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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행14:1-18)

본문

찰스 L 알랜 목사는 아내와 함께 뉴 멕시코 지역의 황량한 곳으로 차를 몰 고 한 참을 달렸습니다. 점심 때가 지났습니다. 사막 길의 한 복판에 와서야 돈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차 속에 떨어졌나하고 길가에 세운 차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지갑은 없었습니다. 가방을 뒤져보아도 없습니다. 심지어 전 날 입었던 옷의 호주머니를 뒤져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 멍한 모 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내는 입을 열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마디 하는 겁니다. "돈이 없어졌다면 없어진 거예요. 그렇다고 이 사막 속에서 이렇게 하루종일 서 있을 건가요 아니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계속 할 건가요" 물론 그들은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나중에 알렌 목사는 어려운 일이 부딪쳐 실망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이 뜨거운 태양 아래 한탄하며 마냥 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사막을 벗어나 인생의 여정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겁니다. 한마디 말도 그 사람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The Power of Optimism'을 쓴 알랜 로이 맥기니스(Alan Loy McGinnis)목사는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 불행하다! 걱정이 있다! 기분이 좋지않다!고 반복해 서 말하거나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입 으로 기분이 좋지않다거나 걱정이 있다고 말해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후회! 이 말은 성경에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도 이 단어 를 지워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다가오는 많은 고난들 앞에서 후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영원한 소망 을 가진 자들처럼 멋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손에 들려진 하나님 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 말씀에 기록된 기 적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자들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은 그 복음의 내용을 증거해야 합니다(행14:7). 바울과 바나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 든지 그곳으로 간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 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부요한 자에게나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배운 사람에게와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 별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젊은이와 노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사람이나 비종 교적인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와 믿지않는 자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본문 7절에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고전 1:21에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자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 았습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의 입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하여 죽어셨다는 것만 증거했습니다(고전2: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 것을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자랑합니다. 지위를 자랑합니다. 미모를 자랑합니다. 자신이 쌓아올린 학문 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자신을 나타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그만 높이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증거한 구체적인 복음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은 허황된 이 야기로 들려질 수 있었습니다.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죽어가는 인 류의 희망이었고, 생명을 살리는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독생자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소식은 한이없는 그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증거한 복음은 육신의 몸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는 자는 멸망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단순하나 엄청난 소식이었습니다. 사람이 똑똑한 것 같지만 알고보면 굉장히 어리석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을 믿습니다. 사람이 만든 그런 것들이 신이라고 믿고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만나지 못했고 또 이해되지 않으니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발상인지 모릅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신앙의 대상 즉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활용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신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죄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단순한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증거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 하여 어떻게 고난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흉 칙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수취로운 이야기 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이며 이런 일을 통하지 않고는 사죄의 은혜를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죄없이 다른 죄있는 자를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가 살 길을 얻었습니다. 그가 고난 당 하심으로 죄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꼐서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에 대하여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증거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심에 대하여 선포하였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는 두 사이를 화해시키는 화해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잘못했고 또 그 일방이 너무 추하여 도무지 그 관계를 좁힐 수 없는 사이에서는 더욱 힘 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보자는 양쪽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중보자는 누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 중에 누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인이 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중 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인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씻 겨졌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 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고후5:18-21의 말씀처럼 이 놀라운 사실 즉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이 소식을 만민에게 증거하는 화목의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구원얻은 하나님이 자녀라면 이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께서 이루 신 이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이 복음의 사실을 증 거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복음을 증거할 때 고난도 닥칩니다(행14:2, 5, 19, 11-13).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반드시 두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그 말씀을 받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부류입니다. 행13:48에도 "이방인들이 듣고 기 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 습니다. 본문 4절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전 파될 때 아멘으로 쉽게 받아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행13:50에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 내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이 다른 지역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와 그 근방의 도시에서도 마 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행14:22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는 고난이 닥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5절에 보세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간신히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난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행14:19 에 보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지 우리는 구 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아들 데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 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바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찢겨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정없는 돌들은 바울의 눈에도 날 아와 맞습니다. 그의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을 겁니다. 그러다가 바울의 두 다 리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를 본 핍박자들 은 계속하여 돌 팔매질을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을 때에야 돌던 지기를 멈추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미친 개처럼, 아닙니다. 죽은 개도 그렇게 잔인하게 처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죽은 바울은 개 보다 못하게 끌려 성 밖으로 내쳐졌습니다. 우리는 쉽게 매맞는 것이나 굶는 것을 고난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매맞는 것만 고난이 아닙니다. 11-13절에 보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제사할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 주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날뛰다가 실패합니다. 그 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결과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서서히 다가옵니다. 그러나 본인은 모릅니다.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전도자는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이지 자신에게 없음을 날마다 날마다 깨닫고 고백해 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할 때 나타나는 핍박은 그 때 그 장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곳에서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증거할 때 기적도 일어납니다(행14:3, 8-10). 성도는 핍박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핍박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기적을 소 멸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우리가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때 복음에 담겨져 있는 기적의 역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할 때 기적을 주께서 나타내어 주십니다. 본문 3절 을 보세요. 기록하기를 "두 사도가 오래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8절 이하에서는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부터 걸어보지 못한 장애 자를 일으킨 기적이 나타납니다. 복음에는 희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소유한 자는 사자같이 담대하여집니다(잠28:
1). 진리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요8:3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어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용기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 속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을 찌르기도 하시 고 깨닫기도 하십니다. 눅 5:1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때 베드로는 밝은 한 낮에도 고 기를 잡은 것이 많아 자신의 배 뿐만 아니라 친구의 배도 가득하게 차우는 기 적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을 의지할 때 체워지는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는 잉크를 가방에 넣어다녀야 했습니다. 때로는 그 잉크 병이 쏱아져 가방을 버리기도 때로는 책도 물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모나미 볼펜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얼마나 유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잉크도 잘 흘러 나오는 것이 참으로 긴요했습니다. 하여튼 모나미 볼펜 한 자루만 있어면 수업 준비는 형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고민은 그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는 숫자 가 적혀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의 볼펜을 보아도 153이예요. 오랜 세월이 흘러서 살펴 보아도 153입니다. 요즈음 도 보시면 153이라는 숫자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는 그 회사의 사장님이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요21장에 나타나는 내용인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갈릴리에서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멸 날이 지나도 주님은 나 타나지 않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물고기를 잡으려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다른 제자들도 따라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뭍에서 외치는 소리가 잡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대답은 '잡은 것이 없다'였습니다. 그 때에 주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하는 자가 누구였는지 몰랐지만 하도 실망되었던 때라 무심 결에 그대로 했습니다. 그랬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엄청난 고기가 그 물에 들어 왔습니다. 손 끝에 느껴지는 묵직한 것은 전율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에 한 제자가 예수님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 잡은 고기의 그물을 끌 어다가 헤아려 보니 153마리였습니다. 그러니까 153이라는 숫자는 불순종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숫자, 기념의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나미 볼펜을 만들면서 153이라는 숫자를 넣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면서 만들었고 결과는 문구류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아마 많은 돈도 벌었을 겁니다.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마음에 평안이 넘칩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생각하여 보세요. 평안하여 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면 내가 가진 복음을 담대히 증 거하세요. 어떤 핍박도 두려워 하지말고 힘있게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증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은 어떤 댓가를 바라서가 아닙니다. 돈 이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감사하고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고후 4:6에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전의 우리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도 없고 내일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속에 비췬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나타낼 책임을 느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살았던 시대는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의 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악한 선지자들이 득세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엘리야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선포하느냐에 관심이 있 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자신이 이러한 때 능력을 나타 내어 지위를 얻거나 인기를 누리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한 마음은 어 떻게 하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느냐는 것이었 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멜 산 위에서 백성들과 이방 선지자들 앞에서 기도하기 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 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 서"라고 소원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비는 엘리야의 소원은 "주 여호와는 하나님 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간 구하였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이유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여 가 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한 순간의 세력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비록 땅 위에서 고난받아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믿음은 우리를 힘있게 합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이 목적대로 됩니다. 우리의 시대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 답게 당당하 고도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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