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일군을 부르시는 하나님 (행13:1-12)

본문

어떤 유대인에게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의 아 내는 악처 중에 악처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처와 사는 그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 러운지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울고 싸우고 떠들고 고통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하여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의 판단은 이제 더 이상 아내와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혼을 작정하고 랍비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아내의 흠을 이야기 했습니다. 사내의 이야기를 다 듣 고난 뒤에 랍비는 말하기를 당신 집에 양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내의 대답은 유대인 집에 양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했습니다. 랍비는 말하기를 그 렇다면 당신은 그 양을 집 안으로 데려다가 지내라고 했습니다. 하루를 지나고난 다음에 그 사내가 랍비에게 죽을 상을 하고는 찾아 왔습니다. 랍비님 이것은 지옥입니다. 악처에다 양까지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하는 말이 당신 집이 닭이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유대인 집에 닭이 있는 것은 당 연한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랍비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당신의 집 안에 닭을 데 려다 함께 살아라는 겁니다. 하룻 밤을 보낸 사내는 죽을 상이 되어서 소금에 절인 나물이 되어서 랍비를 찾아 왔습니다. 랍비님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다 포 기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손을 들었습니다. 악처에다가 양 그 위에 닭들 까지 이건 집이 아니라 한마디로 난장판 바로 그대로입니다. 이젠 다 포기했습니다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말합니다. 랍비는 하는 말이
그렇다면 양과 닭을 당신의 집 밖으로 몰아 내라고 했습니다. 뒷 날 사내가 돌아왔는데 그 얼굴은 화색이 돕니다. 마치 금광을 발견한 사람처럼 싱글벙글합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 니 하는 말이 랍비님 이제 너무 좋습니다. 양과 닭을 몰아내었는데 살 것 같습니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사람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그 에게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가 살던 그대로 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무엇이든지 그 사람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악처도 현모양처 도 남편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양도 닭도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양들과 닭들이 우리 집 안을 헤집고 다녀야 언제가 더 감사했는지 알아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들고난 뒤에 감사해요. 사고없이 차를 잘 타고 다닐 때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고를 당하고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고 말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이건 순전히 우리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중심이 잡혀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인 커다란 혼란을 당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전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우리는 감사하며 살았느냐 고 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그 생활을 감사하고 살았느냐 이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때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힘들다고 불평이나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어라고 합니까 여전히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뭡니까 어렵다는 사람들은 그 때나 이제나 앞으로도 여전히 어렵다 고 말할 사람들입니다. 언제 또는 얼마만큼 주어져야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 삶을 구체적으로 간섭하십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우리의 부유함도 아시고 가난함도 아십니다. 우리의 직장문제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하고 즐거워 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전천후 감사생활을 원하십니다. 흑인이면서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던 미국의 파월은 세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방문제에 간여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걸프전쟁 때는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는데 특별히 세계적인 관심과 협조를 유도하여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렇게 최고의 요직에 있을 수 있었던 첫 번째는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는 것인데 군에서 명예롭게 퇴진한 이후에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는 상대방을 편하게 했 다는 것입니다. 즉 감사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현재의 생활에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 나은 것을 제공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루터의 말대로 촛불로 감사하 면 달빛을 주시고 그것을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이런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증명되는 겁니다.
셋째는 업무에 대한 파악 능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일군을 부르시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군은 선택하시고 적재적소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른 목적은 우리에게 맡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할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우리 자신의 할 일이 있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지역과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할 일이 있어서 이 자리에 앉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 사람을 통하여 나라를 구원하기도 하 고 가정을 살리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 요청하고 그들만 구원되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 5:9에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하심처럼 피로 구속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나라를 부하게도 하시고 가 난하게도 하시며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고 또는 폐하시기도 하심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땅 끝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일어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면 쓰여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가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처럼 그 영토가 광할하거나 백성의 수효가 많아서 사용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상에서 택한 소유로 삼으시겠다는 작정하 셨기 때문에 사용된 것입니다. 지나간 성경의 역사를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그를 열 국의 아버지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를 사용하시겠다는 작정이 서셨음으로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은혜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 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거예요. 창22:17-18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 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 기서 알아야 할 것은 창22장의 사건은 그의 나이와 어떤 일 이후에 일어난 일 이냐는 것입니다. 창22장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에 가서 제물을 바친 사건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감히 사랑하는 독자를 바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 일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죽은 몸과 같았을 때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 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뜨겁고 깊이있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도 자식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엄격이 말한다면 아이의 성취는 부모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 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출29:46에 기록하기를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으로 이주하게도 하시고 이들을 불러 내기도 하십니다. 이들을 불러낸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 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의 뜻은 완벽하게 이루어져 갑니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난한 자를 선택하여 하나님 의 일을 이루십니다. 때로는 부자를 사용하시고 때로는 무능한 자를 때로는 유 능한 자를 때로는 권력가를 때로는 힘없는 백성들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렇게 사용되는 무수한 사람들을 통하여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이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2. 하나님께서 이 지구 상에서 일하실 때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바된 교회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겨진 불후의 명작들을 보세요. 교회를 잘 섬길려고 하니 까 재능의 복을 혹은 물질의 복을 혹은 사람들을 붙여주시고 지위를 높여 주셨 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했습니다(딤전3:15). 본문 1절에 "안디옥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에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교회에 준 사명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 이었는데 이런 명령은 마28:18-20, 막 16:15-16, 눅24:45-48 그리고 행1:8에 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20:21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아 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사명 은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은혜를 주십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모아 말씀으로 돌보고 그의 은혜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죄가 선포됩니다. 교회에 서 세례를 베풉니다. 교회에서 연약한 성도를 위로하고 힘을 돋우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방 땅에 세워진 이 교회를 통하여 복음확장 사업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필요성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뭐가 필요 하냐고 합니다. 교회 없어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사도 필요없다고 합니다. 장로도 필요없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건물도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이 집 저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습니다. 예배 중에 모금된 돈은 음식 구입비로 더 많은 금액은 구제비로 사용 합니다. 그러나 모금의 열의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태여 모금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라디오도 없이 살던 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집집마다 텔레비젼 수상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특정인으로 여겨진던 때 였는데 이제는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무선전화 기를 가지고 다닙니다. 이런 시대에 별볼일 없이 교회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냐 고 집에서도 텔레비 틀면 설교나오고 찬송나오는데 라고 말합니다. 차를 운전하 다가도 틀기만 하면 설교 나옵니다. 그리고 안전하여 달라고 기도까지 하여 줍니다. 이런데 교회가 무슨 필요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잘못된 사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일해 오셨습니다. 복음전파에 안디옥 교회를 사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이 시대에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말씀 전하는 일군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사람을 선택하셔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세요. 1절에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들 과 교사들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여러 일군들을 부르시고 이들을 사용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다섯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 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우리가 압니다. 다음으로 니게 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었는데, 그는 아프리카 흑인이었을 겁니다. 추측컨대 이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나타나는 마나엔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헤롯 안 디바의 젖동생으로 불렸습니다. 이 말을 볼 때 적어도 헤롯 안디바와 함께 자랐 다는 의미일 수 있고, 헤롯의 젖형제 혹은 친밀한 친구로 자랐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들의 사이가 어떤 관계이든지 마나엔은 헤롯 왕실과 그 가족들과는 상 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볼 때 이들이 얼마나 국제적이고 다양한 성장배경을 가진 사람들인가 그리고 교회라는 거대한 공동체 임에도 전혀 잡음없이 하나가 되어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세상적으로 힘이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용하십니다. 삿 4장에 드보라 여사사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랍비돗의 아내였습니다. 평범한 한 가정의 주부를 가나안 왕 야빈의 압 제에서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는 지도자로 사용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누구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대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께 찬양하기를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 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고 했습니다(삿5:7).
4. 하나님께서는 그 일군들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6-12절).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성령님께서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행13:2). 4절에도 "두 사람이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일군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관리하십니다. 이 들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방해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이들은 "성령님이 충만 하여" 외치는 말씀이 9-10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님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만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 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구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능력이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수 행하는 일군과 함께 하는 좋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받기를 원하십니까 권세있게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다 면 주의 일을 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세요. 틀림없이 은혜를 주 십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정 형편도 어려운 농촌에 사시며 목수일을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시골 교회 종 줄을 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새벽에 사람을 깨우는 이 종을 제가 치겠습니다.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저의 하는 모든 일이 퍼져 나아가게 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종을 칩니다. 날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요즘같이 자명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저녁에 잠을 자고 일어나면 교회로 달려 나갑니다. 그리고는 교회 벽에 걸린 시계를 보 면서 종칠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 분의 이런 정성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큰 은혜 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물질의 풍성한 복을 주셨습니다. 자녀들의 삶이 형통하 며 주를 잘 섬기는 복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 하나님은 일군을 부르셔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일군을 부르셔서 일하셨습니다. 무슨 일 을 하든지 준비된 자를 택하셔서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맡기기를 원하실까 요 나에게는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비록 하잖은 일이라고 천히 여겨 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2. 그러나 그 일군들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13:6, 8).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항상 줄겁고 유익한 보상이 즉각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그렇게 쉬 운 일은 아닙니다. 복음전파의 일군이라는 엄청난 직분을 받았지만 이 직을 수 행하는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고후 1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은 다 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사도들의 말로는 그의 순교했다는 겁니다. 복음전파자의 고난은 이처럼 극난합니다. 서울에 있는 어떤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장로를 선택하기 전에 유력한 후보 에게 전화를 하여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에 가지를 않 습니다. 3시간이 지난 다음에 약속 장소로 간다는 겁니다. 그 분의 지론은 이러 해야 교인을 위하는 목사의 심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어느 신문사의 면접시험이었습니다. 오전 9시 까지 고사장소로 나 오라는 통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최사에서는 어떤 누구도 수험장에 나타나 지 않습니다. 신문사에 물어보니 장소는 맞다는 겁니다.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 고 불평하면서 떠나는 수험생이 있었습니다. 정오가 되었을 때 한 분이 나타나 서는 미안하다는 어떤 설명도 없이 붓과 먹물과 화선지를 나누어 주고난 뒤에 자신이 원하는 어떤 글이든지 쓰라고 하고는 들어가 버립니다. 이것으로 채용시 험은 끝난 겁니다. 주최측에서는 신문기자로서의 인내와 끈기가 있는가를 세시 간을 기다리게 하므로 테스트했습니다. 그리고 화선지의 앞뒤를 가릴 줄 아는가 하는 문제로 관찰력을 테스트했다는 겁니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를 선택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원자들에게 통보하기를 새벽 3시에 면접이 있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면접 장소에는 아침 8시에야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시험을 치루 자고 하면서 글 쓸 줄 아는가고 물은 다음에 간단한 한 단어를 쓰라는 겁니다. 그리고 계산할 줄 아는가고 물은 다음에 예라고 대답하자 2+2는 얼마냐고 묻습니다. 아무런 불평없이 기다리고 어린 아이같은 질문에도 대답하는 그 사람을 선교사를 선택했습니다. 그 사람의 합격은 새벽 3시에 오라는 대로 도착하는 자 신의 생각을 부인하는 일에 합격했고 두 번째는 3시 정각에 왔고 오전 8시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있었고 세 번째는 간단한 질문에도 성실히 답하는 겸손과 성실이 있었다는 것이 합격의 이유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 앞에 많은 어려움이 산재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을 두려워 말고 힘있게 전진해야 합니다.
3. 그렇지만 성도의 고난은 끝이있고 열매가 있습니다(행13:12). 본문 12절에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 이히 여기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방해가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하여 큰 응답과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헌신과 봉사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바울에게도 풍성한 위로는 총독이 예수를 구주로 영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인 우리 앞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에는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눈물과 아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에로 인 도하여 가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전도자에게 닥쳤던 숱한 어려움을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은 잠간이고 위로의 보상은 영원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수고를 위로하실 주님의 은총이 더욱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70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