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천년, 천년이 하루 (벧후3:8-12)
본문
오늘 주어진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받은 영감표현 중에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언급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표현의 말씀입니다. 사도가 살던 그 때도 예수님 재림에 대한 이단이 일어나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결정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중에 시간에 대한 표현이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I. 하나님 자신에게는 영원한 현재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시편 90편 4절의 인용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라고하였습니다. 주님에게는 우리가 천년이라 생각하고 있는 긴 시간도 어제 하루 같고, 또한 밤의 한 경점(찰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자존자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알려준 그의 이름이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출3:14)라는 그 자체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영원 자존자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2절에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하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의 관념처럼 하나님은 시간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더던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존 하시는 분이시란 내용입니다.
II.하나님만이 시간의 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시간을 가지고 일하시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 본문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루를 천년처럼 쓰시기도 하시고, 반대로 천년을 하루처럼 쓰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시간을 선용하고, 활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 시간에 대한 많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카이로스(καιρ)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에트 와 모에드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이 제일 많이 사용된 경우는
1 결정적인 순간을 뜻했습니다. 필연적이고, 목적적이고, 계획적인 순간을 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정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뜻입니다. 예컨데 요한복음 7장 6절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경우입니다. 8절에는 .내 떄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한 경우입니다. 그러시다가 마태복음 26장 18절에서는 내 때가 가까워 왔다고하였습니다(마26:4
5).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그 때(καιρ)를 바로 보고 붙잡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카이로스는 하나님 자신께서 계획하신 결정적인 일을 나타내는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로고스가 출현할 때 (딛1:3)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할 때(딤전2:6)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딤전6:15), 그 백성들을 모을 때(갈6:9) 최후 심판 때(벧전4:17, 계11:18, 눅21:8)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또한 짧은 시간도 의미하였습니다(눅21:36, 엡6:18).
3 그리고 찰나적인 시간도 의미하였습니다(살전2:17, 고전7:5, 눅8:13,히11:11.). 중대한 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시간을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시간, 살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고백하는 시간,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시간속에, 인생의 죽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시간을 모조리 하나님 자신께서 자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말해서 모든 유한의 시간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이요 하나님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살 동안 시간의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한 한 부자는 이러한 시간의 주인을 몰랐습니다. 모든 풍성한 소출도 자기 것이고, 영혼도 자기 것이고, 여러해 동안 쓸 곡식을 쌓아 두었다고 하므로 시간도 자기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을 회수해 버렸습니다(눅12:13-21)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오늘도(시간), 내일도(시간), 아무 도시로, 일년간의 계획도 모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자신의 것인 것처럼 자만하고 장사계획을 꾸미던 사람에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허탄한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약4:13-16).
그러므로 천년도, 하루도 주의 시간입니다.
III. 천년 같은 하루, 하루 같은 천년은 택자구원을 목적한 시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이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느니라고하였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 말씀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 세계에 주신 시간이 왜 존재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너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 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는 시간입니다. 여기 너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성부의 예정을 입고, 성자의 피뿌림을 받고, 성령님의 새롭게 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는 역사세계에서의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은 ‘택자구원’을 위하여 전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주신 세월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어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자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 위하여 천년을 하루처럼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의 존재성과 목적성과 필연성과 가치성과 의미성이 분명해 집니다. 택자구원이라고 하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거대한 피조세계가 존재합니다. 택자구원이라고 하는 이 필연적인 당신의 구속계획의 진행을 위하여 하나님은 거창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역사세계에 주어진 시간은 유한적임이 확실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계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시간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이 일이 끝날 때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올 것이라고하였습니다(벧후3:10). 그 날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하였습니다(벧후3:10). 그 때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바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신 말씀을 잠깐 생각하였습니다. 이 말은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지상교회를 향한 유한한 시간의 개념과 선용을 알려 주는 영감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존자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천년의 주인이시요, 하루의 주인이시란 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주인이 인생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란 말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역사세계에 주어진 시간은 택자구원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존의미와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받은 한 평생의 시간은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섬기는데 전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일에 전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천년을(긴 시간), 아니면 하루(짧은 시간)를 장터에서 놀면서 보내서는 안됩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우리는 포도원에서 일해야 합니다(마20:1-16). 바울은 때가 단축하여 졌다고 하였습니다(고전7:29).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하였습니다. 밤낮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락을 좋아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눅12:41-48).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쁜 시대에 삽니다. 분주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이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잘 사는 단계로 비약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불신자들은 시간을 선용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사22:13-14)는 일락에 인생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찾아온 소위 레저문화는 우리에게 엄청난 소비문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를 샀기 때문에,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바쁘다고 핑계하고 왕의 잔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유는 한결 같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잘 되어가기 때문에 바쁘다는 것입니다(마22:1-14). 세네카는 말하기를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것이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우리가 기한부로 사용하다가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카라일(carlyler) 은 ‘시간은 기적이다’고 하였습니다.
아놀드 베넷트(A.Bennet)는 ‘시간의 매일(날마다)의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시간(챤스)을 바로 붙잡는 자에게 주어지는 큰 일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 대해 동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시간 분량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의 분량을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받은 시간을 얼마나 주의 뜻대로 선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눅16:25). 그는 살았을 때 무척 바빴습니다.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갈아입고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는 일에 너무 바빴습니다(눅16:19-29). 그 결과 그는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만을 위하여 낭비한 악인이었습니다. 벌써 1994년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에 예배하는데, 주의 교회를 봉사하는데 전도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정말 나날이 바쁘고 바빴습니다. 지옥에 간 자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결코 주의 일을 연기하지 마십시오. 에드워드 영(E. young)씨는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도적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1994년에 정말 기념비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정말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시간을 선용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성전의 역사는 바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구령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던 모세의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시90:12). 여기에 고이 간직해야 할 적적한 심령이 있네/ 날이 지나가고 있는 동안에 /또 거기에도 슬픔에 찬 영혼들이 멸망하고 있네/ 또 날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에/ 거기에서 조금만 미소를 띄어 주면/ 건저낼 수 있는 새 생명들이 있네/우리가 여행하고 두루 다니면서 그들을 찾아야 하네/ 또 날이 흐르고 있는 동안에 / 아-우리가 할 좋은 일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저 유명한 죠지 쿠퍼(G.Cooper)씨도 이렇게 시간의 선용을 노래하였습니다.
I. 하나님 자신에게는 영원한 현재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시편 90편 4절의 인용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라고하였습니다. 주님에게는 우리가 천년이라 생각하고 있는 긴 시간도 어제 하루 같고, 또한 밤의 한 경점(찰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자존자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알려준 그의 이름이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출3:14)라는 그 자체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영원 자존자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2절에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하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의 관념처럼 하나님은 시간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더던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존 하시는 분이시란 내용입니다.
II.하나님만이 시간의 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시간을 가지고 일하시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 본문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루를 천년처럼 쓰시기도 하시고, 반대로 천년을 하루처럼 쓰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시간을 선용하고, 활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 시간에 대한 많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카이로스(καιρ)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에트 와 모에드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이 제일 많이 사용된 경우는
1 결정적인 순간을 뜻했습니다. 필연적이고, 목적적이고, 계획적인 순간을 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정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뜻입니다. 예컨데 요한복음 7장 6절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경우입니다. 8절에는 .내 떄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한 경우입니다. 그러시다가 마태복음 26장 18절에서는 내 때가 가까워 왔다고하였습니다(마26:4
5).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그 때(καιρ)를 바로 보고 붙잡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카이로스는 하나님 자신께서 계획하신 결정적인 일을 나타내는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로고스가 출현할 때 (딛1:3)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할 때(딤전2:6)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딤전6:15), 그 백성들을 모을 때(갈6:9) 최후 심판 때(벧전4:17, 계11:18, 눅21:8)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또한 짧은 시간도 의미하였습니다(눅21:36, 엡6:18).
3 그리고 찰나적인 시간도 의미하였습니다(살전2:17, 고전7:5, 눅8:13,히11:11.). 중대한 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시간을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시간, 살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고백하는 시간,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시간속에, 인생의 죽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시간을 모조리 하나님 자신께서 자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말해서 모든 유한의 시간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이요 하나님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살 동안 시간의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한 한 부자는 이러한 시간의 주인을 몰랐습니다. 모든 풍성한 소출도 자기 것이고, 영혼도 자기 것이고, 여러해 동안 쓸 곡식을 쌓아 두었다고 하므로 시간도 자기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을 회수해 버렸습니다(눅12:13-21)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오늘도(시간), 내일도(시간), 아무 도시로, 일년간의 계획도 모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자신의 것인 것처럼 자만하고 장사계획을 꾸미던 사람에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허탄한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약4:13-16).
그러므로 천년도, 하루도 주의 시간입니다.
III. 천년 같은 하루, 하루 같은 천년은 택자구원을 목적한 시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이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느니라고하였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 말씀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 세계에 주신 시간이 왜 존재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너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 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는 시간입니다. 여기 너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성부의 예정을 입고, 성자의 피뿌림을 받고, 성령님의 새롭게 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는 역사세계에서의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은 ‘택자구원’을 위하여 전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주신 세월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어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자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 위하여 천년을 하루처럼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의 존재성과 목적성과 필연성과 가치성과 의미성이 분명해 집니다. 택자구원이라고 하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거대한 피조세계가 존재합니다. 택자구원이라고 하는 이 필연적인 당신의 구속계획의 진행을 위하여 하나님은 거창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역사세계에 주어진 시간은 유한적임이 확실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계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시간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이 일이 끝날 때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올 것이라고하였습니다(벧후3:10). 그 날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하였습니다(벧후3:10). 그 때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바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신 말씀을 잠깐 생각하였습니다. 이 말은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지상교회를 향한 유한한 시간의 개념과 선용을 알려 주는 영감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존자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천년의 주인이시요, 하루의 주인이시란 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주인이 인생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란 말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역사세계에 주어진 시간은 택자구원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존의미와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받은 한 평생의 시간은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섬기는데 전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일에 전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천년을(긴 시간), 아니면 하루(짧은 시간)를 장터에서 놀면서 보내서는 안됩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우리는 포도원에서 일해야 합니다(마20:1-16). 바울은 때가 단축하여 졌다고 하였습니다(고전7:29).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하였습니다. 밤낮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락을 좋아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눅12:41-48).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쁜 시대에 삽니다. 분주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이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잘 사는 단계로 비약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불신자들은 시간을 선용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사22:13-14)는 일락에 인생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찾아온 소위 레저문화는 우리에게 엄청난 소비문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를 샀기 때문에,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바쁘다고 핑계하고 왕의 잔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유는 한결 같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잘 되어가기 때문에 바쁘다는 것입니다(마22:1-14). 세네카는 말하기를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것이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우리가 기한부로 사용하다가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카라일(carlyler) 은 ‘시간은 기적이다’고 하였습니다.
아놀드 베넷트(A.Bennet)는 ‘시간의 매일(날마다)의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시간(챤스)을 바로 붙잡는 자에게 주어지는 큰 일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 대해 동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시간 분량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의 분량을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받은 시간을 얼마나 주의 뜻대로 선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눅16:25). 그는 살았을 때 무척 바빴습니다.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갈아입고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는 일에 너무 바빴습니다(눅16:19-29). 그 결과 그는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만을 위하여 낭비한 악인이었습니다. 벌써 1994년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에 예배하는데, 주의 교회를 봉사하는데 전도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정말 나날이 바쁘고 바빴습니다. 지옥에 간 자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결코 주의 일을 연기하지 마십시오. 에드워드 영(E. young)씨는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도적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1994년에 정말 기념비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정말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시간을 선용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성전의 역사는 바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구령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던 모세의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시90:12). 여기에 고이 간직해야 할 적적한 심령이 있네/ 날이 지나가고 있는 동안에 /또 거기에도 슬픔에 찬 영혼들이 멸망하고 있네/ 또 날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에/ 거기에서 조금만 미소를 띄어 주면/ 건저낼 수 있는 새 생명들이 있네/우리가 여행하고 두루 다니면서 그들을 찾아야 하네/ 또 날이 흐르고 있는 동안에 / 아-우리가 할 좋은 일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저 유명한 죠지 쿠퍼(G.Cooper)씨도 이렇게 시간의 선용을 노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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