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서 평강까지 (골3:12-15)
본문
바울은 앞 항목에서 모든 형태의 죄를 죽이고 극기와 자기를 비우는 고통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성도의 의무를 우리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가 우리들 앞에 내세운 임무는 마음에 석 내키지 않는 힘겹고 끝없는 투쟁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우리들이 이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도 가르텨 주었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넣어주신 새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항속적인 갱신의 능력으로 사망이 정복되고 빼앗겼던 우리들의 영역과 권위가 회복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엣 자아의 죽음에서 새로운 인격체가 피어 오릅니다. 자기를 비우는 행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수행하시는 성화 작업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서 우리들이 전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권면하십니다. 이제 바울이 우리들에게 가리키는 것은 이 성화의 작업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옛 자아를 벗어버린 후에새 옷을 입는 것에다 비견하였습니다. 죄 이후에 덕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 속에 죄를 심습니다. 이 죄는 모든 개인적인 죄들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생(新生)으로 우리들의 심령속에 사랑을 심습니다. 이 사랑은 새 생명의 뿌리며 원리입니다. 죄는 인간들을 갈라놓고 모든 인간 관계에 독을 뿌렸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차별이 없는 공평한 사회를 이룩하고 그리스도의 평강 속에서 모든 인간 관계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과 인간들의 마음 속에 다시 넣어주신 신령한 원리인 사랑은 죄와 그 속박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옛 자아를 벗어버릴 수 있는 비결은 새 자아를 입는 데 있습니다. ‘갱신은 사랑을 통해서 옵니다. 거듭나는 것은 복음이 외치는 참다운 의미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 사람이 세속적 본성에 속한 것들을 모두 죽일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옛 자아의 죽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만이 전멸전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가장 단순하고 확고하며 참되고 심원한 정로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옛 자아의 심연을 파고들지 못합니다. 다른 어떤 수단도 옛 사람의 깊이를 재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옛 사람을 박멸시킵니다. “사랑은 지치지 않고, 사랑은 일향(一向)하며, 사랑은 파열적입니다. 사랑은 죄를 섬멸시킬 때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뷔네. A Vinet). 바울은 ‘사랑을 입으라’는 의미를 상술하기 전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기꺼이 동참해야 할 결정적인 동기를 지적합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3:12) 모든 특권은 책임을 수반하고, 모든 축복은 의무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신 자들에게는 그만큼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은 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한편 그런 특권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사실상 많은 분량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은혜로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새 옷 이제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새 생명을 드러나게 표현하십시오, 여러분은 구차한 죄의 넝마들을 벗어버리고 빛나는 사랑의 옷을 입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섯 가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덕성들을 열거하고 이것들이 인간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3:12) 이 품성들은 모두 사랑에서 연원되고 사랑은 이것들을 하나로 띠 띄워 온전케 해 줍니다. 그리고 이 덕성들은 화평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긍휼의 옷을 입으라고 성도들에게 권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덕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곤고한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육체적 도덕적 문제들 뒤에 깔려 있는 영적 파멸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 속에는 언제나 깊은 슬픔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고난에 무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리는 축복의 풍성함을 항상 즐거워하였지만 동족 중의 상실된 형제들 때문에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9:2)이 있었습니다.
둘째 자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도모하는 친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으므로 우리도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도 남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정신과 마음의 경향을 가리키는 데 한마디로 남들에 대한 사랑의 돌봄을 뜻합니다. 자비는 남들의 허물을 다 잊습니다. 자비는 타인들의 잘못을 덮어주고 그들의 안녕을 추구합니다.
셋째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실상 겸손이 없는 자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참된 관심을 보여주려면 우리들은 먼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우리들이 받을 수 있는 타인들로부터의 동정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시를 당하여도 견딜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겸허한 견해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저급한 백성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을 베푸셨기 때문에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천해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명예와 평판이 이런 일로 떨어졌다면 우리들의 경우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 온유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긍휼과 자비에 매우 가까운 또 하나의 ‘사랑’의 덕성입니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을 상심시키는 일을 삼가합니다. 냉혹한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참된 사랑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에 감상주의와는 다른 강한 덕성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래참음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아주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별 것이 아닌 것으로 하여금 아주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해 낙담되지 않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복감이 없이 견디면서 아무리 큰 역경 속에서라도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타인의 반대나 배은망덕이나 불쾌한 태도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계속 친절하며 온유케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덕성들은 아량과 용서가 있는 공동체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표현도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원한)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자기의 형제자매들을 있는 그대로, 즉 그들의 약점과 결함을 그대로 두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상대방 형제들이 현재의 모습들보다 휠씬 더 낫기를 바랍니다. 이 자체는 옳은 소원입니다. 그들이 더 사랑을 베풀고, 더 이해심이 있고, 더 온유하며, 더 참고, 더 호의적이고, 더 너그러우며,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시간을 잘 지키며, 더 마음이 넓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형제 중에서 결핏하면 신경을 자극시키고, 비판을 일삼으며, 매정한 말을 하며, 공정치 못한 자세를 가질 떼에 이 모든 것들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들이 완전치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유와 오래참음의 열매인 상호 용납이 없으면 교회가 지탱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용서가 없이도 살지 못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원한)가 있거든피차 용서하되’ 교회의 연합을 보존하기 위해서 혹은 깨어진 화홥을 회복키 위해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이같은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용서가 없으면 존속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진정으로 용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해서 가지셨던 그 많고 큰 원한의 기록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고 다 찢으신 후 영원히 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악의 기록들을 말끔히 지우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풍성하신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뷔네(Vinet)는 이점을 잘 지적해 줍니다. ‘참으로 용서하려면 용서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곧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모범을 좇아서 죄가 많은 곳에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용서하는 동기와 패턴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사랑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4)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진부한 단어는 없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이 아직도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정감일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랑은 지상에서 가장 천박하고 표피적이며 짧고 이기적인 것들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참뜻은 이런것들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이며 정형(定型)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사랑으 정의만 내리지 않습니다. 사실상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위들에게 신령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나타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그러니까 사라은 느낌이 아니고 행위입니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 아니고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내편에서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환언하면 사랑이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어떤 친근감이나 개인적인 매력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싫은 것을 극복하고, 감사를 모르는 자에게도 주어집니다. 인간의 사랑은 흔히 기호나 일시적 감정이나 자기 이익이나 혹은 우연에 지배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랑에는 의지가 지배적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마냥 무기력하고 죄가 많고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들이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과 자시노가 화해시키고 우리 속에 사랑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롬5:6-10). 형제와 자매, 남편과 아내사이의 사랑이 이런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형편없이 실패되고 맙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주기 보다는 무엇을 대신 받기를 바라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십자가로 측정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떼에 십자가에서 출발됩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과 이 세상에 못박힌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을 이기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의해 짜여졌던 옛 사람의 사고방식을 내던졌습니다. 사랑의 지식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십자가를 묵상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피상적인 생활 방식을 벗겨주는 십자가를 몸소 체험할 떼에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배후에 있는 능력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이 있기에 교회 안에서 관대함과 용서가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모든 덕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덕이 나오기 때문입니다ㅏ. 우리들은 이러한 덕성의 한두 개를 꼭 갖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덕성들을 즉시 다 함께 소유하는 셈이 됩니다. 이 덕성들은 사실상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완전한 품성은 어떤 특정된 덕성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덕들이 합쳐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덕성들을 각기 완성시키고 완벽한 조화로 한데 묶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사랑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진 자가 아니며 또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3:1-3). 평강 이러한 사랑의 표현들은 성도의 마음과 교회에 화평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3:15). 악감, 비난, 원한, 불화가 교회내에 있는데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그냥 넘어가거나 쉽게 익숙해져 버리면 기도나 성경 공부나 교제의 기쁨이 죽어 버립니다. 또한 그것들은 영적 생활을 메마르게 하고 영적 진보를 가로 막으며 복음의 증거를 약화시킵니다. 마음과 양심의 평강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희생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건강이 신체에 중요하듯이 평강도 영혼에 매우 긴요합니다. 평강은 영혼에 균형이 잡히고 질서가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충분한 영적 발육을 위한 조건입니다. 이 평강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화해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때에만 옵니다. 그리고 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영혼의 건강을 향유해아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화평이 내립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고전12:26) 우리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건강은 그 구성원 중에서 가장 병약한 성도의 건강 상태에 준합니다. 마치 연결 고리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체인의 가장 약한 부분에 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교우들이나 교회가 우리들에게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오히려 우리 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해 줍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 속에 임하고 자연히 교회 전체에 파급될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본 시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소명을 성취키 위해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에 옮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3:15)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희생하여 누구에게나 자비와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항상 보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가끔씩은 남에게 관대하고 용서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성품들을 늘 드러내면서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사하는’일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남에게 주기가 힘들면 적어도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합십시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입니다. 사랑의 첫발은 자주심과 자고심을 버리고 남들과의 결속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걸음은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이루기 위해 하나의 직물처럼 온전하 연합체로서 함께 짜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는 교회의 단합과 화평을 위해 큰 일을 감당해 줍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3:12) 모든 특권은 책임을 수반하고, 모든 축복은 의무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신 자들에게는 그만큼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은 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한편 그런 특권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사실상 많은 분량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은혜로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새 옷 이제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새 생명을 드러나게 표현하십시오, 여러분은 구차한 죄의 넝마들을 벗어버리고 빛나는 사랑의 옷을 입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섯 가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덕성들을 열거하고 이것들이 인간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3:12) 이 품성들은 모두 사랑에서 연원되고 사랑은 이것들을 하나로 띠 띄워 온전케 해 줍니다. 그리고 이 덕성들은 화평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긍휼의 옷을 입으라고 성도들에게 권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덕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곤고한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육체적 도덕적 문제들 뒤에 깔려 있는 영적 파멸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 속에는 언제나 깊은 슬픔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고난에 무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리는 축복의 풍성함을 항상 즐거워하였지만 동족 중의 상실된 형제들 때문에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9:2)이 있었습니다.
둘째 자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도모하는 친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으므로 우리도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도 남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정신과 마음의 경향을 가리키는 데 한마디로 남들에 대한 사랑의 돌봄을 뜻합니다. 자비는 남들의 허물을 다 잊습니다. 자비는 타인들의 잘못을 덮어주고 그들의 안녕을 추구합니다.
셋째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실상 겸손이 없는 자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참된 관심을 보여주려면 우리들은 먼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우리들이 받을 수 있는 타인들로부터의 동정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시를 당하여도 견딜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겸허한 견해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저급한 백성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을 베푸셨기 때문에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천해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명예와 평판이 이런 일로 떨어졌다면 우리들의 경우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 온유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긍휼과 자비에 매우 가까운 또 하나의 ‘사랑’의 덕성입니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을 상심시키는 일을 삼가합니다. 냉혹한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참된 사랑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에 감상주의와는 다른 강한 덕성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래참음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아주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별 것이 아닌 것으로 하여금 아주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해 낙담되지 않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복감이 없이 견디면서 아무리 큰 역경 속에서라도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타인의 반대나 배은망덕이나 불쾌한 태도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계속 친절하며 온유케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덕성들은 아량과 용서가 있는 공동체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표현도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원한)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자기의 형제자매들을 있는 그대로, 즉 그들의 약점과 결함을 그대로 두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상대방 형제들이 현재의 모습들보다 휠씬 더 낫기를 바랍니다. 이 자체는 옳은 소원입니다. 그들이 더 사랑을 베풀고, 더 이해심이 있고, 더 온유하며, 더 참고, 더 호의적이고, 더 너그러우며,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시간을 잘 지키며, 더 마음이 넓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형제 중에서 결핏하면 신경을 자극시키고, 비판을 일삼으며, 매정한 말을 하며, 공정치 못한 자세를 가질 떼에 이 모든 것들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들이 완전치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유와 오래참음의 열매인 상호 용납이 없으면 교회가 지탱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용서가 없이도 살지 못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원한)가 있거든피차 용서하되’ 교회의 연합을 보존하기 위해서 혹은 깨어진 화홥을 회복키 위해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이같은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용서가 없으면 존속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진정으로 용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해서 가지셨던 그 많고 큰 원한의 기록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고 다 찢으신 후 영원히 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악의 기록들을 말끔히 지우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풍성하신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뷔네(Vinet)는 이점을 잘 지적해 줍니다. ‘참으로 용서하려면 용서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곧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모범을 좇아서 죄가 많은 곳에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용서하는 동기와 패턴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사랑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4)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진부한 단어는 없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이 아직도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정감일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랑은 지상에서 가장 천박하고 표피적이며 짧고 이기적인 것들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참뜻은 이런것들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이며 정형(定型)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사랑으 정의만 내리지 않습니다. 사실상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위들에게 신령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나타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그러니까 사라은 느낌이 아니고 행위입니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 아니고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내편에서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환언하면 사랑이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어떤 친근감이나 개인적인 매력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싫은 것을 극복하고, 감사를 모르는 자에게도 주어집니다. 인간의 사랑은 흔히 기호나 일시적 감정이나 자기 이익이나 혹은 우연에 지배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랑에는 의지가 지배적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마냥 무기력하고 죄가 많고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들이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과 자시노가 화해시키고 우리 속에 사랑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롬5:6-10). 형제와 자매, 남편과 아내사이의 사랑이 이런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형편없이 실패되고 맙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주기 보다는 무엇을 대신 받기를 바라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십자가로 측정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떼에 십자가에서 출발됩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과 이 세상에 못박힌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을 이기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의해 짜여졌던 옛 사람의 사고방식을 내던졌습니다. 사랑의 지식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십자가를 묵상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피상적인 생활 방식을 벗겨주는 십자가를 몸소 체험할 떼에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배후에 있는 능력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이 있기에 교회 안에서 관대함과 용서가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모든 덕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덕이 나오기 때문입니다ㅏ. 우리들은 이러한 덕성의 한두 개를 꼭 갖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덕성들을 즉시 다 함께 소유하는 셈이 됩니다. 이 덕성들은 사실상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완전한 품성은 어떤 특정된 덕성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덕들이 합쳐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덕성들을 각기 완성시키고 완벽한 조화로 한데 묶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사랑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진 자가 아니며 또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3:1-3). 평강 이러한 사랑의 표현들은 성도의 마음과 교회에 화평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3:15). 악감, 비난, 원한, 불화가 교회내에 있는데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그냥 넘어가거나 쉽게 익숙해져 버리면 기도나 성경 공부나 교제의 기쁨이 죽어 버립니다. 또한 그것들은 영적 생활을 메마르게 하고 영적 진보를 가로 막으며 복음의 증거를 약화시킵니다. 마음과 양심의 평강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희생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건강이 신체에 중요하듯이 평강도 영혼에 매우 긴요합니다. 평강은 영혼에 균형이 잡히고 질서가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충분한 영적 발육을 위한 조건입니다. 이 평강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화해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때에만 옵니다. 그리고 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영혼의 건강을 향유해아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화평이 내립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고전12:26) 우리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건강은 그 구성원 중에서 가장 병약한 성도의 건강 상태에 준합니다. 마치 연결 고리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체인의 가장 약한 부분에 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교우들이나 교회가 우리들에게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오히려 우리 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해 줍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 속에 임하고 자연히 교회 전체에 파급될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본 시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소명을 성취키 위해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에 옮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3:15)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희생하여 누구에게나 자비와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항상 보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가끔씩은 남에게 관대하고 용서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성품들을 늘 드러내면서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사하는’일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남에게 주기가 힘들면 적어도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합십시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입니다. 사랑의 첫발은 자주심과 자고심을 버리고 남들과의 결속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걸음은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이루기 위해 하나의 직물처럼 온전하 연합체로서 함께 짜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는 교회의 단합과 화평을 위해 큰 일을 감당해 줍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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