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어 산을 보라 (시121:1-2)
본문
본문을 보면 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여기서 말하는 산은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는 남서쪽 구릉에 성산이라 일컫는 시온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매년 숱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시온산입니다. 지금 순례자들이 이 산을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심정을 이 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시온산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생각하여 그 산을 성산이라 일컬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시온산을 바라보기만 해도 반가웠고 위로가 되었고 위안을 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시온산을 올려다보면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고백했습니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얼마나 정다운 시입니까 시인은 언제나 변함없이 서 있는 시온산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산은 때로 인간에게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옛부터 사람들은 산을 신의 품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고 큰 산을 성산이라고 햇고 영산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산에는 산신령이 있다고 해서 산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산을 신의 품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은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아갑니다.
옛 시인들은 산을 찾아가서 산을 소재로 해서 시를 읊었습니다. 지혜자들도 모두 산을 찾았습니다. 산에서 생각을 하였고 마음 수양을 하였고 수도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연륜 있는 예술가들은 모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산수화를 즐겨 화폭에 담았습니다. 산은 그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 줍니다. 철학자 칸트는 생전에 산을 즐겨 찾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을 찾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곳에서 영감을 얻고 사색을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은 그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산은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고 공허한 영을 만족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산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복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면서 앞길에 놓인 문제들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예수님은 산을 찾으셨습니다. 겟세마네라는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영적 전쟁의 결전의지를 다지셨던 것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두고 두고 가장 심각한 기도로 각인될 것입니다. 이렇게 산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생각을 주고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좀 번잡한 사람은 바다를 찾아가고 마음이 차분한 사람은 산을 찾아갑니다. 여름 바캉스 때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바닷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 마음들이 번잡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적한 곳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번잡한 곳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그냥 떠들고 재미있게 놀 수는 있어도 조용히 생각할 여유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도시 생활은 사람들의 생각을 없애 버립니다. 생각을 자꾸만 메마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삭막해지고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지는 것입니다. 자연이 그만큼 멀어져서 그렇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히브리인들은 산을 곧 하나님의 품으로 생각하였고 보좌로 생각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시온산 자락을 보기만 해도 위안을 받았고 하나님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산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언제나 산에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산은 곧 하나님이었고 모든 문제를 그곳에서 풀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앞이 콱 막히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맨 먼저 어디를 찾아가야 하겠습니까 산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저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해답이 나오고 길을 찾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히브리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도 예루살렘의 그 산을 향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힘이 약하여 눌리고 짓밟힘을 당할 대도 사람들은 그 산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마지막 때에는 메시아가 그 산으로 강림하여 그곳에 깃발을 꽂고 세상을 향하여 호령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산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깊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람들은 거기서 문제를 해결받으려 했고 길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려움의 순간들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고 바라보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군에 입대하는 어린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거든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그 말을 귓전으로 듣고 흘려 버렸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 고지식한 신앙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유치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그냥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꼭 저렇게 믿어야 하나”하고 빈정댑니다. 아주 유치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아들도 어머니의 그 말이 유치하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전장에서 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언제 적에게 사로잡힐지 모르는 상황에 빠져 버렸습니다. 내일의 운명이 불안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고독했겠습니까 그때 이 아들이 비로소 귓전으로 흘려 들었던 어머니의 그 짤막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거든 저 위를 바라보아라.” 그 아들은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를 보면서 심각하게 부르짖으며 탄원했고 겨우 아군에 의해서 구조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창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이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앞이 콱 막혔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포기해 버릴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어 버릴까”하는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빠지면 포기하고 죽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때를 위해서 저위를 올려다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그 신앙이 바로 “의지 있는 신앙”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라서 출세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발생되는 어려운 순간들을 맞을 때마다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의지 있는 신앙을 키워 주는 일입니다. 극한 상황을 맞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곤란에 빠지게 되면 포기해 버릴까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스스로가 저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언제까지 곁에 끼고 살겠습니까 어려운 때가 오면 스스로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고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모세는 애굽에서 왕자로 4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 40년 동안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살인을 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 미디안 광야는 왕궁 생활과 비교를 하면 천국과 지옥입니다. 하늘과 땅입니다. 완전히 패배자가 되어 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썩습니다. 철저하게 패배자로서 살아갑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그가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지난날에 영화를 맛보지 않았던 사람은 인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의 고민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가 그 광야에서 그렇게 고민하다가 마지막에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사람들이 성산으로 일컫던 호렙산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그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그때 그가 하나님께 무슨 탄원을 했겠습니까 아마 그때 그는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여기서 어떤 길로 가야 합니까”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탄원이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했겠습니까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탄원하면 반드시 해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반드시 길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때 비로소 모세에게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졌습니다. “너는 애굽으로 가라, 가서 네 백성을 인도해 내라.” 그리고 나서 모세가 얼마나 화려하게 컴백을 합니까 얼마나 당당하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냅니까 사람들은 너무 인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문제를 앞에 두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으며 대처하는 방법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신앙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자 고민거리일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가운데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롬웰은 어렸을 때 유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요람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집에서 키우던 원숭이 한 마리가 그를 안고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아이는 그만 죽는다고 울고 있습니다. 온 집이 난리가 났습니다. 지붕 위에서 원숭이가 아이를 놓아 버리면 큰일입니다. 가족들은 난리를 피웠습니다.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자.” 가족들이 모두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 하고 한마디씩 합니다. 사실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 이 할아버지의 말씀이 참 어리석게 들립니다. 이 위급한 때에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땅에 깔고 혹시 아이가 지붕 위에서 떨어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가 어떻게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법들이 더 현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비신앙인들도 재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이라는 점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맨 먼저 그런 방법들부터 써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이 주는 힘이나 영향이나 역할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그 위급한 상황에서 “모두 기도하자”는 할아버지의 제안이 유치하게 들리고 우습게 들리고 한심하게 들리십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조용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잔말 말고 함께 기도하자.” 그래서 모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온통 지붕 위에 있는 아이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에 무슨 힘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렇지만 할아버지만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원숭이가 내려다보니까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입니다. 모두가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자기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갑자기 저지른 행동이라 원숭이도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원숭이가 가족들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동안 조용히 아이을 안고 내려와 마당에 놓고 다시 올라가 버렸습니다.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이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눈을 들어 저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상시가 아니고 위급한 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올려다보아야 하는 까닭은 모든 해답이 거기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길이 저 높은 곳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비결을 알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저 높은 곳을 외면하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모든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들의 해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낙심한 신자 한 분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교회당에 혼자 앉아서 자신의 무력하고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지쳐 있습니다. 그때 교회 안을 빙빙 돌고 있는 참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참새가 어떻게 하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서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이 참새가 한참 동안을 날며 헤매고 다니다가 지쳐서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자가 말합니다. “너도 내 신세와 똑같구나.” 두 신세가 똑같습니다. 둘은 모두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교회 꼭대기에 창문이 조금 열려 있습니다. 그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참새는 한참 동안 그 꼭대기를 쳐다보더니 날아가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이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길은 저 높은 곳에 있구나.
그런데 왜 나는 그 동안 저 밑에서만 방법을 찾으려 했던가” 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길은 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은 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거기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고 자세입니다. 눈과 생각을 언제나 저 높은 곳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마음도 언제나 저 높은 곳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곳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옛 시인들은 산을 찾아가서 산을 소재로 해서 시를 읊었습니다. 지혜자들도 모두 산을 찾았습니다. 산에서 생각을 하였고 마음 수양을 하였고 수도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연륜 있는 예술가들은 모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산수화를 즐겨 화폭에 담았습니다. 산은 그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 줍니다. 철학자 칸트는 생전에 산을 즐겨 찾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을 찾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곳에서 영감을 얻고 사색을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은 그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산은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고 공허한 영을 만족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산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복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면서 앞길에 놓인 문제들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예수님은 산을 찾으셨습니다. 겟세마네라는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영적 전쟁의 결전의지를 다지셨던 것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두고 두고 가장 심각한 기도로 각인될 것입니다. 이렇게 산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생각을 주고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좀 번잡한 사람은 바다를 찾아가고 마음이 차분한 사람은 산을 찾아갑니다. 여름 바캉스 때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바닷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 마음들이 번잡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적한 곳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번잡한 곳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그냥 떠들고 재미있게 놀 수는 있어도 조용히 생각할 여유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도시 생활은 사람들의 생각을 없애 버립니다. 생각을 자꾸만 메마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삭막해지고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지는 것입니다. 자연이 그만큼 멀어져서 그렇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히브리인들은 산을 곧 하나님의 품으로 생각하였고 보좌로 생각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시온산 자락을 보기만 해도 위안을 받았고 하나님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산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언제나 산에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산은 곧 하나님이었고 모든 문제를 그곳에서 풀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앞이 콱 막히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맨 먼저 어디를 찾아가야 하겠습니까 산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저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해답이 나오고 길을 찾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히브리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도 예루살렘의 그 산을 향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힘이 약하여 눌리고 짓밟힘을 당할 대도 사람들은 그 산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마지막 때에는 메시아가 그 산으로 강림하여 그곳에 깃발을 꽂고 세상을 향하여 호령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산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깊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람들은 거기서 문제를 해결받으려 했고 길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려움의 순간들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고 바라보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군에 입대하는 어린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거든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그 말을 귓전으로 듣고 흘려 버렸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 고지식한 신앙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유치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그냥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꼭 저렇게 믿어야 하나”하고 빈정댑니다. 아주 유치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아들도 어머니의 그 말이 유치하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전장에서 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언제 적에게 사로잡힐지 모르는 상황에 빠져 버렸습니다. 내일의 운명이 불안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고독했겠습니까 그때 이 아들이 비로소 귓전으로 흘려 들었던 어머니의 그 짤막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거든 저 위를 바라보아라.” 그 아들은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를 보면서 심각하게 부르짖으며 탄원했고 겨우 아군에 의해서 구조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창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이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앞이 콱 막혔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포기해 버릴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어 버릴까”하는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빠지면 포기하고 죽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때를 위해서 저위를 올려다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그 신앙이 바로 “의지 있는 신앙”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라서 출세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발생되는 어려운 순간들을 맞을 때마다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의지 있는 신앙을 키워 주는 일입니다. 극한 상황을 맞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곤란에 빠지게 되면 포기해 버릴까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스스로가 저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언제까지 곁에 끼고 살겠습니까 어려운 때가 오면 스스로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고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모세는 애굽에서 왕자로 4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 40년 동안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살인을 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 미디안 광야는 왕궁 생활과 비교를 하면 천국과 지옥입니다. 하늘과 땅입니다. 완전히 패배자가 되어 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썩습니다. 철저하게 패배자로서 살아갑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그가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지난날에 영화를 맛보지 않았던 사람은 인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의 고민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가 그 광야에서 그렇게 고민하다가 마지막에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사람들이 성산으로 일컫던 호렙산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그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그때 그가 하나님께 무슨 탄원을 했겠습니까 아마 그때 그는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여기서 어떤 길로 가야 합니까”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탄원이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했겠습니까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탄원하면 반드시 해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반드시 길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때 비로소 모세에게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졌습니다. “너는 애굽으로 가라, 가서 네 백성을 인도해 내라.” 그리고 나서 모세가 얼마나 화려하게 컴백을 합니까 얼마나 당당하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냅니까 사람들은 너무 인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문제를 앞에 두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으며 대처하는 방법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신앙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자 고민거리일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가운데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롬웰은 어렸을 때 유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요람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집에서 키우던 원숭이 한 마리가 그를 안고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아이는 그만 죽는다고 울고 있습니다. 온 집이 난리가 났습니다. 지붕 위에서 원숭이가 아이를 놓아 버리면 큰일입니다. 가족들은 난리를 피웠습니다.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자.” 가족들이 모두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 하고 한마디씩 합니다. 사실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 이 할아버지의 말씀이 참 어리석게 들립니다. 이 위급한 때에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땅에 깔고 혹시 아이가 지붕 위에서 떨어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가 어떻게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법들이 더 현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비신앙인들도 재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이라는 점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맨 먼저 그런 방법들부터 써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이 주는 힘이나 영향이나 역할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그 위급한 상황에서 “모두 기도하자”는 할아버지의 제안이 유치하게 들리고 우습게 들리고 한심하게 들리십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조용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잔말 말고 함께 기도하자.” 그래서 모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온통 지붕 위에 있는 아이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에 무슨 힘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렇지만 할아버지만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원숭이가 내려다보니까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입니다. 모두가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자기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갑자기 저지른 행동이라 원숭이도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원숭이가 가족들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동안 조용히 아이을 안고 내려와 마당에 놓고 다시 올라가 버렸습니다.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이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눈을 들어 저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상시가 아니고 위급한 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올려다보아야 하는 까닭은 모든 해답이 거기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길이 저 높은 곳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비결을 알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저 높은 곳을 외면하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모든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들의 해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낙심한 신자 한 분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교회당에 혼자 앉아서 자신의 무력하고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지쳐 있습니다. 그때 교회 안을 빙빙 돌고 있는 참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참새가 어떻게 하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서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이 참새가 한참 동안을 날며 헤매고 다니다가 지쳐서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자가 말합니다. “너도 내 신세와 똑같구나.” 두 신세가 똑같습니다. 둘은 모두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교회 꼭대기에 창문이 조금 열려 있습니다. 그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참새는 한참 동안 그 꼭대기를 쳐다보더니 날아가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이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길은 저 높은 곳에 있구나.
그런데 왜 나는 그 동안 저 밑에서만 방법을 찾으려 했던가” 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길은 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은 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거기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고 자세입니다. 눈과 생각을 언제나 저 높은 곳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마음도 언제나 저 높은 곳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곳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