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행1:1-11)
본문
사도행전의 시작은 본문에서 밝힌 바대로 누가복음의 속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중심하였다면,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복음증거에 관한 선교의 역사를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인 로마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발생과 성장을 기록하면서 특히 성령님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초대교회 성장사 사도들의 선교역사 성령님의 활동사 또는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님의 행전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의 원리로서 복음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선교를 통한 구속의 적용으로서 복음을 전파한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적으로는 복음서에서 서신으로,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에서 그리스도교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율법에서 은총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오직 유대인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왕국에서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역할을 하는 중요한 책인 것입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제자들은 모두 각기 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까지 사십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며 다시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는 생명의 위협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고기잡으러 고향으로 가버렸으며, 두 제자는 엠마오로 내려갔던 것이며, 마가 요한은 잡혀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다가 베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달아나야 했던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드러내는 피하고 싶은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피하는 재주가 아니라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고사하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너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처럼 이 환경과 처지에서 벗어나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쉽게 받습니다. 그러나 옛 속담에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답니다. 장소와 사람들이 바뀌었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이 전혀 새롭게 될 것 같습니까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저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하면 환경과 사람들도 변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실패하고 무너진 그 자리를 피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루신 일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를 따라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문제는 어느 장소 어떤 사람과 함께 있었는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수가성에 있는 우물가에서 여인이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1-2
4).
2.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님)을 기다리라! 성령님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여러분과 저는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로 인하여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함으로서,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상 받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증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내고 있습니까 사람의 뜻으로 장담을 하면서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 보았지만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결심과 의지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을 때에라야 성도가 성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성령님을 받을 때에 옵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은 오늘도 계속하여 믿는 자에게 임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며, 구원의 기쁨을 알게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하고, 성도가 마땅히 행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또 여러가지 은사를 주셔서 교회로 교회답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를 이루는 성도는 반드시 성령님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님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기까지 전혀 기도에 힘쓰면서 기다리던 제자들처럼, 약속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사모하여 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은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을 배웁니다. 요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빨리빨리가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세대를 살아가다 보니 참지를 못합니다. 인스탄트 식품처럼 마음 먹은대로 즉석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야 직성이 풀립니다. 신앙생활도 기대하고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으면 교회를 옮겨다닌다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바로 바로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라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제자들이 성령님강림을 기다렸고, 오늘 우리는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삽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참는다는 말입니다. 참음이 없는 기다림이란 없습니다. 농부가 무우밭에 무우씨를 뿌려놓고서 날마다 땅을 헤집어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확인하려든다면 살 무우가 어디있겠습니까! 지금은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니뵈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 없어도 거름을 주고 물을 대주고 김을 매는 부지런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처럼 여러분과 저도 심고 기다리십시다. 그 이름 예수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한 일이 쌓여도, 오히려 예수를 믿고난 후에 물질적으로 축복은 커녕 어려움이 더해지고 문제는 풀리기보다는 더 어렵게 꼬이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참아 기다리십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3.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승천은 재림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승천은 재림을 준비하시기 위한 기간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3,18). 이 재림의 약속이 있기에 성도된 우리가 열심을 품고 주를 위해 사는 증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살다가 죽어도 좋을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수의 복을 받았다고 해도 길어야 팔십 인생을 넘기기가 쉽지않는 법입니다. 어떻게 살던지간에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인생의 마지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연연하여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신비한 세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한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하늘에 소망을 둔 여러분과 저를 문제 많은 저 세상으로, 핍박과 고난을 줄로 묶는 사람들에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사유화(私有化), 사제화(私製化)를 벗어나서 이웃을 위해 부름받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증인이란 말입니다. 성도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하는 것을 목숨을 내놓고 증거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증인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다시 오실 그 날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그 날에는 방언도 그치고 예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고 오직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도 주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본래의 내 모습을 찾게 될 것이고 진짜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참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를 고대했던 목자들처럼 별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동방박사들처럼 오늘 우리도 오실 심판주 예수님을 고대합시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제자들은 모두 각기 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까지 사십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며 다시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는 생명의 위협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고기잡으러 고향으로 가버렸으며, 두 제자는 엠마오로 내려갔던 것이며, 마가 요한은 잡혀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다가 베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달아나야 했던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드러내는 피하고 싶은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피하는 재주가 아니라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고사하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너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처럼 이 환경과 처지에서 벗어나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쉽게 받습니다. 그러나 옛 속담에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답니다. 장소와 사람들이 바뀌었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이 전혀 새롭게 될 것 같습니까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저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하면 환경과 사람들도 변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실패하고 무너진 그 자리를 피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루신 일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를 따라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문제는 어느 장소 어떤 사람과 함께 있었는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수가성에 있는 우물가에서 여인이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1-2
4).
2.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님)을 기다리라! 성령님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여러분과 저는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로 인하여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함으로서,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상 받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증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내고 있습니까 사람의 뜻으로 장담을 하면서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 보았지만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결심과 의지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을 때에라야 성도가 성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성령님을 받을 때에 옵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은 오늘도 계속하여 믿는 자에게 임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며, 구원의 기쁨을 알게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하고, 성도가 마땅히 행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또 여러가지 은사를 주셔서 교회로 교회답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를 이루는 성도는 반드시 성령님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님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기까지 전혀 기도에 힘쓰면서 기다리던 제자들처럼, 약속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사모하여 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은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을 배웁니다. 요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빨리빨리가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세대를 살아가다 보니 참지를 못합니다. 인스탄트 식품처럼 마음 먹은대로 즉석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야 직성이 풀립니다. 신앙생활도 기대하고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으면 교회를 옮겨다닌다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바로 바로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라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제자들이 성령님강림을 기다렸고, 오늘 우리는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삽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참는다는 말입니다. 참음이 없는 기다림이란 없습니다. 농부가 무우밭에 무우씨를 뿌려놓고서 날마다 땅을 헤집어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확인하려든다면 살 무우가 어디있겠습니까! 지금은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니뵈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 없어도 거름을 주고 물을 대주고 김을 매는 부지런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처럼 여러분과 저도 심고 기다리십시다. 그 이름 예수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한 일이 쌓여도, 오히려 예수를 믿고난 후에 물질적으로 축복은 커녕 어려움이 더해지고 문제는 풀리기보다는 더 어렵게 꼬이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참아 기다리십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3.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승천은 재림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승천은 재림을 준비하시기 위한 기간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3,18). 이 재림의 약속이 있기에 성도된 우리가 열심을 품고 주를 위해 사는 증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살다가 죽어도 좋을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수의 복을 받았다고 해도 길어야 팔십 인생을 넘기기가 쉽지않는 법입니다. 어떻게 살던지간에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인생의 마지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연연하여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신비한 세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한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하늘에 소망을 둔 여러분과 저를 문제 많은 저 세상으로, 핍박과 고난을 줄로 묶는 사람들에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사유화(私有化), 사제화(私製化)를 벗어나서 이웃을 위해 부름받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증인이란 말입니다. 성도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하는 것을 목숨을 내놓고 증거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증인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다시 오실 그 날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그 날에는 방언도 그치고 예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고 오직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도 주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본래의 내 모습을 찾게 될 것이고 진짜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참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를 고대했던 목자들처럼 별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동방박사들처럼 오늘 우리도 오실 심판주 예수님을 고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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