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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처음모습 (행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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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말은 명예로운 별명입니다. 요즘은 불명예스러운 별명 ‘예수쟁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초대교인들은 명예스러운 별명, 즉 ‘그리스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습니다. 이말은, 모인 교인들이 “우리 그렇게 부르자!” 하면서 하나가 동의하고 하나가 재청하고 그리고 다수가 결정하여 그런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예수이름으로 모여 오늘처럼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세상사람들이 볼 때 뭔가 다르게 보입니다. 말하는 것도 다르고, 행동, 상거래.진실에 있어서나 선량함에 있어서나 정직함에 있어서 뭔가가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며. “아니, 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야! 안디옥에 모이는 그 사람들 말야!” “아-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그 사람들 말인가” “저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일세!” 이렇게 한두사람 입을 거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소문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이 어느날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길가에 “브라우닝 시 감상회”라고 써붙인간판을 보았습니다. 자기시를 감상한다고 하니 고마운 마음 반 호기심 반 해서 슬그머니 들어가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사회자가 앞에서서 브라우닝의 대표적 시인 ‘아침’이라는 시를 멋들어지게 읽습니다. 그리고 풀이를 하는데 이 시에는 이런 의미가 담겼고 자런 의미가 담겼고.어쩌고 저쩌고 열심이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작가 브라우닝이 뒤에서 들으니 기상천외 기절초풍할 노릇입니다. 작자가 도무지 상상조차 못 할 엉뚱한 의미를 붙여대며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말하는데 참으로 가관입니다. 듣다못한 브라우닝, 벌떡 일어나 사회자에게 말합니다. “사회자님, 미안하지만 그 시는 그런 의미보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자리에는 브라우닝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말하기를 그런 무식한 말은 하지 말라고 작자를 보고 오히려 무식하다고 핀잔을 줍니다. 사회자가 그러니까 청중도 따라서 사회자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무식하게 당신이 뭐 안다고 무식하게 나서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브라우닝이 얼굴이 벌개가지고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오늘 교회에 주님이 찾아오신다면 정말 주님 마음에 맞는 교회, 주님 마음에 맞는 교인이라시며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기가막힐 꼬락서니를 보고.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 “내가 언제 이렇게 가르쳤어!” “내가 언제 이렇게 하라고 시켰어!” “도대체 이게 뭐야!” 하시며 탄식하실까요 오늘 교회와 그안에 있는 교인을 살펴보시는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실까요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지난주일에는 교회의 첫 모습이 이러이러 했다고 몇가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주보참조) 오늘은 이어서 그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인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초대교회의 교인의 모습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흔히 우리는 숲을 보면서 나무를 못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보면서 교회 구성원인 교인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할 근거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초대교인의 모습을 살피면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그 때 그 교인들의 모습과 닮았는가 그렇지 못한가 교회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이자리에 오셔서 한사람 한사람 살피면서 기가막혀 탄식하시는 말씀, 이게 뭐야! 공자 제자야 석가 제자야! 미신 제자야 과학 제자야! 이게 뭐야! 주님이 깜짝놀라시며 탄식하실 수 밖에 없는 내 모습은 아닌가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처음 신자의 모습은 세상사람들이 볼 때 보통사람 같지 않아 붙여준 별명이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별명이 무엇인가 혹시 예수믿는 것보다 먼저 인격이나 고치라는 소리는 듣고 있지 않는지, 예수믿는것보다 복장, 말, 행동, 심보.부터 고치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이천년 긴 긴 세월 지나오면서 의미는 잊어버리고 형식만 남은 이교회가 아닌 지, 이천년 긴 긴 세월 내려오면서 신자(christian)는 사라지고 교인(churchman)만 득실거리는 오늘의 교회가 아닌지
1. 그래서첫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먼저 초대교인의 모습과 같이 변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리적인 사람, 즉 자연인을 종교적으로 훈련시키면 교인이 됩니다. 그러나 생리적인 자연인을 성경과 성령님을 통하여 변화시키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과 신자는 다릅니다. 교인은 종교적인 신분을 가졌거나 종교적 교육을 받았거나 종교적 관념이 분명하면 그는 교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자들이요 그렇기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격이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자격입니다. 이는 인격이 변해야 받는 자격입니다 품성이 변해야 받는 자격입니다. 생활이 달라져야 받는 자격입니다. 해방직후 이범석 장군이 한국 청년을 불러모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때 그 단체를 ‘민족청년단’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애국애족으로 훈련시켰는지 거기서 교육을 받고 나오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걸음걸이도 반듯하고, 말하는 것도 분명하고, 행동도 조금도 벗어남이 없습니다. 상거래도 아니면 아니고 그러면 그렇고.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니, 저사람 누구야 몇 주 안보이더니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아 저사람 말야, 저사람이 바로 족총이야 족청” 물론 나쁜의미도 다소 있었지만 거기에서 교육받고 나온 사람의 별명이 바로 ‘족청’이었습니다. 민족청년단을 줄여서 ‘족청’ ‘족청’ 그랬답니다. 세상사람들이 족청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오늘 교회를 드나드는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별명을 지어줄까요 어떤 사람은 믿는 사람들은 다 야바위꾼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야비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이 다 야바위꾼은 아니지만 얼마나 믿는 사람들에게 당했으면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에는 누구나 다 고민스러운 세가지가 있는 법입니다.
첫째, “내가 왜 이모양 이꼴이야!” 자기 모습을 살피며 초라한 자기 모습에 대한 열등감, 수모감, 부끄러움, 한심스러움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둘째로 이와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은 뭔가를 변해보려는 욕망의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보다 낳은 내가 되어야 겠다.” “보다 선량한 내가 되어야 겠다.”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겠다.” “원치않는 악을 안행하는 내가 되어야 겠다.” “보다 진실하고 정직한 내가 되어야 겠다.” 뭔가 변해 볼려고 하는 욕망의 갈등, 이것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갈등이요 고민이요 사람치고 이것 없으면 짐승과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셋째 고민은 그러면 그 방법이 뭔가 그 길을 찾느라고 방황합니다. 이 종교에가서 물어보기도 하고, 저 종교에 가서 물어 보기도 하고. 공자님에게 물어 하루 세번 반성도 해보고, 석가님에게 물어 참선도 해보고, 그러고도 안되면 손가락을 짤라 혈서도 써보고 맹세도 해보고 결심도 해보고하는 몸부림 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면 이 절실한 괴로움, 아름다운 괴로움. 과연 이 괴로움은 성취될 수 없는 꿈일까요 잠꼬댈까요 올라갈 수 없는 나무일까요 역사 이래로 사람들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수 없이 수 없이 발버둥쳐 왔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집약된 것이 바로 종교요 그래서 종교없는 민족 없고 종교없는 사회가 없는 것입니다. 아덴과 같은 곳은 학문의 도시요, 예술의 도시요, 철학의 도시요, 과학의 도시요, 교육의 도시이지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인간의 절실한 욕망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나타난 것이 종교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신 저신 다 섬겨보고 그래도 안되니까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만들어 놓고 몸부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바로 알려주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알지못하는 신을 섬겨가며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에게도 그러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서 그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절실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영생을 얻어 변화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성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주셨습니다. 교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옆에 앉아계신 귀한 성도를 주셨습니다. 오늘과 같은 예배시간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양심의 갈등과 고민속에 있던 초라한 내 모습을 변화시키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이라는 곳은 이방도시입니다. 종교전통의 도시도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이스라엘의 도시도 아닙니다. 완전히 이방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요 그렇기에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백성들이지만 전도자를 통해 큰 무리들이 모여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성령님과 말씀으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변화되니 인격도 변하고,품성도 변하고,생활도 변하고변화된 모습을 보고 안디옥 사람들이. “아니 저게 누구야” “저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 다니는 아무개란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어 좋은 별명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원합니다. 어떠 사람은 그랬답니다. 어떤 사람이 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기봐라, 작은 예수 걸어간다. 작은 예수가 거리에 나오셨네!” 아예 별명을 작은 예수라고 했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별명이 따라야 하겠습니다. 시장에 앉아서 비단장사를 한다고 합시다. 소문이 나기를. “그 작은 예수 집으로 가거라. 그집에 가면 틀림없다더라. 물건 속지도 않고 최고 좋은 것만 주더라.” 그러면 사람들이 마음놓고 모여듭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바로 이런 별명듣는 것이 사회에 소금되고 빛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안디옥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받았으니 그 이유가 변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변회되어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으시 기를 바랍니다.
2. 그러면 이렇게 변화받은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확신으로 살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라는 이 확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확신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라는 감격과 즐거움에 넘치는 이 확신, “내가 우주안에 누구냐” 그 확실한 신분을 아는 사람의 당당함입니다. 과학자는 사람을 가르쳐 “우주안에 무엇(성분)이냐”를 말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냐가 아니라 “우주안에 누구(신분)냐”입니다. 우리는 우주안에 누구입니까 바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과학은 인간을 끌어내려 우주안에 한 물질로 보고 무엇이냐고 말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우주의 황태자입니다. 이는 천사가 부러워 하는 신분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절하는 신분입니다. 하늘이 날 위하여 있고, 땅도 날 위하여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도 날 위하여 있고, 역사도 날 위하여 있는.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이 긍지와 자부심, 이 신분이 분명할 때 따라오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꺽지 못하는 당당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만사형통 운수대통한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칼에 목이 짤려 죽기도 하고, 스데반과 같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환경속에서라도 당당했으니 이는 안일속의 당당함이 아니라 안전속의 당당함이었습니다. 안일속의 당당함이란 무엇입니까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무사태평하여 잘 잠 다자고, 놀것 다놀고 허리츰에 손 집어 넣고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가는 당당함이 안일속의 당당함이며 이런 당당함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퇴페만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안전속의 당당은 나는 비록 약하지만 내 뒤에 백이 든든하기에 오는 당당함입니다. 마치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자기 뒤에 계시기에 자기보다 큰 아이에게 큰소리 치는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 로마정부야 네가 나를 어쩔꺼냐”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 네로야 네가 나를 어쩔꺼냐” 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신분속의 당당함, 그것이 바로 초대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당당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이 베드로를 붙잡아 놓고 “이느무 자식, 왜 자꾸 예수얘기 하느냐”고 공갈 협박했지만 베드로 하는 말 들어보소. “하나님앞에서 너희들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중 어느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을 해보라.”고 냅다 내 질렀던 그 당당함,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안일속의 당당함입니까, 안전속의 당당함입니까 우리는 어려운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세상에.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덕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 갈 것입니다. 잘살면 잘 살수록 더 살벌하고 참혹한 세상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서도 도전하며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닙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자기 신분에 따른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8:4이하를 보면 믿음의 이유로 핍박을 받아 초대교인들이 그냥 사방으로 도망가고 피난을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피난할때 고생스러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두고온 재산(냉장고,세탁기.) 얘기 하는것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입만 뻥긋하면 얘수얘기 나오고 하나님얘기 나오고.하는데, 왜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감격한 신분이 속에서 부글부글 타오르니까 입만 벙긋해도 나올 수 밖에., 속에 돈이 부글부글한 사람은 입만 벌렸다 하면 돈얘기, 속에 욕심이 불글부글한 사람이 입을 벌렸다 하면 욕심얘기.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입만 벌리면 그것이 나오는데 초대교인들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가 가득찼기 때문에 입만 벌리면 예수얘기 하나님애기 했던 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삶의 촛점을 영혼에 맟추며 살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돈을 얼마나 벌까” 그것 생각한것 아니라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은 “오늘도 내 영혼 때묻히지 말아야지!” “오늘도 내 심령 하나님과 관계 끊어지지 말아야지!” “오늘도 내 심령 상처입지 말아야지!” 이것이 아침에 눈을 뜨면서 걱정하는 바였고 부귀영화 못누려도 영혼의 순결이요, 안일향락 못누려도 영혼의 윤택이요 그것 위하여 초대교인들은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몸뚱아리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영혼을 먼저 하고 육체문제를 나중에 하라고 했습니다. 중히 다룰 것과 가볍게 다룰 것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영혼의 문제는 중하게 다루고 몸의 문제는 가볍게 다루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분명히 삶의 촛점을 100년인생에 맞추어 살지 아니하고 영혼에 맞추어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즐거움을 구하는 시간보다 영혼의 순결함을 구하는 시간에 더 열열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잡지 읽는 시간보다 성경읽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말입니다. TV보는 시간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촛점을 어디에 맞추는냐’의 생활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언제나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들에게도 이러한 초대교인들의 모습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슈바이쳐 박사같은 사람은 음악박사에, 철학박사에, 의학박사에.박사학위가 세개나 있어 유럽의 유명한 대학들이 서로 교수로 초빙하고자 안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아프리카 밀림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 병원을 짓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병원을 운영하기에 돈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쳐는 유럽으로 돈을 모으러 떠났습니다. 슈바이처는 파이프 올갠을 직접 제작, 연주하리만큼 음악에 있어 천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파이프 올갠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연주해 주기도 하고 해서 돈을 모음니다.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모으려고 밤이면 삼류여관에 들어가 때묻은 이부자락 뒤집어 쓰고 한쪽 구석에서 꾸부리고 잡니다. 그리고는 아침이면 툴툴털고 일어나 삼등기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궁상맞게 그러느냐고.,그렇게 많이 버는 돈중 조금만 편하게 쓰면 어떠냐고. 그 때 슈바이쳐는 말하기를 그 돈중 한푼도 날 위해 쓸돈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 열차라도 삼등칸을 타지 말고 일등칸을 타고 편하게 여행하라고 하니까 사등칸이 없어서 삼등칸 탄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남에게 베풀고 십자가에서 받은 은총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의 삶의 촛점이 있었고 또한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계 노벨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초대교인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이와같은 모습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셋째, 그들의 삶은 매우 바빴습니다. 행2장을 보면 그저 한마디로 “되게 바빴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면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공부하고, 설교듣고, 성찬식 행하고, 때가 되면 큰 솥에 밥해 가난한 사람들 먹이고, 구제사업한다고 돌아다니고, 전도하러 다닌다고 돌아다니고. 이거 얼마나 바빴는지 모릅니다. 어차피 바쁜 인생, 주님위해 바빠보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바쁜 인생, 변화받은 하나님의 아들고 딸답게 바빠보자는 것입니다. 시간의 의미와 가치는 길고 짧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곳에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래산다고 가치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산 기간동안 얼마나 주님위해 바빳느냐가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시간을 돈이라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아들 딸에게는 시간이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바쁘게 바쁘게 좀더 하나님을 위하여 써보자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 처럼 말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주님을 위해, 영혼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주 바쁘게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집고 넘어갈것은 그렇게 바쁘게 살았으면서도 집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집에서 할 일을 다 했다는 말입니다. 집안에는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교회일로 바쁘다는 것은 그리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집안은 돼지우리 같으면서 기도원이니 부흥회니쫒아다니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식구들 굶기지 않았고 남편들은 깨끗한 옷 입혀 출근시켰고 집안은 항상 깨끗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말을 맺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을 보고 뭐라고 부릅니까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신자의 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달랐기에 별명이 붙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 의해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에 의해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게, 동료에게게, 부하직원에게게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친구에게서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아니 저 사람 누구야” “그리스도인이래!” 하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변화된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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