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성경 (딤후3:15-17)
본문
한국 교회는 개신교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로 삼고,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애독하고, 성경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성장하였다. 한국 교회가 역사에 유례 없이 급속히 성장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많이 읽고 공부한 데 있었다는 것을 자인한다. 한국 개신교는 이제 선교 110년을 넘기면서,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신 성령님의 큰 사역에 감사를 올리면서, 이제는 유아기(幼兒期)를 넘어서 자주적인 사고를 하며 판단을 해야 할 청년기에 접어들었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다. 과거에는 초기 선교사들과 선배 교회 지도자들이 먹여 주는 대로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먹고 자랐다. 우리는 충성스런 선배들의 노고와 성의를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청년기에 접어든 우리들은 모든 것을 새로운 각오에서 관찰하고 보다 정확하게 사실대로 인식해야 할 시기에 도달했다. 누가 말하니까 그냥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판단을 통해서 자각을 해야 할 때가 됐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어린 아이들이 3-4세가 되면서 "이것은 뭐야왜 그래" 하고 사사건건 알려고 하는 것을 본다. 이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도 보다 성장한 현상으로 성경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물음을 가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인류역사에 있어서 천동설(天動說) 시대를 지나 보낸지가 얼마 안된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의례 해가 떴다 진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결국 직관(Intuition)을 토대로 해서 사물을 관찰하는 시대를 살아왔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손에 만져지는 대로가 사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눈에는 확실히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으로 보이니까 보이는 대로 천동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 본 결과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는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동설이 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직관적인 판단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됐다. 우리는 태양 빛이 어떤 색깔이냐고 물으면 `무색(無色)'이라고 보이는 대로 말한다. 확실히 우리 눈에는 무색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태양 광선을 분석해 보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렇게 7색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과 자외선이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이렇게 여러 색깔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우리 눈에 무색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의 직관은 여기서 착각인 것이 틀림없다. 뉴우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중력(重力)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법칙을 발견했다. 보통 사람은 물건이 마구 아무 법칙이 없이 그냥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고 보았지만, 과학자의 눈에는 그리고 그의 과학적 계산에는 확실히 어떤 법칙이 보였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은 뉴우턴의 중력 법칙을 뒤집어 버렸다. 어떤 물건을 놓으면 지구로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고 사실은 복잡한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진다는 것을 아인쉬타인은 발견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자들도 많은 경우에 착각을 저지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찰을 두고 생각해 보자. 과거의 기독교인들이, 특히 천동설 시대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직관에 의해서 판단하며,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이 사실이요 진리라고 생각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액면대로, 즉 읽는 자의 직관적 판단에 입각하여 그대가 사실이요 그대로가 진리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또 성경에 대해서 과거에서부터 전해지는 어떤 의견, 판단, 즉 전통을 듣는 대로 그냥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항해하는 배가 바다 표면에 나타난 빙산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수면에 나타나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상 물 속에 있는 얼음의 부분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다. 만일 그것을 무시하고 빙산에 대수롭지 않게 접근한다면 배는 파선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성경을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직관적으로, 표면을 보면서 그것이 진리의 전부라고 판단하기 쉽다.
고대의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불변의 진리인 양 결정적인 명제를 전해 주며, 그것만이 진리이니 그것을 벗어나면 이단이라느니 비진리라느니 하면서 겁을 주고 위협까지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계몽 시대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과학 발달, 학문 발달의 축복을 허락하면서 사물을 직관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 철저히 과학적으로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사실을 밝히는 기술을 주셨다.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인간에게 주셨다. 어느 하나도 그냥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만져지는 대로를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사실을 과학적으로 조사, 분석, 검토하며 실제를 밝혀 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오늘의 이 방대한 과학 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그리고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이며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어서,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는 말의 본 뜻이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질서 있게 만드셨고 그 질서는 진리이며 그것이 곧 `좋음'이요 '아름다움'이다) 인간이 과학을 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바라시는 일이다. 인류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지성이 발전하였다. 과학이 발달하여 오늘의 고도의 문명을 만끽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는 누구도 야만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도보로 걸어다니던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 컴퓨터 시대에 누가 주먹구구를 하는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겠는가 이제 다시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로 돌아가 보자. 계몽 시대를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직관대로 보지 않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운동을 하였다. 성경을 그냥 읽고 직관대로 전통대로 믿고 말던 태도를 벗어나서 여러 각도로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바로 성서학이다. 성경을 `학'적으로 연구하는 노력을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다. 성경은 그러나 구라파에서 이런 학문적 성경 연구가 진행될 때, 한편에서는 그런 노력을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여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노력도 속되었다. 성경을 비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냥 믿고 기도하면서 읽고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영해를 하면 그만이지, 달리 인간의 이성으로 왈가왈부 따지고 비평하는 것은 모독스러운 일이고 불신앙의 소치고 심지어 마귀의 장난이라고 판단하는 그룹이 학문적 연구 그룹과 병행하여 오늘까지 존속한다. 즉 지동설을 정설로 받아들여 과학 문명을 구가하는 현대에도 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우기며 학문을 무시하는 전근대적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고, 아니 때로는 우리들이 그 부류에 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은 거의 전부가 보수적인 분들이고 거의가 학문을 많이 하지 않은 열심파들로서 근본주의적 성경무비판론자들이었고, 우리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아직 비과학적이고 무비판적이어서 선교사들이 무비판적 성경 교육은 오히려 순조롭게 환영을 받고 피상적이지만 많은 효과를 가져왔다. 즉 성경을 많이 읽고 표면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고 암송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성경 퀴즈 대회에 출전하며 아마도 그랑프리를 받을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비판적으로 깊이 읽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오늘의 현상은 신학대학에서 성서학자들이 구미의 성서학의 이론을 소개하고 `이런 것이 있다'는 정도로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내 것을 삼고 삶의 풍성함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냥 이론적으로 머리에만 남아 있는 정도이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는 말이다. 한국의 많은 신학교에서는 이러한 학문적 연구를 아예 적대시 내지 죄악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천동설 시대에, 문화사적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사상적 야만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좀 개명됐다는 신학교에서도 교실에서는 여러 가지 성서학 이론을 가르치지만 그것이 신학생들 자신의 신앙과 생활에까지는 적용되거나 활용되지 않고 있으니, 하물며 교회 일반 수준에는 어떠하랴. 과거는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한국 교회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을 하며 그 풍성한 진리를 바로 깨달아 생명의 윤택과 풍요를 누리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대개 성경을 이원론적으로 관찰해 왔다.
즉첫째는 표면적 축자적 이해를 했다. 성경을 그냥 읽고 곁으로 나타난 것을 일률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판단했다. 역사적 사실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은 역사적 사실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꼈다.둘째는 소위 영해로서, 주관적으로 그럴듯하게 우화적으로 해석을 붙인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제멋대로 해석해 버린다. 결국 사람에 따라 해석도 달라지고 만다. 전혀 학문성이 없는 엉뚱한 해석을 하며, 따라서 많은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공부한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그냥 일고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고, 좀 더 생각하는 사람, 좀 더 상상력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다 무엇이건 간에 갖다 붙여서 멋대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니 뭐가 어렵겠는가 성경에 대한 이런 태도 때문에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는 일이 아주 쉬운 일이라고 판단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지망하게 된 것이다. 성격을 직관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사실로 말하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해석을 붙이면 되는 판이니 누군들 못하겠느냔 말이다. 국민학교밖에 안나온 사람도 한글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읽는 대로 말하고 무슨 소리든지 그 본문을 가지고 말하면 되니 어려울 것이 뭐냐는 말이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신학교들이 성경을 그렇게 쉽게 다루고 있다. 원시시대, 천동설 시대에 사물을 판단하는 식으로 성경을 그냥 읽고 암송하고 겉만 알고 마구 해석을 붙이는 그러한 성경 교육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깊고 오묘하며, 인간의 섬세한 학문적 연구를 다 동원해도 그 내용을 다 알기 어려운 복잡하고도 신비스러운 것이다. 평면적으로만 성경을 다룬다면 그 깊은 속을 알지 못하게 된다. 다원적으로 구성된 성경이기에 여러 각도에서 연구해야 한다.
1. 한국 교회는 대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들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좀 더 솔직히 우리가 읽는 한글 성경을 학문적으로 검토해 볼 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제대로 옮겨져 있으며 얼마나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이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원문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길 때 결코 원문의 뜻을 100% 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번역해도 원문의 뜻을 80% 내지 90% 밖에 옮기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번역자의 무지나 실수로 인해서 원 뜻과는 상당히 다른 해석을 붙여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번역 성경 자체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면서 얼마나 성실하고 믿을 만한 것인가를 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문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원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를 알아야 한다. 그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우리는 한국에서는 신학교에서 형식적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친다. 졸업하고 나면 그 언어의 알파벳도 기억에 남지 않고 만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활용할 만한 지식이 되도록 그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별로 없다. 독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Gymnasium)에서 고전어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경우와는 너무도 다르다. 우리들은 겨우 번역 성경을 읽고 그것을 원본과 대조하면서 비판할 실력을 못 가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번역 성경의 문제점을 알아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하나님의 말씀의 가감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어찌 학문적 노력 없이 될 일인가 성경을 그냥 읽으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직무유기적, 직무태만적 태도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우리가 성경의 원본으로 돌아가 볼 때, 우리가 가진 원어 성경은 소위 비평판 성경(Criticali zation)들이다. 구약 성경도 여러 개의 비평판 원문 성경들이 있다. 키텔(Kittel)의 Biblia Heb rai ca가 있고, 근자에 나온 Biblia Hebraica Stutt gartensia가 있고 Qumran Text도 있다. 신약 원문에도 근자에 나온 Nestle-Aland 제27판, UBS에서 나온 The Greek New Testament 제4판 등 수많은 비평판 성경이 있다. 우리는 그냥 번역판을 쉽게 읽고 있지만 원문비평학(하등비평)에 입각해서 보다 정확한 성경을 얻어 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번역 성경 배후에 있는 이 원문비평판 성경에 대한 연구를 도외시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거나 비평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서 볼 때 수많은 사본들을 검토하여 보다 정확한 원문 성경을 얻으려는 노력을 어찌 무시하거나 등한시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구미의 학자들이 우리 대신 피땀 흘려 노력하고 있기에 우리가 지금 훌륭한 비평판 성경을 가지게 됐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새 번역을 할 수 있고, 보다 나은 번역 성경을 가질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이 분야에 연구를 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 분야의 연구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경을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3.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건을 사람들을 통하여 해석하고 사람들을 통해서 문서화하고 사람들을 통해서 수집한 책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요소가 성경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역사적 검토와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안에 있는 사건과 인물을 역사적으로 규명해야 하며, 성경 자체가 형성된 역사도 규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원근법적으로 관찰해야 하고,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보다 정확하고 생생하며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4. 우리는 성경을 문학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해야 한다. 글을 여러 가지 형태(style)를 가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성경은 물론 글이고 많은 종류의 글로 구성된 책이다. 산문이 있는가 하면 시가 있다. 역사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지혜문학과 묵시문학이 있다.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문학은 해석의 방법이 다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일률적으로 한 가지 형태의 문학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역사로 보아 버리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할 때, 그 책의 주제가 무엇이며, 어떤 사상의 발전을 기도했으며, 어떤 처지에서, 누가, 누구에게 썼느냐 등 여러 가지 문학적 검토를 해야만 한다.
5. 우리는 성경을 언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과 코이네 희랍어로 된 신약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언어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낱말 하나 하나는 어원이 있고 그 낱말의 변천사가 있다. 시대를 따라 그리고 저자에 따라 낱말의 의미가 다르다.
그러므로 사전적으로 낱말 하나 하나의 정확한 의미를 따지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문장법적으로 낱말들이 결합되어 독특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을 규명하여야 한다. 언어마다 독특한 문법이 있고 문장법이 있다. 히브리어가 가진 특징, 헬라어가 가진 미묘한 문법적 특색 등을 세밀히 알 때 성경 해석은 더욱 깊어지고 더 맑아질 수 있다. 6. 근자에 많은 성경 연구 방법이 등장했다. 성경학자들이 진실된 마음으로 성경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시도한 방법론들이다. 예컨대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등이 등장했고, Past-critical method라고 해서 최근에 등장하는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 구조비평(Structural ism), 해체론(Deconstruction theory), Reader-Response Criticism, "Committed"
Interpre tation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방법은 성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 알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천동설적 성경 해석 시대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과학이 세계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는 이 마당에, 세상을 지도해야 할 교회는 전근대적 사고와 방법으로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니, 결국 사회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점점 유리되고 무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성경은 만고의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과학 시대에는 무시를 당해도 되는 책이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은 그렇게 얄팍한 책이 아니다. 일차원의 책이 아니다. 다원적이고 다차원의 책으로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얼마든지 그 깊은 진리, 영원한 진리의 샘물을 퍼 올리고 삶의 활력소를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학문적 의지와 결단을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의무라고 느껴진다.
그러므로 직관적인 판단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됐다. 우리는 태양 빛이 어떤 색깔이냐고 물으면 `무색(無色)'이라고 보이는 대로 말한다. 확실히 우리 눈에는 무색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태양 광선을 분석해 보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렇게 7색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과 자외선이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이렇게 여러 색깔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우리 눈에 무색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의 직관은 여기서 착각인 것이 틀림없다. 뉴우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중력(重力)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법칙을 발견했다. 보통 사람은 물건이 마구 아무 법칙이 없이 그냥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고 보았지만, 과학자의 눈에는 그리고 그의 과학적 계산에는 확실히 어떤 법칙이 보였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은 뉴우턴의 중력 법칙을 뒤집어 버렸다. 어떤 물건을 놓으면 지구로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고 사실은 복잡한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진다는 것을 아인쉬타인은 발견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자들도 많은 경우에 착각을 저지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찰을 두고 생각해 보자. 과거의 기독교인들이, 특히 천동설 시대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직관에 의해서 판단하며,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이 사실이요 진리라고 생각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액면대로, 즉 읽는 자의 직관적 판단에 입각하여 그대가 사실이요 그대로가 진리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또 성경에 대해서 과거에서부터 전해지는 어떤 의견, 판단, 즉 전통을 듣는 대로 그냥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항해하는 배가 바다 표면에 나타난 빙산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수면에 나타나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상 물 속에 있는 얼음의 부분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다. 만일 그것을 무시하고 빙산에 대수롭지 않게 접근한다면 배는 파선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성경을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직관적으로, 표면을 보면서 그것이 진리의 전부라고 판단하기 쉽다.
고대의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불변의 진리인 양 결정적인 명제를 전해 주며, 그것만이 진리이니 그것을 벗어나면 이단이라느니 비진리라느니 하면서 겁을 주고 위협까지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계몽 시대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과학 발달, 학문 발달의 축복을 허락하면서 사물을 직관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 철저히 과학적으로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사실을 밝히는 기술을 주셨다.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인간에게 주셨다. 어느 하나도 그냥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만져지는 대로를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사실을 과학적으로 조사, 분석, 검토하며 실제를 밝혀 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오늘의 이 방대한 과학 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그리고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이며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어서,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는 말의 본 뜻이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질서 있게 만드셨고 그 질서는 진리이며 그것이 곧 `좋음'이요 '아름다움'이다) 인간이 과학을 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바라시는 일이다. 인류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지성이 발전하였다. 과학이 발달하여 오늘의 고도의 문명을 만끽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는 누구도 야만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도보로 걸어다니던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 컴퓨터 시대에 누가 주먹구구를 하는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겠는가 이제 다시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로 돌아가 보자. 계몽 시대를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직관대로 보지 않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운동을 하였다. 성경을 그냥 읽고 직관대로 전통대로 믿고 말던 태도를 벗어나서 여러 각도로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바로 성서학이다. 성경을 `학'적으로 연구하는 노력을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다. 성경은 그러나 구라파에서 이런 학문적 성경 연구가 진행될 때, 한편에서는 그런 노력을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여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노력도 속되었다. 성경을 비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냥 믿고 기도하면서 읽고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영해를 하면 그만이지, 달리 인간의 이성으로 왈가왈부 따지고 비평하는 것은 모독스러운 일이고 불신앙의 소치고 심지어 마귀의 장난이라고 판단하는 그룹이 학문적 연구 그룹과 병행하여 오늘까지 존속한다. 즉 지동설을 정설로 받아들여 과학 문명을 구가하는 현대에도 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우기며 학문을 무시하는 전근대적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고, 아니 때로는 우리들이 그 부류에 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은 거의 전부가 보수적인 분들이고 거의가 학문을 많이 하지 않은 열심파들로서 근본주의적 성경무비판론자들이었고, 우리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아직 비과학적이고 무비판적이어서 선교사들이 무비판적 성경 교육은 오히려 순조롭게 환영을 받고 피상적이지만 많은 효과를 가져왔다. 즉 성경을 많이 읽고 표면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고 암송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성경 퀴즈 대회에 출전하며 아마도 그랑프리를 받을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비판적으로 깊이 읽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오늘의 현상은 신학대학에서 성서학자들이 구미의 성서학의 이론을 소개하고 `이런 것이 있다'는 정도로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내 것을 삼고 삶의 풍성함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냥 이론적으로 머리에만 남아 있는 정도이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는 말이다. 한국의 많은 신학교에서는 이러한 학문적 연구를 아예 적대시 내지 죄악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천동설 시대에, 문화사적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사상적 야만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좀 개명됐다는 신학교에서도 교실에서는 여러 가지 성서학 이론을 가르치지만 그것이 신학생들 자신의 신앙과 생활에까지는 적용되거나 활용되지 않고 있으니, 하물며 교회 일반 수준에는 어떠하랴. 과거는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한국 교회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을 하며 그 풍성한 진리를 바로 깨달아 생명의 윤택과 풍요를 누리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대개 성경을 이원론적으로 관찰해 왔다.
즉첫째는 표면적 축자적 이해를 했다. 성경을 그냥 읽고 곁으로 나타난 것을 일률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판단했다. 역사적 사실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은 역사적 사실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꼈다.둘째는 소위 영해로서, 주관적으로 그럴듯하게 우화적으로 해석을 붙인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제멋대로 해석해 버린다. 결국 사람에 따라 해석도 달라지고 만다. 전혀 학문성이 없는 엉뚱한 해석을 하며, 따라서 많은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공부한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그냥 일고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고, 좀 더 생각하는 사람, 좀 더 상상력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다 무엇이건 간에 갖다 붙여서 멋대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니 뭐가 어렵겠는가 성경에 대한 이런 태도 때문에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는 일이 아주 쉬운 일이라고 판단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지망하게 된 것이다. 성격을 직관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사실로 말하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해석을 붙이면 되는 판이니 누군들 못하겠느냔 말이다. 국민학교밖에 안나온 사람도 한글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읽는 대로 말하고 무슨 소리든지 그 본문을 가지고 말하면 되니 어려울 것이 뭐냐는 말이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신학교들이 성경을 그렇게 쉽게 다루고 있다. 원시시대, 천동설 시대에 사물을 판단하는 식으로 성경을 그냥 읽고 암송하고 겉만 알고 마구 해석을 붙이는 그러한 성경 교육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깊고 오묘하며, 인간의 섬세한 학문적 연구를 다 동원해도 그 내용을 다 알기 어려운 복잡하고도 신비스러운 것이다. 평면적으로만 성경을 다룬다면 그 깊은 속을 알지 못하게 된다. 다원적으로 구성된 성경이기에 여러 각도에서 연구해야 한다.
1. 한국 교회는 대개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들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좀 더 솔직히 우리가 읽는 한글 성경을 학문적으로 검토해 볼 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제대로 옮겨져 있으며 얼마나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이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원문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길 때 결코 원문의 뜻을 100% 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번역해도 원문의 뜻을 80% 내지 90% 밖에 옮기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번역자의 무지나 실수로 인해서 원 뜻과는 상당히 다른 해석을 붙여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번역 성경 자체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면서 얼마나 성실하고 믿을 만한 것인가를 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문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원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를 알아야 한다. 그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우리는 한국에서는 신학교에서 형식적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친다. 졸업하고 나면 그 언어의 알파벳도 기억에 남지 않고 만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활용할 만한 지식이 되도록 그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별로 없다. 독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Gymnasium)에서 고전어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경우와는 너무도 다르다. 우리들은 겨우 번역 성경을 읽고 그것을 원본과 대조하면서 비판할 실력을 못 가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번역 성경의 문제점을 알아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하나님의 말씀의 가감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어찌 학문적 노력 없이 될 일인가 성경을 그냥 읽으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직무유기적, 직무태만적 태도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우리가 성경의 원본으로 돌아가 볼 때, 우리가 가진 원어 성경은 소위 비평판 성경(Criticali zation)들이다. 구약 성경도 여러 개의 비평판 원문 성경들이 있다. 키텔(Kittel)의 Biblia Heb rai ca가 있고, 근자에 나온 Biblia Hebraica Stutt gartensia가 있고 Qumran Text도 있다. 신약 원문에도 근자에 나온 Nestle-Aland 제27판, UBS에서 나온 The Greek New Testament 제4판 등 수많은 비평판 성경이 있다. 우리는 그냥 번역판을 쉽게 읽고 있지만 원문비평학(하등비평)에 입각해서 보다 정확한 성경을 얻어 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번역 성경 배후에 있는 이 원문비평판 성경에 대한 연구를 도외시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거나 비평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서 볼 때 수많은 사본들을 검토하여 보다 정확한 원문 성경을 얻으려는 노력을 어찌 무시하거나 등한시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구미의 학자들이 우리 대신 피땀 흘려 노력하고 있기에 우리가 지금 훌륭한 비평판 성경을 가지게 됐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새 번역을 할 수 있고, 보다 나은 번역 성경을 가질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이 분야에 연구를 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 분야의 연구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경을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3.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건을 사람들을 통하여 해석하고 사람들을 통해서 문서화하고 사람들을 통해서 수집한 책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요소가 성경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역사적 검토와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안에 있는 사건과 인물을 역사적으로 규명해야 하며, 성경 자체가 형성된 역사도 규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원근법적으로 관찰해야 하고,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보다 정확하고 생생하며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4. 우리는 성경을 문학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해야 한다. 글을 여러 가지 형태(style)를 가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성경은 물론 글이고 많은 종류의 글로 구성된 책이다. 산문이 있는가 하면 시가 있다. 역사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지혜문학과 묵시문학이 있다.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문학은 해석의 방법이 다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일률적으로 한 가지 형태의 문학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역사로 보아 버리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할 때, 그 책의 주제가 무엇이며, 어떤 사상의 발전을 기도했으며, 어떤 처지에서, 누가, 누구에게 썼느냐 등 여러 가지 문학적 검토를 해야만 한다.
5. 우리는 성경을 언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과 코이네 희랍어로 된 신약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언어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낱말 하나 하나는 어원이 있고 그 낱말의 변천사가 있다. 시대를 따라 그리고 저자에 따라 낱말의 의미가 다르다.
그러므로 사전적으로 낱말 하나 하나의 정확한 의미를 따지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문장법적으로 낱말들이 결합되어 독특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을 규명하여야 한다. 언어마다 독특한 문법이 있고 문장법이 있다. 히브리어가 가진 특징, 헬라어가 가진 미묘한 문법적 특색 등을 세밀히 알 때 성경 해석은 더욱 깊어지고 더 맑아질 수 있다. 6. 근자에 많은 성경 연구 방법이 등장했다. 성경학자들이 진실된 마음으로 성경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시도한 방법론들이다. 예컨대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등이 등장했고, Past-critical method라고 해서 최근에 등장하는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 구조비평(Structural ism), 해체론(Deconstruction theory), Reader-Response Criticism, "Committed"
Interpre tation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방법은 성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 알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천동설적 성경 해석 시대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과학이 세계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는 이 마당에, 세상을 지도해야 할 교회는 전근대적 사고와 방법으로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니, 결국 사회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점점 유리되고 무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성경은 만고의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과학 시대에는 무시를 당해도 되는 책이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은 그렇게 얄팍한 책이 아니다. 일차원의 책이 아니다. 다원적이고 다차원의 책으로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얼마든지 그 깊은 진리, 영원한 진리의 샘물을 퍼 올리고 삶의 활력소를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학문적 의지와 결단을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의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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