 퇴색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감사 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이재(理財)에 치우치고 타산적인 생활을 하다 보면 신앙 생활도 모두 타산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됩니다. 보리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맥추 감사 주일도 필요없는 것 아니냐는 발상도 사실은 타산적인 신앙에서 나온 의식입니다. 이 같은 의식 구조로 흐르게 되다 보면 우리에게서 신앙의 모습은 종국에 가서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까지 스며들도록 마음을 열고 진정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합시다. 첫 번째로 감사에는 “환난 중에 드리는 감사가 제일”입니다. 오늘 대다수 사람들은 뭔가 받았을 때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감사는 그렇게 중요한 뜻을 지닌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드릴 수 있는 감사라고 하면 그것은 뜻이 있고 의미가 깊은 감사입니다. 뭔가 사람이 깨닫고, 또 느꼈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3장을 보면 선지자가 하나의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바벨론이 곧 쳐들어 온다는 정보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최강국입니다. 오늘의 미국과 같은 힘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들이 쳐들어 온다고 하면 나라는 풍지 박산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선지자 하박국은 “(합3:16) 내 창자가 흔들렸고 내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미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을 잃게 됩니다. 앞뒤를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감사와 찬송은 바로 환난 중에 드린 감사요 찬송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인만이 흉내 낼 수 있는 그런 감사입니다. 시편을 보면 수많은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나와 있습니다. 개중에는 기뻐서 드린 감사도 있고, 찬양시도 있지만 대부분은 환난 중에 부르짖었던 기도고 찬양이고 감사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찬양의 가사를 보아도 그 가사들 대부분은 환난을 거치는 동안 그 환난 속에서 영감을 받아 눈물로 옮어진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성숙한 감사인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다리 하나만 부러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그만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남편이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소리치는 부인을 향해서 남편은 미친 여자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무엇이 감사하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온전하던 다리가 부러진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내의 감사함은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지 않고 그만큼의 사고로 그쳤음을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두 다리도 아니고 거기다 허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한쪽 다리만 부러졌으니 그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관심은 이렇게 다릅니다. 생각도, 보는 관점도 다릅니다. 불신앙인들의 눈은 부러진 다리를 보지만 신앙인들의 눈은 부러지지 않은 다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주어져서 감사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감사라고 한다면, 어려움이 주어졌을 때 그 곳에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내서 감사하는 것은 철이 든 어른이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같은 감사함을 성숙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난하고 비천한 중에 드리는 감사”도 소중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말할 때 사렙다 과부의 밀가루 떡 이야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뭄과 기근이 극심해서 먹을 것이 모두 떨어져 가고 있을 때 그 마지막 밀가루 한 줌을 반죽해서 엘리야를 공궤하는 그 여인의 손길은 정녕 아름다웠습니다. 그 여인에게도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배가 고프다고 보채고 우는 것이 몹시도 걸렸지만 그것을 마다하고 선지자를 공궤하는 그 손은 정말 기가 막힌 감사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이 전해 내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사복음서를 보게 되면 어느 과부의 두 동전 헌금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남들은 많은 액수의 헌금을 자신 있게 떳떳한 마음으로 헌금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과부는 동전 두 개를 가지고 부끄럽게 움츠린 모습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극구 칭찬합니다. 없는 중에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중에 드린 그 헌금은 그의 전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중에 헌금할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한 마음입니다.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숙한 감사하고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 감사하는 것도 좋은 감사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도 더 소중한 감사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 고난의 삶이 주어졌을 때, 그 환경 그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욱 소중한 감사입니다. 성숙한 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숙한 감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깨달은의 감사도 성숙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에게만 이성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깨달아 알고,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과 처지에서 살고 있지만 한 사람은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사람은 감사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보지 못해서 그렇고, 느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깨달음 여하에 따라서는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 여하에 따라서 그의 삶이 행복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에 나와 앉게 하신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침에 우리는 이 같은 깨달음의 감사를 드리는 아침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네 번째로 감사 중의 감사는 “믿음의 감사”입니다. 감사 중에는 믿음의 감사가 있습니다. 믿음의 감사는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그런 감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난한 중에 드리는 감사와도 그 격이 다릅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 드리는 감사와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의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섭리를 믿고 은혜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를 믿음의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 사건 때 공산당에게 두 아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죽은 두 아들의 영결식 때 아버지인 목사님은 아홉 가지 조건을 일일이 내세우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 자식이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 같은 영광을 하필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3. 3남 3녀 중에 가장 잘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5. 예수를 믿다가 병중 자리에서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전도하다가 순교했으니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갔으니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8.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9.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은 옛날 내 부모가 새벽마다 3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정이요. 내 형제자매들이 2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해 줘서 열매 맺게 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하나이다. 이 땅 위에서, 정말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일은 위대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과연 누가 와서 시비를 걸겠습니까 누가 이 같은 사람을 건드리며 넘어뜨리며 유혹할 수 있을 것입니까 신앙의 높은 경지, 얼마나 신비한 세계입니까 그래서 감사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야만인인 것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너희는 범사에 감사하라.” 오늘 맥추 감사절 아침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같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다만 추수했기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보다 깊고 성숙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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