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인간들 (골로새4:7-18)
본문
교리나 교회 생활이나 혹은 그리스도인의 오류를 바로잡는 유일한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처방법을 본 서신에서 줄곧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최상의 자리를 드리고 그분만이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십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주의 목표이며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천이며 영감이며 모형이십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2:10) 예수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주체입니다. 이것은 본 서신을 점철하는 바울의 대표적인 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본 서신의 말미에 가서 이러한 높은 수준의 강론에서 갑자기 벗어나 개인적인 소식란과 같은 별로 중요치 않은 듯한 인사말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바울의 친구들에게 주는 문안이나 지시 사항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 이런 식으로 끝을 맺어야 할까요 왜 대가들의 명설교처럼 멋지게 끝맺지 않았을까요 바울의 본 서신은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아는 범상한 일들이라서 하나님께 무가치하다고 여기기 쉬운 매우 실제적인 것들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결언들은 그래도 신령한 계시의 일부라고 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지금도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역사 골로새서는 서신의 형식을 빌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서신은 특수한 여건에 처했던 한 사람이 쓴 것인데 다른 서신들에서처럼 개인적인 소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이나 산상보훈이나 혹은 로마서의 대 논쟁처럼 항상 체계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대개 인간의 삶속에 섞여서 인간의 감정들을 형성하고 또 이용하면서 삶의 현장을 통해 드러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관계들을 타고서 전달되며 여기에서처럼 간단한 문안의 말들로써 표현되기도 합니다. 본 서신의 이 마지막 부분은 신학적인 관심이 결여된 하나의 추신이 아닙니다. 이 문안의 인사말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실천적인 측면을 담은 대 진리들 못지 않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신령한 계시란 신화의 영역에 속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문서(각종 인조품 종교들의 어떤 경전들처럼)가 아니라 지리적인 문맥에서 이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와 짜여진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같은 계시의 성격을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시대에 적용시킬 때에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은 물론 영원하고 범세계적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특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현출된 것입니다. 이 점은 교리적인 글에서보다는 서신들의 말미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서신들의 작별 문안들까지도 그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문맥의 영향을 거의 받은 것들입니다
1) 성경의 모든 부분들은 각 시대의 인간들이 가진 필요를 충족시키기 이전에 그 당시의 세계에서 있었던 어떤 특정된 상황을 취급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끝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간단한 문안의 형식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교우들과 교회 사이의 꾸밈없는 자발적 관계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바울,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유스도, 눔바, 아킵보와 같은 여러 교우들 사이와 에베소, 로마,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의 교회들 사이에서 맺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교리적인 지성주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교우들의 연락망이 확산되고 있으며 복음이 참된 것이라는 사실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간들의 신학 논문이나 윤리서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 존재의 전 영역에서 실제로 인간의 피와 살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계시에는 인간의 지성과 마음, 혼과 육신이 다 관련되었으며 크고 작은 역사상의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우리들 존재 전체 속에 파고드는 새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새명은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되 퍽 다른 차원으로 살게 합니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다른 많은 글 중에서 본 서신을 보존하시고 특별히 마지막 문안 부분을 남겨 두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인간들의 모임 본 단원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실제 상황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히시지 않았더라면 함께 모였거나 결코 만나지도 않았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배경이나 언어, 인종이나 사회 계급 혹은 기질이 너무도 달라서 한 몸으로는 도저히 연합될 수 없었던 조건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 서신에서 드러난 사실만 하더라도 교인들의 개별적 상황은 매우 상이하였습니다. 우선 인종적으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아마 데살로니가 사람이었을 것이고,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으며, 유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헬리인들도 있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이었고, 누가는 의사였으며(아마 드로아 출생) 데마는 데살로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과 에바브라와 같은 자유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네시모와 같은 노예들도 끼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민족, 직업, 배경, 삶의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이 한 형제로 연합되어 여행이나 서신, 기도로써 서로의 따뜻한 교우애를 나누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 이름 중에서 마가가 언급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마가는 한때는 소심하고 비겁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남으로써 이 두 사역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행15:37-39) 바울이 다시는 동행시키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마가는 바울의 임종 때까지 그의 곁에서 신실하고 견고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조금도 마가에 대해 유감이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마가의 이름을 회복시켜 주려고 각 교회 앞으로 추천서를 보내어 그를 따뜻이 영접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잘못이나 실수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소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과거의 원수들이 서로 화해를 하고 함께 동역하는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작업입니다. 한편 데마는 곧 바울을 떠날 자였는데(딤후4:10) 과거에 바울을 저버렸던 마가와 함께 같은 동역자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실정입니다. 교회에서는 강점과 약점이 병존하고, 기쁨과 슬픔이 병립하며, 격려와 실망이 교차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범상한 인간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들은 오네시모도 기억해얗비. 그는 도망 중이었던 노예며 도둑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의 주인에게로 되돌려졌던 사람이었습니다(몬1:10-18). 복음은 그들의 상전과 노예의 옛 관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가는 귀한 편지를 가지고 귀가할 때에 골로새에서 이들은 두 형제로서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단체나 써클이나 협회처럼 차단된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 속에는 세리와 바리새인, 상전과 노예, 지식인과 무식인, 문화인과 비문화인들이 공존합니다. 거기에는 중산층이나 근로자층이나 상류층이나 지식층들이 별도로 있어 따로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온갖 종류의 배경을 안은 남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서로 연합되어 새 삶을 풍성히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종들과 인간들의 종 우리들은 본문에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인간들을 전심으로 섬기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실례를 들어 봅시다. 두기고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4:7)이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옥중에 있는 동안 정성껏 그를 보살폈었고 마가 및 유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4:11)자였으며 사도 바울이 시험을 받을 적에 그를 위로했던 자였습니다. 에바브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4:12)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항상 모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고 아울러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의 자매 교회들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주 앞에서 엎드려 탄원하였습니다. 누가는 여러 가지 힘들고 긴장된 여건 속에서 바울의 건강을 돌보았던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전도인이며, 신임을 받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바울이 개척한 사역을 책임지고 맡았습니다. 끝으로 눔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본 단원에 실린 여러 사역자들의 긴 목록에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사역이 성령님에 의해 연합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된 유능한 일꾼들의 전체적인 팀(Team)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완연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큰 인물들의 경우처럼 고립의 고통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의 도움과 위로와 협조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하나의 진공지대를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동역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바울의 삶에는 저항할 수 없는 자력과 같은 위대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면서 동시에 사람들도 힘껏 섬겼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배치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것은 사람들과도 가까운 것입니다. 이러한 동질성은 참되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인간의 필요에 대한 진심의 응답과 상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수직적’관계가 인간과의 ‘수평적’관계로 서로 교차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이 이중적 소명과 이 소명에 대한 사역자의 혼신적(渾身的)봉사는 바울의 다음 증언에서 뚜렷이 부각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4:12,13) 에바브라는 이 교회들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을 안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던 전도사, 목사, 의사(누가) 기타 여러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상실된 이 세상에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투쟁에 가담하였으며 교우들을 위해 고통을 받으면서 함께 교제하고 함께 동정하며 교회를 지켜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결속성 골로새서의 마지막 단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배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무런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인간들에게 직접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일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일으라’(4;16) 그러니까 바울은 두 개의 편지를 써서 하나는 골로새 교회에, 또 하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두 편지는 서로 보완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교인들은 하나님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 필요가 있었고, 역으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인간의 결속체, 곧 교회들과 교인들의 공동체로부터 격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나 신령한 원칙의 덕택으로 교만을 막을 수 있고 연합을 위한 의무를 상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타교회들에게도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교회의 교우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배워야 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겸손과 사랑의 덕을 함양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다른 교우에게 주신 말씀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합니다. 이 결속체의 원리에서 이탈하여 다른 교우들이 하는 말에는 귀를 막는 교회들이나 크리스찬들은 조만간 종파주의나 이단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배우도록 합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우리들의 원칙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로부터 배워야 하는 목적은 우리의 믿음이 건전한지를 확인하고 동시에 우리들의 비젼을 넗히면서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 이해서입니다. 우리들이 하니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모든 성도와 함께’(엡3:18) 갖는 공동 작업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체험이었습니다. 에배소서는 아마 회람 편지로서 한 사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4:16) 성령님에 의해 현재까지 보존된 신약의 에배소서를 가리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에배소서와 골로새서는 상호 보안적이었습니다. 한가지 예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골로새서의 가르침은 에베소서에서 설명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에베소서에서 설명된 교회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강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진리의 한 부분이 맡겨졌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도 다른 또한 부분의 신령한 계시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두 교회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 보다 훨씬 더 종합적인 계시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영감된 성경의 전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본 항목에서 살폈던 원리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다른 교우들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종종 다른 형제들을 사용하여 우리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전적으로 진리를 도맡아 지키는 결정적인 수호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의 성장을 위해서 겸비와 신실함으로 이 결속체의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본 서신은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4:18)라는 바울의 말로 끝맺습니다. 이 축도는 바울의 첫 기도와 소원이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역과 계시의 알파며 오메가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들의 생애에서도 시작과 끝이 되고 영감과 능력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충만하여’졌습니다(2:10) 각주)-십계명은 그 내용이 범세계적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표현된 정확한 양식은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반영해 줍니다(출20:1-17절과 신5:6-21절 비교) 각주)-
그런데 우리들은 본 서신의 말미에 가서 이러한 높은 수준의 강론에서 갑자기 벗어나 개인적인 소식란과 같은 별로 중요치 않은 듯한 인사말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바울의 친구들에게 주는 문안이나 지시 사항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 이런 식으로 끝을 맺어야 할까요 왜 대가들의 명설교처럼 멋지게 끝맺지 않았을까요 바울의 본 서신은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아는 범상한 일들이라서 하나님께 무가치하다고 여기기 쉬운 매우 실제적인 것들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결언들은 그래도 신령한 계시의 일부라고 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지금도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역사 골로새서는 서신의 형식을 빌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서신은 특수한 여건에 처했던 한 사람이 쓴 것인데 다른 서신들에서처럼 개인적인 소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이나 산상보훈이나 혹은 로마서의 대 논쟁처럼 항상 체계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대개 인간의 삶속에 섞여서 인간의 감정들을 형성하고 또 이용하면서 삶의 현장을 통해 드러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관계들을 타고서 전달되며 여기에서처럼 간단한 문안의 말들로써 표현되기도 합니다. 본 서신의 이 마지막 부분은 신학적인 관심이 결여된 하나의 추신이 아닙니다. 이 문안의 인사말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실천적인 측면을 담은 대 진리들 못지 않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신령한 계시란 신화의 영역에 속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문서(각종 인조품 종교들의 어떤 경전들처럼)가 아니라 지리적인 문맥에서 이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와 짜여진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같은 계시의 성격을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시대에 적용시킬 때에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은 물론 영원하고 범세계적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특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현출된 것입니다. 이 점은 교리적인 글에서보다는 서신들의 말미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서신들의 작별 문안들까지도 그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문맥의 영향을 거의 받은 것들입니다
1) 성경의 모든 부분들은 각 시대의 인간들이 가진 필요를 충족시키기 이전에 그 당시의 세계에서 있었던 어떤 특정된 상황을 취급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끝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간단한 문안의 형식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교우들과 교회 사이의 꾸밈없는 자발적 관계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바울,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유스도, 눔바, 아킵보와 같은 여러 교우들 사이와 에베소, 로마,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의 교회들 사이에서 맺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교리적인 지성주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교우들의 연락망이 확산되고 있으며 복음이 참된 것이라는 사실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간들의 신학 논문이나 윤리서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운명과 인간 존재의 전 영역에서 실제로 인간의 피와 살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계시에는 인간의 지성과 마음, 혼과 육신이 다 관련되었으며 크고 작은 역사상의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우리들 존재 전체 속에 파고드는 새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새명은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되 퍽 다른 차원으로 살게 합니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다른 많은 글 중에서 본 서신을 보존하시고 특별히 마지막 문안 부분을 남겨 두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인간들의 모임 본 단원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실제 상황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히시지 않았더라면 함께 모였거나 결코 만나지도 않았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배경이나 언어, 인종이나 사회 계급 혹은 기질이 너무도 달라서 한 몸으로는 도저히 연합될 수 없었던 조건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 서신에서 드러난 사실만 하더라도 교인들의 개별적 상황은 매우 상이하였습니다. 우선 인종적으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아마 데살로니가 사람이었을 것이고,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으며, 유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헬리인들도 있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이었고, 누가는 의사였으며(아마 드로아 출생) 데마는 데살로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과 에바브라와 같은 자유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네시모와 같은 노예들도 끼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민족, 직업, 배경, 삶의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이 한 형제로 연합되어 여행이나 서신, 기도로써 서로의 따뜻한 교우애를 나누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 이름 중에서 마가가 언급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마가는 한때는 소심하고 비겁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남으로써 이 두 사역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행15:37-39) 바울이 다시는 동행시키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마가는 바울의 임종 때까지 그의 곁에서 신실하고 견고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조금도 마가에 대해 유감이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마가의 이름을 회복시켜 주려고 각 교회 앞으로 추천서를 보내어 그를 따뜻이 영접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잘못이나 실수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소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과거의 원수들이 서로 화해를 하고 함께 동역하는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작업입니다. 한편 데마는 곧 바울을 떠날 자였는데(딤후4:10) 과거에 바울을 저버렸던 마가와 함께 같은 동역자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실정입니다. 교회에서는 강점과 약점이 병존하고, 기쁨과 슬픔이 병립하며, 격려와 실망이 교차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범상한 인간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들은 오네시모도 기억해얗비. 그는 도망 중이었던 노예며 도둑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의 주인에게로 되돌려졌던 사람이었습니다(몬1:10-18). 복음은 그들의 상전과 노예의 옛 관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가는 귀한 편지를 가지고 귀가할 때에 골로새에서 이들은 두 형제로서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단체나 써클이나 협회처럼 차단된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 속에는 세리와 바리새인, 상전과 노예, 지식인과 무식인, 문화인과 비문화인들이 공존합니다. 거기에는 중산층이나 근로자층이나 상류층이나 지식층들이 별도로 있어 따로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온갖 종류의 배경을 안은 남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서로 연합되어 새 삶을 풍성히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종들과 인간들의 종 우리들은 본문에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인간들을 전심으로 섬기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실례를 들어 봅시다. 두기고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4:7)이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옥중에 있는 동안 정성껏 그를 보살폈었고 마가 및 유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4:11)자였으며 사도 바울이 시험을 받을 적에 그를 위로했던 자였습니다. 에바브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4:12)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항상 모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고 아울러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의 자매 교회들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주 앞에서 엎드려 탄원하였습니다. 누가는 여러 가지 힘들고 긴장된 여건 속에서 바울의 건강을 돌보았던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전도인이며, 신임을 받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바울이 개척한 사역을 책임지고 맡았습니다. 끝으로 눔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본 단원에 실린 여러 사역자들의 긴 목록에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사역이 성령님에 의해 연합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된 유능한 일꾼들의 전체적인 팀(Team)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완연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큰 인물들의 경우처럼 고립의 고통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의 도움과 위로와 협조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하나의 진공지대를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동역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바울의 삶에는 저항할 수 없는 자력과 같은 위대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면서 동시에 사람들도 힘껏 섬겼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배치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것은 사람들과도 가까운 것입니다. 이러한 동질성은 참되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인간의 필요에 대한 진심의 응답과 상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수직적’관계가 인간과의 ‘수평적’관계로 서로 교차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이 이중적 소명과 이 소명에 대한 사역자의 혼신적(渾身的)봉사는 바울의 다음 증언에서 뚜렷이 부각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4:12,13) 에바브라는 이 교회들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을 안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던 전도사, 목사, 의사(누가) 기타 여러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상실된 이 세상에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투쟁에 가담하였으며 교우들을 위해 고통을 받으면서 함께 교제하고 함께 동정하며 교회를 지켜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결속성 골로새서의 마지막 단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배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무런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인간들에게 직접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일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일으라’(4;16) 그러니까 바울은 두 개의 편지를 써서 하나는 골로새 교회에, 또 하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두 편지는 서로 보완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교인들은 하나님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 필요가 있었고, 역으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인간의 결속체, 곧 교회들과 교인들의 공동체로부터 격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나 신령한 원칙의 덕택으로 교만을 막을 수 있고 연합을 위한 의무를 상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타교회들에게도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교회의 교우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배워야 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겸손과 사랑의 덕을 함양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다른 교우에게 주신 말씀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합니다. 이 결속체의 원리에서 이탈하여 다른 교우들이 하는 말에는 귀를 막는 교회들이나 크리스찬들은 조만간 종파주의나 이단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배우도록 합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우리들의 원칙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로부터 배워야 하는 목적은 우리의 믿음이 건전한지를 확인하고 동시에 우리들의 비젼을 넗히면서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 이해서입니다. 우리들이 하니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모든 성도와 함께’(엡3:18) 갖는 공동 작업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체험이었습니다. 에배소서는 아마 회람 편지로서 한 사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4:16) 성령님에 의해 현재까지 보존된 신약의 에배소서를 가리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에배소서와 골로새서는 상호 보안적이었습니다. 한가지 예로써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골로새서의 가르침은 에베소서에서 설명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에베소서에서 설명된 교회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강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진리의 한 부분이 맡겨졌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도 다른 또한 부분의 신령한 계시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두 교회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 보다 훨씬 더 종합적인 계시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영감된 성경의 전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본 항목에서 살폈던 원리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다른 교우들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종종 다른 형제들을 사용하여 우리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전적으로 진리를 도맡아 지키는 결정적인 수호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의 성장을 위해서 겸비와 신실함으로 이 결속체의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본 서신은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4:18)라는 바울의 말로 끝맺습니다. 이 축도는 바울의 첫 기도와 소원이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역과 계시의 알파며 오메가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들의 생애에서도 시작과 끝이 되고 영감과 능력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충만하여’졌습니다(2:10) 각주)-십계명은 그 내용이 범세계적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표현된 정확한 양식은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반영해 줍니다(출20:1-17절과 신5:6-21절 비교)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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