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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은혜 (행10:1-33)

본문

사람은 만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남으로 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인생이라는 삶을 시작합니다. 부모와 만남으로 보호와 관심과 사랑을 받아 누리며 자랍니다. 또 형제들과 친척들을 만나며 이웃과 친구들을 만납니다. 선배와 후배를 만나며 스승과 제자가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 속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만남이 있고 또 파멸로 인도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성도와의 만남이 있고 불신자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의 만남이 있고 주 밖에서의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때로는 의미 있는가 하면 무의미한 만남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진실로 아름다운 만남을 보아야 합니다. 그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베드로와 로마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와의 만남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한 것은 단순히 지켜지는 예의바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뜻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유대인과 로마인이 함께 하는 만남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람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이 왜 아름다운 만남이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의 만남들은 어떤 만남이 되어야할까요
1. 우리는 만남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와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낮 12시에 자기집 지붕 위에서 기도하던 도중에 환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선민으로서는 도저히 먹어서는 안되는 가증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먹지 아니하려고 했고 공중에서 나는 소리는 계속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끝까지 먹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열납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잘 몰라 고민하던 차에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맞추어 로마 사람인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명대로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군대 백부장으로서 전투 군대 100명을 거느리고 수도 예루살렘을 경비하며 치안을 담당한 군대 장군이었습니다. 또 착한 사람인지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또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며 돌보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칭찬하며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이요, 이방인이요, 속된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였기 때문에, 비록 요청이 와도 상종할 수 없었습니다. 가야 할까 안가야 할까 이것이 베드로에게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지시대로 순종하여 고넬료를 만났는데 세상적으로 볼 때 최대의 권력을 지닌 군대 장군이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속히 일으켜 세우면서 나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유대인이요 당신은 이방인으로서 같이 교제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위법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셨음으로 나와 당신의 관계를 속되다 하지 않을 터이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가를 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싶었고 또 그분을 영접하고 믿기를 원하였습니다. 신앙의 유산과 믿음의 계승을 갖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베드로에게 엎드려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신앙과 성품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높은 신분을 가지고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만, 고넬료는 자신들이 정복한 식민지의 나라의 신앙을 가졌고, 기도를 배웠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므로서 그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즐겨 해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기도가 살아 있습니까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고넬료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상생활 중에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일을 다하고 남아도는 시간에 잠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남는 시간에 자신의 일들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는 고넬료를 보신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베드로를 통하여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열린 창과 사람을 향하여 열린 창을 기자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했던 고넬료는 그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고넬료의 집으로 파송하시고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하셨고 복된 진리의 말씀을 온 집안에 증거 하였습니다. 이제 같이 연합하여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는 전도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와 고넬료와의 만남은 하늘의 비밀과 복음이 전파되는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임하며 구원을 받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수많은 이방인들을 만남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대부분이 세상 이야기로만 하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유익하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대화가 우리들 사이에 오고감에도 세상은 여전히 문제 투성이며, 여전히 영적 기갈로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들의 대화 속에 복음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또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사이에도 베드로와 고넬료와의 관계와 같이 되기를 주 이름으로 원합니다.
2. 우리는 만남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출15:1)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던지셨음이로다 (출18:10)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대상23:30) “새벽과 저녁마다 여호와께 축사하며 찬송하며” (대상25:7)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대하5: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대하7:6) “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레위 사람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느5:13)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욥1:21)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적신이 돌아 가올지라도.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36:24)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시27:6)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30: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주를 찬송하며.” (시33:1)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35:28) “나의 혀가.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67:5) “하나님이여.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68:32)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시69:34)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 지로다” (시74:21) “학대받은 자.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사62:9)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욜2: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눅19: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눅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엡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약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계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여기 찬송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바라크'로서 '무릎을 꿇다, 송축하다'는 뜻으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와 성도와의 만남들은 하나님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며, 기쁨이 충만하며, 거듭남과 변화됨과 구원받았음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만남이 있지만 그 만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만나지는 만남입니다. (창14:19-20)의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처럼, (눅2:20)의 아기 예수와 시므온의 만남처럼 오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만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웃과 만나서 남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내용을 주된 대화로 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만남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헛된 자랑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말을 은연중에 자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아름다운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예화) 어느날 로마의 황제 시이저는 친구들과 귀족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데 잔치를 베풀기로 한 날짜에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그만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시이저는 활 가진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인 “주피터”를 향해 활을 쏘도록 했습니다. 나쁜 날씨를 준데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명령대로 하늘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조금 있으니 하늘에서부터 화살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병사들이 쏘았던 화살이었습니다. 그 화살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활 쏜 자들의 머리에 도로 떨어지고 다치게 하고 죽이게 하는 화살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자고나, 교만이나, 상처를 주는 말의 화살은 자기 머리 위로 쏘아 올린 화살과 같습니다. 결국은 조심성 없이 마구 쏘아 버린 무성한 말의 화살이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화는 세상의 말과 같이 헛되고 무익하며 어리석은 말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추구해야 할 바에 대해 말씀하기를, (시33: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헛된 자랑과 비방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만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를 사랑하며 신뢰하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넬료는 수도 경비 군대의 100명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입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인입니다.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에 살면서 또 높은 신분으로서 살아가는 대단한 고급 군인입니다. 보편적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이러한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겸손하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고넬료에게 임할 때에 그 사랑으로 인해 자기의 모든 자존심과 위치를 무시하고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을 하였던 것이다. 또 베드로도 당시 유대 법으로는 이방인들과 상종해서는 안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상종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 오해가 될 경우에는 제명 출교까지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욱이나 자기의 나라를 지배하는 적대국가요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군대 장군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의 민족간에 쌓여진 불신의 견고한 담을 허물어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 체제는 반드시 무너지는 것과 같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아직도 포용과 수용하는 자세가 되지 못하면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양보할 줄 아는 포용성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폐쇄된 세계관 속에서 머물고 있는 이유는 변화된 세계에 복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폐쇄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과거 교회 역사를 보면 철저하게 잘 믿어 보려는 정신으로 출발했던 에세네파나 은둔 주의자들은 그들의 높은 경건 성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사회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파멸되고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엣세네파의 교회는 문을 닫아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에 베은 낡은 구습에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신념과 관념과 구습을 버리고 고넬료를 만나기 위해 고넬료의 집까지 왔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의미 있는 만남입니다. 만나질 수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하여 온전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애를 썼던 고넬료의 집안에, 그리고 후에는 로마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빛이 비춰 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아는 사람끼리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성격과 수준과 환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용납될 수 없는 관계를 용납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같이할 수 없는 관계를 초월하여 같이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삶의 우선 순위에 사랑이란 말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 “사랑은 모든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를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상대방을 위해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단지 생각으로만 그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을 해 나가는 단계적인 것입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라” 말씀 속에서 “열심이란” 본래 운동장의 경주자가 달려갈 때 목표인 마지막 라인인 줄 앞에 서서 자기의 팔을 최대한으로 펼쳐 그 목표를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성도의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면 달리기 선수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골라인을 잡는 그 순간과 같이 서로 열심을 다하여 실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만남의 시간들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만남은 두 사람을 모두 유익하게 하는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만남과 속 알맹이가 없는 만남을 버리고, 우리는 진솔한 만남,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만날 때 내가 얻을 이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내가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사랑과 신뢰에 근거한 관계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내가 사랑과 신뢰를 보낼 때 상대방은 그것을 확실히 감지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더 나은 사랑과 신뢰를 나에게 되돌려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주변이 복되고 아름답게 바뀌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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