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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권위 (벧후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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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회력과 세계 교회나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역사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나 교회가 특별히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하여 정한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교회력이라고 할 때 교회에 있었던 중요한 기념일을 중심으로 만든 달력을 말합니다. 이 교회력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대강절,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고난주간, 부활절, 승천절, 성령님강림절 등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교회의 역사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인 종교개혁주일과 우리 교단의 역사에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은 교단설립일이나 S.F.
C. 주일 등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한샘교회의 역사에서도 교회 설립일이나 처음으로 직분자를 세운 날 등을 중요한 교회력 가운데 포함시킵니다. 또한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에서 정한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감사절 등도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 삶이나 교회생활의 전 영역에서 필요한 말씀을 균형있게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을 위하여 교단의 역사나 우리 한샘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일을 잊지 않고 기록으로 보관하여 그 역사를 살펴서 현재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도 종교개혁주일에 관한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 독일에서 당시 34살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 대학 교회의 게시판에 당시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붙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세계 교회 역사와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배우면서 알게 되겠지만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긴 역사를 통하여 만들어진 여러 가지 전설과 사람이 지어낸 학설과 교훈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로마 교황의 교서나 명령이 더 권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과 제도가 앞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완성하시고 이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속죄의 진리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로마 교황청에 바치는 갖가지 세금과 면죄부 그리고 고행 등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만이 강조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성직도 돈과 권력에 의해 살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교회의 부패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종교개혁주일 481주년을 기념하면서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책인가 하는 것을 다시 확인해 보는 기회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본문은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알려주는 가장 대표적인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이 서신의 기록 목적, 두 번째로는 성경의 권위, 세 번째로는 성경의 권위와 우리와의 관계문제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서신의 기록 목적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왜 이 편지를 쓰는지 목적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이 베드로후서 1:12-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러한 것을 생각나게 하려하노라."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의 생명이 끝나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순교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언제라도 믿음의 도리를 기억하고 그것에 따라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힘써 너희로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헬. 이 일들)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그가 이 편지를 쓴 모든 내용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이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 내용을 보면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에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과 악한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어떻게 대적해야 하며, 어떻게 믿음을 세워가야 하는지,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이 편지의 기록 목적입니다.
2. 성경의 권위 베드로는 그가 왜 이 편지를 쓰는 지의 목적을 말한 다음에 당시의 성도만이 아니라 그가 떠난 후에 있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과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가르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그리스도의 능력과 오심에 대한 일들이 사람들이 공교하게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친히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도들이 증거하는 메시지가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16절에서 "공교하게 만든 이야기"라고 하는 말에서 "이야기"는 헬라어로 뮈또스(, myth)인데 신들에 대한 신비적인 이야기나 기적과 같은 비역사적인 사실을 말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이 헬라어 용어에서 파생된 영어가 신화(myth)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분명한 역사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실 때 한편에는 모세가 나타나고, 또한편에는 엘리야가 나타난 것과 함께 예수님이 변화되신 것을 본 목격자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마17:1-8). 베드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어 만든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과 사도들이 함께 목격한 일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9-21절에 나타난 말씀인데, 곧 성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치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사도들이 목격한 사실도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하는 말씀은 정말 해석하기 어려운 절입니다. 이 구절은 교회의 오랜 역사 가운데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로마교와 우리 신교가 지금까지 논쟁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로마 카토릭 교회가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수 없고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일은 금지되었고, 교회만이 성경의 해석권을 가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중세교회가 타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을 알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세교회는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황이나 추기경, 사제들이 가르치는 교리서가 성경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의 부패로 인하여 교회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였던 권리를 모든 성도들이 읽고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특수한 계급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일반 모든 평민들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신부나 사제계급에 의해서만 읽고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인간의 이성과 복잡한 추리방법으로 교황이나 사제에 의해 해석되던 성경이 그 자체의 말씀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나타난 해석원리를 무시하고 각 개인 신자마다 자기 임의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 제1장 4항에 "우리가 마땅히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느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진리 자체이시며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거한다"고 하였고, 5항에서는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하여 우리가 믿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말씀으로써, 또는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내적사역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항에서는 "이 성경에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님의 새 계시나 사람들의 전통을 가지고 아무 것도 더 추가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성경이 다시 우리 성도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 말씀을 통하여 구원얻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고 교리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이며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줌으로 성경 밖에서는 구원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신교에서도 이 부분을 해석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하는 부분에서 "사사로이"를 번역할 때 그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가 사사로이 해석한 일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지에 따라 이 본문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는 독자라고 한다면 읽는 독자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 번역은 이러한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어번역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 번역과 가장 유사한 번역이 새영어성경(NEB)입니다. 이러한 번역들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할 때 누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개인적인 생각이나 관점에 따라 해석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사실 과거 역사 가운데서도 그러하였습니다만 오늘날에도 성경을 인위적이고 자기 생각에 따라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대로 대표적인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심지어 통일교까지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입장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관점이나 생각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사로이"라고 하는 말은 읽는 독자의 생각이나 관점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라고 볼 때는 성경은 선지자 자신의 생각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 따라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 따라 번역해 보겠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 자신이 여러 가지를 이해한 일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킹제임스 역(KJV)과 개역표준역(RSV), 새미국표준성경(NASB), 새국제번역성경(NIV)이 대표적으로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새국제번역성경은 이 절을 "성경의 예언은 선지자 자신의 이해에서 온 것이 아니다."(no prophecy of Scripture came about by the prophet's own interpretation)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고 이해한 것은 성경은 선지자가 지어낸 이야기거나 자신이 임의대로 해석하여 만든 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생각이나 명상, 지식, 통찰력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한 것은 성경이 어떤 책이냐 하는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기원(origin)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 카토릭의 견해와 우리 신교 안에서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해석 가운데 어떤 것이 본문에 가장 적절한 의미라고 생각되어지십니까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세 번째 해석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선지자 자신의 이해에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로마 카토릭의 견해가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교에서도 이 말씀의 주체가 성경을 읽는 독자인가, 아니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인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이 두 부분에 대하여 양쪽의 입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국 본문의 최종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한 절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전체 문맥과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20절의 말씀이 뒤에 나오는 21절의 말씀과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절 다음에 우리 번역 성경에 분명하게 표현이 안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 세미콜론(;)이 있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앞의 절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21절은 앞의 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2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성경의 기록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기록자들이 자기의 생각을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과 21절을 합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 자신이 이해한 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맥으로 볼 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성경이 어떤 책인가 하는 성경의 기원과 권위에 관하여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사로이 풀어서"라고 하는 말씀은 성경의 기록자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이해한 것에 따라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말은 이 본문에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따라 옮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바로 성경은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하신 기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 말씀을 권위있게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3. 성경의 권위와 우리 그러면 성경이 인간 저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왔습니다. 오늘 저는 "권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 말은 통치권을 의미하는 관계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학문의 권위, 책의 권위, 부모의 권위, 통치자들의 권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만, 이 의미는 그 위치를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늘날 이러한 권위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권위를 부정합니다. 이것은 정말 반사회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위에 대하여 좋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패하고 잘못된 권위인 권위주의(authoritarian) 때문입니다. 대개가 인격적으로 순종하게 하지 않고 여러 가지 폭력이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압력을 통하여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권위주의를 무조건 나뿐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순종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도와주어도 오히려 악용하는 사례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권위주의는 점점 부추겨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종교인 기독교에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우리 생활 전반에 대한 통치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 생활 영역에서 지배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리랜드 라이컨이 지은 청교도:이 세상의 성자들 이라는 책에서 청교도들의 여러 삶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삶의 모든 영역에 빛과 지침을 주는 소중한 책으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 성경은 살아있는 책이요 사람의 행동과 운명에 독특하고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책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삶의 전 영역에 확대하였습니다. 그들은 경제, 정부, 가정, 교회, 인생, 성, 자연, 교육 그리고 그밖에 다른 모든 문제에 성경의 본문과 성경의 모범을 적용했습니다. 이 청교도들은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유명한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입니다. 이 성경의 서문에 성경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갈 길을 비추는 빛이요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이고 환난 당할 때 위로이며, 사탄을 대적하는 방패요 검이고, 모든 지혜의 보고이고,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이며, 그 분의 은혜를 웅변하는 간증이고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유일한 양식이요 영양이다." 여러분! 날마다 우리 신자의 유일한 권위인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읽고 생활에 적용해 보십시오.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변의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은 성경을 연구하고 이 말씀대로 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자신의 삶을 말씀에 따라 개혁해 가고, 동시에 교회도 개혁해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삶에서 유일한 권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항상 연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이 말씀에 따라 자신과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를 개혁하려는 눈이 열려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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