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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하신 그리스도 (골2:8-10)

본문

바울은 꽤 긴 서론을 끝내고 이제 문제의 핵심을 취급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고, 골로새 교인들을 권면하며 격려하면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를 암시만 하였습니다. 그는 이 오류의 정체를 아직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대책을 준비해 온 셈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오류를 공격하기 전에 미리 그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거짓된 오류의 가면을 벗겼을 때에는 그 가면의 주인공은 이미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으로 오류를 분별합니다. 방이 어두우면 어떻게 청소가 되겠습니까 커튼을 열든지 불을 켜야만 먼지가 드러나서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영적인 문제를 처리할 때에는 지혜가 더 부족한 듯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악이나 오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을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죄를 단죄하는 것만으로는 죄인이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흑백을 가릴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행하는 자들은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빛을 들어오게 하고 나서 그 다음 오류를 정제합니다. 우선 그는 치료부터 해놓고 그후에 진단을 내립니다. 이상스런 순서이긴 하지만 아주 훌륭한 심리요법입니다! 바울은 서두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위엄과 그리스도인들의 다함이 없는 자원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곧 오류를 적시하고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대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계속 시선을 집중케 함으로써 골로새의 오류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승리가 거두어집니다. 두 개의 종교에 해당되는 두 개의 이념들이 서로 대치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철학으로서 공허하고 기만적이며 열매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로서 성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믿음으로 연합되었으며 하나님의 풍성을 그분과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인간의 철학 골로새 교회의 오류는 철학의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 철학이라는 명칭 때문에 상당히 마음이 끌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철학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원래 철학이란 말은 ‘지혜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오직 하나님만 지혜로우시고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지혜가 없다고 가르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사상은 인간의 부족성과 신령한 계시의 필요성을 느낀데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이라면 구태여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정죄하는 것은 ‘인간의 전통에 의존하는 헛되고 기만적인 철학’(2:8영문 NIV참조)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작한 하나의 종교 체계로서 교묘하고 무익한 추상에 불과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현혹된 이 체계에서는 그리스도의 보좌는 천사의 다른 영계의 한 능력으로 격하되고 그리스도의 기능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있다는 수많은 중개자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체계의 자세한 내용은 어떻든지 그것은‘헛된 속임수’였습니다 . 그것은 모든 지식의 총체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과 비교하면 ‘헛된’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이탈시키면서 말로는 하나님께 접근된다고 가르쳤으니까 ‘속임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계시된 진리가 아닌 ‘사람의 유전(전통)’에 입각한 위험한 철학의 본질입니다. 아마 이 철학은 초자연적 계시라는 구실로 비밀리에 유포되다가 초기 세대 동안에 여러 가지 이단들 속에서 다시 등장했을 것입니다. 골로새와 로마의 소아시아 교회들을 위협했던 이단들에서(참조, 디모데서 및 요한 서신) 우리는 후기 영지주의에서 유행했던 천사들과 영계에 대한 밀의성과 추상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우리들이 성경의 굳건한 기반을 벗어나서 개인적인 계시에 의존하면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모든 오류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 가르침이 인간들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세상의 초등 학문’(2:8)과 관련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 본문의 뜻은 우리들에게 쉽게 이해되지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초신자들을 위한 ‘지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교인들이 초보적인 A B C에 해당되는 것을 놓고 매우 진보된 가르침으로 오해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추천 받은 의식들이나 율법주의나 혹은 금욕주의는 그들의 영적 진척에 아무런 도움이 못되었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장애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얻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완성에 별다른 추가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취시킨 사역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인격과 사역을 결하시키는 셈입니다. 한편 본문의 용어는 골로새 교인들이 분명하게 그 뜻을 알았을, 당시의 종교술어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것은 아마 소아시아에 편만했었던 신화나 점성술과 밀착되었을 둣합니다. 이 경우라면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사람들의 운수를 좌우한다고 믿어진 우주의 기운이나 별들의 영향 또는 그와 유사한 관계에 있는 권능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류의 ‘초등학문’들과 대전(對戰)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쓴 매우 감동적인 갈라디아서의 수신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기 전에 그런 초등 학문에 사로 잡혔던 노예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세력들로부터 풀려난 후에 또 하나의 유사한 멍에에 묶이는 위험에 직면케 되었습니다. 이 멍에는 몇몇 영향력 있는 유대주의 자들이 주창하는 율법적인 종교 체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전선만 다를 뿐이지 싸움은 매일반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앗아가려는 일체의 세력들과 싸워야 했습니다.(갈4:3-10). ‘초등학문’의 원뜻이 무엇이든지, 바울이 강조하는 사항은 그런 세력들이 왕권이건 정권이건 혹은 그 어떤 영향력 있는 능력들이건 모두 그리스도 아래 놓였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력들을 십자가 위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원리(학문)’나 우주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세상 위에 계신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천사들처럼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있는 단순한 하나의 중개인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충만’이십니다. 바울은 이 주제를 다음 본문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이신 그리스도 바울은 이 공허한 철학과 거짓된 영성에 대항해서 예수 그리스도엑 연합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향유하는 하나님의 충만을 내세웁니다. 영원한 진리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수천년 전부터 여러 형태로 알려졌습니다. 구약은 이 진리의 보고입니다. 영감된 구약의 말씀들은 상징적인 행위와 그 대상들과 인생의 여망들 속에서 진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비친 신령한 빛은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이 진리의 빛은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 비로소 밝게 드러났습니다. 물론 베일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둠이 없는 충만한 모습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이 진리의 빛은 만질 수 있는 물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1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 그는 오랫동안 대망해 왔던 ‘임마누엘’곧 사람들 가운데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마1:23) 그 분 안에 온전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실상인즉 그 분 자신이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이 위대한 사실에 근거한 종교입니다. 만일 이 사실이 거짓이라면 세상은 공허한 곳이 되고 믿음은 발판이 없어지며 복음은 한갖 협잡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종결적이고 완전한 계시입니다(히1:2).
그리스도는 과거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을 완결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최후의 완벽하고 유일한 희생재물이 되어 이 세상을 창조주와 영원한 화해시켰습니다(고후5:19). 이 신령한 절대적 계시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노력들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그것들은 지혜와 헛된 몽상들과 무익한 금욕주의와 타락된 인간들의 영화를 추구하느라고 어둠 속을 헤맬 뿐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충만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인간들이 창안해 내는 철학들에 오도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저하시키거나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케 하는 신흥종교들의 체재와 타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계시 이외의 것들에 의존하거나(교회 전통들이나 개인적인 계시 및 사적인 교훈들), 다른 종류의 구원의 수단들에(성례, 자기부정, 율법주의, 금욕주의 혹은 선행들) 쏠리면 탈선케 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2:8).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들의 생활을 함께 영위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자기를 영접하는 자들이 그의 신령한 본성을 나누어 갖도록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밷후1:4) 이 신비스런 연합을 통하여 인간은 드디어 자기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만약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으 모든 충만히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자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됩니다. 우리들의 일체의 필요와 소망과 바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채워집니다. 이 놀라운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전통들이나 어떤 영성 훈련을 통해(배록 겸비의 정신이 깃들었어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계시를 보강시키려는 시도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들이‘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없는 풍요를 알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불만과 불평을 영원히 종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모든 중재적 존재들을 포함해서 모조리 제거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데 왜 하속들 앞에 가서 잘 봐 달라고 애원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본 서신의 핵심에 이르렀습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우리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또 우리들의 삶에서 절실히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신기한 계시나 별다른 체험들을 더이상 찾아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넉넉히 주신 분량을 스스로 체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히 풍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거지처럼 구걸을 다니는 그릇된 신앙 활동으로 하나님과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더 이상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충만이 우리의 삶 속에 흘러 들어오게하고 또 우리 주위로 넘쳐 나가게 해야 합니다. 각주)-2세기 이후의 영지주의(더 정확하게 부른다면 ‘영지적 운동들’)는 바울이 본 서신을 집필하던 때에는 아직 조직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영지주의의 독특한 신화나 교리 및 의식들은 중동에서 옛부터 있어 왔습니다. 특히 이 운동은 씨벨레(Cybele)종파가 시작된 부루기아 지역의 골로새 근방과 유태인들의 엣센파들이 살았던 팔레스틴에서 활개을 쳤습니다.(S. Hutin, 'Les Gnostique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0, pp.82ff)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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