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인생을 향한 희망의 출발 (행1:1-11)
본문
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동안 익숙해 있던 직업을 버리고 자 의든 타의든간에 새로운 직업으로 바꾼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 로 해 왔던 경우에 더 좋은 조건의 새로운 직업과 교체하는 일에 있어서는 망설일 것이 없겠지만은 그 일이 손에 익었고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 웬만큼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경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무형문 화재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물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분야의 전통적인 기술의 소지자로서 자타로부터 인정받는 탁월한 기술자를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지정받은 인간 무 형문화재가 다른 직업을 택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일 뿐만 아니 라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12명의 제자들은 훌륭한 결단의 사람들이었다고 칭찬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나름 대로 자신이 종사하던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베드로의 고기잡 이 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이었다. 예수께서 고기잡이하는 베드로에게 접근하셔서 그를 놀라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까 닭인 것이다. 적어도 갈릴리 만큼은 그의 전문분야였기에 말이다.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서 만큼은 최고라고 생각했던 베드로가 어느날 고기를 단 한마리도 잡지 못한 이해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랬 기에 베드로의 마음은 더욱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경우라면 어떻겠는가 설교하는 목사에게 있 어서 설교를 죽쑤는 일보다 더 괴롭고 송구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의아함과 손상된 자존심을 가눌길 없어 고통스러 워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신 것이다. 이 경우는 접근이 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단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함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그는 결코 여가를 선 용하러 나온 강태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그는 처가 식구까지 부양했던 것같다.
왜냐하면 열병에 걸린 그의 장모를 예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낭패와 심한 좌절감 속에서 우울해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 신 주님은 "고기가 잡혔느냐" 물으셨다.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 했을까는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놀랍게도 그물에 가득했을 뿐만 아니 라 배가 가라앉을 정도라서 옆에 있는 동무를 오라고 해야만 했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현실이었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 실 앞에서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갈릴리의 전문가가 아니었더라면 문제는 다 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어쩌다 재수 좋았군!" 이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의 모든 속성을 샅 샅이 알고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그는 심한 충격 속에서 이 분은 나보다 훨씬 탁월한 분, 아니 그 정도가 아닌 아마도 이분은 "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온 것이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정도로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일반인에게 전도하실 때는 굳이 이 방법을 사용 하지는 않으셨다. 그 이유는 일반인들이 그렇게까지 전문가는 아니었을 것이고 또한 제자의 수를 12명으로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실력은 어떠한가 주님의 저울에 달렸을 때 베드로만 큼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의 실력이 그 정도라고 했을 때 주님이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몇날 몇일을 지새우는 고민과 상담이 없이는 결단코 결정되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다른 제자들의 경우는 그들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들은 주님의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과 빛 과 소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예수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각각 흩어졌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 이 이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들은 다시 뭉쳤다. 그리고 주 님은 4O일만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당부를 하신 것이다. "예 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변했다. 지난날 자신들이 주님을 처음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처럼 변했고 오히 려 그보다도 훨씬 더 강도 높게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토록 다시한번 변하게 한 원인은 무엇 인가 과연 그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변하게 했단 말인가 그들 이 각자의 직업에 탁월한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당신의 생애에 있어서 이 말씀은 놀 라운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놀라게 하고 변 하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의 내용 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이 시간 함게 상고하며 하나님께 영광돌 리기를 원한다.
첫째, 기다리라. 주님은 요 14:15-21과 눅 24:29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떠 나면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가 와서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막상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의 상황은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들을 직접 찾아오셨다. 그리고 주님의 기다리라는 약속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셨다.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또한번 이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고 기다릴 것을 간곡히 당부하신 것이다. 예수 안에서의 풍요로운 인생은 기다림에서부터 시작된다. 1OO세에 아들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그가 만일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만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흉년을 피해 고향을 떠났던 나오미의 가 정은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 미는 "나를 희자라고 하지 말라" 했던 것이다. 현재 자신의 위치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있다. 떠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심령들도 있다. 더 낳은 행복이 있을줄 알고 아브라함의 곁을 떠났던 롯은 자신이 그토록 아까와 했던 모든 재물과 사랑하는 아내를 소금기둥으로 만들고 말았다(설교자 자 신이 개발한 아이디어로 떠나지 말것에 대한 적용을 제시한다).
둘째,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풍요로운 성도의 삶은 성령님의 체험에서 구체화 된다. 우리 모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약속을 기다릴 때 우리 위에 충 만히 임하는 성령님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서두 에 들어서면서 졸지에 화산이 폭팔하는 듯한 오순절의 성령님사건을 만나게 된다. 굉장한 힘이 우리를 위압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한 작은 사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새로 제자를 뽑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유다를 대신해서 사도의 일을 해야할 것이라고 이들 은 결정했던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이들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사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있어본 자라야 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맛디아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뒤 맛디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사람의 이름은 두번 다시 나오 지 않는다. 그야말로 영원한 망각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 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고 하며 담대히 복음을 외치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불과 2년 사이에 이들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한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기준으로 정할 수 없다. 오직 성령님의 지시 에 의해서 그 자격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깨달은 중요한 변화의 사실이다. 요한의 물세례가 단순한 죄사함의 역사였다면, 오순절의 성령님세례는 이들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제자들은 오순절의 성령님경험을 통하여 자기의 선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왜 십자가 위에서 맥없이 죽 어야만 했는가"라는 물음에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던 제자들이 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기다리라는 주님 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들 위에 충만히 임한 성령님은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걸고 복음을 외치는 담대한 전도자들로 인생의 길을 바꾸었던 것이다.
세째, 때와 기한의 문제이다. 풍요로운 성도의 삶은 날짜의 얽매임에서 해방할 때 주어 진다. 근래들어 급격히 말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어느 분인가가 쓴 종말에 대한 서적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내용은 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내용이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이 그 책을 읽으면 공부를 포기한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 말세에 대한 세미나가 서울에 서만도 매주 2-3군데에서 개최되고 있다. 수백명의 목회자가 모인다. 그것은 성도들이 말세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증거이다. 6절의 말씀은 종말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이다. 그러나 주 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아버지의 권한이며 너희의 알바 아니다." 그렇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안에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만일 예수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종말은 언제 오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때와 기한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 그것이 복된 신앙이다(설교자는 여기에서 적절한 적용을 제시할 수 있다). 네째, 증인이 되라. 풍요로운 삶의 네번째 단계는 증인의 삶이다. 내가 믿는 바에 대하여, 나의 학문에 대하여, 나의 소신에 대하여, 나 의 기술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신있게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증인이다. 남에게 소개할 수 있는 진리를 소유한 자는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어떤 사람이 허리가 몹시 아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분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허리가 아프다보니 빨리 걷지 못하고 뒷짐을 지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걸 어가고 있는데 택시가 지나가다가 갑자기 그의 옆에 와서 멈추 더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기사가 차문을 열고 나와서는 "아저씨, 얘기좀 합시다"라는 것이다. 그분은 뜻밖의 일에 왠일인가 하 여 의아해 하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그분께 혹시 허리 아프시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까 그 기사는 걸어가는 것을 보고 알 았다는 것이다. "실은 저도 오랫동안 허리가 아파서 상당히 고 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치료법이 있습니다. 그대 로 했더니 깨끗이 낫더군요. 그걸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가 아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먼저 아침에 자고 일어난 후 뒷짐을 지고 아픈 부위를 밑에 서 위로 백번 이상 쓸어 올리고, 다음에는 발바닥의 한 부분을 보여 주면서 그곳을 삼백번 이상 지압을 해주라고 일러 주고는 다시 차를 몰고 가버렸다. 그분은 기사가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실천했는데 얼마 후에는 실제로 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다. 만일 이 운전기사가 "내가 저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조그만 치료법으로 내가 효과를 봤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저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건방 진 태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자기가 경험한 좋은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진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 않고 복음을 전했다. 내가 확 신하는 주님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다(설교자는 여 기서 이들이 증인된 과정을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즉,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과 성령님충만해진 제자들의 자발적인 모습을 대조시켜야 한다). 결론 풍요로운 제자들의 인생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오순 절의 성령님체험으로 되어졌다. 이들이 성령님을 체험하게 된 직접 적인 원인은 "기다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었다는데 있다. 설 교자는 이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초신자들을 위해 "당신 도 이 시간 마음 문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이 약속의 주님과 더불어 당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풍요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초청한 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처럼 의아함과 손상된 자존심을 가눌길 없어 고통스러 워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신 것이다. 이 경우는 접근이 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단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함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그는 결코 여가를 선 용하러 나온 강태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그는 처가 식구까지 부양했던 것같다.
왜냐하면 열병에 걸린 그의 장모를 예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낭패와 심한 좌절감 속에서 우울해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 신 주님은 "고기가 잡혔느냐" 물으셨다.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 했을까는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놀랍게도 그물에 가득했을 뿐만 아니 라 배가 가라앉을 정도라서 옆에 있는 동무를 오라고 해야만 했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현실이었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 실 앞에서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갈릴리의 전문가가 아니었더라면 문제는 다 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어쩌다 재수 좋았군!" 이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의 모든 속성을 샅 샅이 알고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그는 심한 충격 속에서 이 분은 나보다 훨씬 탁월한 분, 아니 그 정도가 아닌 아마도 이분은 "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온 것이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정도로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일반인에게 전도하실 때는 굳이 이 방법을 사용 하지는 않으셨다. 그 이유는 일반인들이 그렇게까지 전문가는 아니었을 것이고 또한 제자의 수를 12명으로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실력은 어떠한가 주님의 저울에 달렸을 때 베드로만 큼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의 실력이 그 정도라고 했을 때 주님이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몇날 몇일을 지새우는 고민과 상담이 없이는 결단코 결정되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다른 제자들의 경우는 그들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들은 주님의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과 빛 과 소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예수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각각 흩어졌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 이 이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들은 다시 뭉쳤다. 그리고 주 님은 4O일만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당부를 하신 것이다. "예 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변했다. 지난날 자신들이 주님을 처음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처럼 변했고 오히 려 그보다도 훨씬 더 강도 높게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토록 다시한번 변하게 한 원인은 무엇 인가 과연 그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변하게 했단 말인가 그들 이 각자의 직업에 탁월한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당신의 생애에 있어서 이 말씀은 놀 라운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놀라게 하고 변 하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의 내용 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이 시간 함게 상고하며 하나님께 영광돌 리기를 원한다.
첫째, 기다리라. 주님은 요 14:15-21과 눅 24:29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떠 나면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가 와서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막상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의 상황은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들을 직접 찾아오셨다. 그리고 주님의 기다리라는 약속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셨다.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또한번 이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고 기다릴 것을 간곡히 당부하신 것이다. 예수 안에서의 풍요로운 인생은 기다림에서부터 시작된다. 1OO세에 아들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그가 만일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만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흉년을 피해 고향을 떠났던 나오미의 가 정은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 미는 "나를 희자라고 하지 말라" 했던 것이다. 현재 자신의 위치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있다. 떠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심령들도 있다. 더 낳은 행복이 있을줄 알고 아브라함의 곁을 떠났던 롯은 자신이 그토록 아까와 했던 모든 재물과 사랑하는 아내를 소금기둥으로 만들고 말았다(설교자 자 신이 개발한 아이디어로 떠나지 말것에 대한 적용을 제시한다).
둘째,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풍요로운 성도의 삶은 성령님의 체험에서 구체화 된다. 우리 모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약속을 기다릴 때 우리 위에 충 만히 임하는 성령님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서두 에 들어서면서 졸지에 화산이 폭팔하는 듯한 오순절의 성령님사건을 만나게 된다. 굉장한 힘이 우리를 위압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한 작은 사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새로 제자를 뽑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유다를 대신해서 사도의 일을 해야할 것이라고 이들 은 결정했던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이들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사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있어본 자라야 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맛디아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뒤 맛디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사람의 이름은 두번 다시 나오 지 않는다. 그야말로 영원한 망각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 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고 하며 담대히 복음을 외치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불과 2년 사이에 이들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한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기준으로 정할 수 없다. 오직 성령님의 지시 에 의해서 그 자격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깨달은 중요한 변화의 사실이다. 요한의 물세례가 단순한 죄사함의 역사였다면, 오순절의 성령님세례는 이들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제자들은 오순절의 성령님경험을 통하여 자기의 선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왜 십자가 위에서 맥없이 죽 어야만 했는가"라는 물음에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던 제자들이 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기다리라는 주님 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들 위에 충만히 임한 성령님은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걸고 복음을 외치는 담대한 전도자들로 인생의 길을 바꾸었던 것이다.
세째, 때와 기한의 문제이다. 풍요로운 성도의 삶은 날짜의 얽매임에서 해방할 때 주어 진다. 근래들어 급격히 말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어느 분인가가 쓴 종말에 대한 서적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내용은 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내용이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이 그 책을 읽으면 공부를 포기한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 말세에 대한 세미나가 서울에 서만도 매주 2-3군데에서 개최되고 있다. 수백명의 목회자가 모인다. 그것은 성도들이 말세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증거이다. 6절의 말씀은 종말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이다. 그러나 주 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아버지의 권한이며 너희의 알바 아니다." 그렇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안에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만일 예수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종말은 언제 오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때와 기한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 그것이 복된 신앙이다(설교자는 여기에서 적절한 적용을 제시할 수 있다). 네째, 증인이 되라. 풍요로운 삶의 네번째 단계는 증인의 삶이다. 내가 믿는 바에 대하여, 나의 학문에 대하여, 나의 소신에 대하여, 나 의 기술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신있게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증인이다. 남에게 소개할 수 있는 진리를 소유한 자는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어떤 사람이 허리가 몹시 아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분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허리가 아프다보니 빨리 걷지 못하고 뒷짐을 지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걸 어가고 있는데 택시가 지나가다가 갑자기 그의 옆에 와서 멈추 더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기사가 차문을 열고 나와서는 "아저씨, 얘기좀 합시다"라는 것이다. 그분은 뜻밖의 일에 왠일인가 하 여 의아해 하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그분께 혹시 허리 아프시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까 그 기사는 걸어가는 것을 보고 알 았다는 것이다. "실은 저도 오랫동안 허리가 아파서 상당히 고 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치료법이 있습니다. 그대 로 했더니 깨끗이 낫더군요. 그걸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가 아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먼저 아침에 자고 일어난 후 뒷짐을 지고 아픈 부위를 밑에 서 위로 백번 이상 쓸어 올리고, 다음에는 발바닥의 한 부분을 보여 주면서 그곳을 삼백번 이상 지압을 해주라고 일러 주고는 다시 차를 몰고 가버렸다. 그분은 기사가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실천했는데 얼마 후에는 실제로 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다. 만일 이 운전기사가 "내가 저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조그만 치료법으로 내가 효과를 봤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저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건방 진 태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자기가 경험한 좋은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진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 않고 복음을 전했다. 내가 확 신하는 주님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다(설교자는 여 기서 이들이 증인된 과정을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즉,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과 성령님충만해진 제자들의 자발적인 모습을 대조시켜야 한다). 결론 풍요로운 제자들의 인생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오순 절의 성령님체험으로 되어졌다. 이들이 성령님을 체험하게 된 직접 적인 원인은 "기다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었다는데 있다. 설 교자는 이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초신자들을 위해 "당신 도 이 시간 마음 문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이 약속의 주님과 더불어 당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풍요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초청한 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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