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강림과 역사 (행2:1-4)
본문
오늘은 성령님강림 주일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호흡이고 입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들실 때 흙으로 모형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에게 입기운, 즉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때 불어넣은 생기, 곧 입기운이 바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또 성령님을 하나님의 숨결이라고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내면의 소리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앉아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묵상할 때 깊은 기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숨결을 듣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 또는 영적 교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이 영적 교통에 의해 하나님과 깊이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성령님이 강림하였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승천하신 후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기도한 지 열흘 만에 성령님이 그곳에 임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의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2절을 보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다락방에 임하는 소리가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이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성령님이 바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마치 성령님이 임하시는 모습이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님이 바람과 같은 소리를 내었겠습니까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람은 소리와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님도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이 마치 바람처럼 임함으로써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청각과 감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힘을 동반합니다. 허리케인과 같은 태풍을 보십시오. 얼마나 위력 있는 힘을 동반하고 있습니까 성령님도 역시 힘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3천 명씩 회개시키는 힘, 마른 뼈들로 하여금 군대를 이루게 하는 힘, 검이 많던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초월하게 하는 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죄인이 탄식하는 기도를 하는 힘 등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바람이 한 번 불고 지나간 곳에는 이와 같은 변화의 역사와 생명을 이루게 하는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령님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 때문입니다.
둘째로 불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각에 호소한 것입니다. “불의 혀”라는 말은 불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성령님이 다락방에 임하는데 마치 불꽃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때로 성령님이 임하실 때는 바람처럼 청각적으로 임하시기도 하고 뜨거운 불처럼 시각적으로 임하시기도 합니다. 불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체질을 바꾸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락방은 온통 불의 도가니처럼 뜨거웠습니다. 체질과 마음과 심장이 모두 불로 달구어져서 뜨거워졌습니다. 나중에는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녹아져서 120명의 개체가 하나가 되고,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한 방언을 사용했으며 인종의 장벽도 무너져 내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방언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구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날 다락방에서는 모두가 방언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님이 불같이 임한 결과 사람들은 모두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뜨겁게 임하시기도 합니다.
셋째로 성령님이 임한 결과입니다. 성령님이 바람과 같이, 불과 같이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몇 가지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변화로써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는 용기입니다. 14절을 보면 “베드로가 소리 높여 가로되”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락문을 잠그고 두려워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 내일이 불안해서 근심스럽게 앉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그들이 성령님을 받은 이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옹졸하고 소심하던 제자들이 모두 이렇게 용감한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통한 변화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수줍던 사람이 전도자로 변합니다. 죽을까 봐 두려워 떨던 사람이 죽음을 초월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근심으로 가득차 있던 마음속에도 소망으로 채워집니다. 물질이 아까워서 인색하던 사람도 풍성한 마음으로 변하여 베푸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생각도 바뀌고 인생관도 바뀌고 발걸음도 바뀌고 생활도 바뀝니다. 이것이 변화요, 중생이요, 새삶입니다. 이것 모두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성령님의 힘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나를 주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에베소서 2:18을 보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성령님의 진정한 역사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나와 앉도록 인도하신 것도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날마다 신앙을 유지하게 하시고 바쁜 생활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일들은 모두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성경을 읽도록 하시고 찬송이 내 마음속에서 나오게 하시는 것도 모두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들 곁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부드러움입니다. 에스겔서 11:19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내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에서 굳어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선한 마음이 악해지기도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해지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별다른 과정도 필요없습니다. 저절로 한 순간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어진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악한 마음이 선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굉장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부드러운 상태인가를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세상의 온갖 미움과 오해와 질투와 시기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성령님은 그 마음으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마음은 곧바로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부드러운 상태입니까 그러면 축복입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온갖 시험들과 유혹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공비에게 두 아들을 희생당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목격하는 순간 손이 떨리고 온몸이 돌같이 굳어지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숫구쳐 올라오더라고 합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한 감정의 발로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 정도의 차원밖에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아주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때 손목사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지만 그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난 후에 그의 마음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측은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도 솟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때 “아, 지금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살인범을 용서의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죽은 아들 대신에 양자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은 욕정을 지닌 사람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전에는 굳어 있던 마음이었는데지금은 부드러워졌고 포근한 마음으로살아가고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고 은혜의 마음입니다.
네 번째는 눈물입니다. 성령님은 메마르고 삭막한 마음속에 온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말라 버린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나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그 눈물은 감사의 눈물입니다. 스가랴서 12:10을 보면 “내가 영을 주리니 그들이 울리라”고 했습니다. 그 눈물은 바로 회개의 눈물이고 감사의 눈물이고 기쁨의 눈물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실 때 주어지는 축복의 눈물입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호언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이 병들었거나 메마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병들었거나 마음속에 온갖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그 눈에서 그리고 그 가슴에서 눈물이 없어집니다. 사람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메말랐으면 눈물이 말라 버리겠습니까 성령님은 때로 우리에게 뜨거운 눈물을 주십니다. 정말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주시고, 감사의 눈물을 주시고, 기쁨의 눈물을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눈물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다섯 번째는 깨달음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을 보면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깨달아 알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성령님이 주시는 또 다른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천국을 본 일이 없고 지옥에 가 본 일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분명히 믿고 확신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본 일이 없고 예수님을 본 일도 없고 더구나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일도 없지만 지금 우리들이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주님을 믿고 확신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모두 성령님께서 이같이 감추인 비밀을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깨닫게 하심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모두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섯 번째는 욕망을 제어하는 힘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을 보면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순간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실수하고 또 실수하고 연일 실수투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래도 이 정도로 말씀 안에서 살고 절제하며 살고 그런대로 이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모두 내 속에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유혹을 극복하고 실족할 조건들을 모두 극복ㄷ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성령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엄청나게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의지하고 위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평화입니다. 아마 성령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이 평화일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령님이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뭐니 뭐니 해도 평화라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그 상황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의지나 감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가 좋은 것입니다. 톱에리디 목사가 들판을 지나 심방을 갔다 오다가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그는 들판에 있는 어느 바위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는 동안 그곳이 그렇게 안온하고 평안하여 마음에 포근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부드러운 영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느껴지는 그 안온함을 글로 써 놓은 것이 오늘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송 188장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입니다. 평화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마음은 내가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관심의 변화입니다. 성령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변하게 하고 가치관을 변하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하시고, 자세를 바꾸게 하시고, 태도를 바꾸어 살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때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관심과 취미와 생각과 습관까지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집니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관심은 어떻게 해서 변화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왜 이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같은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에 이 세상이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신앙생활입니다.
첫째로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2절을 보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다락방에 임하는 소리가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이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성령님이 바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마치 성령님이 임하시는 모습이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님이 바람과 같은 소리를 내었겠습니까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람은 소리와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님도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이 마치 바람처럼 임함으로써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청각과 감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힘을 동반합니다. 허리케인과 같은 태풍을 보십시오. 얼마나 위력 있는 힘을 동반하고 있습니까 성령님도 역시 힘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3천 명씩 회개시키는 힘, 마른 뼈들로 하여금 군대를 이루게 하는 힘, 검이 많던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초월하게 하는 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죄인이 탄식하는 기도를 하는 힘 등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바람이 한 번 불고 지나간 곳에는 이와 같은 변화의 역사와 생명을 이루게 하는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령님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 때문입니다.
둘째로 불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각에 호소한 것입니다. “불의 혀”라는 말은 불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성령님이 다락방에 임하는데 마치 불꽃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때로 성령님이 임하실 때는 바람처럼 청각적으로 임하시기도 하고 뜨거운 불처럼 시각적으로 임하시기도 합니다. 불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체질을 바꾸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락방은 온통 불의 도가니처럼 뜨거웠습니다. 체질과 마음과 심장이 모두 불로 달구어져서 뜨거워졌습니다. 나중에는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녹아져서 120명의 개체가 하나가 되고,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한 방언을 사용했으며 인종의 장벽도 무너져 내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방언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구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날 다락방에서는 모두가 방언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님이 불같이 임한 결과 사람들은 모두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뜨겁게 임하시기도 합니다.
셋째로 성령님이 임한 결과입니다. 성령님이 바람과 같이, 불과 같이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몇 가지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변화로써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는 용기입니다. 14절을 보면 “베드로가 소리 높여 가로되”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락문을 잠그고 두려워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 내일이 불안해서 근심스럽게 앉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그들이 성령님을 받은 이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옹졸하고 소심하던 제자들이 모두 이렇게 용감한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통한 변화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수줍던 사람이 전도자로 변합니다. 죽을까 봐 두려워 떨던 사람이 죽음을 초월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근심으로 가득차 있던 마음속에도 소망으로 채워집니다. 물질이 아까워서 인색하던 사람도 풍성한 마음으로 변하여 베푸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생각도 바뀌고 인생관도 바뀌고 발걸음도 바뀌고 생활도 바뀝니다. 이것이 변화요, 중생이요, 새삶입니다. 이것 모두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성령님의 힘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나를 주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에베소서 2:18을 보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성령님의 진정한 역사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나와 앉도록 인도하신 것도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날마다 신앙을 유지하게 하시고 바쁜 생활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일들은 모두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성경을 읽도록 하시고 찬송이 내 마음속에서 나오게 하시는 것도 모두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들 곁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부드러움입니다. 에스겔서 11:19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내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에서 굳어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선한 마음이 악해지기도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해지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별다른 과정도 필요없습니다. 저절로 한 순간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어진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악한 마음이 선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굉장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부드러운 상태인가를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세상의 온갖 미움과 오해와 질투와 시기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성령님은 그 마음으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마음은 곧바로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부드러운 상태입니까 그러면 축복입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온갖 시험들과 유혹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공비에게 두 아들을 희생당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목격하는 순간 손이 떨리고 온몸이 돌같이 굳어지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숫구쳐 올라오더라고 합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한 감정의 발로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 정도의 차원밖에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아주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때 손목사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지만 그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난 후에 그의 마음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측은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도 솟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때 “아, 지금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살인범을 용서의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죽은 아들 대신에 양자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은 욕정을 지닌 사람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전에는 굳어 있던 마음이었는데지금은 부드러워졌고 포근한 마음으로살아가고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고 은혜의 마음입니다.
네 번째는 눈물입니다. 성령님은 메마르고 삭막한 마음속에 온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말라 버린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나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그 눈물은 감사의 눈물입니다. 스가랴서 12:10을 보면 “내가 영을 주리니 그들이 울리라”고 했습니다. 그 눈물은 바로 회개의 눈물이고 감사의 눈물이고 기쁨의 눈물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실 때 주어지는 축복의 눈물입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호언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이 병들었거나 메마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병들었거나 마음속에 온갖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그 눈에서 그리고 그 가슴에서 눈물이 없어집니다. 사람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메말랐으면 눈물이 말라 버리겠습니까 성령님은 때로 우리에게 뜨거운 눈물을 주십니다. 정말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주시고, 감사의 눈물을 주시고, 기쁨의 눈물을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눈물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다섯 번째는 깨달음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을 보면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깨달아 알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성령님이 주시는 또 다른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천국을 본 일이 없고 지옥에 가 본 일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분명히 믿고 확신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본 일이 없고 예수님을 본 일도 없고 더구나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일도 없지만 지금 우리들이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주님을 믿고 확신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모두 성령님께서 이같이 감추인 비밀을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깨닫게 하심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모두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섯 번째는 욕망을 제어하는 힘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을 보면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순간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실수하고 또 실수하고 연일 실수투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래도 이 정도로 말씀 안에서 살고 절제하며 살고 그런대로 이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모두 내 속에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유혹을 극복하고 실족할 조건들을 모두 극복ㄷ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성령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엄청나게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의지하고 위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평화입니다. 아마 성령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이 평화일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령님이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뭐니 뭐니 해도 평화라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그 상황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의지나 감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가 좋은 것입니다. 톱에리디 목사가 들판을 지나 심방을 갔다 오다가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그는 들판에 있는 어느 바위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는 동안 그곳이 그렇게 안온하고 평안하여 마음에 포근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부드러운 영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느껴지는 그 안온함을 글로 써 놓은 것이 오늘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송 188장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입니다. 평화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마음은 내가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관심의 변화입니다. 성령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변하게 하고 가치관을 변하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하시고, 자세를 바꾸게 하시고, 태도를 바꾸어 살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때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관심과 취미와 생각과 습관까지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집니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관심은 어떻게 해서 변화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왜 이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같은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에 이 세상이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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