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감옥에서 로마감옥 까지 (행16:19-34)
본문
빌립보서 4:1-15 어떤 잘 믿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니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듣게되었읍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 한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고기를 손에 마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고기를 물고 달아납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 기만 하고 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 가 묻기를 무엇이 감사한 일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할아버 지 하는 말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의 입맛 은 그냥 있네"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입맛이 없으면 별로 감사한 일이 못됩니다. 청교도들은 꼭 문이나 벽에 이렇게 써 놓는 데요. "thing and thank"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였습니다. 바울이 귀신들려 괴로워 하는 여자 노예를 한 사람 고쳤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여자 노예는 용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면 딱 들어 맞는 거예요. 그래서 그 노예의 주인은 떼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귀신을 해제해 버리자 점을 칠 수 없었고 돈을 못 벌게 된 주인 이 빌립보의 사람들을 선동해서 로마 관청에 소요죄로 고소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투옥되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그냥 감옥에 가둔 것이 아니라 매를 많이 친 후에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절) 로마의 집정관 부루트스의 두 아들이 왕정 복고죄로 끌려 나와 채찍을 맞는 장면이 로마인 이야기 1권에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이 잔혹한 광경을 똑 바로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부르트스 만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로마의 매질은 혹독한 것입니다. 가죽끈에 쇠를 넣기도 하고 매 듭을 짓기도 하고 뼈조각을 넣기도 합니다. 살이 헤지고 피가 튀는 무시 무시한 형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그 날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신음 소리 가 아닙니다. 불평과 원망이 아닙니다. 한숨과 탄식이 아닙니다. 찬송입니다. 너무 너무 큰 믿음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했지요.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감사는 이런 것이구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이런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 했어요. 그러니 죽는 소리 대신에 찬송을 해야 되겠어요. 바울과 실라는 온 몸이 찢어지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이고 신음 소리가 절러 나오는 상황에서 신음 소리를 방치하지 않았어요. 찬송을 했어 요. 옥문이 터졌어요. 기적은 죽는 소리 끝에 나오는 게 아니라 찬송에서 나오는 겁니다. 죽는 소리 대신에 찬송을!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한 때 그런 초인적인 믿음을 가 진 게 아니예요. 바울은 늘 그랬어요. 보세요. 생애 말기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똑 같았어요. 로마 감옥 안 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감사함으로 아뢰라"(6절). 바울은 서신의 시작을 언제나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비슷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 스무살에 근육무력증에 걸린 물리학자 호킹 박사가 바로 그 렇습니다. 그는 원래
1,2년밖에 더 살지 못한 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85년에는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까지 받아 말하는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호킹은 책의 머리말을 항상 '감사의 말'로 바꿔서 저술을 시작한다고 해요. 큰 믿음입니다. 기쁨, 자족, 능력, 감사 이게 바울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거인입니다. 한 참 활동할 때에는 신앙의 활화산이다가, 열정이 사그라든 말년에는 비겁하고 무기력한 자가 아닙니다. 빌립보 감 옥이든 로마 감옥이든, 인생의 절정기든 인생의 말년이든, 바울 은 뜨거운 감사로 살고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철철 흘러 넘 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관제가 뭡니까 제단 위에 쏟아 붓는 제주(祭酒)입니다. 피를 토하고 죽게되도, 몽당연필 처럼 다 닿도록 이용 당하고 또 혹사 당해도 그래도 나는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이 능력은 고난도 삼키고 절망도 녹이고 비참함도 부숴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에게도 이런 감사가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노동자를 위한 투쟁의 삶을 살다가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 고 감옥에 있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를 잘 아시지요. 그가 최근 감옥에서 출간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에서 투쟁 만이 아 니라 감동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향한 투쟁의 철학이 감동의 철학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감동을 위하여'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음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를 나는 몇 번씩 죽음 앞에 세워지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밥상에서 밥 먹는다는 게 얼마나 큰 자유인지를 아 십니까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 채, 봄을 찾는다고 천리만리 밖으로 떠도는 사람과 같습니다. 봄은 이미 자기 집 울타리에 게나리꽂으로 살구꽂으로 피어 있는 데. .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요한 기쁨인지,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가 감동입니다. 기뻐하라(카이레테)는 문법상으로 현재 능동태 명령형입니다. 지금 기뻐하라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기뻐하라는 겁니다. 선택이 아닌 명령입니다. 내가 스스로 기뻐야 되는 데 이게 어떻게 명령 이 되는 겁니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네 가지 말을 좀 되도록 쓰지 말자고 합니다. "피곤하다시간없다죽겠다바쁘다" 이 네가지입니다. 습 관화 된 언어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 고, 마음은 몸의 물리적 상태를 지배합니다. 이런 말을 자꾸 습 관적으로 쓰다가 보면 한가한 데도 마음이 겨요. 푹 자고 일어 났는 데도 피곤한 것 같아요. 잘 되 나가고 있는데도 엉망인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기쁨의 말을 써야 합니다. 기쁨을 누리려고 하다가 보면 기쁨옵니다. 적극적으로 감사를 누 리다 보면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감동 도 학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바울의 믿음을 닮아서 빌립 보 교인들도 믿음에 굳게 서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빌립보서의 본문 중에 중요한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앤 퀴리오)'입니다. 우리가 잘 포장된 감사의 말을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앵무새 처럼 감사를 습 관적으로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다고 될 일입니까 저급한 싸구려 감사를 남발하자는 게 아닙니다. 안되는 걸 강요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선, 감사는 주님의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면 도저히 감사가 아녜요.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믿음의 눈으 로 보면 감사입니다.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기적이 쏟 아 부어져도 불평이 늘어진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어 내려 가다가 보면 전부 기적 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먹고 살았어요. 출애굽의 기 적, 홍해의 기적, 불기둥, 구름기둥의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 바위를 쳐 물을 내리는 기적 등 온갖 기적을 체험했지만, 사실 가장 감사할줄 모르는 백성들이었어요. 이내 배반하고 불평 하고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모세를 대항했어요. 하나님 의 손길은 이스라엘을 떠난적이 없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 이고 늘 항의했어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동안 물론 고난도 있 었고, 엄청난 불행도 있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떠난적이 없었어요. 결정적인 고난의 시절에는 늘 하나님의 결정적인 기적이 따라 다 녔습니다. 감사의 조건은 충분했지요. 조건은 충분했지만 실제 감사의 반응은 형편 없이 낮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빌립보 감옥 최악의 상황에서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 그 뒤에 기적이 일어 낳습니다. 감사는 주님에게로의 굴복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 감사하기 힘들어요. 독립심이 강한 사람도 힘듭니다. 감사하려고 해도 잘 안되요. 미소를 지으려 해도 짜증이 나요. 기뻐하려해도 근심이 자꾸 떠 올라요. 이래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 께 굴복하고 주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절차를 수용하 고, 주님의 방식을 인정하고, 주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나면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주님에게 나 자신을 쳐서 복종 시킬 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 이럴수 있습니까 항의하고 싶어요. 이럴 때는 독한 마음 뿐이예요. 서운한 마음 뿐이예요. 그러나 주님의 선하심이 마음 깊이에 젖어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작용과 그의 수고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 요. 이런 의미에서 감사는 주님에게로의 굴복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감사의 원천도 그리스도 때 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습니다. 원래 "어 떠한 형편에든지" (11절)라는 말의 뜻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엔 호이스 에이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라도, 감사하며 사는 내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비밀 비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비결입니다. 로마의 카타콤, 터키의 갑바도기아의 굴 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결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이 비결의 전수를 받읍시다.
지난 10월 24일 25일 이틀간 중앙일보에 김용옥 교수와 차범근 감독이 지상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논쟁을 둘러 싸고 천리안 하이텔등 각 PC통신 게시판마다 관련 의견이 수십건씩 오르는등 비상한 관심을 전국적으로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 습니다. 김용옥 교수의 글 중의 일부입니다. "텔레비젼 마이크가 차감독에게 갔다. 첫소감은 "하나님의 은혜 로. " 첫소감은 "주님의 은총으로. " 첫소감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 .신나는 꼴이 터질 때마다 카메라는 열렬히 기도하는 그대의 모습을 비춘다. 이제 그대는 빌리 그래엄을 능 가하는 세기적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대는 전도사가 아니라 축구감독이다. 그대가 이끄는 축구팀은 어느 교회의 사설팀이 아 니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다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 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말끝마다 매 행동마다 주님의 은총을 들먹이는 그대의 행태는 기독교신앙의 실천이 아니요, 한국기독교의 병페적 현상 의 말폐에 지나지 않는다." 차범근 감독의 글은 이렇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은. 때로는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고독하고 힘들 어 자다 말고 일어나 아내에게 전화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나는 대범하지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기를 앞두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그릇이다. 그때마다 나는 엎드려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다가 무섭거나 겁이 나면 그 손 을 더 꼭 쥐는 것처럼 지금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을 꼭 쥐 고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한다. 그러나 경기 전 벤치에 앉아 기도할 때나 경기가 끝난 후 하나님께 감사할 때나 한번도 김교수나 많 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몸짓을 보이기 위해 그 래본 적은 없다. 내가 인터뷰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기 전 나는 우리 선수들을 감동시켜 90분 내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90분간 진두지휘하면서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오차도 없이 매순간 정확히 판단하고 지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경기가 무사히 끝나면 나는 바로 이런 나의 기도가 이뤄졌다고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겼기 때문에 감사하고 이기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는게 아니다. 나는 두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인 스님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부.수녀 님들을 볼 때면 그분들의 기도 모습이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코 끝이 찡해옴을 느낀다. 나에겐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도사도 아니고 종교 편싸움 선봉에 선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생기는 우둔한 사람이다. 주님께 감사 한다는 말 그것이 삶이 되었다고 합니다. 위선과 가 식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런 생활이라고 합니다. 비기독교인들도 그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성의 글을 통신에 올 렸습니다. 물론 한국 축구가 성적이 좋아서 차감독의 글에 공감 하고 그를 지지하는 숫자가 더 많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생활하는 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비기독교인들을 공감시키고 설득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감사가 몸에 밴 사람들에게 오는 특권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손길이 살아서 바로 옆에 있습니다. 사실 감사 자체가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야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역사하는 곳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절망을 이길 힘이 있고, 고통을 찬송으로 바꿀 능력이 있고, 곤궁이나 비천이 나 궁핍을 적응하는 비결을 가지게 됩니다. (빌4:3)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말합니다. 기뻐하 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 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감사의 능력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익명의 시' 주님 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 던지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이기 때문이지요. 일이계획 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도 감사합니다 나의 교만함을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러는 아들 딸이 걱정 거리가 되게 하시고 더러는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 질 때도 감사합니다.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먹고사는 일이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여자 노예는 용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면 딱 들어 맞는 거예요. 그래서 그 노예의 주인은 떼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귀신을 해제해 버리자 점을 칠 수 없었고 돈을 못 벌게 된 주인 이 빌립보의 사람들을 선동해서 로마 관청에 소요죄로 고소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투옥되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그냥 감옥에 가둔 것이 아니라 매를 많이 친 후에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절) 로마의 집정관 부루트스의 두 아들이 왕정 복고죄로 끌려 나와 채찍을 맞는 장면이 로마인 이야기 1권에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이 잔혹한 광경을 똑 바로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부르트스 만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로마의 매질은 혹독한 것입니다. 가죽끈에 쇠를 넣기도 하고 매 듭을 짓기도 하고 뼈조각을 넣기도 합니다. 살이 헤지고 피가 튀는 무시 무시한 형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그 날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신음 소리 가 아닙니다. 불평과 원망이 아닙니다. 한숨과 탄식이 아닙니다. 찬송입니다. 너무 너무 큰 믿음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했지요.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감사는 이런 것이구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이런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 했어요. 그러니 죽는 소리 대신에 찬송을 해야 되겠어요. 바울과 실라는 온 몸이 찢어지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이고 신음 소리가 절러 나오는 상황에서 신음 소리를 방치하지 않았어요. 찬송을 했어 요. 옥문이 터졌어요. 기적은 죽는 소리 끝에 나오는 게 아니라 찬송에서 나오는 겁니다. 죽는 소리 대신에 찬송을!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한 때 그런 초인적인 믿음을 가 진 게 아니예요. 바울은 늘 그랬어요. 보세요. 생애 말기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똑 같았어요. 로마 감옥 안 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감사함으로 아뢰라"(6절). 바울은 서신의 시작을 언제나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비슷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 스무살에 근육무력증에 걸린 물리학자 호킹 박사가 바로 그 렇습니다. 그는 원래
1,2년밖에 더 살지 못한 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85년에는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까지 받아 말하는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호킹은 책의 머리말을 항상 '감사의 말'로 바꿔서 저술을 시작한다고 해요. 큰 믿음입니다. 기쁨, 자족, 능력, 감사 이게 바울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거인입니다. 한 참 활동할 때에는 신앙의 활화산이다가, 열정이 사그라든 말년에는 비겁하고 무기력한 자가 아닙니다. 빌립보 감 옥이든 로마 감옥이든, 인생의 절정기든 인생의 말년이든, 바울 은 뜨거운 감사로 살고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철철 흘러 넘 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관제가 뭡니까 제단 위에 쏟아 붓는 제주(祭酒)입니다. 피를 토하고 죽게되도, 몽당연필 처럼 다 닿도록 이용 당하고 또 혹사 당해도 그래도 나는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이 능력은 고난도 삼키고 절망도 녹이고 비참함도 부숴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에게도 이런 감사가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노동자를 위한 투쟁의 삶을 살다가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 고 감옥에 있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를 잘 아시지요. 그가 최근 감옥에서 출간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에서 투쟁 만이 아 니라 감동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향한 투쟁의 철학이 감동의 철학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감동을 위하여'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음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를 나는 몇 번씩 죽음 앞에 세워지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밥상에서 밥 먹는다는 게 얼마나 큰 자유인지를 아 십니까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 채, 봄을 찾는다고 천리만리 밖으로 떠도는 사람과 같습니다. 봄은 이미 자기 집 울타리에 게나리꽂으로 살구꽂으로 피어 있는 데. .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요한 기쁨인지,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가 감동입니다. 기뻐하라(카이레테)는 문법상으로 현재 능동태 명령형입니다. 지금 기뻐하라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기뻐하라는 겁니다. 선택이 아닌 명령입니다. 내가 스스로 기뻐야 되는 데 이게 어떻게 명령 이 되는 겁니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네 가지 말을 좀 되도록 쓰지 말자고 합니다. "피곤하다시간없다죽겠다바쁘다" 이 네가지입니다. 습 관화 된 언어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 고, 마음은 몸의 물리적 상태를 지배합니다. 이런 말을 자꾸 습 관적으로 쓰다가 보면 한가한 데도 마음이 겨요. 푹 자고 일어 났는 데도 피곤한 것 같아요. 잘 되 나가고 있는데도 엉망인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기쁨의 말을 써야 합니다. 기쁨을 누리려고 하다가 보면 기쁨옵니다. 적극적으로 감사를 누 리다 보면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감동 도 학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바울의 믿음을 닮아서 빌립 보 교인들도 믿음에 굳게 서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빌립보서의 본문 중에 중요한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앤 퀴리오)'입니다. 우리가 잘 포장된 감사의 말을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앵무새 처럼 감사를 습 관적으로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다고 될 일입니까 저급한 싸구려 감사를 남발하자는 게 아닙니다. 안되는 걸 강요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선, 감사는 주님의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면 도저히 감사가 아녜요.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믿음의 눈으 로 보면 감사입니다.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기적이 쏟 아 부어져도 불평이 늘어진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어 내려 가다가 보면 전부 기적 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먹고 살았어요. 출애굽의 기 적, 홍해의 기적, 불기둥, 구름기둥의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 바위를 쳐 물을 내리는 기적 등 온갖 기적을 체험했지만, 사실 가장 감사할줄 모르는 백성들이었어요. 이내 배반하고 불평 하고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모세를 대항했어요. 하나님 의 손길은 이스라엘을 떠난적이 없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 이고 늘 항의했어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동안 물론 고난도 있 었고, 엄청난 불행도 있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떠난적이 없었어요. 결정적인 고난의 시절에는 늘 하나님의 결정적인 기적이 따라 다 녔습니다. 감사의 조건은 충분했지요. 조건은 충분했지만 실제 감사의 반응은 형편 없이 낮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빌립보 감옥 최악의 상황에서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 그 뒤에 기적이 일어 낳습니다. 감사는 주님에게로의 굴복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 감사하기 힘들어요. 독립심이 강한 사람도 힘듭니다. 감사하려고 해도 잘 안되요. 미소를 지으려 해도 짜증이 나요. 기뻐하려해도 근심이 자꾸 떠 올라요. 이래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 께 굴복하고 주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절차를 수용하 고, 주님의 방식을 인정하고, 주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나면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주님에게 나 자신을 쳐서 복종 시킬 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 이럴수 있습니까 항의하고 싶어요. 이럴 때는 독한 마음 뿐이예요. 서운한 마음 뿐이예요. 그러나 주님의 선하심이 마음 깊이에 젖어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작용과 그의 수고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 요. 이런 의미에서 감사는 주님에게로의 굴복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감사의 원천도 그리스도 때 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습니다. 원래 "어 떠한 형편에든지" (11절)라는 말의 뜻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엔 호이스 에이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라도, 감사하며 사는 내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비밀 비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비결입니다. 로마의 카타콤, 터키의 갑바도기아의 굴 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결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이 비결의 전수를 받읍시다.
지난 10월 24일 25일 이틀간 중앙일보에 김용옥 교수와 차범근 감독이 지상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논쟁을 둘러 싸고 천리안 하이텔등 각 PC통신 게시판마다 관련 의견이 수십건씩 오르는등 비상한 관심을 전국적으로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 습니다. 김용옥 교수의 글 중의 일부입니다. "텔레비젼 마이크가 차감독에게 갔다. 첫소감은 "하나님의 은혜 로. " 첫소감은 "주님의 은총으로. " 첫소감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 .신나는 꼴이 터질 때마다 카메라는 열렬히 기도하는 그대의 모습을 비춘다. 이제 그대는 빌리 그래엄을 능 가하는 세기적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대는 전도사가 아니라 축구감독이다. 그대가 이끄는 축구팀은 어느 교회의 사설팀이 아 니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다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 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말끝마다 매 행동마다 주님의 은총을 들먹이는 그대의 행태는 기독교신앙의 실천이 아니요, 한국기독교의 병페적 현상 의 말폐에 지나지 않는다." 차범근 감독의 글은 이렇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은. 때로는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고독하고 힘들 어 자다 말고 일어나 아내에게 전화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나는 대범하지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기를 앞두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그릇이다. 그때마다 나는 엎드려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다가 무섭거나 겁이 나면 그 손 을 더 꼭 쥐는 것처럼 지금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을 꼭 쥐 고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한다. 그러나 경기 전 벤치에 앉아 기도할 때나 경기가 끝난 후 하나님께 감사할 때나 한번도 김교수나 많 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몸짓을 보이기 위해 그 래본 적은 없다. 내가 인터뷰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기 전 나는 우리 선수들을 감동시켜 90분 내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90분간 진두지휘하면서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오차도 없이 매순간 정확히 판단하고 지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경기가 무사히 끝나면 나는 바로 이런 나의 기도가 이뤄졌다고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겼기 때문에 감사하고 이기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는게 아니다. 나는 두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인 스님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부.수녀 님들을 볼 때면 그분들의 기도 모습이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코 끝이 찡해옴을 느낀다. 나에겐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도사도 아니고 종교 편싸움 선봉에 선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생기는 우둔한 사람이다. 주님께 감사 한다는 말 그것이 삶이 되었다고 합니다. 위선과 가 식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런 생활이라고 합니다. 비기독교인들도 그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성의 글을 통신에 올 렸습니다. 물론 한국 축구가 성적이 좋아서 차감독의 글에 공감 하고 그를 지지하는 숫자가 더 많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생활하는 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비기독교인들을 공감시키고 설득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감사가 몸에 밴 사람들에게 오는 특권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손길이 살아서 바로 옆에 있습니다. 사실 감사 자체가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야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역사하는 곳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절망을 이길 힘이 있고, 고통을 찬송으로 바꿀 능력이 있고, 곤궁이나 비천이 나 궁핍을 적응하는 비결을 가지게 됩니다. (빌4:3)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말합니다. 기뻐하 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 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감사의 능력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익명의 시' 주님 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 던지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이기 때문이지요. 일이계획 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도 감사합니다 나의 교만함을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러는 아들 딸이 걱정 거리가 되게 하시고 더러는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 질 때도 감사합니다.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먹고사는 일이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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