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습니까 (고후4:7-11)
본문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있는 낡은 교회 마당에 두 손을 활짝 편 예수님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그 마을 가까이 떨어져서 그 예수님 조각상은 그만 산 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이 물러가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그 예수님 조각상의 조각들을 찾아서 다 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 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그들은 몹시도 아꼈던 것입니다.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몸체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지요. 예수님 조각상의 양손이 없어 져 버린 것입니다.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더이상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상처투성이 손이라 도 있으면 별 문제 없지만, 손이 영 없어 서야 어떻게 주님이라 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날 즈음에,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조각 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 라고 쓰여진 놋쇠 판을 붙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안이 기꺼 이 모두에게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손 없는 예수님의 조각 상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수 년 후 어떤 사람이 놋쇠 판 비문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하나 더 덧붙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내겐 손이 없으 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 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우리들은 주님의 손과 발이요, 입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통해 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십니다. 주님을 증언할 사람은 주님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거룩한 도구라 할 수 있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을 삼 단계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감 정적 인생의 단계'입니다. 쾌불쾌, 호불호, 미추등이 주 관심사입니다. 이게 모든 생활의 기준이 됩니다. 그저 생물학적 인생일 뿐 입니다.
둘째는 '도덕적 실존'입니다. 가치와 이념, 도덕과 이상 을 향해 열심히 추구하는 인간형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추구 할 수 있는 고상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유한합니다. 마지 막
셋째는 '신에 눈뜨는 종교적 실존'입니다. 이것은 도구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어 쓰이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을까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생명을 주셨을까요 똑 같은 생명을 만들라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면 생명 창조 작업을 합니다. 무학자이든, 빈한 한 삶을 사는 사람이든, 그의 삶은 고귀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질그릇들이지만 보물을 간직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 생명 창조작업은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전달하는 멧신저(messenger) 역할만 할뿐입니다. 생명창조 작업은 할 수 없습니다. 생명창조 작업은 하나님의 도구된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질그릇 같은 우리가 보물을 간직한 이유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일궈 가는 하나님나라의 도구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 즉 생명 만드는 일을 위탁해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은 이 거룩한 사역을 위탁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하고 계실 뿐입니다. 성령님께서도 직접 역사하시지 않고, 그가 성전으로 삼고 있는 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렇듯 도구와 사역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구는 쓰기 위해 있듯이, 하나님의 도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까 쓰여지는 시점은 진정으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있은 다음입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자신의 전 존재를 의탁하는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맘대로 쓸 수 있도록 완전한 양도 각서를 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례는 그런 의미에서 양도 각서 서명식입니다. 때문에 '부르심'이 있고, 그 다음에 '맡김'이 있습니다. 맡김에는 '양도'와 '헌신'이 있습니다. 양도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의 문제이고, 헌신 은 '쓰여 질 수 있는'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어떻게 받아들여 졌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조직폭력배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폭력을 통해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소매치기 세계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소매치기에 쓰일 것입니다. 회사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영업활동을 위해 쓰여 질 것입니다. 봉사기관에 받아들여 진 사람은 사람을 섬기는 데 쓰여질 것입니다. 때문에 어디에 받아들여졌느냐는 곧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여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인간 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요, 멋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정치가나 대통령, 명작의 집필가나, 역사를 바꾸는 혁명 가, 불후의 예술작품을 남기는 예술가 등 걸출하고 뛰어난 사람 으로 살아간 사람은 정말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걸출한 사람만이 고상한 삶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평범한 사람이라 도 누구나 위대하고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정치가나 역사가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보석을 캐는 삶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삶입니다. 보물을 간직한 삶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 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절) 여기서 보배와 질그릇은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보배는 보배함에 담아야 제격입니다.
그런데 진귀한 보물을 죄 많고 때묻은 천하 고 연약한 질그릇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런던 타워를 관광할 때 보물전시실을 들른 적 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관식을 했을 때의 왕관은 물 론이고 역대 왕들의 왕관들이 다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보석들, 70케라트 이상이나 된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야몬드 등 기록적인 보물들이 진품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조명에 비친 보석들은 문외한인 제가 봐도 굉장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보석 왕관들을 관람하는 것이 참으로 진풍경입니다. 그냥 서서 유심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콘베 어 벨트 위에 서서 지나가면서, 이 삼중으로 된 방탄 유리에 갇 힌 보석 왕관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경비원들의 삼엄함 경비 속에서 말이지요. 이렇듯 값비싼 보석은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담는 그릇에서 부터 보관, 감시까지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귀하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오늘 보석 왕관 보다 더 세기적으로 중요한 보배를 단지 질그릇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가치가 없고 초라한 것의 상징입니다. 뚝배기 허드레 그릇에 세기적인 보석을 담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 정도면 보배와 질그릇은 극적인 대비를 이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이 세기적인 보석은 바로 복음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입니다. 바로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이지요.
왜냐하면 뒤의 구절이 그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보배를 위해 우 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과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 아 닙니다. 무엇입니까 생명의 복음증거와 복음에 합당한 사랑의 실천을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질그릇 같은 자신이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으니 감사하며 당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바울이 보배를 위해 감수하는 어려움을. 전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겨쌈 당하다'(들리보메노이)(8절)는,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완전히 찌그러지는 고통의 상황을 말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고'(8절), 이것은 군대용어입니다. 적군의 포위망 앞에서도 용감 무쌍한 정신을 잃지 않고 포 위망을 뚫을 정신에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핍박과 거꾸러뜨림 당해도 버린 바 되거나 망하지 아니하고'(9절) 칠전팔기의 정신 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10절), 십자가를 늘 몸에 짊어지 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있으니, 예수의 생 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능력도 함께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고난도 되 지만 속죄와 구원을 주는 능력이이 되기도 합니다. 주의 도구가 되어 복음의 고난을 죽도록 당하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생명은 항상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 대축제는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속죄와 구원 생명 살림의 사역입니다. 이 생명 살림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질그릇에 참된 보배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 라"(12절) 우리가 고난에 참여함으로 너희 고린도 교회 믿음의 아들 딸들은 생명 가운데 더 풍성해 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 역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수고와 사역이 생명의 꽂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이음의 법칙입니다. 마치 어머니는 출산의 고통으 로 몸부림치며 사선을 넘고 있지만 한 생명은 고고히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여러 모양 여러 힘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고통 을 기꺼이 감수하는 부모 때문에 자녀는 양육되고 생명이 자라 풍성해 지듯이 말이지요.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탄생합니다. 영적 생명탄생,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 한 활동입니다. 일평생 쏟아 부은 여러 가지 재물, 시간, 관심, 여가는 흘러갑니다. 말하자면 유한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소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쌓이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어떤 단체의 아침 성경 공부 시간에 십 여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간에 왜 사느냐고 물어 봤지요. 어떤 분은 오늘 보다 좀더 행복한 내일을 위해 산다고 대답합디다. 어떤 분 은 한 단계 한 단계 더 나아지는 삶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산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을 위해, 어떤 분은 자녀를 위해, 어떤 분은 남편을 위 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부 유한하고 지나가는 찰나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목표를 두었던 자녀는 그리 감사하는 보답 없이 훌 쩍 떠나 독립할 것이고,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은 식어지고 진부 해 질 것입니다. 아끼던 직장은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합니다. 모두 흘러가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목숨을 걸고 물질과 재능과 시간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면 하늘에 쌓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 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산 삶은 하나님 나라 사역 법칙으로 보면 소비이지 생산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생존하기 위해 먹어치우는 음식 처럼 말이지요. 비버라는 동물은 엄청난 양의 나무를 먹어치웁니다. 한 겨울을 나는데 주위의 나무 30그 루를 넘어뜨려 양식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동물처럼 생존하기 위해 일평생을 몸부림치며 산다면 사실 비참한 일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경제위기가 되니까 그걸 온 몸 으로 체험하고 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의미니 가치니, 사랑이니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오늘 살 아 남는 것이 최대의 목표입니다. 비참한 일입니다. 살아남은 자 의 슬픔입니다. 이렇게 일생을 마친다 생각하면 참으로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재물도 그래요. 자신을 위해 사용한 재물은 그냥 지나갑니다. 우리가 일평생 먹어대는 쌀은 수십 가마니가 되지만 그냥 없어지는 것입니다. 한 몸을 지탱하는 데 쓰였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쌀도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쓰였다면 하늘에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눅12:33) 했지요. 하늘에 쌓이는 물질과 땅에 쌓이는 물질이 따 로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평생 자식 먹여 살리고 가정 돌보고 부모 공 양하고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물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런 자잘한 것들이 씨줄 날줄이 되어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자체로서 의미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보면 하늘에 그리 많이 쌓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 관심, 시간, 재능을 영적 생명 살 리는 일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투자한 것은 하늘에 쌓이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보의 바퀴를 굴린 사람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 다 중요합니다. 세속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것 자체로서 아주 가치 있는 삶을 살 았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살아가다 보니 자연히 이뤄진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살아가다 보니 얻어진 열매일 뿐입니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고 아주 작은 일을 이루었 다 하더라도 복음증거와 사랑의 사역을 위해 살았다면, 똑 같은 비중과 가치를 지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 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 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 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2:20-21) 믿음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삶,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위대한 삶, 하늘에 보물이 쌓이는 삶, 바로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게 온전히 드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힘써 사용되고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를 깨끗하게 해서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귀한 사역자들로 살 아, 인생이 보석처럼 빛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지요. 예수님 조각상의 양손이 없어 져 버린 것입니다.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더이상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상처투성이 손이라 도 있으면 별 문제 없지만, 손이 영 없어 서야 어떻게 주님이라 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날 즈음에,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조각 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 라고 쓰여진 놋쇠 판을 붙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안이 기꺼 이 모두에게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손 없는 예수님의 조각 상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수 년 후 어떤 사람이 놋쇠 판 비문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하나 더 덧붙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내겐 손이 없으 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 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우리들은 주님의 손과 발이요, 입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통해 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십니다. 주님을 증언할 사람은 주님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거룩한 도구라 할 수 있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을 삼 단계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감 정적 인생의 단계'입니다. 쾌불쾌, 호불호, 미추등이 주 관심사입니다. 이게 모든 생활의 기준이 됩니다. 그저 생물학적 인생일 뿐 입니다.
둘째는 '도덕적 실존'입니다. 가치와 이념, 도덕과 이상 을 향해 열심히 추구하는 인간형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추구 할 수 있는 고상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유한합니다. 마지 막
셋째는 '신에 눈뜨는 종교적 실존'입니다. 이것은 도구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어 쓰이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을까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생명을 주셨을까요 똑 같은 생명을 만들라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면 생명 창조 작업을 합니다. 무학자이든, 빈한 한 삶을 사는 사람이든, 그의 삶은 고귀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질그릇들이지만 보물을 간직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 생명 창조작업은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전달하는 멧신저(messenger) 역할만 할뿐입니다. 생명창조 작업은 할 수 없습니다. 생명창조 작업은 하나님의 도구된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질그릇 같은 우리가 보물을 간직한 이유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일궈 가는 하나님나라의 도구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 즉 생명 만드는 일을 위탁해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은 이 거룩한 사역을 위탁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하고 계실 뿐입니다. 성령님께서도 직접 역사하시지 않고, 그가 성전으로 삼고 있는 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렇듯 도구와 사역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구는 쓰기 위해 있듯이, 하나님의 도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까 쓰여지는 시점은 진정으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있은 다음입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자신의 전 존재를 의탁하는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맘대로 쓸 수 있도록 완전한 양도 각서를 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례는 그런 의미에서 양도 각서 서명식입니다. 때문에 '부르심'이 있고, 그 다음에 '맡김'이 있습니다. 맡김에는 '양도'와 '헌신'이 있습니다. 양도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의 문제이고, 헌신 은 '쓰여 질 수 있는'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어떻게 받아들여 졌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조직폭력배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폭력을 통해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소매치기 세계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소매치기에 쓰일 것입니다. 회사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영업활동을 위해 쓰여 질 것입니다. 봉사기관에 받아들여 진 사람은 사람을 섬기는 데 쓰여질 것입니다. 때문에 어디에 받아들여졌느냐는 곧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여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인간 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요, 멋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정치가나 대통령, 명작의 집필가나, 역사를 바꾸는 혁명 가, 불후의 예술작품을 남기는 예술가 등 걸출하고 뛰어난 사람 으로 살아간 사람은 정말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걸출한 사람만이 고상한 삶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평범한 사람이라 도 누구나 위대하고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정치가나 역사가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보석을 캐는 삶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삶입니다. 보물을 간직한 삶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 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절) 여기서 보배와 질그릇은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보배는 보배함에 담아야 제격입니다.
그런데 진귀한 보물을 죄 많고 때묻은 천하 고 연약한 질그릇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런던 타워를 관광할 때 보물전시실을 들른 적 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관식을 했을 때의 왕관은 물 론이고 역대 왕들의 왕관들이 다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보석들, 70케라트 이상이나 된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야몬드 등 기록적인 보물들이 진품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조명에 비친 보석들은 문외한인 제가 봐도 굉장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보석 왕관들을 관람하는 것이 참으로 진풍경입니다. 그냥 서서 유심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콘베 어 벨트 위에 서서 지나가면서, 이 삼중으로 된 방탄 유리에 갇 힌 보석 왕관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경비원들의 삼엄함 경비 속에서 말이지요. 이렇듯 값비싼 보석은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담는 그릇에서 부터 보관, 감시까지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귀하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오늘 보석 왕관 보다 더 세기적으로 중요한 보배를 단지 질그릇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가치가 없고 초라한 것의 상징입니다. 뚝배기 허드레 그릇에 세기적인 보석을 담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 정도면 보배와 질그릇은 극적인 대비를 이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이 세기적인 보석은 바로 복음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입니다. 바로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이지요.
왜냐하면 뒤의 구절이 그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보배를 위해 우 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과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 아 닙니다. 무엇입니까 생명의 복음증거와 복음에 합당한 사랑의 실천을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질그릇 같은 자신이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으니 감사하며 당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바울이 보배를 위해 감수하는 어려움을. 전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겨쌈 당하다'(들리보메노이)(8절)는,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완전히 찌그러지는 고통의 상황을 말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고'(8절), 이것은 군대용어입니다. 적군의 포위망 앞에서도 용감 무쌍한 정신을 잃지 않고 포 위망을 뚫을 정신에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핍박과 거꾸러뜨림 당해도 버린 바 되거나 망하지 아니하고'(9절) 칠전팔기의 정신 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10절), 십자가를 늘 몸에 짊어지 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있으니, 예수의 생 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능력도 함께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고난도 되 지만 속죄와 구원을 주는 능력이이 되기도 합니다. 주의 도구가 되어 복음의 고난을 죽도록 당하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생명은 항상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 대축제는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속죄와 구원 생명 살림의 사역입니다. 이 생명 살림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질그릇에 참된 보배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 라"(12절) 우리가 고난에 참여함으로 너희 고린도 교회 믿음의 아들 딸들은 생명 가운데 더 풍성해 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 역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수고와 사역이 생명의 꽂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이음의 법칙입니다. 마치 어머니는 출산의 고통으 로 몸부림치며 사선을 넘고 있지만 한 생명은 고고히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여러 모양 여러 힘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고통 을 기꺼이 감수하는 부모 때문에 자녀는 양육되고 생명이 자라 풍성해 지듯이 말이지요.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탄생합니다. 영적 생명탄생,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 한 활동입니다. 일평생 쏟아 부은 여러 가지 재물, 시간, 관심, 여가는 흘러갑니다. 말하자면 유한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소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쌓이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어떤 단체의 아침 성경 공부 시간에 십 여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간에 왜 사느냐고 물어 봤지요. 어떤 분은 오늘 보다 좀더 행복한 내일을 위해 산다고 대답합디다. 어떤 분 은 한 단계 한 단계 더 나아지는 삶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산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을 위해, 어떤 분은 자녀를 위해, 어떤 분은 남편을 위 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부 유한하고 지나가는 찰나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목표를 두었던 자녀는 그리 감사하는 보답 없이 훌 쩍 떠나 독립할 것이고,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은 식어지고 진부 해 질 것입니다. 아끼던 직장은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합니다. 모두 흘러가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목숨을 걸고 물질과 재능과 시간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면 하늘에 쌓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 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산 삶은 하나님 나라 사역 법칙으로 보면 소비이지 생산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생존하기 위해 먹어치우는 음식 처럼 말이지요. 비버라는 동물은 엄청난 양의 나무를 먹어치웁니다. 한 겨울을 나는데 주위의 나무 30그 루를 넘어뜨려 양식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동물처럼 생존하기 위해 일평생을 몸부림치며 산다면 사실 비참한 일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경제위기가 되니까 그걸 온 몸 으로 체험하고 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의미니 가치니, 사랑이니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오늘 살 아 남는 것이 최대의 목표입니다. 비참한 일입니다. 살아남은 자 의 슬픔입니다. 이렇게 일생을 마친다 생각하면 참으로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재물도 그래요. 자신을 위해 사용한 재물은 그냥 지나갑니다. 우리가 일평생 먹어대는 쌀은 수십 가마니가 되지만 그냥 없어지는 것입니다. 한 몸을 지탱하는 데 쓰였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쌀도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쓰였다면 하늘에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눅12:33) 했지요. 하늘에 쌓이는 물질과 땅에 쌓이는 물질이 따 로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평생 자식 먹여 살리고 가정 돌보고 부모 공 양하고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물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런 자잘한 것들이 씨줄 날줄이 되어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자체로서 의미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보면 하늘에 그리 많이 쌓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 관심, 시간, 재능을 영적 생명 살 리는 일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투자한 것은 하늘에 쌓이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보의 바퀴를 굴린 사람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 다 중요합니다. 세속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것 자체로서 아주 가치 있는 삶을 살 았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살아가다 보니 자연히 이뤄진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살아가다 보니 얻어진 열매일 뿐입니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고 아주 작은 일을 이루었 다 하더라도 복음증거와 사랑의 사역을 위해 살았다면, 똑 같은 비중과 가치를 지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 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 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 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2:20-21) 믿음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삶,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위대한 삶, 하늘에 보물이 쌓이는 삶, 바로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게 온전히 드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힘써 사용되고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를 깨끗하게 해서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귀한 사역자들로 살 아, 인생이 보석처럼 빛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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