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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천년같이 (벧후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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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두 종류의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엄격하신 부모가 있고 또 하나는 자상하신 부모가 있습니다. 엄격하신 부모는 가부장적인 부모로서 근엄하고 명령하기를 좋아하고 순종을 강요하십니다. 때로 잘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용서가 없고 그래서 가까이하기에는 거북스러운 존재입니다. 이런 가부장적인 부모가 계신 집안에는 표면적으로 보면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말이 없고 다툼이 없고 불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이해나 자상함이나 따뜻함은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깊은 교류나 대화가 없고 삶의 모습이 지극히 일방적입니다. 오늘도 이런 부모님들이 있지만 옛날에 더 많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상하신 부모도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이 계신 집안에는 대체적으로 민주적이고 이해가 있고 따뜻함이 있습니다. 또 오래 참음이 있고 포용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어쩌다 실수를 해도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하고 가급적 매를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의 부모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이런 집에는 방항도 있고 시끄럽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정이 있고 이해가 있고 마음과 마음의 깊은 대화와 교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말할 때도 이 두가지 속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무서운 아버지와 같이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호령하시고 순종을 강요하시고 강하게 훈련하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들고 좇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주로 구약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무서운 아버지처럼 지극히 가부장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구름 속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군위 있는 모습입니다. 홍해를 잘라놓고 건너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능력 있고 힘이 잇는 가부장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매를 드시고 강하게 명령하시고 벌 주시고 그러면서도 때로는 상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지극히 구약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백성들은 그런 권위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했고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약시대로 오면서 그 하나님은 더 이상 가부장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적인 아버지처럼 자상하시고 온화하신 아버지 상으로 나타납니다. 기다리시고 이해하시고 포용하시고 때로 안타까워하시고 하루가 천년같이 집 나간 아들을 문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안절부절하시는 그런 아버지 같은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벧후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것이 신약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하루가 천년같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일 것입니다. 적어도 신약의 하나님은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회초리를 들고 좇아다니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한없이 기다리시면서 스스로 찾아와 주시기를 바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더 이상 강제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을 강요해서 사랑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회초리가 무서워서 사랑하는 것도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스스로의 마음으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권총을 들고 애인에게 찾아가서 “나와 결혼해 잘라, 승낙하지 않으면 쏜다”고 말해서 승낙받아 결혼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강제결혼은 불행한 것입니다. 결혼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보고 있으면 행복한 것처럼 너도 나를 보면 행복한 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행복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희생이 나오고 즐거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절대로 강요하거나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여류 명사 한 분의 수기를 보았습니다. 이 분이 유명해서 밖의 출입이 잦습니다. 아침에 나가면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인가 밤늦게까지 이 부인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는 대부분의 남편들이 화를 내기 십상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기다렸다가 들어오면 큰 소리를 내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아내가 걱정이 되어서 문 밖에 나가서 서성대며 기다립니다. 한참을 기다리는데 부인이 돌아옵니다. 그때 밤늦게 들어오는 부인을 맞으면서 하는 말이 “좀 일찍 오지 않고,” 그러고는 두말 하지 않습니다. 짤막하지만 그 말 한마디 속에 진정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말 한마디에서 아주 진한 부성을 느꼈노라고 수기를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런 때 화를 내는 것도 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성숙한 사랑의 표현은 이해입니다. 참음입니다. 포용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때로 강제로 일하시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하라”고 명령한 것을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을 했을 때 매를 드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호령하시고 진노하시고 채찍을 드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대부분 사람들이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시고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매를 들고 좇아 다니는 그런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구약시대라고 해서 모두 강제로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 배후를 보면 또 다른 이면에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이방 나라를 동경해서 하나님 곁을 떠나지 못해 안달을 할 때도 금방 벌을 주고 진노하시고 유황불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호소하셨습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 백성들아, 돌아오라”하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이번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설득하십니다. “우상에게 절해 보라. 그들이 구원을 하는가, 먹을 것을 주는가, 입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는가 시험해 보라”하고 설득하십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이번에는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우화법으로 탄식하십니다.“(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것은 참 기가 막힌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생각하는 존재로 지어 놓으셨는데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니까 그 답답한 심정을 하늘과 땅을 향해서 호소하고 탄식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루가 천년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런 모습이 이사야서와 호세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찾아가고 가서 추파를 던지고 이방 나라에 귀를 기울이고 그 문화를 동경하고 그러다가 그곳에 깊이 빠져서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천년이 하루같은 심정으로 기다리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르면 불행입니다. 정말 불행입니다. 그래서 무지가 죄인 것입니다. 성경은 가장 큰 죄가 무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갑니다. 세속에 깊이 빠져서 살고, 놀이에 깊이 빠져서 살고, 물질과 성에 깊이 탐닉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일도 잊어버리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놀러 다닙니다. 그랬다고 하나님이 금방 벌을 내리시겠습니까 벼락을 치겠습니까 그약시대에는 그런 때 앞길에 철조망을 쳐 놓으셨습니다. 가면 금방 지뢰가 터졌습니다.땅이 갈라지고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히 갈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 시대는 강제로 일하시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하도 유약해고 유아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약시대는 가시철망도 없고 벼락도 지진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주일에 놀러 가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살면서 별짓을 다 해도 벼락은 없습니다. 주일에 놀러 가도 땅이 갈라지는 법도 탈도 없습니다. 오늘날은 무한 자유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 좋을 대로 마음껏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갈 데 안갈 데 겁 없이 마구 다니며 놉니다. 할 짓 못할 짓 다하며 살아갑니다. 이제는 주부들이 매춘 행위를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은 이 정도로 자유 분방하고 무한하게 자유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 같은 자유는 저주일 수 있습니다. 자유는 어떤이에게는 소중한 것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저주일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찾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유를 누릴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자유처럼 무서운 저주도 없습니다. 사람이 잘못하게 되면 금방 제재가 주어지고 아픈 반응이 오고 무서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잘못으로부터 빨리 헤어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약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백성들이 잘못하면 금방 제재가 주어졌습니다. 벌이 금방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속히 그 잘못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제재가 없습니다. 아픔이 없습니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길을 막 가는 것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고 그냥 걸어갑니다. 그렇지라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금방 매를 들고 좇아나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알고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스스로”에 의미를 두십니다. 그것에 값을 두십니다. 그리고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리는 심정이 마치 하루가 천년을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방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로운 일에까지 매를 들고 좇아 다니는 것도 사랑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데도 보고만 있는다면 그것도 사랑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젊은 엄마들이 자주 범하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자라난 후에도 버릇이 없습니다. 매를 들어야 할 때는 매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기다리다 못해 진노를 쏟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할 때 하나님은 진노의 매를 드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그렇게 진노를 쏟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그렇게 진노를 쏟으셨습니다. 그 진노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들이었습니까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다리실 때 돌아옵니다. 놀러 갔다가도 적당한 때 돌아옵니다. 좀 얄밉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빠졌다가도 적당한 때 돌아옵니다. 얼마나 지혜 있습니까 오늘 이 시대는 무한 자유시대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단해서 신앙생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기다리시던 하나님도 할 수 없이 강제로 하시는 하나님으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수단을 쓰시고 방법을 쓰시고 분노를 쏟으십니다. 왜 분노를 쏟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냥 놓아 두었더니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인내도 아닙니다. 지나친 관심도 사랑도 아니지만 지나친 무관심은 더욱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기에 하나님은 때로 정신이 번쩍 나도록 진노하시고 매를 드시고 채찍을 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복입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한 가지 경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을 향한 경고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예수도 잘 믿고 불구자도 아니고 천국도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 이상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이가 자라는 데 부모 말씀도 잘 듣고 건강하게 자라고 거기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면 부모가 왜 아이들에게 야단을 칩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되니까 부모가 때로는 매도 들고 혼내기도 하고 큰 소리도 치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와왔을 때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나무라지도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마음에 적당한 때 돌아와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돌아와 준 아들이 고맙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잔치를 배풀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이 길었더라면, 아버지가 기다리시다가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마음이 상한 후에 돌아왔더라면, 그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기다리던 아들이었지만 화가 나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마침 아들이 아버지가 지치기 전에 돌아와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흔쾌한 마음으로 아들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신앙인은 때를 분별할 줄 알고 시기를 분별할 줄 압니다. 앉았다가도 적당한 때 일어설 줄 압니다. 잠을 자다가도 적당한 때 깨어날 줄 압니다. 세상에 빠졌다가도 오래 있지 않고 곧 돌아올 줄 압니다. 그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일조차도 없었으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늦게라도 돌아올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입니까 오늘 우리는 참 좋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위험 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눈이 어두워지기 쉽고 나태해지기 쉽고 관심을 엉뚱한 곳에 쏟기 쉽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염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에 깊이 빠져서 헤어나올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돌아오라고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반성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혼이 나야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를 맞고서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깊이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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