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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신앙 (행18: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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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4일만 지나면 금년도 역사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매년 이마 때가 되면 아쉽고 후회스럽고 허전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마 지금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금년은 참 어수선한 가운데 보내게 되었습니다. 경제위기시대로 인해서 많은 실직자가 생겨나서 경제의 어려움으로 온 나라가 힘을 잃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북한 땅에 소떼가 가고 자동차가 가고 하더니, 금강산 관광 유람선을 띄워 한맺힌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햇볕 정책으로 남북한의 교류하 화해무드로 가는 것 같으면서도 판문점 김훈 중위사망사건이 터지고 서해안에 무장공비가 나타나 국민을 또한번 실망시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구조조정의 여파로 경제빅딜을 가져오고, 무엇보다도 정권이 교체되어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만큼 새로운 위정자들이 잘 해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난 시간은 언제나 시끄러운 일들만 기억하게 됩니다. 또 지난 시간은 생각하면 할수록 미련도 많고 아쉬움도 많고 후회도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연연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가 어떤 신앙인으로서 바른 삶을 살아갈 것인가. 또한 어떤 신앙인의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아볼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당시 당시 학문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아주 정열적이었고 변론에 능하고 구약성경에 정통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폴로 광장에 많은 민중을 모아 놓고 화려하게 웅변을 해서 박수를 받았던 사람으로도 알려졌습니다. 그런 그가 에베소의 어느 회당에서 예수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 마침 에베소에 와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집사 부부가 그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신앙이 아주 좋은 집사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다니면서 사역하던 열정적인 전도자들입니다. 이 두 부부가 그 가르침을 들을 때 어딘지 모르게 아볼로의 가르침에는 공허함이 들어 있었습니다. 웅변적인 달변으로 가르치기는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 가르침 속에는 창백함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신앙은 지극히 겨념적이었고 깊은 맛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이 아볼로라는 사람은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는데 신앙에 구체적인 체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지극히 개념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뿐 그 이상의 것에는 문외한입니다. 십자가의 도나 성령님의 체험이나 복음이 주는 능력이나 힘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깊이나 힘이나 능력이 있겠습니까 마치 산도 가 보지 않고 산을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산을 가 보지도 않은 사람이 산을 말할 때는 말은 잘 할지라도 어딘지 모르게 그 말에는 구체성이 없고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의 그러한 결점을 알았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예수에 관한 도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이 무엇인지, 심자가의 도와 부활과 성령님 체험을 말해 주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가르쳐 주었고 복음의 더 깊은 면을 소개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론적인 신앙은 예수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어딘지 모르게 창백하고 메마르고 깊은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키면 두렵고 선뜻 나설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를 말하고 소개할 만한 용기도 없습니다. 이것이 이론적인 신앙이 가지는 결점이고 단점이자 무력함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지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맡아서 하든지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구체적으로 행동하면 생활에서 주어지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소속이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람이 태도가 분명해야 생활에도 확신이 주어지고 사람들에게도 분명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보면 생각이나 의사, 태도가 불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놓기를 꺼립니다. 그래서 오늘을 “익명성의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자신의 내용이 공개되기를 꺼립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습과 삶의 내용을 공개하기가 싫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 놓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 놓으면 행동에 제약을 받고 부담도 되고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하는 염려도 있고 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무슨 힘으로 용감하게 나서서 어떤 역할을 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왜 이런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신앙내용이 빈약해서 그렇습니다.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처럼 애매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신앙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소속감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매사에 확신이 있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이 구체적이 되면 이런 축복이 주어집니다. 또 하나는 갈등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구체적이 되면 먼저 갈등이 없어집니다. 사람이 갈등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이 어느 때인가 하면 할까 말까 하고 마음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마음이 어정쩡할 때 그때에 갈등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목회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새벽예배입니다. 이 새벽기도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기도가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결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매일 나가는 사람은 태도가 분명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새벽이 되어 잠을 깨도 나갈 것인가 잠을 더 잘 것인가 하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주 결석하는 사람이 갈등이 많습니다. 새벽 시간에 잠을 깨도 오늘 나갈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누워서 한동안 갈등을 겪습니다. 그래서 아예 매일 나가는 것으로 작정을 하면 그런 갈등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생활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갈등이 많은 법입니다. 학교에 자주 빠지는 학생은 아침만 되면 갈등을 겪습니다. 매일 학교에 가는 학생은 갈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생활 태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사 자신감이 생기고 갈등이 없어지고 생활에 활력이 주어지고 삶의 내용이 분명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새로워져서 자세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새해에는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삶의 내용도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또 신앙이 이렇게 구체적이 되면 신앙의 “깊은 맛을 느끼게”됩니다. 신앙의 묘미는 그 자체 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신앙이 형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생활하면서 그 신앙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면 그 신앙에서 재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바빠서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아갈 때 “나는 신앙인으로서 만사를 다 접어 두고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 얼마나 만족스런 모습입니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입니다. 여기서 기쁨이 나오고 즐거움이 나오고 감사함이 나오며 일종의 성별 의식까지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보다도 예배를 통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내가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기쁨입니까 거기에 신앙의 깊음이 있고 은혜가 있고 신앙이 주는 참 행복의 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부가 매일같이 바닷가에서만 맴돌면 무슨 고기다운 고기를 잡고 어부로서의 보람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어부는 파도가 거칠어도 깊은 바다로 나아가 고기를 잡아야 큰 고기를 잡을 수 있고 그래서 만선의 기쁨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어야 어부로서 보람도 기쁨도 누릴 수가 잇는 것입니다. 금은 금광 깊숙이 파고 들어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주는 바다 깊숙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생수는 땅속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금이 야산에서 나오며 진주가 개천에서 나오며 생수가 아무 데서나 흘러 나오겠습니까 신앙인은 신앙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야 그곳에서 맛을 느낄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깊이가 없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저축하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오늘날 음식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모두 인스턴트 식품들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그런 일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냥 만들어 놓은 음식을 그날 그날 사다가 먹습니다. 그러니 그 음식에 무슨 깊은 맛이 있겠습니까 요새 아이들을 보면 약기는 무척 약은데 어쩐지 깊은 맛이 없습니다. 그것도 시대 탓일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자연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동물 소리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강아지는 어떻게 우는지 아니”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멍멍멍” 그럽니다. 강아지는 그렇게 웁니다. 우는 것이 아니고 짖습니다. “그러면 호랑이는 어떻게 우는지 아니”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두 “으르렁” 그럽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오리는 어떻게 우는지 아지“ 그러니까 이이들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여러분, 오리는 어떻게 웁니까 한참 있다가 한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오리 뚝“ 그것이 오리의 움음입니다. 오늘 아이들은 자연을 모릅니다. 자연의 생태계나 깊이를 모릅니다. 자연과의 만남이 없고 놀이가 없고 TV를 통해서 보고 듣는 것이 전부라서 이런 얕은 감각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시는 무척 약은데 정서적으로 깊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가 아이들이 귀엽기는 한데 아이다운 순진함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보다 깊은 곳에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주의 가르침을 내 생활 속에 깊이 접목시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우리는 신앙이 주는 깊은 맛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주는 기쁨이고 행복함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기쁨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이 구체적이 되면 무엇보다도 하나의 중심이 생깁니다. 신앙이 체험적인 신앙이 되면 무엇보다 그 신앙의 가치관이 강하게 세워집니다. 생활에서 우선 순위가 구축이 됩니다. 신앙의 절대적인 가치관이 세워지게 됩니다. 나의 삶에서 최우선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선행되어야 그 신앙이 중심이 생기고 빛깔이 생기고 모양이 만들어 지며 내용이 구축되는 것입니다.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이 2차대전의 아주 중요한 시점에 전세계에 전할 연설을 하기 위해서 방송국으로 가느라고 택시를 탔습니다. 방속국으로 가자고 하니까 택시 운전사가 하는 말이 “1시간 후에 처칠이 연설을 하는데 집에 가서 들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갈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처칠 자신이 참 기쁘더랍니다. 그래서 택시 요금에다 1파운드를 더 줄테니 가지고 하니까 이 운전사가 한참을 망설입니다. 돈을 벌 것이냐 연설을 들을 것이냐 그것이 고민이었습니다. 한참 생각을 하더니 하는 말이 “좋습니다. 타십시오. 처칠이 밥먹여 줍니까”하고는 달리더랍니다. 지폐 한 장에 처칠에 대한 기대나 존경이나 연설을 들어야 하겠다는 지금까지의 철학이 모두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지폐 한 장이 아니라 몇 장을 준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마음이 중심입니다. 이런 정신을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선 순위를 결정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에게 헌신하기 위해서,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당신에게 예배드리기 위해서 오늘 무엇인가를 희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 중심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른 가치관이고 신앙 중심입니다. 사람이 가난과 배고픔과 절대 빈곤과 싸우면서도 내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끝까지 맞서서 싸웁니다. 그 신앙이 얼마나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중심이고 철학이고 신앙의 가치관입니다. 사람이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의 형상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 그런 자세가 신앙인의 삶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기쁨이 나오고 행복이 주어지고 만족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너무나 감격해서 핍박도 고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 해도 그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참 기쁨입니다. 다 빼앗겼을지라도 감사하고, 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기쁨이 있고, 매를 맏을지라도 행복한 마음, 이것이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먼저 중심 있는 신앙으로 발전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주는 깊은 맛과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새해에는 이 같은 신앙으로 축복을 받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지 오웰이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공산주의란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 미국이 북한에 저렇게 놀아나는 것 아닙니까 체험하지 않고는 공산주의가 지니고 있는 숨겨진 그 뒷모습을 깊이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니체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피로 쓴 글이라야 인생을 흐느끼게 할 수 있다.” 미사여구로 꾸며 놓은 글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입으로, 말만으로 간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은 호소력 있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사여구로 화려하게 아볼로가 웅변하듯이 예수를 전했지만 그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확신이 없고 구체적인 신앙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아굴라 부부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가 구체적으로 예수를 새롭게 만나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바라기는 새해에는 우리들의 신앙이 아주 구체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었으면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는 모든 것을 접어 주고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으로, 지폐 한 장의 유혹이 올 때는 그 유혹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으로, 말로만 듣던 성령님의 강한 사로잡힘이 바로 나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 믿음으로 성숙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한 신앙이 바로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질 때만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내게 행동하는 은혜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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