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충만을 받자 (행1:3-8)
본문
1. 우리 사람은 언제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유언을 준비해야 합니다. “김집사님, 돌아가실 때 어떤 유언을 하시겠습니까 이집사님은요” 듣고 보니 모두가 중요하고 꼭 남겨야할 내용들이군요. 맞습니다. 쓸데없는 잔소리를 유언으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가면서 남겨진 가족들에게 하는 말. 그 중요성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이제사십일 동안을 자신의 부활을 확증하시기 위해 이세상에 남으셨다가 기한이 되어 승천하실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육신을 가지신 그 예수님은 이세상에서 천국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이세상에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불러서 마지막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본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름 아닌 성령님충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너무도 절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인간적인 호기심과 육적인 욕심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들의 모습들이 얼마나 똑같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금 내 생각은 어떤 것으로 꽉 차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삶의 모습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심3일. 우리가 새로운 결단과 각오로 1998년을 시작한지 벌써 많은 시간들이 흘렀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런 다람쥐 채바퀴 돌 듯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약해서입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죄를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바로 성령님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야 그것은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힘이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증인이란 의미를 좀 더 넓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전도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이란 의미가 아니라 땅끝까지 도달하라는 의미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20,30여년 전에는 전도하기가 참 쉬웠습니다. 그때는 교회만 개척하면은 1년 안에 100여명이 모이는 것은 수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복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어덯게 해야 할까요 이제 말로 전도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축호전도나 노방전도를 하지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전도의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행조건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의 욕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말이야.’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어떻습니까 창피하지요 제발 이런 일이 좀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행동이나 말을 참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자기 친구에게 늘 같이 교회에 다니자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좋다, 싫다 말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으로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독교인 친구가 결사적으로 그 친구에게 매달리며 교회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너나, 안 다니는 나나 도대체 차이가 뭐냐 너나 나나 살아가는 모습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니 내가 왜 시간을 허비하면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딱 잘라서 말하자 기독교인 친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은 그 친구나 이웃에게 교회에 가자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곧 잘 다른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해 오곤 했습니다. 다른 교회 친구들이 어떻게 전도하는지 그 비법을 물어보았지만 그냥 웃을 뿐 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전도한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떤 감언이설과 선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 분은 저에게 어떤 좋은 교훈의 말이나 선물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다만 그 분의 사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 보았지요. 그러자 그 분은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한 번 예수님을 믿어보기로 결심하였지요.” 여러분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분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바로 그 분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 다시말하면 말로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예수님의 증인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이라 할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말씀하시고 능력과 권능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나에게 충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서 우리에게 계시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하여 그 분의 삶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성령님충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령님충만입니다. 단지 부흥회나 은사 집회를 통하여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가 성령님충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의 변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의 변화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충만을 지속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늘 체험하며 살게 됩니다. 그 분의 권능과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살게 됩니다. 성령님의 사람은 신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이 파악할 수 없는 아니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분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삶, 바로 그 삶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마음에 멍울이 날 정도로 우리에게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2. 본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름 아닌 성령님충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너무도 절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인간적인 호기심과 육적인 욕심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들의 모습들이 얼마나 똑같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금 내 생각은 어떤 것으로 꽉 차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삶의 모습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작심3일. 우리가 새로운 결단과 각오로 1998년을 시작한지 벌써 많은 시간들이 흘렀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런 다람쥐 채바퀴 돌 듯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약해서입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죄를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바로 성령님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야 그것은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힘이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증인이란 의미를 좀 더 넓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전도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이란 의미가 아니라 땅끝까지 도달하라는 의미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20,30여년 전에는 전도하기가 참 쉬웠습니다. 그때는 교회만 개척하면은 1년 안에 100여명이 모이는 것은 수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복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어덯게 해야 할까요 이제 말로 전도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축호전도나 노방전도를 하지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전도의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행조건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의 욕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말이야.’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어떻습니까 창피하지요 제발 이런 일이 좀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행동이나 말을 참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자기 친구에게 늘 같이 교회에 다니자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좋다, 싫다 말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으로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독교인 친구가 결사적으로 그 친구에게 매달리며 교회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너나, 안 다니는 나나 도대체 차이가 뭐냐 너나 나나 살아가는 모습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니 내가 왜 시간을 허비하면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딱 잘라서 말하자 기독교인 친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은 그 친구나 이웃에게 교회에 가자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곧 잘 다른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해 오곤 했습니다. 다른 교회 친구들이 어떻게 전도하는지 그 비법을 물어보았지만 그냥 웃을 뿐 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전도한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떤 감언이설과 선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 분은 저에게 어떤 좋은 교훈의 말이나 선물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다만 그 분의 사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 보았지요. 그러자 그 분은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한 번 예수님을 믿어보기로 결심하였지요.” 여러분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분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바로 그 분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 다시말하면 말로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예수님의 증인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이라 할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말씀하시고 능력과 권능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나에게 충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서 우리에게 계시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하여 그 분의 삶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성령님충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령님충만입니다. 단지 부흥회나 은사 집회를 통하여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가 성령님충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의 변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의 변화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충만을 지속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늘 체험하며 살게 됩니다. 그 분의 권능과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살게 됩니다. 성령님의 사람은 신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이 파악할 수 없는 아니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분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삶, 바로 그 삶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마음에 멍울이 날 정도로 우리에게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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