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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종교 (골로새2:16-23)

본문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전적인 충족성이 지닌 의미를 해설합니다. 그리스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매력을 느낀 혼합주의를 능히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충족성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의 진보를 바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건전하지만 그리스도인을 위험한 길로 오도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성장을 위해서 성경의 계시된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고 깨달은 말씀들을 기쁘게 실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복음과 성격이 다른 길들을 걸어 보려거나 성경이 보장하지 않은 것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은 신앙 생활을 병들게 합니다.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은 하나님의 경배에서 인간의 경배로 점점 흘러가게 되고, 과거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세력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얻어 주신 승리의 자유를 내던지게 되며, 다시 자신을 또 하나의 멍에에 부복케 합니다.(갈4:9,10 ; 5:1 ; 3:3). 바울은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가 당면한 혼합주의는 율법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금욕주의의 세 가지 요소였는데 이것들은 서로 밀착된 관계에 있어 구별을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편의상, 각각 별도 항목으로 다루면서 상이한 측면들을 들추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주의 율법주의는 각 세대마다 교회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어 왔습니다. 이 질병은 특히 성경을 가장 철저히 믿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높은 신앙 수준을 가진 복음주의 기독교를 강타해 왔습니다. 율법주의의 질병은 사람에 따라 증세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성도는 몇 가지 특정된 문제들에 대해서 율법적인 자세를 지니고, 또 다른 성도는 그런 무제들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별도의 현안들을 놓고는 퍽 까다롭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적인 규약이라는 것은 개인, 교회, 시대, 장소에 따라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서로 갈등을 느끼게 되고 비판과 분열을 자극시킵니다. 대개 율법적인 시비는 이차적인 문제들을 놓고 일어나지만 거의 언제나 심각한 균열을 초래합니다.
골로새 교회에서는, 로마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만는(롬14:1-6), 교인들 사이의 분쟁은 어떤 교리 문제가 아니고 음식과 절기에 대한 종교적 관습 때문에 생겼습니다.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 음식과 의식에 관한 규례가 많은 유대주의는 1세기 교회들에게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유대주의의 종교적 규례들은 교회 내부와(로마 및 갈라디아 교회처럼) 혹은 교회들 사이에(안디옥과 예루살렘 교회들) 대립과 반목을 일으켰습니다. 이 규정들은 하나님이 주셨건, 사람들이 첨가시켰건 모두 장차 실현될 일들의 그림자에 불과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속에서 드러날 실체의 계시에 대한 화살표며 준비물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의 다음 말씀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9:9-11).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종교가 미리 예시했었던 모든 것들을 단번에 완전무결하게 성취시켰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은 유대교의 규례들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교의 관습들로 인해 야기된 듯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는 사항들은 유대교나 이교의 풍습에 다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참조. 히8:5 ; 9:23 ; 10:1).
이교에서도 연례 절기들과 초생달 축제들이 금식과 함께 지켜졌습니다. 이러한 이교의 종교 행사들은 유대교의 절기들에 못지 않게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날 실체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준 강론에서 인정했듯이(행17:27), 이방인들의 종교 행사들은 인간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진리들에 대한 갈구였습니다. 이교나 유대교를 막론하고 또는 1세기의 사람들이건 현대인들이건 인간은 누구나 거의 의식적으로(비록 본인이 이를 인정치 않더라도)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의 한 반증입니다. 아뭏든 우리들이 모세의 의식들처럼 신령한 감동으로 주어진 것이건 아니면 인간의 전통으로 왜곡되었건, 혹은 인간의 무지로 비롯된 이교의 관습들이건(롬1:20-23) 그림자는 실체의 등장으로 종식되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가 나타났는데도 그림자를 따르는 것은 뒷걸음질입니다. 만약 어떤 신부 될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님을 오랫 동안 기다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님이 드디어 돌아왔는데도 이 신부될 자가 눈을 돌려 자기 침실의 벽에 걸린 신랑 되실 분의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곧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율법의 그림자들에 너무도 정신이 빠진 나머지 그들의 모든 소망들을 온전히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은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효과적인 봉사 생활을 하려면 행동 수칙들이 있어야 하고 엄격한 단련 속에서 우리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꾸릴 수 있어야 합니다(고전9:24-27)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 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예컨대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은 모든 일에 신시하다는 하나의 표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얽어매는 율법주의로 빠져들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며, 위선적 행위에 붙잡히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물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옳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유일한 참된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율법은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고전9: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 그리스도는 성경의 말씀 속에서 계시되었고 성령님에 의해 우리 구원의 완성자로 인정되신 분입니다. 신비주의 바울은 본 서신 전체에서 복음에다 외부의 불순물을 첨가시켜 복음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려는 골로새 교인들의 유혹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율법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곁들여 일종의 신비주의까지 업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지라’(2:18,19) 본문에서 이름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골로새 교회에는 누군가 교회를 일종의 금욕주의로 인도하려고 한 듯합니다. 이 금욕주의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문제의 당사자가 제안하는 예배란 굉장히 겸손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예배에서는 자기부정과 금욕의 정신이 강조되어 회중들에겔 인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정신은 자연인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 앞에 섰을 때에 갖게 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옛부터 하나님을 빈손으로 만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선행이나 희생제물이나 혹은 중보자들을 앞세워 하나님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중개자의 도움이 없니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거나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흔히 건방지고 오만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어떤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곧바로 나아가는 것은 주님께 대한 존경심과 겸비의 결핍을 드러내는 불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복음의 단순성을 인간이 만든 종교 체제로 도치시키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개인의 느낌이나 이성으로 대치시키는 행위는 아무리 좋은 의도일지라도 겸손이 아니고 교만입니다. 성경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무시하고 환상이나(누구의 것이든)사사로운 계시(실제이건 상상이건)를 중시하면 우리는 수 천년간 시험되고 확인되며 입증된 진리의 굳건한 터전을 떠나서 인간의 지혜와 망상과 기만의 위험한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바깥에는 사적인 종교와 불건전한 스릴과 오류와 종파주의의 늪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들은 교회 밖에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부요함을 온전히 파악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엡3:18 ; 4:11-14).“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1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아마 바울은 이 후자의 아이다어를 염두에 두고서 ‘이것들은 장래에 있을 것의 그림자이고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2:17 표준번역)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옮긴다면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개역)가 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실체(몸)와 그림자 사이의 대조 이상의 의미가 함유되었을지 모릅니다.
아마‘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신비주의를 막는 보호막이라는 암시가 내포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적 성장은 종교적인 규례의 실해에서 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되었을 때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옵니다(2:19). 금욕주의 골로새 교회를 위협했던 종교 체제 내지는 ‘철학’은 교리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이 이단들은 특히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능력들(천사, 이 세상의 초등 학문 혹은 원리)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력들이 실존하든 상상이든, 유용하든, 호전적이든, 또는 유대교에서 온 것이건 이교에서 차용된 것이건, 아무런 사오간이 없습니다. 궁극적인 실체이시며 진리이신 그리고 최상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동시에 비(非)가시적인 존재들을 경외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입니다. 그런 신앙 생활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나 미래에도 성립될 수 없는 모순입니다. 한편 이 종교 체제는 실제적인 면도 있습니다. 고차원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서 제시된 금욕주의는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의 병합에서 오는 논리적인 결과입니다. 금욕주의의 방법은 율법주의에서 온 것이고 그 영감은 신비주의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사상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와 정면으로 모순됩니다.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2:21). 이런 종교적인 금기 사항들은 얼마나 많으며, 이런 미신들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때때로 이같은 금령들의 노예가 됩니다! 본 문맥에서 금해진 것들은 없어질 것들로서 그 자체로서 아무런 중요성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와 전혀 무관합니다(롬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 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중요한 것은 그런 금기 사항들의 사용법인데 어떻게 보면 아예 사용치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이런 금기들은 거룩의 조건들로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2:23) 이런 경건의 규칙들을 준수하는 자들의 영적 위치는 교회에서 대단히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성이 외적으로 드러나도록 다분히 의도적인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 영적 운도으이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인간이 자작(自作)한 인본적인 경배를 추앙하고 인간의 자긍심을 부추기며 인간의 욕망을 달성시키려는 이기심의 추구였습니다. 온갖 종류의 자의적(自意的)인 희생과 극기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보다는 영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몸을 멸시하는 이원론적 종교에서 더 흔한 현상입니다. 인본적이고 이교적인 사상들을 주입시킨 종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 인간의 어떤 업적도, 어떤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고귀하고 아무리 훌륭하며 가장 헌신적인 이타적 행위일지라도 기독교 속에 인간의 공적을 주입하면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욕하는 격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압력이 되므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도는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완벽하며 영원하고 무한한 희생을 멸시하고 인간의 종교를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에다 올려 놓으려는 무엄한 짓입니다. 헌신적인 일에는 물론 개인의 단련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봉사에는 희생과 고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의 열매를 육신의 일들과 혼돈치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육신의 일들은 하나님의 눈에 무익할 뿐 아니라 자연인의 욕망만 채워줄 따름입니다. 복음은 충만한 삶이며 자유롭고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주의의 마침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10:4). 율법은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줌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롬8:1). 그리스도는 신비주의에 대한 처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한 자들은 더이상 다른 출저에서 색다른 모든 것이 충족합니다. 그리스도는 금욕주의 부정입니다. 그의 희생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넘치도록 충분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희생을 첨부시키려는 시도는 십자가의 능력을 도전하는 행위입니다.(히10:14).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기쁨 속에서 충만한 삶을 긍적적인 자세로 살도록 합시다. 이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종(信從)하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 속에서(요15:15) 만족하는 생활입니다. 바울의 전체 메시지와 그의 전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체와 사역에 집중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역에 집중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그리스도는 인간의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며 모든 인본적 종교 체제의 종지부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골로새서 첫 부분이 지닌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모든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영감이십니다. 이것은 본 서신의 3장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의 주제입니다. 각주)-교회는 바울이 예견했던 이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A.D 2세기 동안 아가페의 다이나믹한 능력은 유대교의 경건주의와 헬레니즘의 금욕주의가 내건 형식성과 견제성 때문에 상당히 마비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원래 깊은 내적 회심의 결과로 흔히 생기는 부수적 현상이 이제는 중심 요소가 되었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영에서는 단절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부터 여러 가지의 금욕주의 그룹들이 오래된 절제사상을 혼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나주에는 이 금욕의 원리가 온갖 종유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모든 덕성의 영감과 근원으로 보편화 되었습니다.’(R. Minnerath, Les chretiens dans le monde,Ier etIIe siecles, pp.265ff), ‘절제’(encrateia)는 금욕으로 해석되었으며 은혜의 복음은 부정적인 도덕율로 대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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