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시대를 사는 지혜 (행1:6-14)
본문
근래 들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왕따 현상'입니다.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들이 한데 모여 사는 곳곳마다 에 역설적으로 이 '왕따 현상'이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왕따 현상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닌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 가기 시작한 이래 계속되어온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런 따돌 림 현상이 주로 신체적, 정서적으로 취약점을 갖는 자를 대상으로 부분적으로 일어났었으나 요즘에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 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직장, 사회 곳곳에 이 왕따 현상 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있고, 동료들의 차가운 눈길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사표를 쓰는 직장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너무도 깊어 2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다가 다시 일터를 찾아와 자기를 괴롭힌 동료들을 살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왕따는 '무시하고, 따돌리는 것'입니다. '왕따'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 면 한자 접두어 '왕'과 따돌림의 준말인 '따'가 결합한 말로 글자 그대로 해석 하면 '심하게 따돌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 왕따 현상이 만연하게 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어간다는 증거입니다. 왕따 현상은 병든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정의에 어긋나고 인간의 존 엄성을 부정하는 병적 현상이 바로 왕따 현상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반기독교적 사조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언제나 '저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 신 형제'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고, 재산 이 얼마이고, 배움이 어디까지이든지 간에 그만큼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기적인 세태,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그릇된 풍조를 반영하는 이 왕따 현상에는 그런 신앙적 점검이 전혀 없습니다. 동료, 그것도 약자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결코 왕따를 만들어내는 무리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왕따 당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다수에 속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시1편 기자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를 복수로 표시하고 의인은 단 수로 표시합니다. 진리와 정의라는 잣대를 무시하고 다수에 속하기만 하면 그는 언제나 왕따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수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왕따 만들기'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전횡이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율법이라는 획일화된 틀 안에서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의 틀인 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러기에 그 사회에서 왕따가 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왕따는 창녀, 세리 그리고 각종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정권의 힘을 빌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용서 못할 왕따였습니다. 그래서 거지도 세리의 집에서 모르고 구걸을 했다가 세리의 집인줄 알면 얻은 것은 다시 그 집안으로 던져버리고 갔습니다. 불치병 또한 율법을 범한 죄의 대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자들을 성밖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저들뿐이 아 니라 유대사회는 왕따가 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왕따가 되는 사회였 습니다. 그런 사회에 예수께서 오셔서 스스로 왕따가 되셨고 그 시대의 왕따들 을 찾아 저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즉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말을 지금말 로 표현하면 '왕따들의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이 왕따가 무서운 까닭이 무엇입니까 왕따가 무서운 것은 한 인간을 외로움의 끝자리로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 고통의 뿌리입니다. 날로 늘어가는 자살, 알콜중독, 약물중독, 그리고 스트레스로 말 미암는 각종 신경성 질환이 바로 이 외로움으로 말미암는 증상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언제나 외로움이라는 질병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역시 어린이, 청소년,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모두 이 외로움이라는 질병에 감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고 그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에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정말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그 외로움을 친구관계로, 또는 사회 적 관계로 희석시키며 살아왔는데 그들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은 정말 죽음을 뜻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왕따 현상이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그치거나 줄어들지는 않을 것 이라는 전망입니다. 21세기는 더 외로움이 짙어지는 시대요 왕따 현상이 기승 을 부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왕따 의 타겟이 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아니 정말 진리와 의를 좇아 살려 한다면 벌써 지금 여기서부터 작고 약하게나마 왕따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고독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고독 합니다.
그런데 이 고독이란 것이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긍정적 고독'이 있 고 '부정적 고독'이 있습니다. 긍정적 고독이 깊어지면 득도를 하게 되고, 부정 적 고독이 깊어지면 자살하거나 아니면 사고를 저지르게 됩니다. 전자를 '독거' 라고 하고 후자를 '외로움'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olitude와 Loneliness로 구 분짓습니다. 이 두 가지의 고독 중 어떤 고독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은 완 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저의 청년시절이었던 70년대를 풍미했던 '고래 사냥'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최인호 원작 소설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한 '바보들의 행진'의 삽입곡이기도 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제 너무도 시대어가 되었습니다.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 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현대 인간의 진한 외로움을 노래한 가사입니다. 현대인에게 술과 춤은 외로움을 떨치는 제 1의 도구들입니다.
그런데 그 술과 춤으로 아무리 외로움을 달래보아도 가슴에는 슬픔뿐이고 외로움뿐이더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주인공 병태는 자기의 꿈의 상징인 작은 고래 한 마리를 잡으러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바다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고래가 산다는 동해바다에 자기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LONEL
INESS, 외로 움의 종말입니다. 그 70년대나, 2000년을 코앞에 둔 이 90년대나 인간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 이 없습니다. 여전히 외로움에 떨고 삽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삼고 삼 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더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 그리스도인에게 왕따는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대가, 세상이 철저히 왕따시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이 시대로부터 왕따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7:14절에도 보면 주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여 왕따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왕따 중의 왕따'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 역시 그 시대의 왕따 그룹이었습니다. 요20:19절에 보면 '저들은 주님이 십자가 에 못박혀 죽자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안으로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다' 고 했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 들을 찾아오시자 마자 거듭해서 '평강있으라', '평강있으라' 말씀하셨겠습니까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얼마동안 이 왕따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40일을 함께 하자 저들은 모처럼 용기를 내서 자기들의 희망을 다시 표명합니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가 이때니이까.' 그러자 주님은 '그건 너희 알 바 아니요, 너희는 다른 데 관심을 갖고 살라'시 며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럼으로서 이제 다시 제자들은 왕따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이 왕따 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는 가를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저들은 재림을 약속하시며 승천하신 주님을 떠나보 낸 후 언젠가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던 그 다락방으로 되돌아옵니다. 저들 은 다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을 것입니다. 잠시 물러갔던 두려움과 외로움 이 다시 저들을 엄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저들이 과연 어떻게 그 왕 따 의식을 떨쳐버렸습니까 감람원에서 돌아온 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됨의 시도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열 한 제자가 다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 라 다니며 수종들던 여제자들, 거기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형제들까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기를 시작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저들에게는 이런 변화, 다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같 이하여 기도에 힘쓰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방이 막힌 방에서 저들은 하늘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이 왕따 의식을 극복하 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스승이 떠나간 처지에서 저들은 두려웠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서 그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바꾸었고 그 부정적 고독인 '외로움'을 긍정적 고독 인 '독거'로 바꾸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저들 생에 가장 결정적인 삶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저들이 무엇을 기도했을까 여전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을까, 부자되기를, 건강하기를, 유명해지기를 기도했을까. 저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바로 성령님을 구했습니다. 성령님이 자신들의 마음 에 가득 차오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성령님 충만을 경험합니다. 성령님 충만이란 바로 '내면의 구조조정'입니다. 내 생각, 내 고정관념, 내 관 심을 다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관심으로 채워넣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에 공허하고 허탈한 '외로움/loneliness'의 자리가 무언가로 충만히 채워지는 '독거/solitude'의 자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성령님 충만함을 경험한 저들은 예전의 저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에 떨고 움추려있는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담대하게 유대인들 앞에 나아가 기 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지난 달에 유성에서 열린 전국 노회 인권위원장 모임에 참석해서 15년의 감옥 살이 끝에 출소한 대도 조세형 씨를 만났습니다. 강사로 초빙된 그와 아침식사 를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었는데 '그의 발언 요지는 감옥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갇혀있던 곳은 보통 감옥이 아니고 혼자 쓰는 독방이었습니다. 사방이 꽉 막혔습니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열리는 것은 때가 되면 식사를 들이밀어주는 배식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사면이 꽉 막힌 방에서 아주 소중한 것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15년 동안 사각의 벽 속에 갇혀 그 안에서 책을 읽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깥세상에서 세월을 몽땅 탕진해 버 린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보다 그의 15년이 헛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감옥의 벽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주먹으로 아무리 내리쳐도 말 한 마 디 들어주지 않는 세상의 막막함 그 자체였겠지만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이 누구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 고해의 성역이었노라고, 그 속에서 학대받고 고 통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났노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열려있는 사람은 감옥 속에서도 무언가를 얻는다는 진리를 그는 우리에게 가 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도리어 복이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또한 사람이 국내외적으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바 로 시인 박노해입니다. 오늘 '야곱의 우물'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만은 그는 감옥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실 저도 시를 좋아해서 이 런 저런 시집을 적지않게 구입합니다만은 박노해 시집은 '머리띠를 묶으며'라는 한 권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노동의 새벽'도 서점에서 한참을 들여다본 적도 있습니다만은 너무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과격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아 그냥 놓곤 했 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감옥에서 7년 동안 있으면서 쓴 글들을 모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보고나서는 박노해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어느새 외부의 적을 향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투쟁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친 영성의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그의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뿌리 여섯'이라는 글에서 그는 뿌리 다섯을 '영성의 진보'라고 이름 붙이고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진보입니다. 아무리 나무가 크게 성장하고 꽃이 화려해도 잘 익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쓰러 지면 그 한 생이 허망하듯 우리 역시 영적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 살아온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합니다. 언제든 죽음이 오면 '고맙습니다. 저 잘 놀다 갑니다' 웃으며 떠날 수 있게 영혼이 아주 잘 익어가는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이 세상 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강하고 돈 많고 지식있는 사람도 삶과 죽음의 진상을 확 연히 깨쳐 영적 진보를 이룬 사람 앞에서는 참으로 작고 덧없는 자기 진상을 비 춰보게 됩니다. 영성이 깊어가는 사람만이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의연히 주체를 이루어 흔들림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장군은 전쟁의 승 리까지를 목숨 바쳐 생각하고, 정치가는 전쟁 이후 선거까지를 목숨 바쳐 생각 하지만, 영성가는 자기가 죽은 이후까지를 목숨 바쳐 생각합니다. 삶 너머까지 를 내다보는 크나큰 허무를 품은 사람만이 늘 죽음을 예비하고 자기 삶의 안쪽 에서도 싸워가며 자기를 더욱 가치있게 바치고 나누고 보살펴 나갑니다. 꼭 누 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핵심만을 기쁘게 살아나가기에 자기를 위함이 곧 모 두를 위함이 됩니다. 영성이 진보하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크고 사회적으로 성장해도 그것은 속이 텅 빈 거품이고 덧없는 욕심의 몸부림일 뿐입니다. 날마 다 자기를 지켜보고 자기 안의 죽음과 인사하며 소중한 삶을 끔찍스러이 여기십 시오. 참선이건, 기도이건, 숨 공부건, 종교행사건, 또는 일기를 쓰면서, 서예 를 쓰면서, 여행을 하면서, 무엇이든 자신을 성찰하고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을 생활화하십시오.' 저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루이제 린저가 '생의 한 가운데'라는 들에서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삶이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사각의 벽이다.'
인생은 사각의 벽인데 그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각의 벽에서 조세형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고 박노해 역시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카톨릭 신자인 박노해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감옥 속에서 새벽기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방이 막힌 방의 지붕을 뜯 어 하늘로 길을 내었더니 하늘로부터 놀라운 것들이 쏟아 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 다락방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 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바로 거기서 저들은 왕따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도리어 많은 사람 앞에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을 올라가다가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하는 것을 보 고 이렇게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은과 금이 저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왕따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세상이 혈안이 되어 찾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주면 왕따당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게 없으 니 자연히 왕따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없는 것으로 인해 주눅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아닌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새로운 것을 그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휩쓸려 살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 것만을 움켜쥐고 나누고 하 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줄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남들이 다 한다고 따라 하는 꼭두각시형 인간, 카멜레온형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중심이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왕따를 초월해서 삽니다. 그에겐 내적 평안 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충만해져서 외로움이 아닌 독거를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남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내면을 한 번 주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남을 향한 왕따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누군가를 적대시하고 원망하고 마땅치 않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 제일의 원인은 바로 성령님충만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님을 소멸해 가고 있는 것은 기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없으면 외로워지고, 외로워지면 피폐해지고 피 폐해지면 남을 적대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 내면의 법칙입니다. 반대로 기도하면 충만해지고 충만해지면 넉넉해지고 넉넉해지면 남을 환대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적대감이 넘칩니까, 환대감이 넘칩니까 왕따 시대를 사는 지혜가 이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습니다. 저들처럼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의 삶은 환경과 관계없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너를 환대하고 품게됩니다. 이게 바로 왕따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를 연구한 학자가 '간디를 간디되게 한 것은 그의 물레질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간디는 어느 날에는 죽음과 질병이 만연 한 도시에서 가난에 찌든 사람들 가운데 서서 저들을 어루만지고 희망의 말을 건네며 인자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왕궁과 정부 청사에 들어 가 그 시대의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과 치밀한 협상을 벌입니다. 사람들은 '어 떻게 해서 간디가 그 두 극단 사이를 왕래하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러한 정서적, 영적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궁금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답이 바로 물레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레는 항상 그의 삶의 중심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공적 활동을 마치고 집 에 돌아오면 인도인들의 풍습대로 마루 바닥에 앉아 양모로 그의 옷을 만들기 위한 실을 잣는 단순한 노동인 이 물레질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 을 고르고 자기 삶의 무게중심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왜 기도가 없었 겠습니까 바로 그 영성의 자리가 그에게 그러한 내면의 질서감각과 지혜와 판 단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밤하늘의 천체를 선명히 보려면 모든 방해광선을 제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야하듯이 그렇게 모든 잡다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여행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넘어서는 성령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고 그 권능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왕따 시대를 지혜롭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제자들처럼 마가의 다락방 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혀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게되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왕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하나님께 왕따당할 것을 더 두 려워하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미움과 반목과 따돌림이 난무하는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늘을 호흡하며 다른 방식 의 삶을 살아가기를 저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의 주님, 저희로 합당한 주님의 자녀들로 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함으로 주님과 교통케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보시기에 아름다운 은혜의 삶을 누 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공허의 사람들이 아닌 충만의 사람들이 되어 이땅의 소외되고 따돌림당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저희에게 더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런데 이기적인 세태,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그릇된 풍조를 반영하는 이 왕따 현상에는 그런 신앙적 점검이 전혀 없습니다. 동료, 그것도 약자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결코 왕따를 만들어내는 무리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왕따 당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다수에 속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시1편 기자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를 복수로 표시하고 의인은 단 수로 표시합니다. 진리와 정의라는 잣대를 무시하고 다수에 속하기만 하면 그는 언제나 왕따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수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왕따 만들기'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전횡이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율법이라는 획일화된 틀 안에서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의 틀인 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을 의미했고 그러기에 그 사회에서 왕따가 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왕따는 창녀, 세리 그리고 각종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정권의 힘을 빌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용서 못할 왕따였습니다. 그래서 거지도 세리의 집에서 모르고 구걸을 했다가 세리의 집인줄 알면 얻은 것은 다시 그 집안으로 던져버리고 갔습니다. 불치병 또한 율법을 범한 죄의 대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자들을 성밖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저들뿐이 아 니라 유대사회는 왕따가 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왕따가 되는 사회였 습니다. 그런 사회에 예수께서 오셔서 스스로 왕따가 되셨고 그 시대의 왕따들 을 찾아 저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즉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말을 지금말 로 표현하면 '왕따들의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이 왕따가 무서운 까닭이 무엇입니까 왕따가 무서운 것은 한 인간을 외로움의 끝자리로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 고통의 뿌리입니다. 날로 늘어가는 자살, 알콜중독, 약물중독, 그리고 스트레스로 말 미암는 각종 신경성 질환이 바로 이 외로움으로 말미암는 증상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언제나 외로움이라는 질병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역시 어린이, 청소년,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모두 이 외로움이라는 질병에 감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고 그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에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정말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그 외로움을 친구관계로, 또는 사회 적 관계로 희석시키며 살아왔는데 그들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은 정말 죽음을 뜻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왕따 현상이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그치거나 줄어들지는 않을 것 이라는 전망입니다. 21세기는 더 외로움이 짙어지는 시대요 왕따 현상이 기승 을 부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왕따 의 타겟이 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아니 정말 진리와 의를 좇아 살려 한다면 벌써 지금 여기서부터 작고 약하게나마 왕따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고독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고독 합니다.
그런데 이 고독이란 것이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긍정적 고독'이 있 고 '부정적 고독'이 있습니다. 긍정적 고독이 깊어지면 득도를 하게 되고, 부정 적 고독이 깊어지면 자살하거나 아니면 사고를 저지르게 됩니다. 전자를 '독거' 라고 하고 후자를 '외로움'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olitude와 Loneliness로 구 분짓습니다. 이 두 가지의 고독 중 어떤 고독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은 완 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저의 청년시절이었던 70년대를 풍미했던 '고래 사냥'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최인호 원작 소설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한 '바보들의 행진'의 삽입곡이기도 했던 그 노래 가사는 이제 너무도 시대어가 되었습니다.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 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현대 인간의 진한 외로움을 노래한 가사입니다. 현대인에게 술과 춤은 외로움을 떨치는 제 1의 도구들입니다.
그런데 그 술과 춤으로 아무리 외로움을 달래보아도 가슴에는 슬픔뿐이고 외로움뿐이더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주인공 병태는 자기의 꿈의 상징인 작은 고래 한 마리를 잡으러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바다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고래가 산다는 동해바다에 자기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LONEL
INESS, 외로 움의 종말입니다. 그 70년대나, 2000년을 코앞에 둔 이 90년대나 인간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 이 없습니다. 여전히 외로움에 떨고 삽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삼고 삼 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더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 그리스도인에게 왕따는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대가, 세상이 철저히 왕따시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이 시대로부터 왕따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7:14절에도 보면 주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여 왕따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왕따 중의 왕따'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 역시 그 시대의 왕따 그룹이었습니다. 요20:19절에 보면 '저들은 주님이 십자가 에 못박혀 죽자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안으로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다' 고 했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 들을 찾아오시자 마자 거듭해서 '평강있으라', '평강있으라' 말씀하셨겠습니까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얼마동안 이 왕따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40일을 함께 하자 저들은 모처럼 용기를 내서 자기들의 희망을 다시 표명합니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가 이때니이까.' 그러자 주님은 '그건 너희 알 바 아니요, 너희는 다른 데 관심을 갖고 살라'시 며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럼으로서 이제 다시 제자들은 왕따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이 왕따 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는 가를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저들은 재림을 약속하시며 승천하신 주님을 떠나보 낸 후 언젠가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던 그 다락방으로 되돌아옵니다. 저들 은 다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을 것입니다. 잠시 물러갔던 두려움과 외로움 이 다시 저들을 엄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저들이 과연 어떻게 그 왕 따 의식을 떨쳐버렸습니까 감람원에서 돌아온 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됨의 시도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열 한 제자가 다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 라 다니며 수종들던 여제자들, 거기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형제들까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기를 시작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저들에게는 이런 변화, 다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같 이하여 기도에 힘쓰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방이 막힌 방에서 저들은 하늘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이 왕따 의식을 극복하 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스승이 떠나간 처지에서 저들은 두려웠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서 그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바꾸었고 그 부정적 고독인 '외로움'을 긍정적 고독 인 '독거'로 바꾸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저들 생에 가장 결정적인 삶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저들이 무엇을 기도했을까 여전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을까, 부자되기를, 건강하기를, 유명해지기를 기도했을까. 저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바로 성령님을 구했습니다. 성령님이 자신들의 마음 에 가득 차오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성령님 충만을 경험합니다. 성령님 충만이란 바로 '내면의 구조조정'입니다. 내 생각, 내 고정관념, 내 관 심을 다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관심으로 채워넣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에 공허하고 허탈한 '외로움/loneliness'의 자리가 무언가로 충만히 채워지는 '독거/solitude'의 자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성령님 충만함을 경험한 저들은 예전의 저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에 떨고 움추려있는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담대하게 유대인들 앞에 나아가 기 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지난 달에 유성에서 열린 전국 노회 인권위원장 모임에 참석해서 15년의 감옥 살이 끝에 출소한 대도 조세형 씨를 만났습니다. 강사로 초빙된 그와 아침식사 를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었는데 '그의 발언 요지는 감옥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갇혀있던 곳은 보통 감옥이 아니고 혼자 쓰는 독방이었습니다. 사방이 꽉 막혔습니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열리는 것은 때가 되면 식사를 들이밀어주는 배식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사면이 꽉 막힌 방에서 아주 소중한 것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15년 동안 사각의 벽 속에 갇혀 그 안에서 책을 읽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깥세상에서 세월을 몽땅 탕진해 버 린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보다 그의 15년이 헛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감옥의 벽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주먹으로 아무리 내리쳐도 말 한 마 디 들어주지 않는 세상의 막막함 그 자체였겠지만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이 누구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 고해의 성역이었노라고, 그 속에서 학대받고 고 통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났노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열려있는 사람은 감옥 속에서도 무언가를 얻는다는 진리를 그는 우리에게 가 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도리어 복이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또한 사람이 국내외적으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바 로 시인 박노해입니다. 오늘 '야곱의 우물'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만은 그는 감옥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실 저도 시를 좋아해서 이 런 저런 시집을 적지않게 구입합니다만은 박노해 시집은 '머리띠를 묶으며'라는 한 권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노동의 새벽'도 서점에서 한참을 들여다본 적도 있습니다만은 너무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과격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아 그냥 놓곤 했 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감옥에서 7년 동안 있으면서 쓴 글들을 모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보고나서는 박노해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어느새 외부의 적을 향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투쟁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친 영성의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그의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뿌리 여섯'이라는 글에서 그는 뿌리 다섯을 '영성의 진보'라고 이름 붙이고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진보입니다. 아무리 나무가 크게 성장하고 꽃이 화려해도 잘 익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쓰러 지면 그 한 생이 허망하듯 우리 역시 영적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 살아온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합니다. 언제든 죽음이 오면 '고맙습니다. 저 잘 놀다 갑니다' 웃으며 떠날 수 있게 영혼이 아주 잘 익어가는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이 세상 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강하고 돈 많고 지식있는 사람도 삶과 죽음의 진상을 확 연히 깨쳐 영적 진보를 이룬 사람 앞에서는 참으로 작고 덧없는 자기 진상을 비 춰보게 됩니다. 영성이 깊어가는 사람만이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의연히 주체를 이루어 흔들림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장군은 전쟁의 승 리까지를 목숨 바쳐 생각하고, 정치가는 전쟁 이후 선거까지를 목숨 바쳐 생각 하지만, 영성가는 자기가 죽은 이후까지를 목숨 바쳐 생각합니다. 삶 너머까지 를 내다보는 크나큰 허무를 품은 사람만이 늘 죽음을 예비하고 자기 삶의 안쪽 에서도 싸워가며 자기를 더욱 가치있게 바치고 나누고 보살펴 나갑니다. 꼭 누 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핵심만을 기쁘게 살아나가기에 자기를 위함이 곧 모 두를 위함이 됩니다. 영성이 진보하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크고 사회적으로 성장해도 그것은 속이 텅 빈 거품이고 덧없는 욕심의 몸부림일 뿐입니다. 날마 다 자기를 지켜보고 자기 안의 죽음과 인사하며 소중한 삶을 끔찍스러이 여기십 시오. 참선이건, 기도이건, 숨 공부건, 종교행사건, 또는 일기를 쓰면서, 서예 를 쓰면서, 여행을 하면서, 무엇이든 자신을 성찰하고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을 생활화하십시오.' 저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루이제 린저가 '생의 한 가운데'라는 들에서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삶이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사각의 벽이다.'
인생은 사각의 벽인데 그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각의 벽에서 조세형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고 박노해 역시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카톨릭 신자인 박노해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감옥 속에서 새벽기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방이 막힌 방의 지붕을 뜯 어 하늘로 길을 내었더니 하늘로부터 놀라운 것들이 쏟아 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 다락방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 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바로 거기서 저들은 왕따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도리어 많은 사람 앞에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을 올라가다가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하는 것을 보 고 이렇게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은과 금이 저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왕따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세상이 혈안이 되어 찾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주면 왕따당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게 없으 니 자연히 왕따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없는 것으로 인해 주눅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아닌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새로운 것을 그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휩쓸려 살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 것만을 움켜쥐고 나누고 하 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줄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남들이 다 한다고 따라 하는 꼭두각시형 인간, 카멜레온형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중심이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왕따를 초월해서 삽니다. 그에겐 내적 평안 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충만해져서 외로움이 아닌 독거를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남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내면을 한 번 주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남을 향한 왕따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누군가를 적대시하고 원망하고 마땅치 않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 제일의 원인은 바로 성령님충만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님을 소멸해 가고 있는 것은 기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없으면 외로워지고, 외로워지면 피폐해지고 피 폐해지면 남을 적대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 내면의 법칙입니다. 반대로 기도하면 충만해지고 충만해지면 넉넉해지고 넉넉해지면 남을 환대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적대감이 넘칩니까, 환대감이 넘칩니까 왕따 시대를 사는 지혜가 이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습니다. 저들처럼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의 삶은 환경과 관계없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너를 환대하고 품게됩니다. 이게 바로 왕따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를 연구한 학자가 '간디를 간디되게 한 것은 그의 물레질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간디는 어느 날에는 죽음과 질병이 만연 한 도시에서 가난에 찌든 사람들 가운데 서서 저들을 어루만지고 희망의 말을 건네며 인자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왕궁과 정부 청사에 들어 가 그 시대의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과 치밀한 협상을 벌입니다. 사람들은 '어 떻게 해서 간디가 그 두 극단 사이를 왕래하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러한 정서적, 영적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궁금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답이 바로 물레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레는 항상 그의 삶의 중심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공적 활동을 마치고 집 에 돌아오면 인도인들의 풍습대로 마루 바닥에 앉아 양모로 그의 옷을 만들기 위한 실을 잣는 단순한 노동인 이 물레질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 을 고르고 자기 삶의 무게중심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왜 기도가 없었 겠습니까 바로 그 영성의 자리가 그에게 그러한 내면의 질서감각과 지혜와 판 단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밤하늘의 천체를 선명히 보려면 모든 방해광선을 제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야하듯이 그렇게 모든 잡다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여행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넘어서는 성령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고 그 권능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왕따 시대를 지혜롭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제자들처럼 마가의 다락방 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혀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게되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왕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하나님께 왕따당할 것을 더 두 려워하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미움과 반목과 따돌림이 난무하는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늘을 호흡하며 다른 방식 의 삶을 살아가기를 저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의 주님, 저희로 합당한 주님의 자녀들로 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함으로 주님과 교통케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보시기에 아름다운 은혜의 삶을 누 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공허의 사람들이 아닌 충만의 사람들이 되어 이땅의 소외되고 따돌림당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저희에게 더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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